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탑(中央塔)은 예로부터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중원경에 대한 자존심으로 향토역사의 향기이다. 중앙탑(中央塔)의 문화재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인데, 열마 전까지도 중원 탑평리칠층 석탑이었다가 변경되었다. 중앙탑(中央塔)은 반천탑(盤川塔)과 김생사탑(金生寺塔)으로도 불리웠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없다. 중앙탑(中央塔)은 신라의 중원경에 있다는 뜻이고, 반천탑(盤川塔)은 남한강 안반내에 있다는 표현이고, 김생사탑(金生寺塔)은 김생사에 있다는 추측일 뿐 이었다. 중앙탑(中央塔)은 중원경에 있었기에 중원경탑(中原京塔), 반천탑(盤川塔)은 금천(金遷)에 있었기에 금천탑(金遷塔)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금의 옛지명인 금천도 중앙탑이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명은 아닐 수도 있다. 한강의 수운역사에서도 금천의 안반내 나루가 아니고, 엄정의 목계나루가 주목받는 것은 대부분의 자료들이 신라의 역사가 아닌 근.현대사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재 명칭은 지역성과 맞춤법 등을 적용하여 '지역명+고유명사+방향+형태+재질+문화재 종류'순서로 변경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문화재 명칭에 따라 해석하면 충주시 탑평리에 있는 7층으로 된 돌무더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중앙탑이라 부를 뿐이다. 충주 고구려비도 중원 고구려비에서 변경된 것이지만, "충주 용전리 고구려 석비"라고 표기하지않고 고구려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단양에 있는 적성비는 "단양 신라 적성비"로 표기된다. 그리고, 서울이 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서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며, 창녕에 있는 진흥왕 척경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다. 유사한 문화재인데도 그 명칭기준은 참으로 해괴하다. 문화재 중에는 시대와 성격 등이 불분명하여 모든 문화재에 통일된 명칭을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일반 국민들 뿐만 아니라 지역민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표기들이 많다. 괴산 원풍리 마애불은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며, 목계 부흥사 돌탑은 "충주 부흥사 방단적석유구"로 표기된다. 고유명칭 대신 문화재의 분류를 같이 사용함으로써 문화재가 왜곡된 느낌이 든다. 문화재를 분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특성을 무시하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과 중앙탑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앙(中央)에서 앙(央)은 크다(大)라는 표현으로 중앙탑은 시골 들판에 서 있는 작은 돌탑이 아니라, 국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내포한 상징적인 의미이다. 중앙탑(中央塔)에 대한 명칭과 유래는 너무도 많다. 그 중에서도 김생사탑(金生寺塔)은 김생사지가 발굴되면서 그에 대한 낭설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중앙탑(中央塔)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큰 사찰도 발굴되지않아 가람배치에 따른 사리탑(舍利塔)보다는 남한강과 중원경의 비보사탑(裨補寺塔)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풍수에 따른 비보탑(裨補塔)에 대한 해석도 저마다 다르지만, 중앙탑은 왕과 중앙의 권력보다는 부처의 힘을 빌어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도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중앙탑(中央塔)이 불교와 연관된 조형물이기에 사리탑(舍利塔)으로 간주할 수도 있으나, 지리적 여건이나 지형적인 요소들은 다른 탑과 달리 그 건립 경위와 시기를 알 수 없기에 더 신비롭다. 중앙탑에 대한 명칭과 유래에 관련된 자료들도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것과 근래에 채록된 민담들이고,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도 단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기록들에서 중앙탑이라는 명칭. 신라 원성왕 12년이란 건립시기의 추정, 그리고, 탑을 해체수리 할때 나온 유물의 소재지. 탑의 건립 경위와 시기를 밝혀줄 수 있는 유물이 사라진 현실에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중앙탑(中央塔)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부끄럽다. "내가 처음으로 중앙탑을 본 것은 1972년도 남한강 대홍수가 지나간 75년으로 기억하는데, 중앙탑을 처음 본 느낌은 흔히들 말하는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한강변 하중도(모래섬)에서 천 년을 지켜온 중앙탑의 모습에서 신비로움을 느끼면서도 국보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게 보였다. 지금은 중앙탑 공원이 정비되고, 중앙탑 주변의 토사를 깍아내려 탑이 더 높게 솟아있는 것처럼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지만, 문화재를 원형보존해야하는 본래 취지와는 맞지않는 모습이다.(중원경과 완장성에 대하여)에서 발췌"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과 중앙탑은 무엇이 다를까 ? 명칭조차도 베일에 쌓여 있는 탑을 바라보며 신라의 중원경을 상상해본다. 무엇이 떠오를까 ? "잃어버린 역사."일 것이다.
충주시 고구려비와 충주목 고구려비와 중원경 고구려비와 국원성 고구려비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 표현일까 ? 이러한 명칭 논쟁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다.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는 광화문 현판의 글씨조차도 문제를 삼아 교체되었다.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의 논란에서도 숭례문의 문화재적 가치가 국보 1호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보 1호는 문화재 등록번호일 뿐이다. 기존의 문화재 명칭을 답습하지말고, 새로운 기준으로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는 아닐까 ?
국보급 지정문화재(문화재청 자료)
연번 | 종목 | 명칭 | 매체 | 소재지 | 관리자(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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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국보 제1호 |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서울 중구 | 문화재청장 | |
2 | 국보 제2호 |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
서울 종로구 | 종로구 | |
3 | 국보 제3호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서울 용산구 | 국립중앙박물관 | |
4 | 국보 제4호 | 여주 고달사지 승탑 (驪州 高達寺址 僧塔) |
경기 여주군 | 여주군 | |
5 | 국보 제5호 |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
충북 보은군 | 법주사 | |
6 | 국보 제6호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
충북 충주시 | 충주시 | |
7 | 국보 제7호 |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
충남 천안시 | 천안시 | |
8 | 국보 제8호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충남 보령시 | 보령시 | |
9 | 국보 제9호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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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 부여군 |
10 | 국보 제10호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
전북 남원시 | 백장암 |
11 | 국보 제11호 |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
전북 익산시 | 익산시 | |
12 | 국보 제12호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
전남 구례군 | 화엄사 | |
13 | 국보 제13호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
전남 강진군 | 무위사 | |
14 | 국보 제14호 |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
경북 영천시 | 은해사 | |
15 | 국보 제15호 |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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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 봉정사 |
16 | 국보 제16호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
경북 안동시 | 안동시 | |
17 | 국보 제17호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
경북 영주시 | 부석사 | |
18 | 국보 제18호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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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 | 부석사 |
19 | 국보 제19호 |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 |
경북 영주시 | 부석사 | |
20 | 국보 제20호 |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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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불국사 |
21 | 국보 제21호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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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불국사 |
22 | 국보 제22호 |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
경북 경주시 | 불국사 | |
23 | 국보 제23호 |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
경북 경주시 | 불국사 | |
24 | 국보 제24호 |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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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석굴암 |
25 | 국보 제25호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
경북 경주시 | 경주시 | |
26 | 국보 제26호 |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
경북 경주시 | 불국사 | |
27 | 국보 제27호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
경북 경주시 | 불국사 | |
28 | 국보 제28호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
경북 경주시 | 국립경주박물관 | |
29 | 국보 제29호 |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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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국립경주박물관 |
30 | 국보 제30호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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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분황사 |
31 | 국보 제31호 |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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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경주시 |
32 | 국보 제32호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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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 해인사 |
33 | 국보 제33호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
경남 창녕군 | 창녕군 | |
34 | 국보 제34호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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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 창녕군 |
35 | 국보 제35호 |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
전남 구례군 | 화엄사 | |
36 | 국보 제36호 | 상원사 동종 (上院寺 銅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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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군 | 상원사 |
37 | 국보 제37호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
경북 경주시 | 경주시 | |
38 | 국보 제38호 |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慶州 高仙寺址 三層石塔) |
경북 경주시 | 경주시 | |
39 | 국보 제39호 |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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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 경주시 |
40 | 국보 제40호 |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慶州 淨惠寺址 十三層石塔) |
경북 경주시 |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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