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69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왜 탄금대 전투라고 하는가 ?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왜 탄금대 전투라고 하는가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고적편에는"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중종 때에 충주목사를 지낸 박상(朴祥)이 쓴 싯구에는 "탄금대 아래 흐르는 물 쪽빛 같네. /彈琴臺下水如藍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文章强首無遺墓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翰墨金生有廢庵" 라고 서애집에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인 이만도가 쓴 싯구에는"마암에다 철관 몹시..

대소원면 - 경제원(敬濟院)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

충주시 이류면이 충주시 대소원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소원의 지명유래에 대한 출처는 아직도 미궁 속에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소원의 옛지명은 "경제원(敬濟院)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대조(大棗)는 현재..

중앙탑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앙탑(中央塔)은 예로부터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중원경에 대한 자존심으로 향토역사의 향기이다. 중앙탑(中央塔)의 문화재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인데, 열마 전까지도 중원 탑평리칠층 석탑이었다가 변경되었다. 중앙탑(中央塔)은 반천탑(盤川塔)과 김생사탑(金生寺塔)으로도 불리웠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없다. 중앙탑(中央塔)은 신라의 중원경에 있다는 뜻이고, 반천탑(盤川塔)은 남한강 안반내에 있다는 표현이고, 김생사탑(金生寺塔)은 김생사에 있다는 추측일 뿐 이었다. 중앙탑(中央塔)은 중원경에 있었기에 중원경탑(中原京塔), 반천탑(盤川塔)은 금천(金遷)에 있었기에 금천탑(金遷塔)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금의 옛지명인 금천도 중앙탑이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명은 아닐 수도 있다. 한강의 수..

충주사고의 복원에 대하여

충주지역에서 사라진 문화유산 중 복원이 필요한 것이 충주사고가 아닐까한다. 특히 조선초기에 역사서적들을 보관했던 충주사고의 가치는 기록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이동경로의 역사가 그를 말해준다. 하지만, 충주사고는 치욕적인 임진왜란 충주전투로 인하여 사라졌으며, 충주지역의 문화적 자존심도 충주사고와 함께 사라진 것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에 복원된 무주의 적상산 사고를 둘러보며, 충주사고에 대한 역사를 다시금 고찰하며 그에 대한 복원의 중요성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충주의 문화유산 중에서 충주사고는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유일하게 잔존했던 외사고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등이 전주사고에 의해 보존되었지만, 그 이전에 충주사고에 고려역사서적 등이 보존되었기에 고려사 등의 편찬에 기초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사라..

마역봉(마패봉)과 마골점(麻骨岾) 봉수대에서

마역봉(馬驛峰) 또는 마패봉(馬牌峰)은 마골점(麻骨岾)의 봉수대에서 유래하는 산이다. 마역봉(馬驛峰)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으로 지도에는 마역봉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지방에서는 마패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역봉(마패봉)의 지명표기도 마역봉(馬驛峰) 또는 마패봉(馬牌峰)으로 쓰고 있으며, 마패봉은 암행어사 박문수의 마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등산객을 위한 스토리 텔링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암행어사 박문수의 마패와 말이 등장된 것이 아닌가한다. 하지만, 마역봉은 괴산군 연풍면과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과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마골재 또는 마골점(麻骨岾)의 봉수대에서 유래하는 산이다. 겨【명사】벼, 보리, 조 같은 곡식의 낟알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마역봉(마패봉)은 봉수..

계립령(鷄立嶺)의 어류성(御留城)을 찾아서

"문경(聞慶) 북쪽 새재 동편에 이름이 어류(御留)라는 산성(山城)이 있다." 이 글은 조령산성 내에 있던 옛성인 어류성과 계립령 주변의 역사기록과 답사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어류성(御留城)은 조령산성이 설치되기 이전에 있던 옛성으로 고려태조 왕건이 머무른 성으로 알려지며, 어류성(御留城)은 산성보다는 백두대간을 넘는 계립령 주변에서 왕이 머무른 임시 행궁터로 추정된다. 어류(御留) 또는 어류성 유지는 조령산성을 축성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조령산성이란 명칭도 숙종이 조령산성을 수축한 이후에 나타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이시발과 신충원이 설치한 차단성과 목책 등은 조령산성이라 부르지 않고 어류(御留)의 방어선인 어류성(御留城)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어류성(御留城)을 주흘산 안..

중원미륵사지와 석굴사원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이 계립령을 개척하였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신라가 점령한 한강유역을 수복하겠다고 출전하였다가 죽는다. 그 후 고구려는 신라의 김춘추에게 한강유역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신라의 찬란한 천 년 역사도 부패와 타락으로 국운이 쇠락하여 고려에게 귀속되어 사라진다. 미륵사지에 얽힌 전설은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한이 서려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치열한 영토분쟁과 후삼국의 시대상이 미륵사지의 미륵불과 덕주사 마애불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 월악산 일대에 있는 덕산의 신흥사와 고산사 등에서도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설화가 전해지며, 고산사가 있는 와룡산성과 월악산의 덕주산성 뿐만 아니라, 죽령과 계립령 일대의 수많은 산성들이 치열했던 전쟁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발치(發峙)는 죽령과 계립령을 잇는 고갯길이다.

청계천은 청계천 복원공사로 서울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으나, 충주천 하천정비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충주시 직동에서 살미면 재오개리를 잇는 발치재에는 재오개 도수로 터널이 만들어져서 충주호의 남한강물을 충주천으로 흘려보내는 수로공사가 완료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충주천 복원사업과 재오개 도수로 통수가 언제까지 이루어질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충주시 직동과 살미면 재오개리를 잇는 도로공사도 발치재 구간을 착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충주를 둘러싼 계명지맥의 충주시경계 종주코스(계명산-남산-발치봉-대림산)도 남산에서 발치봉 구간이 개설되지않아 재오개길로 우회하거나, 계명산과 남산, 대림산과 발치봉 코스로 분리되어 산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 광업소의 채석장으로 인하여 계명지맥을 종주하는 산행코스가 단..

임진왜란 충주전투에 대하여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嶺隘度盡地坼開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江心湧出彈琴臺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欲起申砬與論事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啓門納寇奚爲哉회음이 만약 성안 위치에 있었던들 淮陰若在成安處적치가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赤幟豈過井陘來그때 우리는 조였으면서 한이 쓰던 꾀를 썼으니 我方爲趙計用漢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鍥舟索劍眞不才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麾旗指水入水去목숨 바쳐 ..

탄금대 토성을 돌아보며

탄금대를 다녀간 사람 중에 탄금대 토성을 보거나 탄금대 토성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지, 탄금대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고,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하여 남한강에 빠져 죽은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탄금대에 세워진 신립장군에 대한 비석들과 유래비는 모두 최근에 세워진 것들이다. 충주의 역사에서 임진왜란의 패전은 큰 수모였기에 충주의 역사에서 임진왜란의 충주전투나 고전장터에 관한 기록조차도 남기질 않았다. 그런데, 왜 갑짜기 신립 장군이 충주의 인물로 등장하고, 그에 관한 비석들이 임진왜란의 전쟁터였던 달천뜰과 달천강변이 아니라 신성한 탄금대 토성에 설치되었을까 ? 탄금대 토성과 양진명소는 명산대천에서 제를 지내기 위한 소도와 같이 신성시 여기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

충주의 지명유래 - 대원과 예성

충주의 지명유래 - 대원과 예성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란 명칭은 오늘 날에도 충주지역의 학교나 단체명 등으로 쓰여지고 있다.예성(蘂城)은 충주읍성의 옛명칭으로 잘알려져 있으나, 대원(大原)이란 명칭은 충주시민들도 잘알지 못한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대원이란 명칭은 대원사와 대원령,그리고 하늘재의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대원사와 미륵대원은 대원(大阮)으로 대원(大原)으로 표기되는 충주의 옛지명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원(大原)과 대림(大林,大臨)이란 지명이 충주시에 산재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충주의 옛지명 중에서 "중주, 대원, 예성, 창화, 충원, 유신" 보다는 "국원과 중원"이라는 옛지명이 충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원과 중원이란..

중원역사의 재조명을 시작하며

산골어부는 역사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산과 강을 따라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문화 답사기를 남기지만, 답사한 자신의 생각보다는 유적자료와 사진으로 나도 이런 곳을 다녀왔다는 것을 과시한다. 산골어부도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여행과 산행 중에 접하는 옛유적지와 문화재를 살펴보고 "왜" 란 의문을 던지며 역사란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같다. 학창시절에 배운 한국사와 세계사는 진학과 취업을 위한 시험공부로 취급되고, 잡학을 좋아하기에 역사책과 향토자료는 백과사전과 같은 이야기꺼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와 관련된 사료들 중에 잘못 해석되고 기술된 것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향토역사에 관한 논문과 자료집에서 잘못된 자료들을..

계명산과 심항산 영액

계명산과 남산의 사이에는 심항현(心項峴) 또는 심항치(心項峙)가 있었다. 심항산 봉수와 더불어 심항산 영액이라는 마즈막재의 차단성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 그 동안 남산(금봉산)과 계명산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보았지만 그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계명산에서 심항산 봉수대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들을 다시금 답사해 보았다. 계명산 615봉에서 709.5봉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오성봉수(오동산봉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보인다. 마즈막재 부근에 있었다는 심항산 영액(嶺阨)에서 영액(嶺阨)이란 무엇일까 ? 고문서나 문화재 명칭에서 영애(嶺隘) 또는 영액(嶺阨)이란 길목을 막는 차단성 또는 관문성보다는 험난한 길목의 목책을 이르는 표현이다. 심항산 영액도 마즈막재 부근에서 설치된 작은 방어선으로 전시에 ..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에 대하여

남한강과 목걔대교  남한강과 막흐래기탄 어릴 적에 성황당을 지날 때면 돌하나를 주워서 성황당에 던지고 지나가야 했었다. 만약 돌을 주워서 던지지않고, 성황당을 지나쳤다면 무엇가를 빼어먹은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성황당에서 소원을 빌때면 돌을 정성껏 쌓거나 성황나무에 올려놓고 기원한다. 성황당은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있기에 마을 또는 고을의 경계와 위상을 상징하는 곳이다.  돌무더기를 쌓고 돌탑을 쌓는 것은 우리 민족만의 고유의 풍습이나 토속신앙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돌탑은 민간에 뿌리깊게 자리한 풍습 중에 하나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미신으로 간주하여 돌탑들이 많이 훼손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근래에는 마을 뿐만 아니라 장소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돌탑들을 쌓아올린다.  소도(蘇塗)의..

남한강과 비보풍수론에 대하여

풍수지리란 자연환경과 자연지형을 분석한 생태지리학이다, 풍수이론은 자연지형에 따른 자연환경에 순응하면 흥하고, 역행하면 망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그 논리를 정립하는 과정과 그를 해석하는 세력에 의해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고, 종교적인 잘못된 주술산법과 좌향론으로 자연의 섭리에 역행함으로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참위설과 자연의 무궁한 이치를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에 의존하는 풍수도참은 지나치게 작은 세계을 해석함으로써 자연법칙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보다는 비보풍수라는 것으로 잡귀(雜鬼)를 끌어들여 신뢰성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풍수지리는 자연환경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옛 사람들의 훌륭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도 신도시계획과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