다인(多仁)과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고려사지리지 충주목에는 익안현 다인철소가 나타난다. 다인(多仁)이라는 지명은 무슨 뜻이며, 다인철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 경북 의성군 다인면은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에 속해 있던 곳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인현(多仁縣)을 달이현(達已顯) 또는 다이(多已)로 기록하고 있다. 고지명에서 다인(多仁)은 기름진 땅(地)으로 해석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조에는 "다물도(多勿都)"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다물(多勿)은 고구려의 말로 옛땅의 회복이다."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영토확장을 다물(多勿)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다인현(多仁縣)에서 달(達)이 다인(多仁)으로 가차된 지명이다. 경북 의성군 다인면에서 다인(多仁)은 넑은 벌(伐)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대구(달구벌)의 옛지명인 달구화현(達句火縣)의 달(達)과 같은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은 고려사절요에서 1231년에 충주노군의 난을 진압할때 달천(達川)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달천(達川)이라는 지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덕천(德川) 또는 달천(獺川)" 이라고도 하고, 감물(甘勿), 월천(月川),거무내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달천(達川)에 대한 지명유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달천(達川)의 유래를 다인(多仁)이라는 지명과 연관지어 보고자 한다.
지명유래에서 달(達)에 대한 해석도 무수히 많다. 달(達)이라는 지명이 벌(伐), 월(月), 산(山)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은 본래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자연환경 등에 따라 달리 표현했을 수도 있다. 용재총화에는 고려 말에 차(茶)를 좋아하는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이 충주(忠州)의 달천수(達川水)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앞선 기록인 고려사절요에서 서기 1232년(고종 3년) 8월과 9월에 충주노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의 기사에 달천(達川)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달천(達川)을 덕천(德川) 또는 달천(獺川)이라고 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일화로 달천의 유래가 변질된다. 달천의 유래가 "달다."라는 의미도 감물내미(甘勿內彌)의 감(甘)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물내미(甘勿內彌)의 감(甘)은 차자표기에 따른 표기이다. 하지만, 달천(達川)에서 달(達)에 대한 해석 중에서 다인과 연관되는 지명들을 열거하면 "다인현(多仁縣-경북 의성), 다물(多勿-고구려의 옛땅, 국내성), 감물(甘勿-괴산 감물내미), 인담(仁潭-가금면 반천), 미을성(未乙省-국원성의 옛지명)" 등이 있다. 다인(多仁)에서 다(多)는 땅(地)으로 해석되고, 인(仁)은 "어질다."라는 의미로 풍요롭고 기름진 곳이라는 벌판으로 해석한다. 즉, 다인(多仁)과 익안(翼安)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익안현이란 지명은 고려의 대몽항전 기간 중에 잠시 존재했던 군현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대소원은 조선시대에 봉수와 역참제도에 따라 형성된 촌락에 불과하다. 익안현의 관할지역은 현재의 대소원면이 아니라, 군현제에 기준에 따라 달천의 서쪽 지역을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익안현은 일시적인 편제이기에 그 위상을 발휘하지 못하고 폐현되어 고려사지리지에서 충주목의 관할지역인 1군 5현에 속하지 못했고, 세종지리지에서도 다른 부곡들과 함께 지(池), 어(魚)의 집단거주지역으로 기록되어있다.
[참고자료]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二年夏六月(이년하륙월) : 2년 여름 6월,
松讓以國來降(송양이국래항) :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以其地爲多勿都(이기지위다물도) :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封松讓爲主(봉송양위주) :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麗語謂復舊土爲多勿(려어위복구토위다물) :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故以名焉(고이명언) :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2) 삼국사기 지리 - 신라
多仁縣(다인현) : 다인현은
本達已縣(본달이현) : 원래 달이현[이었는데,
(或云多已((혹운다이) : ) 혹은 '다이'라고도 한다.]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大丘縣(대구현) : 대구현은
本達句火縣(본달구화현) : 원래 달구화현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3) 삼국사기 지리 - 고구려
漢山州(한산주) : 한산주
國原城(국원성) : 국원성
一云未乙省(일운미을성) : 미을성 또는
一云託長城(일운탁장성) :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4)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임진 19년(1232), 송 소정 5년ㆍ금 천흥(天興) 원년ㆍ몽고 태종 4년
○ 9월에 삼군이 충주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삼군이 처음 달내[達川]에 이르렀을 때, 물이 깊어 건너지를 못하고 막 다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노군(奴軍)의 적괴 2, 3명이 시내의 건너편에서 고하기를, “우리가 주모자의 목을 베어 와서 항복하려 합니다." 하였다. 이자성 등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만 하면 꼭 너희를 다 죽이지는 않으리라." 하였더니, 적이 도로 성중으로 들어가 중 우본(牛本)의 목을 베어왔다. 관군이 머물러 이틀을 진치고 있었는데, 노군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관군이 성에 들어가 나머지 당을 잡아서 모두 죽이고 얻은 재물과 마소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5) 고려사 지리지
- 충청도 충주목(忠州牧)
[고종(高宗) 42년 다인(多仁)의 철소(鐵所) 사람이 몽고군을 막아 공(功)이 있었으므로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삼았다.]
-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다인현(多仁縣)
○ 다인현(多仁縣). 본래 신라의 달이현(達已縣)【혹은 다이(多已)라고도 하였음.】 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속(來屬)하였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소속하였다가 뒤에 보주(甫州)로 이속(移屬)하였다. 별호(別號)를 인양(仁陽)이라 한다.
6)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예천군(醴泉郡)
본디 수주현(水酒縣)인데, 경덕왕이 예천군(醴泉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보주(甫州)로 고쳐서 안동(安東)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2년 임진에 태자(太子)의 태(胎)를 묻은 까닭으로 기양현(基陽縣)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는데, 신종(神宗) 7년 갑자에 【송나라 영종(寧宗) 가태(嘉泰) 4년.】 남도 초토병마사(南道招討兵馬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東京)의 도적과 더불어 기양(基陽)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므로,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고,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보천군(甫川郡)으로 고쳤다가, 병신년에 또 예천군(醴泉郡)으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1이니, 다인현(多仁縣)이다. 본디 달이현(達已縣)인데, 【혹은 다이(多已)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상주에 붙였다가, 뒤에 본군(本郡)으로 내속(來屬)시켰다. 별호(別號)는 인양(仁陽)ㆍ양양(襄陽), 또는 청하(淸河)이다.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7)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는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서 승격시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 남도초토사(南道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東京賊]과 이 고을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으므로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보주군(甫州郡)으로 고쳤고, 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하였다.
【속현】 다인현(多仁縣) 본래 신라의 달이현(達已縣)으로, 혹은 다이현(多已縣)이라고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에 본군의 속현이 되었다. 본군의 서남쪽 40리에 있으니 용궁현 동촌에 넘어 들어가 있다. 다른 이름을 인양(仁陽)이라고 한다.
8)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 디지털 충주문화대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이 지역에 중앙탑이라 불리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어 마을 이름이 탑들이라 불렸고,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탑평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탑평리에는 반천, 인담, 탑정, 응동의 4개 마을이 속해 있다. 반천은 반내의 한자식 표현이고, 인담은 홍수로 인해 이곳에 못이 생겨 그런 이름이 붙었다. 탑정은 탑의 다른 표현으로 중앙탑과 관련이 있고, 응동은 매를 뜻하는 응동을 썼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황새머리, 황새모롱이란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9) 조선지지자료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郡(충주군) 可金面(가금면)
仝 仁潭(인담) 흐르늡 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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