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17년(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註 001과 불내현(不耐縣)註 002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註 003의 거수(渠帥)가 군사를 내어 곡하(曲河)註 004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년(42) 가을 8월에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사냥을 하다가 새와 짐승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太祖大王) 〔66년(118)〕 여름 6월에 왕이 예맥(穢貊)註 001과 함께 한의 현도군註 002을 습격하는 한편, 화려성(華麗城)註 003을 공격하였다.註 004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幽州)註 001자사(刺史)註 002 풍환(馮煥),註 003 현도태수 요광(姚光),註 004 요동태수 채풍(蔡諷)註 005 등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 와서註 006 예맥거수(穢貊渠帥)註 007를 공격하여 죽이고 무기와 군마,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왕이 아우註 008 수성(遂成)註 009을 보내 병력 2천여 명註 010을 거느리고 풍환과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자,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그에 따라 수성이 험요한 요충지를 근거지로 삼아 대군을 막고, 몰래 3,000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태우고註 011 2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註 012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고조선(古朝鮮) ○ 元封 3년(B.C.108) 여름,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朝鮮王 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右渠의 大臣 成已가 또 [漢에] 反하여 다시 軍吏를 공격하였다. 左將軍이 右渠의 아들 長註 043과 항복한 相 路人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成已를 誅殺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朝鮮을 평정하고 眞番·臨屯·樂浪·玄菟의 四郡註 044을 설치하였다. 參을 封하여 註 045澅淸侯로 삼고, [韓]陶는 秋苴侯註 046로, [王]唊은 平州侯註 047로, 長은 幾侯註 048로 삼았다. 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沮陽侯註 049로 삼았다. 左將軍을 불러 들여 [그가] 이르자 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지게 한 죄로 棄市註 050하였다. 樓船將軍도 병사를 거느리고 列口註 051에 이르렀다면 左將軍을 기다렸어야 당연한데, 함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 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贖錢을 받고 庶人으로 삼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夫餘) 夫餘國註 032은 玄菟의 북쪽 千里 쯤에 있다.註 033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註 034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방 二千里이며, 본래 濊[族]의 땅이다.註 035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驪) ○ 句驪註 072는 一名 貊이라 부른다. 別種이 있는데, 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小水貊註 073이라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貊弓이 그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옥저(東沃沮) [漢] 武帝가 朝鮮을 멸망시키고서 沃沮 땅으로 玄菟郡을 삼았다.註 092 뒤에 夷貊의 침략을 받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沃沮를 縣으로 고쳐 樂浪[郡]의 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後漢] 光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沃沮侯로 삼았다.註 093 그 나라는 지역이 좁고 작은데다가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의 大人을 뽑아 使者로 삼아서 邑落을 [토착 渠帥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註 094 租稅註 095로서 貂布註 096·魚鹽 및 여타 해산물을 징수하고, 美女를 뽑아 그 종이나 妾으로 삼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 ○ 元朔 원년(B.C.128) 에 濊君 南閭註 104 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註 105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樂浪·臨屯·玄菟·眞番의 四郡을 두었다. 昭帝 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註 106 현도는 다시 [高]句驪로 옮겼으며 單單大領의 동쪽의 沃沮와 濊貊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註 107 다시 [大]領의 동쪽 7縣을 떼어 낙랑 東部都尉를 두었다. [濊가 漢에] 내속된 후부터註 108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條나 되었다.註 109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東部]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大]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渠帥)들을 봉해 縣侯로 삼으니, 歲時마다 모두 와서 朝賀하였다.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侯와 邑君과 三老가 있다. [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韓) ○ 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註 125들로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國)를 邦이라 부르며, 弓은 弧라 하고, 賊은 寇라 하며,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여, 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秦韓註 126이라고도 부른다. 城栅과 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邑에는 각각 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臣智註 127라 하고, 그 다음은 儉側, 그 다음은 樊秖, 그 다음은 殺奚, 그 다음은 邑借註 128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註 129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 그 도장에 ‘濊王之印’註 053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 東夷의 옛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別種註 070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동옥저(東沃沮) 東沃沮註 104는 고구려 蓋馬大山註 105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註 106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註 107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 에 변경의 郡을 줄였는데, [沃沮의 東部]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註 113·華麗註 114·沃沮註 115등의 諸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이들 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功曹註 116·主簿註 117 등의 諸曹를 두었는데, 濊人이 모두 [그 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縣國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 [東沃沮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서 大人을 두고 使者註 118로 삼아 [토착 渠帥와]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大加로 하여금 租稅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草類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동옥저 사람)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예(濊)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註 138 漢代 이래로 侯·邑君·三老註 139의 관직이 있어서 下戶를 통치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高]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廉耻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曲領註 140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그 뒤 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山川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 141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 142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 143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 144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 韓註 150 韓註 151은 帶方註 152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註 153 둘째는 辰韓,註 154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註 155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城郭이 없었다.註 156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註 157·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辰王註 158은 月支國을 통치한다. 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註 159의 稱號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이 있다. ○ [朝鮮]侯 準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註 160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註 161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註 162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註 163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魏略: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絕滅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韓은] 漢나라 때에는 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朝謁하였다. 魏略: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註 164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註 165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王莽의 地皇 연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註 166의 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材木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鑡이 “나는 漢나라의 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鑡은 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含資縣으로 갔다. 含資縣에서 [樂浪]郡에 연락을 하자, [樂浪]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서 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鑡이 이때 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樂浪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辰韓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樂浪]郡에서는 鑡의 功과 義를 표창하고, 冠幘과 田宅를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代를 지나 安帝 延光 4년(A.D.125; 百濟 己婁王 49)에 이르러서는 그로(선조의 공으로) 인하여 賦役을 면제받았다. ○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辰韓의] 노인들은 代代로 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를 피하여 韓國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城柵이 있다.註 176 그들의 말은 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라 하고 도적(賊)을 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徒라 하여 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나라·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辰韓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辰韓은] 처음에는 6國이던 것이 차츰 12國으로 나뉘어졌다. ○ 弁辰도 12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邑借가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大國은 4~5천家이고, 小國은 6~7백家로, 총 4~5萬戶이다.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註 177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魏略: 그들은 [外地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진서(晉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마한(馬韓) 韓에는 세 개의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韓이다. 진한은 帶方[郡]의 남쪽에 있는데,註 021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는다. ○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城郭이 없다.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註 022 큰 나라는 1萬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각각 渠帥가 있다. 마한의 풍습은 기강이 낮아 跪拜하는 禮가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註 023 온 가족이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長幼와 男女의 분별이 없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단지 장사지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 [그 나라의] 풍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 따위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남자들은 머리를 틀어묶고 상투를 드러내놓으며,註 024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용감하고 굳세다. 국가에 부역이 있거나 城隍을 修築할 적에註 025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는 모두 등가죽을 뚫고 그 구멍에 큰 밧줄을 꿰어,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며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일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註 026 [그 나라 사람들은]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쓰며,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에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하게 여긴다. [마한의] 풍습은 귀신을 믿으므로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떼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神에게 제사지낸다. 10월에 이르러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는데, 그를 ‘天君’이라 부른다. 또 別邑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蘇塗’註 027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蘇塗의 뜻은 西域의 浮屠와 흡사하지만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있다. 진서(晉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진한(辰韓)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註 031 [秦의] 苦役을 피하여 韓에 들어왔는데, 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을 세웠으며, 언어는 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은 秦韓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6國이 있었으나, 그 뒤 점점 나뉘어 12國이 되었다. 또 弁辰이 있는데 그 역시 12국으로 도합 4~5萬戶註 032이며, 각각 渠帥가 있고 모두 辰韓에 속해 있다.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비록 대대로 계승하지만 [진한 사람이] 스스로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으니,註 033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이 분명한 까닭에 마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진한의] 토질은 五穀이 자라기에 적당하며, 양잠이 성행하고 비단을 잘 짜며, 소도 부리고 말도 탄다. 그 풍속은 마한과 비슷하며, 병기도 역시 마한과 같다. 아기가 처음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한다. 춤추기를 좋아하며 비파 연주를 잘 하는데, 비파의 모양은 筑과 비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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