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진한조에서 최치원이 풀이한 탁수의 유래는 연나라에서 유래한다.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유비 현덕은 하북성 탁현(涿縣) 사람이다. 탁현(涿縣)은 베이징(北京)의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북쪽에 있는 줘저우(涿州)에 해당되며 그 곳을 흐르는 강을 탁수(涿水)라 한다.
탁수는 고전에 나오는 치우천황과도 연관되는 지명이다. 그리고, 최치원은 탁(涿)과 양(梁)을 도(道)로 표현하는 것을 신라방언으로 해석하고있다. 고전이나 지명의 유래에서 한자를 차음하는 이두문자는 참으로 해석하기 힘든 일이다. 또한 지명의 한문표기에서 그를 표기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된 것들이 많아 그 진위를 분별하기 어렵다. 현재도 고전이나 지명을 해석함에 있어서 삼국유사 진한조에 나오는 사탁, 사량, 사도에 대한 해석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산골어부는 충주의 옛지명인 "사천성"을 "모래내(사천)"에서 찾아 본 적이 있었다. 이찌 보면은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 사천성을 민담설화에서 찾는 것이 산골어부(바보)같은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이 글을 남긴다.
[삼국유사 진한조]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과 마을을 사탁,점탁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신라 사람의 방언에 탁을 읽는 음을 도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이라 하는데,양을 도라고도 읽는다)
최치원이 말하는 연(燕)나라 사람은 연나라에 살고있던 고조선의 유민인 조선족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마한의 영토에서 성장한 백제는 고조선의 유민이고, 진한에서 성장한 신라는 북방민족이라는 것은 지역감정에서 표출된 비하 섞인 조롱으로 간주하고 싶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무제의 고조선 침입은 고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한민족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소국들이 벌이는 역사는 그 기록이 없기에 온갖 추측들을 만들어낸다. 특히 중국고서를 비롯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기록들을 정설로 인용하지만 역사의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천 년의 역사가 흐른 후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생각은 김부식의 관점에서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시대를 정보화 시대라고 극찬하지만 천 년이 흐른 서기 3000년에 역사가가 천 년전인 서기 2000년의 역사를 쓸 때에 지금 우리가 남긴 기록과 유물들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
충주의 향토사를 이야기할때, 충주지역을 마한과 백제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충주지역에 관한 역사자료나 논문들에서도 충주의 고대사를 백제로 표기하고, 그 시대의 유물도 백제시대의 유물로 구별한다. 하지만, 중원문화권 사람들의 고대역사에 대한 인식은 백제보다는 고구려나 신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에서도 백제가 충주를 지배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백제가 제2대 다루왕(多婁王 AD28~77년) 3년에 낭자곡성까지 진출하여 토지를 개척하면서 신라왕에게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이 기록은 신라의 탈해왕 편에서도 나온다. 일성 이사금(逸聖 尼師今 AD134~154년)은 태백산에서 제를 지내고 말갈족이 불태운 장령의 목책을 세웠다.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尼師今 AD154~184년)은 재위 3년에 계립령과 죽령을 개척하고, 재위 9년에 일길찬 흥선이 이끄는 군사 2만으로 공격하면서, 아달라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를 따라 백제를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서 백제와 신라는 원삼국 초기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으나, 아달라왕 이후에는 국경분쟁에 따른 기록들이 별로 나타나질 않는다.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백제의 근초고왕과의 싸움에서 백제가 승리하지만, 근초고왕은 그 보복이 두려워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고, 고구려가 정비된 후에는 공격을 받아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지배력을 잃고, 백제의 왕들이 전사하거나 내란 등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다. 원삼국 초기에 백제와 신라가 벌이는 남한강유역의 분쟁은 국원성과 괴주(괴산)으로 추정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고대지명들은 남한강이 아닌 미호천 유역인 청주와 진천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중기에는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가 임진강과 한강에서, 말기에는 백제와 신라는 금강에서 국경분쟁이 빈번히 일어난 것으로 기록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국원성인 충주를 지배한 기간이 얼마되질 않고, 삼국시대의 충주지역은 백제보다는 마한과 고구려와 신라가 더 많은 기간을 지배했기에 삼국시대의 분류에서 남한강 유역을 백제가 지배했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충주지역은 백제가 지배하다가 고구려가 지배하고, 진흥왕이 한강유역인 중원을 개척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된 이후에는 충주가 고구려의 남하정책 이전에도 이미 신라의 옛영토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원삼국시대에 백제가 남한강의 중원지역을 얼마나 지배했으며, 지배세력의 변천은 중원의 문화에 얼마나 큰변화를 가져다 주었기에 충주지역에서 원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유적지나 유물들을 백제시대로 구분하는 것일까 ?
涿 - 들을 탁, [본음] 들을 촉, 땅 이름 탁, [본음] 땅 이름 착
삼국사기에는 국원성의 옛지명으로 완장성(薍長城)과 탁장성(託長城) 등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완장성(薍長城)과 탁장성(託長城)은 고구려가 충주지역을 지배하기 이전에 생겨난 지명이다. 가금면 지명유래를 살펴보면은 가금면 소재지인 탑평리에 인담(仁潭) 또는 탁담(濁潭)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지명유래에는 흐르늪을 인담(仁潭) 또는 탁담(濁潭)이라고 한다. 탁담이 탁장성은 아닐까 ? 신라의 아달라왕이 계립령의 개척하고 감물현과 마산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고한다. 아달라왕이 설치한 감물현은 경북 김천, 마산현은 충남 서천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김천과 충남 서천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럽다. 또한 김제의 벽골제는 신라의 흘해왕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부정하는 견해가 많다. 이는 한국의 고대사가 정립하지 못하여 원삼국시대의 형성과정을 부정하는 역사관 때문이다. 상고사나 원삼국시대를 공부하다가보면은 그를 기록한 옛사람들의 고민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서의 기록들이 다르게 나타나면 이를 어떻게 기술해야하는지를 망설이게 된다. 하물며, 그 기록을 읽는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까 ?
강수(强首)는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다.http://cafe.daum.net/chungjuhoMTB/jU5A/11
중원경과 완장성에 대하여 http://cafe.daum.net/chungjuhoMTB/jU5A/7
삼국사기 지리 고구려
漢山州(한산주) : 한산주
國原城(국원성) : 국원성
(一云未乙省(일운미을성) : [미을성 또는
一云託長城(일운탁장성) : )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마한(馬韓)-삼국유사(三國遺事)
魏志云(위지운) :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魏滿擊朝鮮(위만격조선) :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朝鮮王準率宮人左右(조선왕준솔궁인좌우) :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越海而南至韓地(월해이남지한지) :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開國號馬韓(개국호마한) :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甄萱上太祖書云(견훤상태조서운) :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이렇게 말했다
昔馬韓先起(석마한선기) :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赫世勃興(혁세발흥) :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어시백제개국어금마산) : 이에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崔致遠云(최치원운) :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馬韓(마한) : "마한은
麗也(려야) : 고구려(高句麗)이고,
辰韓(진한) : 진한(辰韓)은
羅也(라야) : 신라(新羅)다.
(據本紀(거본기) :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에 의하면
則羅先起甲子(칙라선기갑자) : 신라는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麗後起甲申(려후기갑신) :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而此云者(이차운자) : 여기에 말한 것은
以王準言之耳(이왕준언지이) : 조선왕 준을 가리킨 것이다.
以此知東明之起(이차지동명지기) :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이 일어날 때에
已竝馬韓而因之矣(이병마한이인지의) : 마한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故稱麗爲馬韓(고칭려위마한) :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부른다.
今人或認金馬山(금인혹인금마산) :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이 있다고 해서
以馬韓爲百濟者(이마한위백제자) : 마한을 백제라고 하지만
盖誤濫也(개오람야) :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일 것이다.
麗地自有邑山(려지자유읍산) : 고구려 땅에는 본래 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故名馬韓也(고명마한야) :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四夷(사이) : 사이(四夷)·
九夷(구이) : 구이(九夷)·
九韓(구한) : 구한(九韓)·
穢貊(예맥) : 예맥(穢貊)이 있는데,
周禮職方氏掌四夷九貊者(주례직방씨장사이구맥자) :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東夷之種(동이지종) :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卽九夷也(즉구이야) :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三國史云(삼국사운) :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溟州(명주) : "명주(溟州)는
古穢國(고예국) :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野人耕田(야인경전) :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得穢王印(득예왕인) :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獻之(헌지) : 바쳤다.
又春州(우춘주) : 또 춘주(春州)는
古牛首州(고우수주) :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古貊國(고맥국) :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又或云今朔州(우혹운금삭주) :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是貊國(시맥국) : 바로 맥국(貊國)이다.
或平壤城爲貊國(혹평양성위맥국) :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淮南子注云(회남자주운) : <회남자(淮南子)> 주(注)에 이르기를
東方之夷九種(동방지이구종) : "동방(東方)의 오랑캐는 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다.
論語正義云(론어정의운) :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이르기는
九夷者(구이자) : "구이(九夷)란,
一玄菟(일현토) : 1은 현토(玄토),
二樂浪(이락랑) : 2는 낙랑(樂浪),
三高麗(삼고려) : 3은 고려(高麗),
四滿飾(사만식) : 4는 만식(萬飾),
五鳧臾(오부유) : 5는 부유(鳧臾),
六素家(육소가) : 6은 소가(嘯歌),
七東屠(칠동도) : 7은 동도(同屠),
八倭人(팔왜인) : 8은 왜인(倭人),
九天鄙(구천비) : 9는 천비(天鄙)이다"라고 했다.
海東安弘記云(해동안홍기운) :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 이르기를
九韓者(구한자) : "구한(九韓)이란,
一日本(일일본) : 1은 일본(日本),
二中華(이중화) : 2는 중화(中華),
三吳越(삼오월) : 3은 오월(吳越),
四乇羅(사탁라) : 4는 탁라(乇羅),
五鷹遊(오응유) : 5는 응유(鷹遊),
六靺鞨(육말갈) : 6은 말갈(靺鞨),
七丹國(칠단국) : 7은 단국(丹國),
八女眞(팔녀진) : 8은 여진(如眞),
九穢貊(구예맥) :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다.
칠십이국(七十二國)-삼국유사(三國遺事)
通典云(통전운) :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朝鮮之遺民(조선지유민) : "조선의 유민(遺民)은
分爲七十餘國(분위칠십여국) :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皆地方百里(개지방백리) :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 리(百里)이다."
後漢書云(후한서운) :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西漢以朝鮮舊地(서한이조선구지) :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初置爲四郡(초치위사군) :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後置二府(후치이부) : 뒤에 두 부(府)를 두었다.
法令漸煩(법령점번) : 법령(法令)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分爲七十八國(분위칠십팔국) :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各萬戶(각만호) :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했다
(馬韓在西(마한재서) : (馬韓은 서쪽에 있어
有五十四小邑(유오십사소읍) : 54개의 조그만 邑을 가지고 있었는데
皆稱國(개칭국) :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辰韓在東(진한재동) : 辰韓은 동쪽에 있고
有十二小邑(유십이소읍) : 12개의 작은 邑 차지했는데
稱國(칭국) : 모두 나라라고 했다.
卞韓在南(변한재남) : 卞韓은 남쪽에 있어
有十二小邑(유십이소읍) : 역시 12개의 작은 邑을 차지했는데
各稱國(각칭국) :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변한백제(卞韓百濟)-삼국유사(三國遺事)
(亦云南扶餘卽泗沘城也(역운남부여즉사비성야) : (또는 남부여라고도 하는데 곧 사비성이다))
新羅始祖赫居世(신라시조혁거세) :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卽位十九年壬午(즉위십구년임오) : 즉위한 19년 임오(서기 전 39)에
卞韓人以國來降(변한인이국래항) :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新舊唐書云(신구당서운) :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이르기를
卞韓苗裔(변한묘예) :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在樂浪之地(재락랑지지) :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後漢書云(후한서운) :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卞韓在南(변한재남) :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馬韓在西(마한재서) :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辰韓在東(진한재동) :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致遠云(치원운) : 최치원(崔致遠)은 이르기를
卞韓(변한) : "변한은
百濟也(백제야) :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按本紀(안본기) : 본기(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溫祚之起(온조지기) :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在鴻嘉四年甲辰(재홍가사년갑진) : 홍가(鴻嘉) 4년 갑진(서기 전 17)의 일이라고 한다.
則後於赫居世-東明之世(則後於赫居世-동명지세) :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나 동명왕(東明王) 시대보다
四十餘年(사십여년) : 40여 년이나 뒷 일이 된다.
而唐書云(이당서운) : 그런데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卞韓苗裔在樂浪之地云者(변한묘예재락랑지지운자) :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謂溫祚之系出自東明(위온조지계출자동명) :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故云耳(고운이) : 그렇게 말한 뿐이다.
或有人出樂浪之地(혹유인출락랑지지) :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立國於卞韓(입국어변한) : 변한(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與馬韓等竝峙者(여마한등병치자) : 마한(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在溫祚之前爾(재온조지전이) :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非所都在藥浪之北也(비소도재약랑지북야) :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或者(혹자) : 어떤 사람이
濫九龍山亦名卞那山(람구용산역명변나산) :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고 역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故以高句麗爲卞韓者(고이고구려위변한자) : 고구려(高句麗)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했다.
盖謬(개류) :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當以古賢之說(당이고현지설) :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의 말을 좇는 것이
爲是(위시) : 옳을 것이다.
百濟地自有卞山(백제지자유변산) : 백제 땅에도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故云卞韓(고운변한) : 변한이라 하는 것이다.
百濟全盛之時(백제전성지시) : 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十五萬二千三百戶(십오만이천삼백호) :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
진한(辰韓)-삼국유사(三國遺事)
(亦作秦韓(역작진한) :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쓴다)
後漢書云(후한서운) : <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辰韓耆老自言(진한기노자언) :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秦之亡人適韓國(진지망인적한국) :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이마한할동계지이여지) :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相呼爲徒(상호위도) :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有似秦語(유사진어) :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故或名之爲秦韓(고혹명지위진한) :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有十二小國(유십이소국) :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各萬戶(각만호) :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稱國(칭국) :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又崔政遠云(우최정원운) :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辰韓本燕人避之者(진한본연인피지자) :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故取涿水之名(고취탁수지명) : 그런 때문에 탁수의 이름을 따서
稱所居之邑里(칭소거지읍리) : 그들이 사는 읍과 마을을
云沙涿(운사탁) : 사탁
漸涿等(점탁등) : 점탁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羅人方言(라인방언) : (신라 사람의 방언에
讀涿音爲道(독탁음위도) : 탁을 읽는 음을 도라고 했다.
故今或作沙梁(고금혹작사량) :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이라 하는데
梁亦讀道(량역독도) : 양을 도라고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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