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지명유래 - 대원과 예성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란 명칭은 오늘 날에도 충주지역의 학교나 단체명 등으로 쓰여지고 있다.예성(蘂城)은 충주읍성의 옛명칭으로 잘알려져 있으나, 대원(大原)이란 명칭은 충주시민들도 잘알지 못한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대원이란 명칭은 대원사와 대원령,그리고 하늘재의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대원사와 미륵대원은 대원(大阮)으로 대원(大原)으로 표기되는 충주의 옛지명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원(大原)과 대림(大林,大臨)이란 지명이 충주시에 산재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충주의 옛지명 중에서 "중주, 대원, 예성, 창화, 충원, 유신" 보다는 "국원과 중원"이라는 옛지명이 충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원과 중원이란 옛지명은 국가권력인 왕권을 상징하지만, 중앙집권이 강화된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는 중원을 한자로 재해석하여 충주(忠州)란 지명으로 지역민심을 반영하여 국가와 왕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명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지명인 국원성과 중원경에 대한 정서는 천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충주(忠州)의 옛지명인 국원(國原), 중원(中原), 중주(中州), 대원(大原)의 의미는 시대마다 다를 것이다. 충주의 옛지명 중에는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은 조선시대 초기의 역사서인 세종지리지 충주목 편에 충주목의 별호가 "대원(大原)과 예성(蘂城)" 이라고 기록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충주목 군명(郡名)조에서는 국원(國原), 대원(大原), 예성(蘂城), 중원(中原). 창화군(昌化軍)으로 기록되어있다. 충주목의 별호인 대원과 예성은 충주지역의 군명(郡名)이라기 보다는 충주읍성(邑城)의 별칭이 아닐까한다. 충주목의 별호인 예성(蘂城)은 그 지위가 강등되어 예성(芮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유신현, 충원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충주읍성 인근지역에서 발견된 심방석을 예성(蘂城)의 유물로 추정하고, 예성(蘂城)을 아름다운 꽃성이라고 극찬하지만 심방석이 충주읍성의 유물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미흡하다, 하지만 예성(蘂城)은 아름다운 충주성을 연상케하여 충주를 예술의 고장인 예향(藝鄕)의 이미지로 부각시켜준다.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란 지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 예성(蘂城)은 고려시대 대몽항쟁 이후인 충렬왕 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충주성을 재축성하면서 충주성을 예성이라고 멍명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산 정약용은 충주를 지나면서 충주를 예주성(蘂州城)으로 표현했다. 예성(蘂城)과 달리 대원(大原)이란 지명은 충주시내가 아닌 백두대간의 길목인 하늘재 부근인 미륵사지 일대에서 대원령(계립령)과 더불어 대원사(미륵대원)"란 유적지가 잔존하고,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과 대림산성 그리고 탄금대의 대림창(大臨倉)과 하림궁 등에서 그와 유사한 지명이 나타난다.
계립령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며, 미륵대원은 삼국유사에 나타나며, 대원령은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며 계립령에서 대원령로 변경되었다가 한원령으로 다시 변경됨으로 인하여 현재는 하늘재로 불리우고 있다. 충주의 옛지명인 대원(大原)은 큰고을이란 의미이고, 미륵리에 나타나는 대원(大阮)은 큰 사원이나 역원을 의미한다. 미륵사지에서 나타나는 미륵대원은 절터와 원터가 함께 잔존하기에 두 개의 의미가 모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와 덕주사 마애여래입상(德周寺 磨崖如來立像)은 신라의 마의태자에 관련된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나,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왕자가 무슨 힘으로 거대한 사찰을 건립했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충주철불이 모셔진 충주 대원사(大圓寺)는 근래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대원사(大院寺)와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왕력)에서
第八阿達羅尼叱今 [又與倭國相□…□嶺□…□立峴今彌勒大院東嶺是也]
제 8대 아달라니질금. [ … 또 왜국과 더불어 서로 … 고개 … 입현은 지금의 미륵대원 동쪽 고개이다.]
고려사절요/권십육/고종 안효대왕/임진 19년(1232) - 1차 침입에 따른 충주관노의 난
○ 春正月(춘정월) : 봄 정월에
○ 忠州官奴(충주관노) : 충주의 관노(官奴)가
作亂(작란) : 난을 일으키니,
宰樞會崔瑀第(재추회최우제) : 재ㆍ추가 최우의 집에 모여
議發兵(의발병) : 군사를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州判官(주판관) : 주(州)의 판관
庾洪翼(유홍익) : 유홍익(庾洪翼)이
請遣使撫諭(청견사무유) : 사자를 보내어 회유할 것을 청하니,
卽以注書朴文秀(즉이주서박문수) : 곧 주서(注書) 박문수(朴文秀),
前奉御金公鼎(전봉어금공정) : 전 봉어(前奉御) 김공정(金公鼎)을
假爲安撫別監(가위안무별감) : 임시로 안무별감(安撫別監)을 삼아
以遣之(이견지) : 보내었다.
先是(선시) : 이 보다 앞서
州副使于宗柱(주부사우종주) : 주(州)의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가
每於薄書間(매어박서간) : 매양 문부(文簿) 처리에 있어
與洪翼有隙(여홍익유극) : 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聞蒙兵將至(문몽병장지) : 몽고 군사가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議城守(의성수) :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는데
有異同(유이동) : 의견이 달랐다.
宗柱(종주) : 종주는
帥兩班別抄(수량반별초) : 양반별초(兩班別抄),
洪翼(홍익) : 홍익은
率奴軍雜類別抄(솔노군잡류별초) :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를 거느리고
互相猜忌(호상시기) : 서로 시기하더니,
及蒙兵至(급몽병지) : 몽고 군사가 들이닥치자
宗柱洪翼與兩班等(종주홍익여량반등) : 종주ㆍ홍익과 양반 등은
皆棄城走(개기성주) : 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唯奴軍雜類(유노군잡류) : 오직 노군잡류가
合力擊逐之(합력격축지) : 합력하여 쳐서 물리쳤다.
蒙兵退(몽병퇴) : 몽고 병이 물러가자
宗柱等還州(종주등환주) : 종주 등이 주(州)로 돌아와
檢考官私銀器(검고관사은기) : 관가와 사가의 은그릇을 점검하니,
奴軍(노군) : 노군(奴軍)이
以蒙兵掠去爲辭(이몽병략거위사) : 몽고 군사가 약탈하여 갔다고 말하였다.
戶長光立等五六人(호장광립등오륙인) :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 대여섯 사람이
密謀殺奴軍之魁者(밀모살노군지괴자) : 노군의 괴수를 죽이려고 음모하였는데,
奴輩知之(노배지지) : 노군들이 미리 알고
相與謀曰(상여모왈) : 서로 모의하기를,
蒙兵到(몽병도) : “몽고 군사가 이르자
則皆走匿不守(즉개주닉불수) : 다 달아나 숨어 성은 지키지 않더니,
乃何以蒙人所掠(내하이몽인소략) : 이제는 어찌 몽고 군사가 약탈한 것까지
反以歸罪吾輩(반이귀죄오배) : 우리에게 죄를 돌려
而欲殺之乎(이욕살지호) : 죽이고자 하는가.
盍先圖之(합선도지) : 우리가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으랴." 라고 하였다.
乃詐爲會葬者(내사위회장자) : 이에 회장(會葬)하러 오는 사람처럼 꾸민 뒤에
吹螺集其徒(취라집기도) : 나각을 불어 그의 무리를 모았다.
先至首謀者家(선지수모자가) : 먼저 주모자(主謀者)의 집에 가서
火之(화지) : 불을 지르고,
凡豪强(범호강) : 토호(土豪)로서
素有怨者(소유원자) : 본래부터 원망을 산 자들을
搜殺無遺(수살무유) : 모두 찾아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
且令境內曰(차령경내왈) : 또 경내(境內)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敢有隱匿者(감유은닉자) : “감히 은닉하는 자가 있으면,
當滅其家(당멸기가) : 마땅히 그 가족을 멸하리라." 하니,
於是(어시) : 이에
婦人小子皆遇害(부인소자개우해) : 부인과 어린아이까지도 다 화를 입었다.
○ 安撫別監朴文秀(안무별감박문수) : 안무별감 박문수(朴文秀)는
還自忠州(환자충주) : 충주에서 돌아오고,
金公鼎留州(금공정류주) : 김공정은 고을에 머물러
以待平定(이대평정) :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리고,
奴軍都領令史池光守(노군도령령사지광수) : 노군도령(奴軍都領) 영사(令史) 지광수(池光守)와
僧牛本等(승우본등) : 중 우본(牛本) 등이
赴京(부경) : 경성으로 달려가니,
崔瑀大加褒賞(최우대가포상) : 최우가 크게 포상을 하여
以光守(이광수) : 광수를
補校尉(보교위) : 교위(校尉)에 보(補)하고,
以牛本(이우본) : 우본을
爲忠州大院寺主(위충주대원사주) : 충주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삼았다.
○ 八月(팔월) : 8월에
遣三軍兵馬使(견삼군병마사) : 삼군 병마사를 보내어
討忠州奴賊(토충주노적) : 충주의 노적(奴賊)을 토벌하였다.
○ 九月(구월) : 9월에
三軍平忠州而還(삼군평충주이환) : 삼군이 충주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三軍初至達川(삼군초지달천) : 삼군이 처음 달내[達川]에 이르렀을 때,
水深未涉(수심미섭) : 물이 깊어 건너지를 못하고
方造橋(방조교) : 막 다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奴軍賊魁(노군적괴) : 노군(奴軍)의 적괴
二三人(이삼인) : 2, 3명이
隔川告曰(격천고왈) : 시내의 건너편에서 고하기를,
吾等(오등) : “우리가
欲斬謀首出降(욕참모수출항) : 주모자의 목을 베어 와서 항복하려 합니다." 하였다.
李子晟等曰(리자성등왈) : 이자성 등이 말하기를,
如此則(여차칙) : “만약 그렇게만 하면
不必盡殺汝輩也(불필진살여배야) : 꼭 너희를 다 죽이지는 않으리라." 하였더니,
賊還入城(적환입성) : 적이 도로 성중으로 들어가
斬僧牛本以來(참승우본이래) : 중 우본(牛本)의 목을 베어왔다.
官軍留屯二日(관군류둔이일) : 관군이 머물러 이틀을 진치고 있었는데,
奴軍勇健者(노군용건자) : 노군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들은
皆逃匿(개도닉) : 모두 달아났다.
官軍入城(관군입성) : 관군이 성에 들어가
擒支黨悉誅之(금지당실주지) : 나머지 당을 잡아서 모두 죽이고
以所獲財物牛馬(이소획재물우마) : 얻은 재물과 마소를 가지고
來獻(래헌) : 와서 바쳤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병진 43년(1256) - 충주산성 패전과 월악산 신사
○ 夏四月(하사월) : 여름 4월에
○ 蒙兵(몽병) : 몽고병이
屠忠州城(도충주성) : 충주성을 도륙하고
又攻山城(우공산성) : 또 산성을 치니,
官吏老弱(관리로약) : 관리와 노약자들이
恐不能拒(공불능거) :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登月嶽神祠(등월악신사) :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忽雲霧(홀운무) :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風雨雷雹俱作(풍우뢰박구작) : 바람ㆍ비ㆍ우레ㆍ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蒙兵以爲神助(몽병이위신조) :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不攻而退(불공이퇴) : 치지 않고 물러갔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을묘 42년(1255) - 대원령 전투
○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蒙兵踰大院嶺(몽병유대원령) : 몽고병이 대원령(大院嶺)을 넘으니,
忠州出精銳(충주출정예) :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擊殺千餘人(격살천여인) :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중원 미륵리 사지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 [변천]
중원 미륵리 사지는 1963년에 고고미술사학회(현 한국미술사학회)에 의해 고려 석실 사원지로 소개되었고, 1965년에는 경주 석굴암 복원을 위한 자료로 제시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 24일에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이 각각 국보 제166호와 제16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 21일에 각각 보물 제95호와 제9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석실 사원이 위치하였던 상모면(현 수안보면)은 행정 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여 문화재 지정 명칭은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과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이다.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 조사는 1977년부터 시작되어 2차, 3차, 4차, 5차의 발굴 조사와 석실에 대한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사찰 이름으로 대원사(大院寺)가 확인되었고, 대원사지 동쪽에서 원지(院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이 이곳에 있었고, 많은 출토 유물을 통하여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같은 발굴 성과를 통하여 1987년 7월 18일에 충청북도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 국립공원 월악산과 함께 중요한 자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6년 9월에 수안보온천과 연계한 문화 유적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주변 정비 과정 중에 재대석, 장대석, 초석 및 건물지로 보이는 유구와 유물들이 노출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제1차 조사는 1977년 8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이루어졌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으로, 1978년에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를 간행하여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1차 조사를 바탕으로 석굴 실측 조사가 실시되었고, 1979년 2월 15일에 석굴 실측 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제2차 조사는 1978년 9월 15일부터 1978년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으로, 보고서는 1979년 8월 20일에 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이 있는 석실의 앞쪽으로부터 석등, 괴산 미륵리 사지 오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 제269호인 귀부(龜趺), 당간지주, 중문지에 이르는 사지의 중심 지역과 하천 서쪽의 건물지 등 가람 배치에 있어서 중심권에 해당하는 지역을 발굴하여 유구의 현상을 파악하였다.
제3차 조사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담당하여 1982년 11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고, 보고서는 1983년 1월 15일 간행되었다. 당시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안말마을 입구였다. 조사 결과 새로 조성된 마을의 지하에서도 상당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사찰의 권역을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연차적으로 토지 매입과 정비 계획이 추진되었고, 안말마을은 1986년에 현재의 점말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4차 조사는 1990년 7월 16일부터 1990년 11월 30일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안말마을 지역과 사지 중심 지역의 동쪽 구릉지, 그리고 당시 사찰 권역 내에 있던 세계사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안말마을 지역에서 원지(院址)와 관련된 유구를 찾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결과 보고서는 1992년 6월 30일에 간행되었다.
제5차 조사는 제4차 발굴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이고, 조사 기간은 1991년 7월 3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제4차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담장지 유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찾지 못하였다. 한편 석실 금당의 서쪽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중요한 건물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기단 석렬만이 확인되었다. 또한 동향으로 된 요사 1동의 유구가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5차까지 진행되었던 발굴 조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중원 미륵리 사지에는 석실과 석조물이 있는 하천의 동쪽 면을 중심으로, 하천 서쪽의 평지에는 부속 건물인 요사(寮舍)와 승방(僧房)이 있고, 후대의 건물인 세계사(世界寺)가 있던 언덕과 그 서쪽의 구릉지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규모의 건물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지의 외곽으로는 동서의 산 능선에 돌담장을 설치하여 사역을 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 [현황]
현재 중원 미륵리 사지의 석실 상부의 목재구조(木材構造)는 남아 있지 않고, 하부 석실 중심에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위치하고 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 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현재 사적 제3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이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 있지 않으나 석실 구조물 중앙에는 주존불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봉안되어 있으며 1977년 발굴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礎石)들이 발견되어 평면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발굴 조사 때 ‘미륵당(彌勒堂)’, ‘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1192년(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였다. 그 후 곧 복원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다시 중수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쳐 18세기에 다시 한 번 중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등이 끊긴 것은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사원지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 덕주공주가 지은 월악산의 덕주사를 바라보도록 북쪽을 향해 지은 석실사원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8) |
• 『중원군 미륵리 석굴 실측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 『미륵리사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 『미륵리사지 3차 발굴조사보고서』(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3) |
• 『미륵리사지 4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2) |
• 김영진·박상일, 『대원사지, 미륵대원지』(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 『미륵리사지 5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 『충주시 문화유적』(청주대학교박물관, 2002) |
미륵대원지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절터.
- [변천]
미륵대원지는 중원 미륵리 사지 발굴 조사 중 옛 미륵리 안말마을이 있던 자리에서 확인·조사된 사원 터로서, 대규모 건물지가 동·서·남·북으로 회랑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一然)에 의하여 『삼국유사』가 저술되었던 고려 충렬왕대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 1의 신라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 항목에, “계립령은 지금 미륵대원의 동령이다(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원(院)의 경영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76년 미륵리 사지의 정비계획에 의해 사역(寺域)에서 철거된 안말마을에서 상당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연차적으로 토지 매입과 정비 계획이 추진되었다. 미륵대원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 7월 16일부터 1990년 11월 30일까지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대규모의 건물지가 방형으로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처럼 길게 연결되어 노출되었다. 또한 이들 건물지 사이의 중정(中庭)에도 건물이 있었고, 건물지들의 기단 석렬 바깥쪽에 축대를 쌓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남쪽 건물지의 기단과 축대 등 일부 지역에 대한 확인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91년 7월 3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되었던 발굴, 조사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미륵대원지의 남쪽 건물지에 해당하는 기단 남면과 배수구, 석축 등이 새롭게 노출되어 미륵대원지의 규모와 건물 배치 상태를 파악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같은 발굴 조사를 토대로 미륵대원지의 건물은 2차에 걸쳐 중복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잔존 유구가 있으나 규모와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2차 건물 개축 때에 중간에 문지(門址)를 개설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굴 조사를 토대로 각각의 건물지를 정리하면, 북쪽의 건물지는 2중으로 겹쳐 복잡하지만 회랑처럼 동서로 긴 형태를 유지하였고, 길이는 1차 건물이 31m, 2차 건물이 58m이다. 남쪽의 건물지는 정면 13칸의 대형 건물로서 기단 길이가 61.4m, 폭 7.4m이다. 동쪽의 건물지는 측면의 기단과 초석 등이 유실되어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서쪽 건물지는 성벽형(城壁形) 석축으로 폭이 좁고 기단 윗면의 상태가 불확실하여 건물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로 이해되었다.
- [의의와 평가]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유적으로, 중원 미륵리 사지와 함께 계립령을 중심으로 그 일대의 역사, 지리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정치, 사회는 물론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사원(寺院)의 의미와 그 특성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8) |
• 『중원군 미륵리 석굴 실측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 『미륵리사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 『미륵리사지 3차 발굴조사보고서』(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3) |
• 『미륵리사지 4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2) |
• 『미륵리사지 5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 김영진·박상일, 『대원사지, 미륵대원지』(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 『충주시 문화유적』(청주대학교박물관,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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