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과 목걔대교
남한강과 막흐래기탄
어릴 적에 성황당을 지날 때면 돌하나를 주워서 성황당에 던지고 지나가야 했었다. 만약 돌을 주워서 던지지않고, 성황당을 지나쳤다면 무엇가를 빼어먹은 것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성황당에서 소원을 빌때면 돌을 정성껏 쌓거나 성황나무에 올려놓고 기원한다. 성황당은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있기에 마을 또는 고을의 경계와 위상을 상징하는 곳이다. 돌무더기를 쌓고 돌탑을 쌓는 것은 우리 민족만의 고유의 풍습이나 토속신앙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돌탑은 민간에 뿌리깊게 자리한 풍습 중에 하나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미신으로 간주하여 돌탑들이 많이 훼손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근래에는 마을 뿐만 아니라 장소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돌탑들을 쌓아올린다. 소도(蘇塗)의 돌탑과 성황당의 돌무더기는 무엇이 다를까 ?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한다. 마니산 참성단과 태백산 천제단은 무엇이 다르고, 태백산에는 천제단 뿐만 아니라, 장군단과 남측 안부에 또 다른 제단이 있다. 개천절 행사 때면 등장하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처음 본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다. 첫째는 참성단의 석축의 축조상태와 규모이고, 두번째는 제단의 방향이다. 고조선 이래로 이어온 배달민족의 천제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였고, 제단의 방향이 북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고조선 뿐만 아니라. 단군의 자손 또는 한민족의 혈통과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권력들이 군림했지만, 권력에 의해 천제단은 만들어지질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도성과 각 군읍에도 사직단과 여단이 있다. 그리고 객사라는 곳에도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라는 것을 모셔두고 중국의 황제 또는 왕에게 의식을 행한다. 각 왕조의 종묘와 사직은 자신들의 왕권과 왕조를 위한 것일 뿐이고, 선대의 왕조는 말살시켜 버린다. 서울의 환구단(원구단)과 중국 북경의 천제단은 마니산의 참성단과 태백산의 천제단과 무엇이 다를까 ? 역사기록은 각 권력의 역사들을 대변하지만 그 역사는 권력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그 민족 내면에 깔려있는 전통과 풍습은 특정권력이 멸망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자료 - 마니산 참성단 실측도)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는 쉽게 말하면 돌로 쌓은 돌탑이다. 돌탑은 분묘와 탑으로 구분된다. 고대 고구려의 적석묘와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천제단과 사직단과 여단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 우리는 탑을 재질에 따라 석탑과 전탑과 목조탑 등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작게 다듬어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부흥사의 돌탑을 왜 방단적석유구라고 할까 ? 돌탑에는 부흥산 신위(산신령)가 모셔져 있다. 이는 태백산 천제단에 모셔진 한배검이라는 신위와 비슷하다. 신위가 있는 돌탑과 고구려의 적석묘와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된 금강계단은 그 명칭과 형식이 다를 뿐 분묘로 구분된다. 돌무더기가 돌무덤이 되고, 돌무덤이 돌탑으로 변한다. 부흥사 돌탑은 왜 유구라고 할까 ? 경주의 분황사탑이나 익산의 미륵사탑은 탑신이 무너져도 유구라고 하질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탑들이 사각형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탑신이지만 방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며, 대부분의 탑들이 부재를 쌓아 만들어져 있지만 적석이란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부흥사 탑은 "방단적석유구"라는 무식한 표현을 할까 ? 제천 동산에 있는 돌탑도 "교리방단석조물"이라고 칭하고 있다. 돌탑으로 표현하면 무식한 표현이고, 방단적석이라 표현하면 유식하고, 체계적인 문화재 명칭분류가 되는 것일까. "부흥사 돌탑" 또는 "최봉출탑"이라 하고 그 탑의 설명에서 그 탑의 형식과 제원을 표현하는 것이 옭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중앙탑을 "충주탑평리 방단적석다층탑"이라고 표현하면 바보로 취급할 것이다. 문화재의 명칭을 부여함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 때 표기된 문화재 명칭이 아니라, 세로운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한다.
충주 부흥사 돌탑을 바라보면서 전탑과 모전석탑을 떠올려본다. 전탑은 벽돌로 된 탑이고,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탑이다. 두 탑은 탑의 부재인 재질만 다를 뿐이다. 전석은 구운 벽돌이고 모전석은 벽돌형태의 가공석이다. 탑의 형식이나 형태로 보아도 전탑이 모전석탑을 닮은 것이지, 모전석탑이 전탑을 닭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양전통건축은 서양전통건축과 달리 벽돌이나 석재를 건축재료로 쓰지않고, 건축구조물의 기단이나 분묘 등에만 쓰여진다. 즉 인간의 주거공간에는 벽돌이나 석재를 쓰지 않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전탑,굴뚝, 담장, 그리고 분묘에 축조된 벽돌들을 보면은 벽돌이라는 훌륭한 건축재료와 기술이 있으면서 벽돌로 된 건축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목조건축이라는 것이 소형 건축물에서 쉽지만, 대형 건축물에서는 벽돌이나 돌보다도 힘든 구조물이다. 또한 목조물은 물과 불에 취약하여 내구성은 물론이고 관리하기도 어렵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목조물은 화재로 소실되어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들이다. 전통건축물을 답사하면서 공포의 형식이나 지붕과 추녀선의 곡선미를 이야기하지만, 목조기둥과 대들보가 떠받치는 육중한 지붕의 하중과 목재의 취약성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에도 전통한옥을 예찬함에 있어서 한옥의 외형과 천연재료의 우수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전통한옥집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엄청난 건축비용과 기능과 용도가 현실과 맞지않아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충주 부흥사의 기울어진 돌탑을 바라보면서 세계7대 불가사의에 나오는 바벨탑과 피사탑을 떠올려 본다. 바벨탑의 붕괴와 피사탑의 지반침하는 부흥사의 돌탑에서도 나타난다. 어찌 보면은 돌탑을 더 높게 쌓고자하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한다. 부흥사 돌탑은 작은 돌탑 앞에 산신의 신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돌탑과 신위를 돌탑으로 감싸 올리면서 기존의 전탑을 모방한 것은 아닌가한다. 그로 인해 자연석의 불안정한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그 주변을 다시 돌을 덧붙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계획된 돌탑이 아니라, 쌓아 올리면서 미흡한 부분들을 보강하였기에 더 친밀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 부흥사의 돌탑과 산신각은 나란히 위치한다, 부흥산 산신령은 어디에 있을까 ? 부흥산 산신과 산신각의 산신은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부흥사를 내려 오면서 부흥사의 산신각과 법당과 요사체를 돌탑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축조되였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흐른다.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부흥사에 있는 조선 전기 방형의 기단에 판석을 쌓아 만든 전탑 모양의 적석유구.
- [위치]
엄정면 목계리 부흥사 내의 산신당 옆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불탑이 금당 앞 중앙에 위치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 [형태]
벽돌 크기보다 작은 장방형의 작은 돌을 이용하여 높이 약 8m, 둘레 약 13m로 쌓았다. 밑에서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드는 형상이며, 일반적인 불탑의 형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단을 방형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고, 그 위로 4단을 쌓았으며, 전면인 동쪽에는 방형 감실이 있다. 감실은 사람이 앉아서 드나들 만한 크기로 안에는 ‘부흥산신위(富興山神位)’라고 새겨진 비석이 안치되어 있다.
본래 방단식 이형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근대에 부흥사에 거주했던 최봉출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하단부에는 방단식 이형탑의 모습이 무너지지 않고 잘 남아 있으며, 상단부는 무너졌기 때문에 공을 들여 다시 쌓아 뒤쪽을 원형으로 높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단부는 인위적으로 다시 쌓는 과정에서 똑바로 중심을 맞추지 못하여 전반적으로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방단탑의 오른쪽에는 기단의 흔적이 관찰된다.
- [의의와 평가]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는 근대에 최봉출이 다시 쌓은 것으로 전하는데, 공덕을 쌓기 위해 조성된 돌무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돌무지는 부흥사라는 절에 위치하므로 자연히 탑으로 생각하게 한다.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와 같은 모전석탑의 모습은 경상북도 안동과 의성, 일본의 웅천에도 있다.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는 안동·의성·제천·여주로 연결되는 선상인 충주 남한강변의 목계에서 확인된 점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
• 『충주 엄정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충주박물관, 2001) |
제천 교리 방단석조물 (堤川校里方壇石造物) - 지방유형문화재 203호
일반적으로 모전석탑(模塼石塔)은 통일신라 이래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형태가 남아 있지 않아 모전석탑인지 석단(石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또한 조성된 정확한 연대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전기(高麗時代 前期)의 것으로 추정된다. 금수산(錦水山) 자락의 산중턱의 교리사지(校里寺址)에서 서남향 약50m지점의 암반위에 화강암재로 조성된 모전석탑으로 추정되는 1기의 석탑 형태의 네모꼴 석단(方形 石壇)이 있다. 1960년대 학계에 모전석탑으로 알려져 희소성(稀少性)과 중요성(重要性)은 인정되어 왔으나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못한채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방치된 상태이다. 큼직한 암반위에 화강암을 길이 30~40cm, 두께 5~15cm정도의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석단을 조성하였다. 기단부는 일변의 길이가 4m로 정사각형(正方形)을 이루고 있으며 높이 약1m이다. 초층 탑신부는 107cm높이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도 한변의 길이가 211cm정도 되는 네모꼴(方形)의 옥개부분의 잔형을 남기고 있다. 현재 기단부와 초층부의 일부만 유존되고 있다. 북동쪽은 붕괴되었으나 서쪽면은 일부가 남아있다. 내부가 심하게 파헤쳐져 중심부는 암반이 보일 정도로 도굴되었다. 주변에 무너진 석재(石材)가 다수 흩어져 있어 절벽아래로 상당수 유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석조물에서 북서쪽으로 50m 떨어져 이 석조물과 관련된 교리사지(校里寺址)에는 건물의 기단석축(基壇石築)이 낮게 남아 있고 자연석을 다듬은 주초석(柱礎石)들이 산재해 있다. 수습유물(收拾遺物)로는 어골문(魚骨紋) 평기와와 격자문(格子紋) 기와, 파상문 기와 등이 수습되고 있는데 출토기와의 편년은 모두 고려시대(高麗期)의 것으로 이 석조물과 동일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寺域)의 규모는 약200평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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