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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왜 탄금대 전투라고 하는가 ?

산골어부 2014. 7. 26. 11:25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왜 탄금대 전투라고 하는가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고적편에는

"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중종 때에 충주목사를  지낸 박상(朴祥)이 쓴 싯구에는

"탄금대 아래 흐르는 물 쪽빛 같네. /彈琴臺下水如藍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文章强首無遺墓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翰墨金生有廢庵" 라고 서애집에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인 이만도가 쓴 싯구에는

"마암에다 철관 몹시 험난하거니 / 磨巖鐵串險
천험인 이 탄금대서 산 등졌다네 / 天設是負隅
아홉 번 뛴 장군의 한 서려 있거니 / 九超將軍恨" 라고 향산집에 수록되어있다.

 

조선왕조실록, 국조보감, 상촌집, 난중잡록, 서애집, 징비록, 재조번방지 등 수많은 조선의 역사기록에 신립장군은 달천뜰에서 기마병을 중심으로한 전면전을 계획하다가 팔천의 군사와 충주민을 하루도 아닌 한식경 만에 몰살시키고 왜군에게 쫒기다가 탄금대 아래 달천에 빠져 죽은 무능한 장수로 기록되어 전한다. 하지만, 조선말기에 이만도가 쓴 향산집에서는 신립장군이 탄금대를 아홉번 뚼 맹장으로 미화되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우륵이 가야금을 탄 탄금대가 열두대로 변질되어 회자되어 오다가, 근래에는 탄금대 토성과 양진명소사터에 신립장군의 순국지지비와 순절비 등이 건립되면서 탄금대는 임진왜란전쟁터로 변질되어 신립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활시위를 식히려고 절벽을 오르내리며 분전하다가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한 명장으로 왜곡되어 충주를 빛낸 명현으로 추대되어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해 충신 의사단 등을 달천에 설치하여 그 혼백을 기리는 제를 지낸 사례가 나타난다, 특히 순조 32년인 임진년에 갑년을 맞이하여 "신입과 김여물 등을 충주 달천의 순의한 옛터에 사제."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탄금대에는 충혼탑과 팔천고혼위령탑 등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같은 역사왜곡과 변명이 현재의 충주시와 유관기관 그리고 향토사학자들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임진왜란 충주전투는 기마병인데, 위령탑에는 보병이 백병전에서 패전한 모습이 연상된다.)

 

탄금대는 가야금의 우륵과 강수, 그리고 김생 등이 중원문화를 꽃피운 명승고적지였다. 하지만,  탄금대는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전으로 인하여 그 치욕의 역사를 뒤집어 쓴 채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지휘한  패장 신립과 김여물은 그들의 아들인 김류와 신경진 등이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득세하여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조선의 역사서에서는 신립장군은 임진왜란보다는 북관의 여진족을 물리친 북관전투의 맹장으로 미화되긴 했지만,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전으로 인하여 무능한 패장으로 각인되었다. 신립이 여진족과 벌인 북관전투는 임진왜란 충주전투와 달리 온성부사로써 소규모의 여진족과의 국지전에서 승리한 결과로 임진왜란 충주전투와는 비교될 수 없는 규모이었기에 북관전투에 따른 작은 승전으로 그를 명장으로 일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탄금대는 충주전투의 패전으로 인하여 중원문화를 자랑하는 명승지가 아닌 흉지가 되었다. 이는 정약용의 "탄금대를 지나며"라는 싯구와 윤계선의 달천몽유록, 이중환의 택리지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산(정역용) 시문집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嶺隘度盡地坼開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江心湧出彈琴臺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欲起申砬與論事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啓門納寇奚爲哉

회음이 만약 성안 위치에 있었던들                     淮陰若在成安處

적치가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赤幟豈過井陘來

그때 우리는 조였으면서 한이 쓰던 꾀를 썼으니    我方爲趙計用漢

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鍥舟索劍眞不才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麾旗指水入水去

목숨 바쳐 싸운 군대들 그 얼마나 가련한가          萬夫用命良可哀

지금도 밤이면 도깨비불이 출몰하여                   至今燐火夜深碧

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                      空使行人肝膽摧

 

이중환 택리지

 

충주목

 

사대부의 정자가 많고 의관 차린 사람들이 모이며 배와 수레들도 모여든다. 또 국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한 고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많기로 팔도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니, 이름난 고을이라고 부르기에 넉넉하다. 경상도(에서 서울 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거쳐 (이 고을로)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고을로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그러므로 이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으로 오가는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다투는 곳이 된다. 참으로 온 나라의 한복판이 되어 중국의 형주나 예주와 같기 때문에, 임진년에 왜적이 신립(申砬)을 또한 여기서 패배시켰다. 보통 때에도 살기가 하늘을 찌르며,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지세가 서북쪽으로 쏟아지며 정기가 머물러 쌓이지 않으므로 부유한 자가 또한 적다. 백성이 많아 항상 구설이 많고 경박하여서 살 곳이 못 된다.

 

임진왜란 충주전투는 당시의 전장터인 달천뜰이 아니라, 왜 배수진을 친 탄금대 전투로 왜곡되고 있을까 ? 그리고, 충주전투의 패장인 신립은 어떻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을까 ?  신립을 따라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김여물은 조선의 역사서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기록에서도 유일하게 맹장으로 분전한 장수로 기록되어 있지만, 종사관이 어떻게 순변사인 신립장군과 같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장의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충주목사 조방장으로 참전한 이종장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임명된 지방수령으로 충주에 부임하여 충주전투에 참가한 것 이외는 그 공로가 없는데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무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핵심인물인 신립.김여물,이종장 등이 충주땅에 머물러 충주전투를 준비하고 전투를 치룬 것이 3일에 불과하고, 그 3일 만에 충주전투에서 패전하여 8천의 군사와 수많은 충주민을 죽게 만들었는데, 무슨 공로로 어떻게 충주를 빛낸 인물로 추대되어 명헌추모제를 지낼 수가 있을까 ? 그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정치적 논리들을 열거해본다.

 

 

 

1. 국가전란에 따른 전사자에 대한 예우(임진왜란)

 

2. 유교문화에 따른 가문의 정통성(인조반정 일등공신 가문의 부활)

 

3. 권력투쟁에 따른 정파의 명분논리(인조의 친명반청정책에 따른 북벌론)

 

4. 반일감정에 따른 민심의 전환(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5. 5. 16 군사혁명에 따른 무장들의 우상화와 성역화

 

6. 향토사학자들에 의한 향토역사의 왜곡

 

7. 지역문인과 정치인들에 의한 향토역사의 미화

 

8. 관광자원에 따른 민담설화의 상업화

 

9. 잘못된 애향심에 따른 지역예찬론

 

10. 역사교육의 잘못된 인식과 시대적 변천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그림-1. 김여물장군-일본군 荒御田과 적토마를 타고 겨루는 모습

 

 

임진왜란 충주전투가 배수진을 친 탄금대 전투가 된 것은 탄금대가 달천에 접한 명승지였기에 충주보다는 탄금대 전투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배수진이라는 표현에서도 달천보다는 남한강에 절벽을 이룬 탄금대가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탄금대에 인접한 남한강과 달리 충주의 달천은 남한강의 지류로 수심도 깊지않고 유수량도 많지않아 임진왜란 충주전투 시에 팔천의 조선군과  1만8천 여의 일본군이 배를 이용한 도강작전없이도 강여울을 따라 달천을 건넜기에 이를 중국고사에 등장하는 항우의 파부침주(破釜沈舟)와 한신의 배수지진(背水之陳)에 비유하여 배수진을 친 전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이는 조선의 역사기록과 달리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 500인과 조선군 사망자 3000인으로 기록한 일본의 기록으로 추정하면 수많은 조선군이 달천의 강여울을 따라 도망 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달천제방과 충주호 조정지댐 축조로 형성된 탄금호가 있어 달천강변이 호수처럼 변해 있지만, 불과 1972년 대홍수 때 까지도 달천은 드넓은 백사장과 샛강과 늪지로 형성되어 탄금대에서 쇠꼬지로 이어지는 금탄여울도 갈수기에는 배가 없어도 강여울을 따라 건너 다녔으며, 여름철이면 탄금대 용섬까지 수영으로 헤엄쳐 건넜으며, 단월과 달천나루터 인근에는 섶다리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임진왜란 충주전투는 배수진을 친 신립의 지략이기보다는 윤계선이 달천몽유록에서 기술한 것처럼 어설픈 배수진으로 군사들의 손만 묶어(背水無功束萬手)"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조선의 군사들이 달천강과 샛강을 건너서 도망쳤기에 조선군의 지휘체계가 일시에 무너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을 마치며 남기고 싶은 것은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탄금대 전투로 왜곡하지도 말고,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배수진으로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립은 임진왜란 충주전투를 주력부대인 기마병으로 전면전을 계획만 하였을 뿐, 그를 실행하지도 못하였고, 적의 기습에 허둥대다가 자멸한 무능한 장수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배수진은 한신의 배수진이 아니라, 탄금대와 달천의 지형을 모르고, 지도상에 그린 배수진이라는 것이다. 또한 충주전투의 상황에서 배수진을 친 군대가 어찌 충주관아로 이어지는 비좁은 길과 논으로 진격할 수 있겠는가 ?  충주의 지형은 남한강과 달천강으로 둘러쌓여 있는 지형이기에 탄금대가 아니더라도 배수진인 것이다.

 

 

 

임진왜란 충주전투가 역사의 고증에 따라 정립되고, 탄금대에서 왜곡된 비석들이 사려져 고전장터(달천뜰)에 자리를 잡아야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지고, 강수가 시를 읊고, 김생이 도를 닦는 두타행의 명승지로 거듭날 것이다. 탄금대는 신립장군에 대한 사적인 우상화와 사적인 치적물 그리고 패전의 굴레를 감추기보다는 임진왜란 충주전투에 대한 역사의 인식과 재조명으로 중원의 역사가 바로 설때 중원문화를 꽃 피운 명승지가 될 것이다.

 

 

 

[참고자료]

역사왜곡으로 얼룩진 탄금대 비석들

http://cafe.daum.net/chungjuhoMTB/ia4o/154

 

고려사지리지 - 양광도 충주목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연소(楊津衍所)가 있으며 별호(別號)를 대원(大原)【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이다.】

 

세종 지리지/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목)

 

○ 대천(大川)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청풍(淸風)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주〉 서남쪽으로 흘러 여강(驪江)이 된다.【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로 한다.】
○ 양진연소(楊津衍所)【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산천】

금천(金遷)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사묘】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 견문산(犬門山) 밑 금휴포(琴休浦) 어귀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실려 있다. 봄가을마다 향(香)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고적]

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국조보감 제31권 선조조 8년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ㆍ경기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상이 서쪽으로 떠날 것을 의논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흥원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모두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여 민심이 귀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달 29일 저녁에 상이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를 듣고 동상(東廂)에 나아가 서쪽으로 떠날 계획을 의결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잠시 상께서 평양으로 가셔서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경성(京城)을 지킬 것을 청했는데, 유성룡이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무척 충성스럽기는 하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임진(1592,만력 20)


4월30일 (기미)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나오는 귀절과 도성의 동요가 유행하자 거기에 해석이 나돌다
 

국초(國初)에 승려 무학(無學)이 지은 도참기(圖讖記)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1592)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기축년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석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조정에서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을 보내어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입이 충주에서 패전하고 전군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했다. 이른바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며, 용(聳)’은 ‘입(立)’의 뜻이며, ‘운근(雲根)’은 곧 돌[石]이다. 그러므로 ‘악용운근(岳聳雲根)’은 ‘신입’이란 말이 된다. 또 ‘담공월영(潭空月影)’은 곧 ‘달이 여울에 떨어진 것[月落灘]’이니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그 아랫 구절은, 도성 안의 백성은 피난가고 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이다.
또 동요(童謠)가 있어 임진년 정월부터 도성 안에 퍼지기 시작하더니 4월에는 크게 유행했다. 동요는 곧 ‘이팔자 저팔자 타팔자[此八字彼八字打八字], 자리 봉사 고리 첨정(自利奉事高利僉正), 경기 감사 우장 직령(京畿監司雨裝直領), 큰달마기[大月乙麻其]’였는데, 임진 난리 뒤에 해석하는 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 사람은 남녀가 간음하는 것을 일러 ‘타팔자(打八字)’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군대가 우리 나라의 여인을 간음한다는 말이고, ‘자리고리(自利高利)’는 우리 나라의 방언으로 ‘냄새나고 더럽다.’는 뜻인데 이것은 임진 난리 뒤에 생긴 납속 군공(納粟軍功)을 의미하며, ‘봉사(奉事)·첨정(僉正)’은 다 낮고 미천함을 의미하고, 상이 4월 그믐에 파천하였으니 그 달은 큰 달이며 큰달 그믐 곧 큰달 말일이란 뜻이다. 이른바 ‘큰달마기’란 곧 ‘큰달 끝[大月末]’이란 뜻이고, 그날은 마침 큰비가 내려 경기 감사가 우장(雨裝)과 직령(直領)을 입고 어가를 뒤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원전】 21 집 484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어문학-문학(文學) / *군사-전쟁(戰爭)


[주D-001]무자년 : 1588 선조 21년.

 

 

조선왕조실록 순조 31년 신묘(1831,도광 11)  
 
 
 11월22일 (경오)
 
명년 봄을 기다려 신입과 김여물 등을 충주 달천의 순의한 옛터에 사제하라고 명하다
 

명년 봄을 기다려 고(故)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과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및 여러 장사(將士)들을 충주 달천(撻川)의 순의(殉義)한 옛터에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참판 조인영(趙寅永)이 태실(胎室)을 봉심하기 위하여 충주에 갔다가 돌아와서 ‘명년이 임진년의 옛 갑년(甲年)이 되니 옛일을 추억(追憶)하는 감회를 나타내어 보임이 합당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인영이 또 충주에서 삼영(三營)에 바치는 보미(保米) 7백 19석(石)의 폐단을 말하면서 대전(代錢)으로 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원전】 48 집 372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재정-국용(國用) / *금융-화폐(貨幣)


[주D-001]임진년 : 1592 선조 25년.
[주D-002]삼영(三營) : 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 윤계선의 달천몽유록

 

경자년 하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 윤계선(尹繼先)의 《달천몽유록(㺚川夢游錄)》에 다음과 같이 이르다.
만력 경자년(1600, 선조 33) 중춘에 파담자(坡潭子)는 당직으로서 서청(西淸)에 며칠 동안을 묶여 있었다. 새벽에 승정원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시종신 다섯 사람을 불러들여 봉서를 내려주며 제도(諸道)를 암행하라 하였는데, 파담자도 그 중에 끼어 있으므로 한강가에 모여 자면서 봉서를 떼어보니 받은 도는 호서였다. 여러 고을을 차례로 암행하여 충주(忠州)에 이르렀다. 나그네로 떠돌다보니 어느덧 3월이라, 동풍은 따뜻하게 불어오고, 달천의 물은 맑게 출렁이며 수많은 백골(白骨)은 널리고 꽃다운 풀은 더욱 푸르렀다. 9년 동안에 싸움터는 이미 묵어서 들쥐와 산성성이는 해를 보고 숨고, 주린 까마귀와 성난 솔개는 사람을 향하여 시끄럽게 우짖는다. 지친 말을 천천히 몰면서 당시를 묵묵히 회상한다. 양가에서 뽑힌 자제와 훈련받은 정병이 혹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자원해서 오고, 혹은 가흑한 관리의 징발을 당해, 허리에 활을 차고 등에 화살을 지고 싸움터에 나가서 갑옷을 깔고 북을 두드렸다. 좋은 무기를 간직하고서도 싸우지 못하니, 장군의 계책 없음이 분하다. 손을 묶고 할 일 없이 적을 맞이하여 목을 내밀고 적의 칼을 받았으니 마음을 싸매고 원한을 머금었다. 헛되이 죽은 혼이 사충(沙蟲)이 되고, 원숭이와 학이 된 자가 그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 분한 기운이 위로 맺혀 뭉친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원한의 소리가 아래로 흘러 강물도 흐느낀다. 이다지도 마음을 상하고 눈을 쓰리게 하는가. 인하여 슬피 읊조리고 강개하여 시 세 편을 지었다. 그 절구에,
싸움터의 꽃다운 풀은 몇 번이나 새로웠나 / 戰場芳草幾回新
한도 없는 향규의 꿈속의 몸이로다 / 無限香閨夢裏身
비바람 불어 오는 한식절에 / 風雨過來寒食節
이끼 낀 해골들은 또 저문 봄을 맞는구나 / 髑髏苔碧又殘春
하였다. 그 율시에는,
까마귀ㆍ소리개 다 날아가고 물새도 보금자리에 드니 / 鳥鳶飛盡渚禽棲
해 떨어진 모래밭에는 길조차 희미하네 / 落日沙場路欲迷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니 그저 아득하기만 한데 / 憶得當時空脈脈
차마 보니 꽃다운 풀은 또 푸르르도다 / 忍看芳草又萋萋
갑옷이 물을 메워 금탄강은 오열하고 / 鐵衣塡水琴灘咽
삭은 뼈는 들에 우뚝 쌓여 월악산이 낮도다 / 杇骨撑郊月岳低
뉘라서 장군으로 하여금 명예가 이르게 했던고 / 誰使將軍名譽早
거마로 하여금 헛되이 서쪽을 정벌케 하였음은 뉘우치노라 / 悔敎車馬浪征西
하였다. 또 세 번째 시에 이르기를,
동쪽은 죽령, 남쪽은 새재 / 東竹嶺南島嶺
충주가 우리나라의 뛰어난 경치를 독차지하였네 / 中原獨據靑丘勝
누가 평평한 들판에 진을 치게 하였던고 / 誰敎雲鳥陣平郊
들으니 장군이 밤중에 영을 내렸다고 / 聞道將軍夜有令
배수진도 보람 없이 병사들의 손만 묶이니 / 背水無功束萬手
회음후가 천년 뒷사람을 그르쳤네 / 淮陰誤人千載後
임금의 수레 파촉으로 간 줄을 모르고 / 不知鑾輿幸巴蜀
말없는 시냇가 백골은 하마 삭았네 / 無語溪邊已杇
뼈가 삭은 것은 아깝지 않으나 / 骨已杇不足惜
다만 그대 우리 임금의 의식을 허비한게 한이로다 / 但恨吾君費衣食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는 필부의 용기를 / 憑河未售匹夫勇
사람들이 만인적이라 칭찬함은 우스운 일이로다 / 堪笑人稱萬人敵
하였다. 복명한 지 몇 달이 못 되어 화산(花山)의 수령으로 나갔다. 벼슬이 한가롭고 공문서도 드물었으므로 유고(遺稿)를 펼쳐보노라니, 변성(邊城)에 달이 돋아오르고, 단청한 누각에는 풍경 소리도 잠잠하다. 맑은 밤은 으슥한 베개에 의지하여 생각에 잠기니, 정신이 몽롱한 사이에 호접몽(蝴蝶夢)이 무르익어 나를 인도하여 산과 내를 뛰어넘고 문득 한 곳에 이르러 구름 안개가 슬픔을 띠고 돌시내가 원한을 쏟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보금자리에 들고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배회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읊조리노라니, 난데없이 질풍이 성내어 부르짖더니 살기가 온 들에 가득하고 천지는 칠흑같아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으며, 오직 보이는 것은 횃불을 든 한 패가 먼 데서부터 오는데 많은 장정들이 떠들썩하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파담자는 꼼짝도 못하고 섰었는데 머리털이 오싹했다. 급히 숲속으로 피하여 그들의 하는 짓을 엿보니, 서로 뒤섞여 울부짖는데 겨우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있었다. 혹은 머리가 없는 자, 혹은 오른팔이 잘렸거나 왼팔이 잘린 자, 혹은 왼발을 잘린 자, 오른발을 잘린 자 혹은 허리는 있으면서 다리가 없는 자, 혹은 다리는 있으면서 허리가 없는자, 혹은 배가 팽팽하여 비틀거리는 자는 아마 물에 빠진 것이리라. 모두 머리카락을 온통 얼굴에 풀어헤치고, 비린내 나는 피가 사지(四肢)에 쏟아져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하늘을 향하여 한 마디 부르짖고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니 산이 흔들리고 흐르는 물도 멎는 듯했다. 이윽고 구름이 흩어지고 달은 높은데, 온 세상이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흰 이슬은 서리가 되어 갈대는 우거지고 찬 별은 쓸쓸하고 넓은 들은 빨아서 널어놓은 명주와도 같다. 여러 귀신들이 눈물을 닦고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이 원한은 그지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은 맑으니 이런 좋은 밤을 어이할꼬. 한바탕 이야기나하여 이 밤을 지새우자.” 하며, 목소리를 모아 노래하기를, “살아서도 쓰이지 못했는데 죽어서 또한 무엇을 하리.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인데 나를 죽인 자는 누구인고? 우리를 길러주신 임금의 은혜가 깊으니, 나라의 일이 위급할 때에 대장부 한번 죽음은 아까울 것 없으나, 장군이 말을 너무도 쉽게 해서 이다지도 극도에 이르렀네.” 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여러 귀신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서로 말하기를, “늙은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은 누가 드리며, 안방의 아리따운 아내는 원망의 눈물이 속절없이 많으리. 나의 죽음을 반신반의하다가 안마(鞍馬)만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 함께 살 인연이 끊어졌다 하여 그저 지전을 뿌리며 초혼하는 것을 번거로이 할 뿐이리라.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랴.” 하였다. 그중의 한 귀신이 빙그레 웃으며, “무엇을 그리 지껄이느냐? 이 사이에 혹시 세상 손님이 몰래 엿듣고 있지나 않느냐?” 하였다. 파담자는 그들이 벌써 알아차렸음을 알고 달려가서 뵈니 일제히 일어나 넌지시 읍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전날 여기를 지나간 이가 아니오? 그때에 보내준 시를 우리들은 잘 받았소. 그 시와 율은 풍자가 잘 되었으며, 절구는 처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읽을 수 없게 하니 참으로 이른바 귀신도 울리는 문장이었소.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이기에 다행히도 군자를 만나 보니, 구름 같은 지난 일을 낱낱이 이야기할 수는 없소만 그 중의 한두 가지 말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대는 듣고서 세상에 전해주면 매우 다행이겠소이다.” 하고는 곧 털어놓기를, “장수는 삼군의 생명을 맡은 이요, 병사는 한 사람이 지휘하여 쓰는 것이니 만일에 장수가 어질지 아니하면 반드시 일을 망치는 법이오. 중원(中原) 충주(忠州) 은 지세가 뛰어나서 실로 남기(南紀)요, 초점(草岾)은 천험(天險)의 으뜸이요, 죽령은 지리로 따져 믿을 만한 곳이므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열지 못함은 촉도(蜀道)보다 어렵고, 백 사람이 요새를 지키면 천 사람으로도 뚫고 지나가지 못함은 위험하기 정형(井陘 하북성 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같으니, 나무를 깎아서 목책(木柵)을 만들고 돌을 쪼개어 병거(兵車)로 삼으면 북쪽 군사가 어찌 날아선들 건너오리오. 남풍이 죽어가는 소리를 싣고 오지 않을 것이니, 푹 쉰 아군으로 피로한 적을 기다리면 장사는 베개를 높이 하고, 주인이 되어 객을 제압하면 승패는 바둑판같이 훤하거늘, 아깝도다! 신 공의 계략이 이러하지 못하고 그 위엄을 가지고 자기 주장만 내세웠다. 김 종사(金從事)의 청이 어찌 근거가 없으리오. 이순변(李巡邊)의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었건만, 듣지는 않고 감히 억측으로 결정하였던 것이오. 신 공의 말이, ‘배에서 내린 적은 거위나 오리처럼 걷기가 어렵고, 길을 두 배로 빨리 달려온 적은 개ㆍ돼지와 같이 계략이 없는 법이니, 평평한 큰 들판에서 단판 싸움에 때려부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산 험한 고개에 두 길로 갈라서 지킬 필요가 어디 있겠나?’ 하고, 드디어 탄금대(彈琴臺)로 퇴진하여 용추(龍湫) 물가에 탐정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고, ‘세 번 호령하면 북을 치며 오위(五衛)의 군사에게 재갈을 물려 까닭없이 군사를 놀라게 하는 자를 베는 것은 손자(孫子)의 병법이요, 사지(死地)에 놓여야만 마침내 산다 함은 한신(韓信)의 기이한 계략이다.’ 하였소. 이는 거문고의 기둥을 아교로 고착시켜 놓고 거문고를 뜯는 것이나, 나무 그루만 바라보며 토기 오기를 기다리는 식이라. 효원(孝元)을 죽이고, 안민(安敏)을 목벤 일도 본래 이런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건아(健兒)는 핏덩이가 되고 장사(壯士)는 고깃밥이 되었으니 또한 참혹한 일이 아니겠소. 더욱 우스운 것은 서릿발 같은 큰 칼과 해에 번쩍이는 긴 창을 번득이면서 날뛰고 고함지르며 한참 싸우는 판에 별안간 진지를 바꾸어 징을 치고 깃발을 눕히니 그 당당하고 정연하던 대형세가 구름같이 흔들리고 새처럼 흩어져 용감하고 씩씩하던 군사가 뒤만 돌아보고 두 손을 모아서 드디어 관문을 뛰어넘고 배를 끼고 강을 건너뛰던 용기와 박차고 일어나 싸우려던 힘으로 하여금 마침내 피투성이로 쓰러지게 했으니,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잘 싸우는 장수는 있어도 잘 싸우는 병졸은 없었으니, 어찌 우리들만 목이 베어졌겠소. 불세출의 재주를 가지고 전무후무한 공을 세우려 하니, 우리가 이러한 죽음에 어찌하겠소?” 하였다. 말을 마치자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이윽고 피로한 기색을 띤 장부가 부끄러워운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정거리며 그 발은 머뭇머뭇, 그 입은 말을 못하고 여닫기만 하다가 읍하고 고하기를, “고아가 된 아들, 과부가 된 아내들의 원한이 내 일신에 모였으니, 내 비록 죄진 몸이나 오늘 그대들의 말에 있어 어찌 변명하지 않겠소. 나는 본래 장군 가문의 후손으로, 계보는 귀인의 집에서 나왔으므로 기운은 소도 삼킬 만하고 성품은 말달리기를 좋아하였소. 삼세의 경계에는 어두웠으나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병법을 배웠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호방(虎榜)에 장원급제는 못했지만 백보 밖의 버드나무 잎을 뚫을 정도로 활쏘는 재주를 참으로 배웠더니, 밝은 임금에게 그릇 알려져서 외람되이 임금의 은혜를 받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소. 북쪽의 오랑캐가 준동하였을 때에는 서관(西關)에 장성(長城) 구실을 하며 번개처럼 한 칼로 소탕하여 적을 없애버렸고 우레같이 삼군을 움직여 그 소굴을 무찌르니, 마치 강동(江東)이 장요(張遼)의 이름에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그치며,새북(塞北)이 이목(李牧)의 위엄에 눌려 말[馬]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같았지요. 공은 적었으나 보답은 무겁고, 지위가 높으니 뜻도 높았소. 한강과 금강의 사이를 달리니, 금띠를 허리에 차고 승명려(承明廬 한 나라 때 신하들의 숙직소)에 드나들 때 임금께서는 칭찬하는 말씀을 하셨소. 변방의 풍진이 한번 일어나자 봉화의 신호가 석 달을 계속하니, 장수로 제수한다는 명령을 받자 곧 전장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어전에서 간절히 아뢰는 말씀에 임금께서 감동하시어 일선 장수를 통솔할 권한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겼소. 적을 훤히 꿰뚫어보고, 군사는 손바닥 위에서 운용하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강한 놈을 종아리만 때리기로 작정하고 문을 열어 도적을 끌어들일 것을 깨닫지 못했소. 자기 의견만 고집하면 작아진다는 옛 사람의 가르침을 잊어버렸고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법이라, 마복군(馬服君)의 아들 조괄(趙括)의 일과 같았으나, 어찌 사람의 잘못만이겠소. 역시 하늘이 도와주지 아니하였소. 어려(魚麗)의 진을 치지도 못한 채 왜적이 선수를 치니 형세는 북산(北山)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 하듯이 지리적 조건도 비록 편했지만 사람들이 다투어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대사는 이미 끝났소. 아! 어디로 돌아갈꼬. 나 홀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드디어 여덟 자의 몸을 만길 물속에 던졌던 것이오. 놀란 물결이 넘쳐도 이 부끄러움은 씻기 어려우므로 맑고 빠른 여울은 슬피 흐느끼면서 다투어 나의 회포를 호소하지요. 가끔 구름이 골짜기 어귀에 잠기고, 달이 못 가운데 비치는데 넋은 외로워 의지할 곳이 없고, 그림자는 홀로 서러워하네. 세월이 덧없이 가고 억울한 심사는 미처 펴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그대를 만나 마음속을 털어놓게 되었소. 아! 항우(項羽)가 산을 뽑는 힘과 세상을 뒤덮을 기개를 가지고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지마는 마침내 오강(鳥江)에서 패하였으며,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의 재주로 한(漢) 나라를 붙들려는 충성을 품고 기산(祁山)에 다섯 번을 나가 싸우고 다섯 번을 돌아왔으나 보람이 없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한 일이라 사람이 어찌 하리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아! 저 아득한 하늘이여!” 하고는 슬피 노래부르며 눈물 흘려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부릅뜨고 신 공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시루는 이미 깨어졌고,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며, 성패는 운수가 있고, 시비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다시 무슨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오늘밤에 여러분이 더 찾아올 것같소. 마침 방외인이 찾아와서 근처에 있으니 윗자리에 맞이하여 우리들의 즐거움을 보이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미처 앉기도 전에 거마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사면에서 구름처럼 모여든다. 혹은 깃발을 휘날리고 창검이 삼엄하며 혹은 부인(符印)을 차고 초라한 의관들이 벽제(辟除)하면서 길을 인도하여 문득 대하(臺下)에 이르러 백면서생(白面書生)과 홍안무부(紅顔武夫)들이 머뭇거리며 겸손하게 읍하고 자리에 오르내리는데 갑자기 많은 배들이 모여들어 강길에 노젓는 소리가 요란하고 바람을 실은 배들이 천리를 잇대어 마침내 노주(蘆洲)에 닻줄을 매었다. 대장군이 누른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내려오니, 여러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나 맞이한다. 장군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니 곧 오른쪽이다. 왼쪽 자리의 첫째는 고 첨지(高僉知) 경명(敬命) 이다. 다음은 최 병사(崔兵使), 그 다음은 김 원주(金原州), 다음은 임 남원(任南原), 다음은 송 동래(宋東萊), 다음은 김 회양(金淮陽), 다음은 김 종사(金從事), 다음은 김 창의(金倡義), 다음은 조 제독(趙提督)이었다. 오른쪽 자리의 다음은 황 병사요, 다음은 이 병사, 다음은 김 진주(金晉州), 다음은 유수사(劉水使), 다음은 신판윤(申判尹), 다음은 이 수사, 다음은 이첨사(李僉使), 다음은 정 만호(鄭萬戶)였다. 남쪽줄 자리에는 심 감사(沈監司)ㆍ정 동지(鄭同知)ㆍ신 병사(申兵使)ㆍ윤 판사(尹判事)ㆍ박 교리(朴校理)ㆍ이 좌랑(李佐郞)ㆍ고 임피(高臨陂)ㆍ고 정자(高正字)이고, 아랫자리는 승장(僧將)이었다. 김 종사(金從事)가 여러 좌우들에게 말하기를, “속세의 선비가 여기에 있으니 맞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첨지가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파담자도 말석을 차지하였다. 자리가 이미 정해지니 금소반에 아름다운 떡이 좌우에 가지런히 놓이고, 관현악의 비장한 가락이 뒤섞여 어울린다. 풍악이 끝나기도 전에 장군이 정 만호를 불러, “네가 소와 말을 잡아놓고 탁주를 강물에 흘려 부하들에게 마시게 하여 군사와 함께 즐기고 풍악을 즐기게 하라.” 하고, 이에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니 그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여러 귀신들이 좋아라고 날뛰며 고함을 지르고 기세를 부렸다. 첫째 자리의 고 첨지가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의 즐거움은 즐겁기는 즐겁소. 귀한 손님이 자리에 있고, 이렇게 성대한 잔치가 다시 있기 어려우니 어찌 여러 군사를 물리치고 각각 그 뜻을 이야기하게 하지 않겠소.” 하자, 장군이 곧 징을 치게 하여 지휘하니, 삼성(參星)은 아직 기울지 않았는데 옥토끼가 하늘에 뜨니 모든 동물은 소리를 거두고, 나무 그림자는 서로 얽혀 비친다. 호위병으로 하여금 연잎 금잔에 술을 붓게 하니, 두서너 순배에 취기가 살가죽에 떠올라서 화기가 무르익는다. 왼쪽에서는 붓을 들어 시를 읊고, 오른쪽에서는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부르니 불평의 노래가 아래로부터 올라온다. 고 정자가 나아가 말하기를, “어버이의 슬하를 떠나지 않고 진중에 외람되어 모셔 매양 맛있는 음식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던 차에 전세가 불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었소. 비영(丕寧)의 종이 한 팔이 잘렸으나 구제하기 어려웠으며, 변호(卞壺)의 아내가 아비와 아들을 곡한 것이 무엇이 부끄러우리오. 해골이 서로 버티고 혼백이 함께 노니오.” 하고, 이에 읊기를,
지하에도 삼강이 중하고 / 地下三綱重
인간 사에는 만사가 헛되구나 / 人間萬事虛
항상 아버님의 뒤를 따르거니 / 尙堪隨杖屨
행색이 어떠한가 묻노라 / 行色問何如
하였다. 고 임피가 또한 나아가 말하기를, “군영의 고아로서 세상에 다시 없는 지극한 슬픔을 안고, 호부(虎父)에 견자(犬子)가 될까 두려워, 새매의 날개에 종달새가 찢길 것도 잊어버리고, 피눈물 흘리며 창을 베개 하고,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갚기 어려워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 무리가 싸락눈처럼 모여들어 관흥(關興)장포(張苞)의 승전을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릴 만하였는데, 결국 고기를 굶주린 범의 아가리에 던져준 결과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소원을 풀지 못하게 되었소.” 하고, 이에 읊기를,
비바람 해마다 지나가니 / 風雨年年過
모래밭에 묻힌 뼈에도 이끼가 끼었네 / 沙場骨亦苔
평생에 원수를 갚으려던 뜻은 / 平生報仇志
조금도 삭아지지 않았노라 / 一寸未成灰
하였다. 이 좌랑(李佐郞)이 또한 나아가, “부형(父兄)의 하던 일을 이어받아 입으로 성현의 남기신 글을 외웠지마는 경륜의 재주가 부족하여 조정에서 일하기 어려웠으며, 전쟁하는 용기 또한 용렬해서 왜적의 포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장의 편지를 아내에게 부쳤으니 장부로서 가소로운 일이며, 두 개의 귤을 형에게 던졌으니 원귀(寃鬼)가 가련하다. 비참한 정상이 어찌 이다지도 극도에 달했는고.” 하고, 이에 읊기를,
몸은 청유막을 돕는데 / 身佐靑油幕
왜놈이 세류영을 엿보았네 / 胡窺細柳營
구름을 탄 용이 홀연히 거꾸러지니 / 雲龍忽顚倒
왜적이 벌써 날뛰는구나 / 豺虎已縱橫
칼은 장홍의 피가 새파랗고 / 劍碧萇弘血
꽃은 두견새 울음소리에 붉도다 / 花紅杜宇聲
백골을 거두어줄 사람 없는데 / 無人收白骨
방초는 온 들에 푸르도다 / 芳草遍郊生
하였다. 박 교리가 또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나이 겨우 열 여덟에 이름이 전국에 으뜸가고, 금마옥당(金馬玉堂)을 단번에 뛰어올랐으며, 어로(御爐)의 푸른 연기 속에 하루에 임금을 세 번 알현했으니, 은총이 이미 넘쳐 재앙이 또 닥쳐왔네. 뉘 알리오. 대궐의 뜰에서 하직을 올리자마자 문득 왜적의 소굴에서 참몰당할 줄을. 말을 달리는 재주는 썩은 선비에게 본래 해당되지 않지만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어찌 의지하랴. 고향은 아득하고 나의 몰골은 처량하기만 하구나.” 하면서 읊기를,
희고 고운 얼굴은 사람들 가운데 적은데 / 白面人中少
붉은 연꽃은 막사 안에 피었구나 / 紅蓮幕裏開
명성이 비록 자자하였으나 / 聲華雖籍甚
천명은 이미 쇠하였도다 / 天命已衰哉
갈길이 머니 이 넋을 어디에 의탁하리오 / 路遠魂何托
세월이 오래 되니 뼈도 또한 부서지누나 / 年深骨亦摧
달은 대궐문에 밝으니 / 月明靑鎖闥
밤마다 내 넋은 홀로 돌아가노라 / 夜夜獨歸來
하였다. 윤 판사가 또 나아가서, “양반집 자손이요 대부의 신하로서 때가 맞지 않아 운명이 다하고 하늘이 순탄하지 않아 일이 잘못되니, 많은 선비 중에서 혼자 뽑힌 몸이 마침내 난리통에 쓰러졌소. 집에 계신 부모님은 늙고 쇠한데 소식이 끊겼으며, 호교(湖橋)에 산은 높고 물은 아득하여 길조차 먼데, 밝은 달을 따라 집에 돌아가고, 슬픈 바람에 부쳐 나무에 외치노라.” 하면서 읊기를,
젊은 시절 활쏘기는 익히지 않았으니 / 桑弧少不習
늘그막에 말도 타기 어렵도다 / 陣馬老難騎
남은 운명 어찌하여 이다지도 기구한가 / 殘命何多舛
뜬 이름은 일찍부터 속임을 입었다오 / 浮名早被欺
구름을 바라보는 그쪽에는 하늘이 아득하고 / 天昏望雲處
해가 저무니 부모가 문을 기대고 자식 기다릴 때로세 / 日暮倚閭時
쓸쓸하다 외로운 넋이 남아 있으니 / 寂寞孤魂在
빈 산에는 소쩍새가 슬피 우네 / 空山哭子規
하였다. 신 병사가 또한 나아가 말하기를,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병서를 대략 익힌 탓으로 벼슬을 건너뛰어 병조에 적을 두고 북문을 맡았더니, 시운이 막히어 임금의 파천을 슬퍼하게 되었소. 군사를 거느리고 저 철령(鐵嶺)을 넘어 원수(元帥)를 만나 임진(臨津)에 진을 쳤소. 나라의 치욕을 씻고, 아울러 형의 원수를 갚고자 군사를 재촉하여 물을 건넜으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는 격이라. 군사와 말이 모두 희생되었으니 비록 후회한들 이제 무엇하리오.”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넋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네. 바람은 소소히 언덕에 불고, 음산한 구름은 하늘을 덮어 날은 차갑네. 누군들 형제가 없으리오마는 어찌 우리 집안에만 이다지도 가혹한고. 물고기 배에 나의 뼈를 묻게 되었으니 해가 갈수록 잊혀지지 않네.” 하였다. 정 동지가 또 나아가서, “일찍 시서(詩書)를 익히고 병법은 배우지 못하였네.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오래 벼슬에 매여 있다가 전쟁에서 손님접대하는 구실을 맡았고 높은 벼슬에 올랐소. 복이 과하면 재앙이 생기니, 은혜는 깊고 죽음은 가벼워라. 넋은 전장터에 떨어지고, 뼈는 모래밭에서 썩으니, 언제나 슬픔을 품고 있는데 세월은 덧없이 빠르기만 하오.” 하고는 읊기를,
사나운 왜적과 부딪쳐 성호를 박차니 / 驕鋒一犯蹴城濠
오작교 언저리에 살기가 드높다 / 鳥鵲橋邊殺氣高
서생이 싸움에 나갈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 早識書生事征戌
말을 달리고 활과 칼을 익혀볼 것을 / 且將馳馬慣弓刀
하였다. 심 감사가 또 나아가, “적의 포위 속에서 어명을 받고, 나라가 절단난 나머지에 임소로 오니,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어 서울을 바라보며 속을 썩히고, 병력은 모자라 기내에서 군사를 모아들이니, 옷의 띠를 풀 겨를도 없이 오직 나라에 은혜를 갚는데 에만 충실하였소. 삭녕(朔寧)에서 군사를 잃은 것은 그 실패의 원인이 비록 지략이 없는 탓이었다고 하지만 종로 네거리에서의 효수는 다행히 가져갈 아들이 있었으니, 팔자대로 죽었는데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하리오.” 하며, 읊기를,
푸른 산 깊은 곳에 관청문은 닫혔는데 / 碧山深處掩官扉
척후마는 밤중에 나가 돌아오지 않네 / 候馬中宵去不歸
넋은 창칼에 흩어지니 아관 진형도 다 흩어지고 / 魂散劍鋒鵝鸛盡
적막한 새벽 하늘에 지는 달빛만 비치도다 / 曉天寥落月斜輝
하였다. 정 만호가 이에 큰 칼을 들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돛을 내리는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나라의 위급함을 염려하며, 고을에 사내다운 사내 없음을 나무랐네. 살아서는 장군과 함께 일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장군과 처소를 같이하니, 하늘을 우러러 무엇이 부끄러우며, 땅을 굽어 무안할 것이 무엇이랴.” 하였다. 그 지기(志氣)가 활달하고 격조가 비장한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돛대는 높아 백 자나 되고, 큰 돛은 구름같구나 / 檣高百尺兮大帆如雲
푸른 바다 넓고 넓은데 물결은 잔잔하기도 하다 / 碧海茫茫兮波不生紋
왼쪽은 부산이요, 오른쪽은 대마도라 / 左釜山兮右馬島
취한 눈을 부릅뜨니 기운이 훈훈하네 / 瞋醉眼兮微醺醺
몸이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니 / 身先死兮志未遂
장한 기운 내뿜어 구름 끝을 범하네 / 噓壯氣兮干雲端
대장부가 구질구질해서 되겠는가 / 大丈夫不可瑣瑣兮
한 알의 탄알을 슬퍼해서 무엇하리 / 何用悲乎一彈丸兮
하였다. 이 첨사가 또한 나아가서, “비록 백 사람의 으뜸은 못 되지마는 한낱 외로운 충성을 자처하오. 소륵(疏勒)에서 성를 지킬 적에 경공(耿恭)을 도위(都尉)로써, 적벽(赤壁)에서 배를 불사를 적에 정보(程普)를 우독(右督)으로써 면려하였는데, 창같은 자줏빛 수염이 오래 강 모퉁이에 머물러 있고, 수풀같이 늘어선 배들이 모두 손 아래 달려있었소. 대마도를 깎아서 바다를 메워버리렸더니, 어찌 붕새의 날개가 꺾일 것을 생각하였으리오. 넋은 날아가고, 용기는 다하니 원한이 푸른 바다에 막혔도다.” 하고, 이에 읊기를,
큰 바다는 저렇게 깊은데 / 大海深如許
외로운 몸은 원한이 가득하도다 / 孤身怨有餘
장한 뜻은 아직 펴지도 못하였는데 / 壯心售未了
거센 물결은 허공에 부딪쳐 푸르도다 / 鯨浪碧磨虛
하였다. 이 수사가 이에 일어나 청하기를,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다가 죽었으면 그만이지 이미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말해 무엇하리오. 청컨대, 여러 대인을 위하여 농이나 하나 하겠소.” 하며, 긴 허리를 굽히고 늙은 주먹에 침을 뱉아 노를 저으며 즐기는 시늉을 하고, 취하여 노래 부르기를, “두병(斗柄 북두칠성의 국자 자루에 해당하는 세 별)은 길게 기울고, 밀물은 오르려 하고. 뱃사공들아! 배를 띄워 가잤구나. 왕사(王事)를 튼튼히 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지엄하니, 부상(扶桑)이 지척이라 또 긴 돛이 걸렸구나.” 하였다. 신 판윤이 또 나아가서, “미천한 나의 회포는 이미 대강 말하였소.” 하고, 읊기를,
국내에서 명성도 일찍 났는데 / 國中名譽早
죽은 뒤에는 시비도 많도다 / 身後是非多
한 번 패하고 본진으로 돌아와서 / 一敗還關後
처량하게 큰 칼 어루만지며 노래부르네 / 悽然撫劍歌
하였다. 유 수사가 또한 나아가서, “영웅은 죽음을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오. 좋은 장수는 빠른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신령스러운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오. 생각건대, 그날 어떤 사람이 늙은 나더러 겁이 많다고 꾸짖고 양처럼 구박하며, 이제 윗도리를 벗고 범을 잡으라 하니, 나라의 은혜를 받은 것이 두세 번이라 죽어 마땅하지만, 싸우다가 죽은 자가 천백을 헤아리니 그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리오. 활이 꺾이자 주먹을 휘두르고, 칼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 해골은 황량한 들판에 드러나고 슬픔을 큰 강물에 쏟는구려.” 하고 읊기를,
배수에 꽉 찬 군사 늙은 이리를 치는데 / 背水嬴兵搏老狼
한 사람 방책 없어 만 사람이 죽었네 / 一人無策萬人亡
산하의 잔풀이 해마다 푸르르니 / 山河細草年年緣
지나는 길손이 싸움터를 가리키네 / 惟有行人指戰場
하였다. 김 진주가 또한 나아가서, “다행히 하늘에 빛나는 신령의 도움으로 성을 보전한 공적이 조금 있었던 바 포상의 영광이 분에 넘쳐 감격하여 몸을 바쳤소. 강성한 오랑캐 군사가 잠깐 우이(盱眙)에서 꺾이더니, 자기(子琦)의 군세(軍勢)가 수양(睢陽)에 다시 모이자, 그물로 참새를 잡아먹고 땅을 파서 쥐를 잡아먹다가 계책이 다하여 말을 잡아먹고 뼈를 깎아 불을 때고, 아들을 바꾸어 먹으면서도 양을 끌고 항복할 생각은 없었소. 뜻을 더욱 삼판(三版 세 길 되는 성)에만 쏠렸으나, 몸이 돌연히 한 알의 탄알에 쓰러졌소. 임금의 특별한 은총에 보답하지 못하니, 장한 회포 풀기 어렵구려.” 하며, 노래하기를, “누각 밑 바위는 깎아지른 듯한데, 그 밑에 긴 강 있어 푸른 물결 쓸쓸하도다. 장사가 오래 포위되어 변방의 티끌이 까맣고, 총소리 하늘을 흔들어 대 쪼개는 소리같구나. 은혜는 태산같고 몸은 홍모(鴻毛)같으니, 피는 흘러 갑옷을 물들인다. 땅은 넓고 하늘은 높은데, 미친 바람이때로 일어 노기를 떨치누나.” 하였다. 이 병사가 또한 나아가서, “적군이 운봉(雲峯)을 넘어오니 저 명나라 장수가 혼자서 대방(帶方 남원)을 지키면서 남원을 함락한 왜적이 구례(求禮)로부터 온 것을 운봉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우리 나라 군사를 지휘하니, 여러 군진에서는 그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었소. 나는 나라의 수치라고 민망히 여겨 한 기마로 달려갔으나 관하에는 겨우 30여 명이 있을 뿐이었는데 성 밖 적군의 그 수효가 백만이었소. 아홉 번 공격하여도 떨어뜨리기 힘든 성이 단번에 무너졌으니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니겠소. 의로운 충성을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쌓인 시체들과 함께 썩었소.” 하고, 읊기를,
교룡성(남원산성) 낡았는데 남은 구름 사라지고 / 蛟龍城古殘雲斷
오작교 쓸쓸한 데 지는 해만 차갑구나 / 鳥鵲橋荒落照寒
백골의 떨기 속에 많은 세월 흘렀으니 / 白骨叢中多歲月
장부의 백발이 꿈속에 솟아 관을 찌르네 / 壯夫華髮夢衝冠
하였다. 황 병사가 또한 나아가서, “하찮은 몸이 쓸 데는 없으나 외로운 성을 의지하여 총지휘자가 되었소. 바람은 일만 깃발에 위엄을 날리고, 비는 한쪽 모퉁이에서 화를 빚어, 탄알이 어느새 이마에 맞자 적들은 다투어 성에 기어올랐소.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한 것이지 잘못 싸운 죄가 아니니, 이 일을 난들 어찌하리오. 새끼줄이 끊어지면 자국이 있는 법이니, 누가 나를 허물하겠소. 성을 오르면서 흘린 피를 마시며 싸운 상처를 싸매었소.” 하고, 〈성을 쌓는 노래[築城之歌]〉를 지어 이르기를,
궂은 비 열흘이나 잇달아 내리니 벼이삭에 귀가 돋히고 / 遙雨連旬兮禾頭生耳
우뚝한 옛성은 사뭇 높아 무너졌네 / 古城崔嵬兮崇極而圮
달구질 소리, 에헤야! 성쌓기에 힘쓰자 장사들이여 / 萬杵馮馮兮勖哉與士
적이 올라오면 우리들이 다 죽는다 / 賊若攀登兮吾屬且死
하였다. 김 회양이 또한 나아가서, “오른쪽 자리에 앉은 이는 모두 장사들이니, 시시한 선비가 뒤를 이어볼까요. 회양이 험한 지형으로 본래 3면이 그물같다고 이름이 났는데, 늙은 저는 당황하여 한 명의 병사도 단속하지 못하고, 오직 맡은 땅을 지키고 도망하지 않을 줄만 알고서 책상에 의지하여 스스로 자멸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소. 손에는 인수(印綬)를 쥐고 피는 조복(朝服)을 적셨소.” 하고, 읊기를,
회산은 우뚝하고 / 淮山嵥嵥
회수는 도도한데 / 淮水滔滔
외로운 넋이 머뭇거려 / 孤魂躑躅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네 / 事與心違
먼 옛날 기나긴 밤에 / 萬古長夜
나를 알아줄 사람 누구인고 / 知我者誰
온서가 넋이 있다면 / 溫序有魂
나는 가서 따르리라 / 我往從之
하였다. 조 제독이 또한 나아가서, “내딴에는 식견이 조금은 있다고 여겼는데, 여러 사람들은 나를 광인이요 천치라 비웃었소. 흉칙한 왜적이 우리 나라에 정성드리는 꾀를 알아차리고서 대의를 들어 물리쳐버리라는 소를 올렸소. 순모(郇模)가 광주리를 가진 것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요, 서복(徐福)의 섶을 옮겨 쌓으라는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소. 국경을 침범했는데도 왜 사신의 머리를 자를 것을 결단하지 못하므로, 쟁기를 놓은 것은 오로지 근왕(勤王)을 위한 것이오. 적의 예봉을 꺾고 강한 적병을 무너뜨려, 상당(上堂 청주)의 호통소리가 하늘을 흔들었소. 승세를 타서 싸우다 패하니 금산(錦山) 백성들의 간뇌(肝腦)가 땅을 발랐소. 남아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의로운 죽음을 편안하게 여겼소.” 하고 읊기를,
공자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루라 하였고 / 孔曰成仁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라 하였네 / 孟曰取義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배운 일이 무엇이뇨 / 讀聖賢書 所學何事
바람이 빨라도 풀은 굳세고 / 風疾草勁
임금이 모욕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 / 主辱臣死
운뢰같이 격문을 띄우고 / 傳檄雲雷
하늘과 땅에 굳게 마음을 맹서했지 / 誓心天地
돌아다니면서 3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니 / 歷募三千
용감한 군사였지요 / 赳赳多士
서원(청주)에서 크게 이기고 / 西原大捷
위세가 여러 진영에 떨쳤는데 / 威震列壘
금산에서 적을 업신여겨 / 輕敵錦山
마침내 뜻을 못 이루었소 / 竟致齎志
날이 가고 달이 가는데 / 日居月諸
썩은 뼈무더기 속에서 / 杇骨叢裏
넋은 오히려 창피하오 / 魂尙忸怩
나라의 수치가 되다니 / 爲國之恥
하였다. 김창의(金倡義)가 또한 나아가서, “우연히도 왜적의 침략을 입어 우리의 견고한 성곽이 유린되었으므로, 왜적의 힘을 요량하지 않고 의병을 규합하였소. 초야에 한가로이 살지만 감히 임금이 주여숙(柱厲叔)을 알아보지 못함을 말했겠소. 강도(江都 강화)의 뛰어난 지형은 경선(景仙)이 먼저 점거한 것을 배우게 하였소. 오랫동안 한양에 있는 왜적의 소굴을 엿보면서 비록 소탕하지는 못하였으나, 진산(晉山 진주)성을 가서 지킨 것은 실로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오. 그런데 하늘이 순리를 따르는 자를 돕지 않아 일이 마침내 구제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속절없이 낙락한 회포만 남아서 처량히 우는 귀신을 따르게 되었소.” 하고, 읊기를,
저녁 까마귀 울며 흩어지고 달은 성에 뜨는데 / 昏鴉啼散月臨城
누각 허물어진 터에는 해묵은 풀만 펀펀하도다 / 樓觀荒墟宿草平
오직 대수풀 있어 꺾어도 다하지 않고 / 唯有竹林摧不盡
해마다 비바람에 죽순이 가지런히 돋아나네 / 每年風雨笋齊生
하였다. 김 종사가 또한 나아가서, “문장은 천하의 명성을 차지하고, 힘은 6균(鈞)의 활을 당겼소. 호방한 한 평생이 작은 예절에는 구애되지 않았소. 용만(龍灣)에서 범한 일은 실로 국법에 저촉되는 일이라 옥에 갇힌 죄수가 앉아서 기이한 계책을 감추고 있다가, 삼가 석방의 은명을 받고서 국난에 나가기를 꺼리지 않았소. 날뛰는 추한 무리 왜적을 흘겨보며 섬멸하기를 굳게 기약하였으나, 도원수의 패배를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마찬가지요.” 하고, 읊기를,
탄금대 아득하고 얕은 여울이 조잘거리니 / 彈琴臺逈淺灘鳴
외로운 신하를 위해 불평을 울리누나 / 時爲孤臣作不平
생각하니 개부막(장군의 막사)에 잘못 편입되어 / 憶得誤編開府幕
몇 번이나 좌거의 병법을 헛되이 말했는고 / 幾回虛說左車兵
시냇가에 뼈는 썩었으나 붉은 마음은 살아 있고 / 溪邊骨杇丹心在
지하의 넋은 외로울 망정 햇빛은 밝도다 / 地下魂單白日明
감옥에서 거울 보고 울던 몸이 무엇하리오 / 肯向圜扉頻泣鏡
모래밭에 뼈를 드러낸 것도 또한 임금의 은혜라오 / 沙場暴露亦恩榮
하였다. 송 동래가 또한 나아가서, “몸이 해진(海鎭)에 매여 있고 경계는 잠잠하여 봉화가 쉬고 있는데, 변란은 태평한 후에 일어나 사람들은 창졸간에 당황하니, 그 누구와 함께 지키리요. 연수(連帥)는 이미 도망하고 날더러는, ‘어디를 가느냐? 성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소. 태산과 새알의 형세이니 패전할 것은 뻔한 일이나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자의 은은 가볍다는 글을 써서 집에 부쳤지요. 저 오랑캐를 꾸짖는 데는 어찌 안고경(顔杲卿)의 말이 모자라리오만 무지한 섬 오랑캐도 왕촉(王蠋)의 무덤을 봉할 줄 알았소. 나라에 충성하고자 할진대 어찌 제 몸을 아끼겠소.” 하고, 읊기를,
지방을 지키면서 동쪽 오랑캐의 침입을 막지 못했고 / 分符猶未絶東漁
신하가 임지에 죽었어도 죄만 남았소 / 臣死封疆罪有餘
신세는 이미 삼척검에 맡기고 / 身世己憑三尺劍
부모님께 다만 두어 줄의 글월을 부쳤소 / 庭闈只寄數行書
유유한 세월에 황운은 늙었고 / 悠悠歲月黃雲老
쓸쓸히 가슴속에 한 바다가 되었네 / 落落襟期碧海虛
천리에 외로운 넋이 돌아오지 못하여 / 千里孤魂歸不得
비바람 치는 옛 성에 홀로 머뭇거리노라 / 古城風雨獨躊躇
하였다. 임 남원이 또한 나아가서, “위태로운 시국을 당하여 외람되이 발탁을 입었는데, 임지인 남원의 지형은 실로 우리 나라의 요충이오. 명 나라 군사와 함께 힘을 다히니,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에 비겼었소. 적이 쳐들어와서 높은 사닥다리는 어지러이 춤추고, 달무리는 점점 짙어지니, 군사는 외롭고 세력은 약함을 탄식하고, 원군이 끊어져서 북소리가 가라앉음을 슬퍼하였소. 맡은 지역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칼날을 밟게 되었으니, 땅을 지키는 신하로서 죽어 마땅한 일이어니와 양원(楊元)이 힘껏 싸웠으나 그 머리를 보전하기 어려웠으니 국법에는 유감이 있소.” 하고 읊기를,
비휴같은 1대가 천관에서 내려와 / 豼貅一隊下天關
용성(남원의 옛 이름)을 가로막으니 그 의기가 한가하도다 / 橫截龍城意氣閑
맹렬한 형세로 곧장 비장을 찌르고 가니 / 猛勢直衝飛將去
외로운 신하는 한 조각 넋만이 돌아왔네 / 孤臣只有片魂還
하였다. 김 원주가 또한 나아가서, “백리밖에 되지 않은 피폐한 고을로써 수만의 강적을 당하니 이미 임기응변으로 변을 제압할 재주도 없고, 또 차마 재나 닦고 경문이나 외고 있을 수도 없어 물러나 치악산(雉岳山)을 확보하고 오히려 어리진을 펴고 있었소. 산이 험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토담 무너지듯 하여 쉽게 패하고 말았으니, 외로운 성이 어육이 되고, 온 집안이 모두 칼과 창에 넘어졌소. 나는 은혜를 입었으니 만번 죽어도 달게 여기지마는 처자는 왜 한꺼번에 죽어야 하오.” 하면서 읊기를,
치악산 높은 삼리성에 / 雉岳山高百里城
늙은 몸이 붉은 인끈을 차고 남은 군사를 보전하렸더니 / 白頭朱綬保殘兵
무고하게도 무단히 요사한 창끝의 피로 화하고 / 無端一化妖鋒血
쓸쓸한 시냇물만이 밤낮으로 울고 있네 / 惟有寒溪日夜鳴
하였다. 최 병사가 또한 나아가서, “몸은 안영(晏嬰)처럼 칠척이 되지 못하나, 마음은 적선(謫仙)의 만부(萬夫)보다 웅장하였소. 도적을 토벌하려고 떨치고 일어나 호남ㆍ영남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더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소. 그래서 변방의 요새를 지키라는 글월을 받고, 성벽을 지키며 적개심을 가지니 마치 버마재비의 팔로 수레를 항거하는 격이었소. 성은 섬 오랑캐에 무너지고 몸은 높은 다락에서 떨어졌소.” 하고, 부(賦)를 지었는데, “섬오랑캐 미친 듯이 날뛰어 함부로 우리 강토를 침범했네. 북소리 떨치니 무안(武安)의 기왓장이요, 피흘려 내려가 준의(俊儀)의 도랑이로다. 백기(白起)가 언(鄢)과 영(郢)을 10일에 함락시키듯, 우리의 서울을 당 명황(唐明皇)이 파촉(巴蜀)으로 파천하듯이 우리 임금이 파천하시니, 구묘(九廟)는 먼지 속에 들어 혈식(血食)을 못하고 만백성은 울부짖으며 어육이 되었네. 한낱 신하로서 딴 마음 없이 대의를 믿고 나갔도다. 삼척검(三尺劍)을 들고 일어나니 선비는 다투어 격서 받고 나가네. 군사의 위세는 천지를 흔들고, 씩씩한 기운은 북두를 찌른다. 자니(紫泥) 찍은 조서가 내려 부절을 나에게 쪼개어 주시므로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팔을 걷고 추악한 무리 왜적을 쓸어버리기를 기약했노라. 진양(晉陽 진주)의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는데 적이 쳐들어온다고 차마 버리고 가리. 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같은 처지에는 형이라 부르고, 사졸을 어루만져 부스럼도 빨았지요. 적은 강한데 우리 힘이 외로움을 슬퍼했고, 뜻은 크나 재주 없음을 탄식했네. 하늘이 도와주지 않음을 어찌하랴. 우리 훌륭한 인물이 쓰러지니 사기는 떨어졌네.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헛되이 손가락 잘라 옷자락에 혈서 썼네. 다락은 높아 백 척인데, 넋은 외로워 갈 곳이 없네. 봄바람은 불어 풀은 푸르고, 가을달은 밝아 하늘은 훤하구나. 원한은 해가 가도 사라지지 않고, 아롱진 무지개 되어 길이 기운 뿜네.” 하였다. 고 첨지가 또한 나아가서, “차라리 죽고 말지 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없었소. 공을 도모한 낭심(狼瞫)은 이미 쫓겨났지만 격문을 띄워 문산(文山)의 의를 부르짖었소. 현륙음주(顯戮陰誅)의 글귀는 황소(黃巢)를 울리지는 못했으나 닭 울음소리를 듣는다거나 노를 두드린다는 말들은 모두가 충성심을 내보냈지요. 군사를 개와 양과 같은 적들의 소굴로 몰아넣어 한번 가고 돌아오지 못한 것이 슬펐지만 삶을 버리고 의(義)를 택한 것은 비록 백 번을 죽은들 무엇을 후회하리오. 하물며 두 아들이 있어 충효를 둘 다 저버리지 않았소.” 하고, 한편의 율시를 읊기를,
태평 성대라 난리를 잊어버리고 / 聖代忘金革
변방의 신하는 옥문을 닫았구려 / 邊臣閉玉門
별자리는 바로 북신을 옹위하고 있는데 / 星躔端北控
고래 수염은 놀랍게도 동쪽으로 치닫누나 / 鯨鬣駭東奔
여러 고을에는 왜적의 티끌이 자욱하고 / 列郡腥塵漲
높은 하늘은 혈우로 어둑하도다 / 長空血雨昏
이릉은 백기의 불이 일어나고 / 夷陵白起火
촉도에는 천자의 깃발이 펄럭이도다 / 蜀棧翠華飜
세 조정을 내리 섬긴 흰머리 늙은이가 / 皓首三朝老
한 치의 단심은 아직도 남았어라 / 丹衷一寸存
격문을 전하니 해와 달이 밝아지고 / 檄傳明日月
맹세를 정하니 천지를 흔들도다 / 盟定動乾坤
바람에 끌려 깃발은 멀리 나부끼고 / 風掣旌旗逈
하늘은 맑은데 북나팔 소리 요란하구나 / 天晴鼓角喧
꾀가 없으니 경솔히 적을 범했고 / 無謀輕犯敵
칼을 지녔으니 은혜 갚음이 중하도다 / 有劍重酬恩
쓸쓸하도다 천년의 원한이여 / 寂寞千年怨
처량하도다 두 아들의 넋이여 / 凄凉二子魂
옛 싸움터에 봄이 지나니 / 古場春盡後
이끼가 푸르러 자국이 절로 생겼네 / 苔碧自生痕
하였다. 장군이 이에 정색하며 눈쌀을 찌푸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 하늘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대들의 말을 다 들었으니 나의 슬픈 회포도 좀 말하리라. 태평 시대에 낳고 자라서 조그만 공로도 못 나타냈는데, 죽부(竹符)를 풀고 장수에 임명되니, 너무도 임금의 알아주심을 받게 되었소. 오랑캐가 바다를 건너오게 되자 스스로 한번 죽음을 각오하고 수군을 모아 왜적을 가로막아 뱃길을 안전하게 하여 놓았소. 적의 배 3백여 척을 불사르니 그 세력은 당할 자 없었고, 한산도(閑山島)를 지키는 5ㆍ6년 동안에는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소. 그런데 갑자기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었으니 산을 만들다가 중단해 버린 격이 되고 말았소. 남은 병력과 두어 척의 배를 패전한 뒤에 다시 받아 가지고, 노를 잇고 돛을 내려 급한 여울 위에서 일곱 번을 이겼소. 도망하는 적을 예교(曳橋)에서 막다가 장성(將星)이 노량(露梁)에서 떨어졌지요. 북을 올리고 깃발을 흔들라는 명령을 아들에게 분부하니,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한다’의 구절은 어룡(魚龍)을 감동시켰소.” 하고는, 읊기를,
1만 배 서성대는 속에 한 곳은 편안한데 / 萬舳迷津一枕安
6년 동안의 큰 난리는 파란이 치솟았네 / 六年桑海動波瀾
먹구름 감도는 대마도는 탄알만한데 / 雲暗馬島彈丸小
된서리 내린 원문에는 칼빛이 차갑도다 / 霜肅轅門尺劍寒
산하를 두고 맹세하여 마음은 이미 굳었지만 / 誓指山河心已許
천지같은 은혜라 갚기도 어렵구나 / 恩同天地報還難
군사는 싸움을 끝맺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 出師未捷身先死
영웅들의 눈물이 응당 마르지 않으리 / 留與英雄淚不乾
하였다. 읊고 나자, 한 승장(僧將)이 엎드려 나아가서, “나는 본래 승려 출신이지마는 다행히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성품을 타고났으므로, 중의 옷을 벗고 갑옷으로 갈아입고, 육계(六戒)를 싹 잊어버리고 법고(法鼓)를 들고 나와 전고(戰鼓)로 삼마 제갈량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은 것을 본받기로 하고, 흉악한 적과 여기저기서 싸워 도적의 소굴에 깊숙이 들어갔지요. 마침내 죽음의 영광을 얻게 되어 다행히 중들은 임금도 없다는 꾸지람을 면하게 되었소.” 하고 읊기를,
쓸쓸히 외로운 넋 가고 오지 않는데 / 孑孑孤魂去不來
첩첩한 푸른 산은 높다랗게 솟았네 / 亂山靑走鬱崔嵬
인간들아 윤회설을 말하지 마소 / 人間莫道輪回說
저승에 마냥 갇혀 원한을 못 풀었네 / 一鎖泉臺怨未開
하였다. 장군이 칭찬하면서, “이 중이야말로 우리들을 격려할 수 있다.” 하고, 파담자에게 이어 화답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파담자는 즉석에서 붓을 휘둘러 쓰기를,
이 밤이 어떤 밤이오 세월은 가는데 / 今夕何夕歲云徂
옛 누대의 하얀 달이 무성한 벌판에 댔구나 / 古臺霜月連平蕪
충성으로 국가에 보답한 대장군이 / 精忠報國大將軍
이 밤에 손님들을 누대의 한 모퉁이에 모았네 / 夜會賓客臺之隅
의기는 하늘을 찌르고 창검은 차가운데 / 義氣撑空劍戟寒
원문의 이 즐거움은 인간에 없으리로다 / 轅門此樂人間無
일휴당(최경회의 호)은 마음이 좋은 남자에다 / 日休堂中好男子
제봉(고경명의 호)의 가슴속은 얼음이 옥호에 비치네 / 霽峯襟期氷暎壺
간성 치악의 늙은 태수요 / 干城雉岳老太守
대방의 임 군(임현)은 큰 꾀를 품었도다 / 帶方任君懷壯圖
동래의 송백은 나중에 시드는 바탕이요 / 東萊松柏後凋姿
종사(從事)들도 웅장하고 기이하여 용봉의 새끼로다 / 從事雄奇龍鳳雛
당당한 대의를 누가 먼저 외쳤느냐 / 堂堂大義孰先倡
이름이 호남의 으뜸이라 성가가 특별하구나 / 名冠湖南聲價殊
제독관은 본디 강개한 사람이라 일컬었고 / 提督元稱慷慨人
회양은 본래 한 서생일세 / 淮陽自是書生迂
3대가 장수된 이씨의 아들에다 / 三世登壇李氏子
다시 황공같은 참다운 장부가 있도다 / 復有黃公眞丈夫
김후의 끓는 피 나라 지킨 몸이요 / 金侯血渾保障身
유 장군은 나라 걱정으로 턱수염이 희었네 / 劉帥霜驚憂國鬚
사공의 은총은 천지를 적시고 / 司空恩寵涵天地
수사의 위명은 축로를 뒤흔들었네 / 水伯威名動舳艫
영웅을 말하면 누가 이 첨사 같을꼬 / 英雄誰似李僉使
만호의 담력은 비상히 크도다 / 萬戶膽力非常麤
용모가 단중한 심 방백이요 / 容儀端重沈方伯
기상이 훤칠한 정 중추네 / 氣岸軒昻鄭中樞
남문의 쇄약은 소원수에 / 南門鎖鑰小元帥
판사의 풍류는 군자 선비라 / 判事風流君子儒
선적은 일찍이 옥서에 이름 끼었고 / 仙籍曾編玉署名
성관은 일찍 금화(궁중의 판서)의 정책을 도왔도다 / 星官夙佐金華謨
고씨 집안의 두 구슬은 난새와 짝지어 날고 / 高家雙璧伴鸞翔
범궁의 영규 스님은 학의 울음을 남겼네 / 梵宮靈師餘鶴廖
천년에 이런 모임 다시 있기 어려우니 / 千年此會知難再
만고에 꽃다운 이름 외롭지 않네 / 萬古芳名自不孤
파담자에게 어찌 다행하지 않으리 / 坡潭之子何幸耳
금항아리의 푸른 술로 함께 즐겼네 / 綠酒金樽同一娛
붓을 들고 읊조리며 이 성대한 일을 기록하니 / 把筆吟哦記盛事
시가 이뤄지자 밝은 구슬 종이에 가득하도다 / 詩成滿紙揮明珠
하였다. 써서 올리니 좌우가 무릎을 치고 탄식하기를, “문장이 맑고 굳세며 의기가 격동하고 처절하니, 그대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노라. 부(賦)를 지어 비록 적을 물리친다지만 시를 읊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 그대의 재주로써 무예를 아울러 익혀 활을 잡고 말을 달리면 못할 것이 무었이랴. 문장은 나라를 빛내고, 무예는 외적의 수모를 막을 것이오. 우리들은 할 수 없지만 그대는 힘쓰라.” 하였다. 파담자가 일어나 감사하기를,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하직하고 내려가니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元均)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죽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베개를 어루만지면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역력히 기억이 난다. 그 벼슬로 그 성명을 상고해 보니, 장군은 곧 이순신(李舜臣)이었다. 고 첨지는 경명(敬命)이요, 최 병사는 경회(慶會), 김 원주는 제갑(悌甲), 임 남원은 현(鉉)), 송 동래는 상현(象賢), 김 종사는 여물(汝岉), 김 창의는 천일(千鎰), 조 제독은 헌(憲), 김 회양은 연광(鍊光), 황 병사는 진(進), 이 병사는 복남(福南), 김 진주는 시민(時敏), 유(劉) 수사는 극량(克良), 신 판윤은 입(砬), 이 수사는 억기(億祺), 이 첨사는 영남(英男), 정(鄭) 만호는 운(運), 심 감사는 대(垈), 정(鄭) 동지는 기원(期遠), 신 병사는 할(硈), 윤 판사는 섬(暹), 박 교리는 지(篪), 이 좌랑은 경류(慶流), 고 임피는 종후(從厚), 고정자는 인후(因厚), 승장은 영규(靈圭)이다. 파담자는 뜻이 있는 자라 어떤 사람이 나라 일에 죽었다면 일찍이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은 그 의(義)를 사모하고, 혹은 그 절개를 기리며, 혹은 그 사적을 탄식하고, 혹은 그 목숨을 애도하였다. 꿈속에서 만난 이가 모두 내가 평소에 우러러보고 공경하던 분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었으므로 이런 꿈을 꾼 것이리라. 이에 제문을 지어 변변치 않은 제물을 마련해 가지고 화악(華岳) 위에 올라 남쪽 구름을 바라보며 곡하고, 서해를 굽어보며 그들의 넋을 불러 제사하였다. 그 사연을 다음과 같이 쓰노라.
파담자는 수양산(首陽山)의 고비나물을 캐고 응벽지(凝碧池)의 물로 잔을 올려 감히 27분의 영전에 아뢰오니, 영령들은 아실런지요. 나는 본래 서생으로서 반평생을 문닫고 역사를 읽으며 옛 사람을 사모하여 그 정충(精忠) 고절(苦節)에 대하여는 책을 덮고 탄식합니다. 만고와 우주를 더듬어보아도 겨우 한두 남아를 발견할 뿐이니, 저 성대한 중국으로서도 이같이 적거늘 우리 삼한으로 말하면, 비록 예의의 나라라 일컬으나 옛날의 동이(東夷)인데 위기에 임하여 오랑캐를 물리친 훌륭한 선비가 27분이나 됩니다. 아! 거룩한 임금이 왕위를 이어 장구한 터전을 만들었고, 2백 년 동안 백성을 기르고 교화시켜 이처럼 많은 선비를 냈던 것입니다. 수군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碧波津)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고 제봉[高霽]은 문장이라 일컫기에는 부족하지마는 강개하여 군사를 일으켜 있는 힘을 다하여 나라의 위기를 건졌습니다. 몸을 적의 소굴에 맡겨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여 확고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의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최 병사는 사람됨이 활발하고 매인 데가 없으며, 처음에 모집한 의병은 범이 아니면 바로 곰이라, 서관(西關)에 보낸 편지로 좋은 벼슬에 올랐더니 마침내 진양(晉陽)에서 전패하여 장한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치악산성(雉岳山城)은 높고 험준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그윽하고 깊숙하므로 김 사군(使君)이 지형을 살펴보고 이 험하고 가파른 곳을 차지하였는데, 왜적이 한번 침범하자 형세는 외롭고 군사는 피로하여 온 집안이 칼날 아래 쓰러지니 비린내 나는 피가 낭자하였습니다. 남원은 곧 호남의 관문인데 임 공이 지켜 웅대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양원(楊元)의 2천여 기가 군대의 위세를 크게 빛냈으나, 미친 왜적이 너무도 창궐하여 힘을 모아 독을 퍼뜨리면서, 새같이 소리개같이 날뛰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는 소수의 응원도 끊어졌으니 공인들 혼자서 이를 어찌하리오. 삼리성(三里城)이 하루아침에 상처 투성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래(東萊) 송 선비는 속세를 벗어난 듯 멀쑥하고 시원스러운 풍채로 강해(江海)의 일휘((一麾)에 변란이 불의에 돌발했으므로 그 형세가 한 오라기의 실로 1,000균(鈞)의 무게를 끄는 형세였습니다. 철문을 굳게 잠그고 신명에게 맹세하고 죽음에 임하여 16 글자를 남겨, 보는 이는 목메어 흐느끼니, 슬프도다, 그 장함이여! 김 종사는 장원 급제하였고 힘은 40근짜리 철퇴를 잡아 흔듭니다. 활달했던 그 평생은 자신의 견줌이 너무 과했으나 잡혀 죄에 묶인 것은 자기 죄가 아니니 칼에 그 턱을 기댔던 것입니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천승(千乘 도순변사 신립을 가리킴)의 막료가 되었으나 시운이 불리하여 사람이 죽어 원한을 남기었습니다. 창의(倡義)의 선비는 먼저 서남쪽 요해를 점거하여 강유(綱維)를 떨쳤으며,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막아서 힘껏 싸웠으나 지쳐서 몸은 죽고 이름을 길이 남겼습니다. 제독의 식견이 처음에는 시귀(蓍龜)와 같다 하였소. 현소(玄蘇)와 수호하던 날을 당하자 혹시 화근을 끼칠까 두려워 거적을 궐문 앞에 깔고 엎드려 5일 동안 극간하였소. 가책(賈策)과 순광(郇筐)을 여러 사람이 모두 천치라고 하였는데, 그대가 참으로 천치였던가? 변을 듣고 곧 일어나 의를 부르짖고 부지런히 힘썼으며, 서원(西原 청주)의 승첩에 우서(羽書)와 격문(檄文)이 사방으로 달렸는데, 깊숙히 금산(錦山)으로 들어가 적의 속임수에 빠져 몸은 죽고 일은 그릇되어 큰 공적이 단번에 무너져버렸습니다. 김 선생은 좋은 분이외다. 조복(朝服)을 갖추고 인수(印綬)를 차고 맡은 곳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비록 적을 무찌르지는 못하였으나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아 회수(淮水)는 맑고 맑습니다. 황 공(黃公)은 온 성안이 의지하고 존중히 여기는 중망을 지니고, 방패를 잡고 성벽에 올라 활시위를 당겨 적을 쏘았습니다. 부장에 섞여 의로운 몸이 한번 거꾸러지니 북소리가 문득 힘이 없어졌습니다. 이 공은 고립된 성이 이미 흔들려 형세가 위태로울 때에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척에게로 나아가 위태함을 꺼리지 않고 천금(千金)의 귀한 몸을 가벼이 한 것은 패배자가 되기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당하다, 김 공이여! 힘써 진산(晉山)을 보존한 자는 누구이뇨. 공훈이 높으니 보답도 훌륭하도다. 옥음(玉音)에 아름답다 했는데 무너져서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의 빛나고 빛난 업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유 공(劉公)은 노련한 장수로서, 말가죽으로 자신의 시신을 쌀 결심으로 싸움에 임하여 패하고 화살이 다하자 그 자리에서 곧 죽었으니 진실로 천시(千蓍)에 부합합니다. 신공의 배수의 진이야말로 임금의 은혜는 넓은데 그 보답은 작으니 그 죽음은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지마는 8천의 건아들이야 또 왜 죽습니까? 수사는 참으로 백 사람의 으뜸이요, 첨사는 8척의 훤칠한 키요, 정운(鄭運) 또한 장사라 어찌 지기(志氣)가 낮겠는가? 기백(畿伯)과 동추(同樞)는 모두 맑은 조정의 이름난 벼슬아치로 대궐뜰에 드나들다가 위급할 때에 왕명을 받고 몸을 바치고도 뉘우치지 않았으니, 그들은 모두 한가지입니다. 병사(兵使)는 형의 원수를 갚기에 어찌 그리 급급하여 일각을 늦다 하였던고. 윤 정당(政堂)에게는 양친이 있었으며, 기성(騎省 병조)의 낭관(郞官)과 옥서(玉署)의 논사(論思)가 비명에 함께 죽었으니 이것은 한번 탄식할 것도 못 됩니다. 고씨 집안의 뛰어난 두 형제가 그의 부형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실로 하늘이 주신 떳떳한 도리를 지켰습니다. 영규(靈圭)는 승려 출신으로서 쓰러져 넘어가는 왕가(王家)를 힘껏 붙들어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아! 저 하늘의 뜻은 넘겨보기 어렵구려. 어찌하여 이들을 세상에 내보냈다가 또 어찌하여 그리도 빨리 이들을 앗아갔습니까? 원통한 기운이 천지 사이에 막혀 답답함을 펼 길이 없습니다. 천둥이 치고 구름이 모이고 바람이 참담하게 불어대어도 이 노여움을 풀기에 부족하며, 이 슬픔을 달래기에 부족합니다. 아깝도다, 공들의 재주로써 태평성대의 시대에 처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응하여 익숙하지 못한 군사로써 비록 채찍을 꺾지는 못했으나,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잊어서 그 절개와 의리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았으니, 그 자질은 저 풍이(馮異)ㆍ등우(鄧禹)ㆍ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와 똑같다고 보겠습니다. 만약 공등 한두 사람에게 하늘이 두어 해를 더 빌려주어 혹시 오늘에 이르렀다면 오(吳) 나라와 월(越) 나라가 와신상담하고, 월 나라가 10년 동안 백성들을 늘리고 10년 동안 백성들을 가르쳐서 오 나라에 복수한 것처럼 하여 5ㆍ6사(師)를 풀어서 일본 마도(馬島)의 악독한 종류로 하여금 무서워서 움츠리고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데 지난 일을 돌이킨들 무엇하리오. 땅에서는 높은 산 큰 바다가 되고, 하늘에서는 북두(北斗)와 남기(南箕)가 되어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건너자면 끝이 없습니다. 화산(花山)의 절벽과 사해(四海)의 물가에 넋이여! 돌아와서 나의 말에 감응하기 바라나이다.
○ 전라도 겸방어사를 폐지하였다.
○ 전세(田稅)를 비로소 해창(海倉)에 납부하였다. 난리가 일어난 뒤로부터 군량을 혹 본창(本倉)에 납부하였으므로 여기에 말하는 것이다.


 

[주D-001]백이산하(百二山河) : 진(秦)의 요새 함곡관은 매우 험하여 두 사람이 지키면 백 사람을 당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2]의곡(義穀) : 공공사업을 위하여 재물을 헐어 기부하는 곡식.
[주D-003]자경(子敬)이 …… 일 : 자경은 오(吳) 나라 사람 노숙(魯肅)의 자인데, 노숙은 손권(孫權)을 도와 조조의 군사를 적벽(赤壁)에서 크게 깨뜨린 문무를 겸비하고 도량이 큰 영웅이다. 집이 부자로서 남에게 희사하기를 좋아하였다. 노숙이 곳간을 가리켜 주유(周瑜)에게 쌀을 주었다는 옛일에서 나온 말로, 물자로써 서로 도울 때에 쓰는 말이다.
[주D-004]사충(沙蟲)이 …… 된 자 : 주(周) 나라의 목왕(穆王)이 남정을 했을 때에 전군의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사충(沙蟲)으로 화하였다고 한다.
[주D-005]만인적(萬人敵) : 혼자서 만인을 상대한다는 뜻으로 병법을 말한 것임. 항우(項羽)가, “글은 성명을 적을 수 있으면 족한 것,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겠다.” 한 말에서 기인되었음.
[주D-006]남기(南紀) : 남국(南國)의 강기(綱紀)라는 뜻으로 그 지방의 형승을 말한 것임. 《시경》에, “넘실넘실한 강한은 남국의 벼리다[滔滔江漢南國之紀]”에서 나온 말임.
[주D-007]남풍이 …… 것이니 : 《좌전》에, “남풍이 굳세지 않아 사성(死聲)이 많으니 초(楚) 나라는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음.
[주D-008]안민(安敏)을 목벤 일 : 충주 싸움에서 척후장 안민이, “적병이 벌써 쳐들어왔다.”고 망령된 말을 하여 군중을 놀라게 하였다고 신립 장군이 그의 목을 베었다.
[주D-009]삼세의 경계 : 장수는 삼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데서 나온 말임. 진(秦) 나라 왕전(王剪)ㆍ왕분(王賁)ㆍ왕리(王離)가 삼대를 내리 장수가 되었는데 그뒤가 좋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기인된 것임.
[주D-010]장요(張遼)의 …… 그치며 : 장요는 조조(曹操)의 장수로서 결사대 8백 명으로 손권(孫權)의 10만 대군을 격파하여 그 이름을 강동에 떨쳤다. 그의 성품이 용맹무쌍하여 그가 왔다고 하면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주D-011]이목(李牧)의 …… 같았지요 : 이목은 전국시대 조(趙) 나라의 북쪽 변방을 지킨 명장으로서 그가 흉노(匈奴)와 진(秦) 나라를 칠 때에 그의 위엄에 눌려 적의 군마가 전진하지를 못하였다 한다.
[주D-012]마복군(馬服君)의 …… 같았으나 : 조(趙) 나라 명장 마복군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趙括)을 말한 것임. 조사는 평소에 그 아들 조괄을 두고 말하기를, “전쟁이란 사지(死地)인데 조괄이 쉽게 말하니, 조나라에서 만약 조괄을 장수로 삼는다면 반드시 조나라 군사를 없앨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장수가 되어 진(秦) 나라 장수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에게 참패를 당해 죽었음.
[주D-013]변호(卞壺)의 …… 곡한 것 : 진(晉) 나라의 상서령 변호 부자가 임금을 위하여 함께 죽었다.
[주D-014]관흥(關興) : 관우(關羽)의 아들로 제갈량에게 중용된 장수.
[주D-015]장포(張苞) : 장비(張飛)의 아들.
[주D-016]세류영(細柳營) : 한(漢) 나라 주아부(周亞夫)가 장군이 되어 세류(細柳)에 진을 쳤을 때 그 규율이 다른 어느 장군의 진보다 엄정하였다. 문제(文帝)가 순시하고 크게 감동하여 마침내 세류영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주D-017]장홍(萇弘) : 《장자》외물편에, “장홍이 촉에서 원통히 죽어서 피를 저장해 두었는데 3년이 지나자 그 피가 새파랗게 되었다.” 하였음. 장홍은 본래 주(周) 나라 대부였음.
[주D-018]금마옥당(金馬玉堂) :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로 한(漢) 나라 때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던 곳이었는데, 뒤에는 인하여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데 쓰인다.
[주D-019]소륵(疏勒)에서 …… 도위(都尉)로써 : 소륵은 신강성(新疆省)에 있는 한(漢) 나라 때 36국(國)의 하나요, 경공은 후한(後漢) 때 장수로 흉노(匈奴)를 공격하고 돌아와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주D-020]적벽(赤壁)에서 …… 면려하였는데 : 적벽대전 때에 오(吳) 나라 장수 정보가 유비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조의 병선을 불로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주D-021]우이(盱眙) :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초(楚) 나라 의제(義帝)가 도읍했던 곳.
[주D-022]자기(子琦)의 …… 모이자 :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장순(張巡)이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켜 적장 윤자기(尹子琦)와 싸웠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주D-023]온서(溫序) : 한 나라 교위였는데 외효(猥囂)의 장수에게 잡혀서 목이 잘리게 될 적에 온서는 수염을 입에 물고 하는 말이, “이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으니, 수염이나 더럽히지 말아야 되겠다.” 하였음.
[주D-024]주여숙(柱厲叔) : 춘추전국시대에 주여숙이 여(莒) 나라 오 공(敖公)을 섬겼으나 오 공이 알아주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오 공에게 난이 생기자 가서 목숨을 바치려 하였다.
[주D-025]좌거(左車) : 이좌거(李左車). 조(趙) 나라 장수인데 한(漢) 나라의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조 나라를 치자 막을 계책을 진여(陳餘)에게 말했으나 용납되지 않고 진여는 전사하였다. 한신이 좌거를 얻어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계책을 써서 연(燕)ㆍ제(齊)의 여러 성을 항복받았다.
[주D-026]안고경(顔杲卿) : 안고경은 당(唐) 나라 사람인데,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으면서 안녹산(安祿山)과 혈전을 벌였다. 성이 함락되자 녹산을 꾸짖기를, “조갈구(臊羯狗)야 어찌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주D-027]왕촉(王蠋)의 …… 알았소 :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쳤을 때, 연 나라의 악의(樂毅)가 제 나라의 왕촉이 어질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렀으나 왕촉은 응하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지아비에게 시집가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악의는 감동하여 그의 무덤에 흙을 덮고주고 표창하였다. 여기에서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왜군이 후히 장사지내 준 것을 말한다.
[주D-028]강회(江淮)의 보장(保障) : 수양성(睢陽城)에 절사(節死)한 당(唐) 나라 사람 장순(張巡)을 두고 이른 말임.
[주D-029]비휴(豼貅) : 맹수의 이름인데 범과 같다고도 하고 곰같다고도 하며, 옛날에 이것을 길들여 전쟁에 썼다고 한다.
[주D-030]안영(晏嬰) : 안자(晏子).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검소한 생활의 본보기로, 한 벌의 갖옷을 30년 동안 입었다.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주D-031]칠척이 …… 웅장하였소 : 이태백(李太白)의 〈한 형주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구절에, “비록 키는 일곱 자에 차지 못하나 마음은 만부를 이긴다.”는 말이 있다.
[주D-032]무안(武安) : 무안군은 백기(白起)의 봉호이다. 진(秦) 나라 장수 백기는 병법에 뛰어나 남쪽으로는 언(鄢)ㆍ영(郢)ㆍ한중(漢中)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趙括)을 쳐서 그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주D-033]낭심(狼瞫) : 전국시대 진(晉) 나라 장수인데 진(秦) 나라 군사와 싸울 때 몸을 바쳐 달려가 분전하고 죽으니, 진(晉) 나라 군사가 뒤따라가 싸워 크게 이겼다.
[주D-034]현륙음주(顯戮陰誅) : 신라(新羅) 최치원(崔致遠)이 당(唐) 나라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성토하는 격서를 지었는데, “천하 사람이 모두 현륙(顯戮)할 것을 생각하는 것만 아니라, 역시 땅 속의 귀신도 마땅히 음주(陰誅)를 의논할 것이다.” 하였음.
[주D-035]닭 울음소리를 듣는다거나 : 《진서(晉書)》조적전(祖逖傳)에, “사공 유곤(劉琨)과 함께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황계(黃鷄) 우는 소리를 듣고 발로 유곤을 차서 깨우며 하는 말이, ‘이는 절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바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하였음. 그래서 지사(志士)가 뜻을 두고 분발하는 데 쓰임.
[주D-036]노를 두드린다는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북벌할 때에 양자강을 건너며 노를 두드리면서 맹세하기를,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다시 건넌다면 이 강과 같으리라.” 하였다. 그는 드디어 석륵(石勒)을 무찌르고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인하여 이 말은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D-037]죽부(竹符) : 죽부는 군수의 신표로서 대로 만들어 둘로 쪼개어 오른쪽을 서울에 두고, 왼쪽을 군수에게 주는 것이니, 여기서는 군수를 그만둔다는 뜻.
[주D-038]응벽지(凝碧池) :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의 당 나라 금원(禁苑) 안에 있는 못.
[주D-039]산 중달(仲達)을 …… 하였으니 : 제갈량(諸葛亮)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위(魏) 나라의 사마의(司馬懿 호는 중달)와 대전하다가 병사하였는데, 죽음을 감추고 싸웠더니 사마의가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다.”는 말이 생겼다.
[주D-040]16 글자 : 송상현(宋象賢)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는 글에,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졌는데 여러 진영에서는 베개를 높이하고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의(恩義)는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陣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한 16자를 가리킨다.
[주D-041]강유(綱維) : 삼강(三綱)과 사유(四維). 삼강은 군신ㆍ부자ㆍ부부, 사유는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耻)
[주D-042]가책(賈策)과 순광(郇筐) : 한 문제(漢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치안책(治安策)〉이라는 시국 구제책을 올렸으며, 당(唐) 나라 때에 순모(郇謨)가 정권을 농단하는 원재(元載)를 상복을 입고 탄핵하였더니, 임금이 그를 불러 어의(御衣)를 하사하였다.
[주D-043]천시(千蓍) : 한 그루에서 수십 줄기가 나는 풀로 점칠 때에 산가지로 썼다.

 

서애선생문집 제2권 -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탄금대(彈琴臺)를 지나다가 느낀 바 있어 박창세(朴昌世) 선생의 운에 차운함 병서(幷序)
 

 


내가 조정에 있을 때 “도성은 긴 강으로써 요새를 삼아야 하는데, 충주가 한강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도성을 보존할 수 없다. 이보다 앞서 신립(申砬)이 조령의 요새에 웅거하여 충주를 견고하게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적을 평지로 끌어들여 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여지없이 대패하여 열흘 동안에 삼도(三都)를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조령과 죽령 두 고개에 요새를 설치하여 뜻밖의 일을 대비하고, 또한 탄금대에 성을 쌓아 웅거하여 지키도록 하며, 배로 황해도의 어염을 싣고 강물을 따라 올라가 산중 고을에 흩어 주고 쌀로 받아 백성들의 이익이 되게 하면 점차로 군량을 저축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그런데, 일이 거의 되어 가는 차에 내가 견책되어 조정을 떠나니, 그 일이 모두 폐지되었다.
지금 그 아래를 지나는데, 단지 그때 어염을 저장하던 작은 초가집 두어 칸만 남아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하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십중팔구다.” 했으니, 어찌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박상(朴祥) 선생이 이 고을 목사로 있을 때 지은 시에,

 

“특이한 경치 삼라한 것을 다 볼 수 없는데, 탄금대 아래 흐르는 물 쪽빛 같네. 명문장 강수는 묘도 없고, 명필 김생의 암자가 퇴락했네. 지는 해 윗강에는 배가 둘 둘이요, 스치는 바람 웅덩이에 해오라비 셋 셋이라. 낭도사를 가인에게 부르지 말게 하라, 태수가 듣고 얼굴이 붉어지네.[異境森羅不可探 彈琴臺下水如藍 文章强首無遺墓 翰墨金生有廢庵 落日上江船兩兩 斜風盤渚鷺三三 陶詞莫遣佳人唱 太守聞來面發慚]”

 

라고 하였기에, 그 시를 차운하여 나의 뜻을 붙인다.

상류의 경치를 이 속에서 찾으니 / 上流形勝此中探
산은 금성으로 싸고 물은 쪽빛을 둘렀네 / 山擁金城水繞藍
흥폐는 때가 있어 두 눈에 눈물이 흐르는데 / 興廢有時雙淚眼
관문 나루에는 외로운 암자 하나 / 關津無賴一茅庵
가엾구나 부질없이 만 명의 군사를 보내고 / 還憐銳卒空輸萬
앉아서 큰 도읍 셋이나 잃었네 / 坐使䧺都盡失三
묘당에서 수년 동안 조그마한 공도 없어 / 廊廟數年無寸效
바람에 의지해 생각하니 마음만 부끄럽네 / 倚風料理只心慚


 

[주D-001]낭도사(浪淘詞) : 악부(樂府)의 가사명. 유우석(劉禹錫)이 9수를 짓고, 백거이(白居易)가 6수를 짓고, 황보송(皇甫松)이 3수를 지었다. 원문 도사(陶詞)의 ‘陶’는 ‘淘’의 오자다.

 

향산집 제1권 - 아홉 번 뛴 장군의 한  / 九超將軍恨

 

권함길에게 시로 편지를 써서 주다〔與權涵吉詩札〕
 

 


밝은 시절 성무 이에 열렸거니와 / 明時聖廡闢
사문의 도 울연하게 전모 있었네 / 文猷蔚典謨
선비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서 / 多士集如雲
상소 안고 대궐에다 하소연했네 / 抱章籲天都
이러한 때 옛 친구의 서신이 오매 / 是時故人書
고향 산이 그림인 양 눈에 선하네 / 鄕山入畫圖
스산스러운 나의 자취 홀로 달래며 / 慰我冷散跡
향화 받아 받들고서 창오에 갔네 / 香火奉蒼梧
거북 뼈로 제사하매 부끄럽거니 / 祀骨還堪恥
내가 지닌 자질 본디 호련 아니네 / 器使本非瑚
아득 멀리 생각하니 송대 아래엔 / 遙憶松臺下
백일 아래 구불구불 길이 났으리 / 白日路崎嶇
대로께선 몸 건강해 지팡이 짚고 / 大老筇屨健
신선들이 먹는 창포 먹고 계시리 / 仙餌服靈蒲
어찌하여 효도하며 집에만 있고 / 如何入孝地
처음 먹은 봉호의 맘 게을러졌나 / 初心倦蓬弧
병이 아니 들고서도 병 핑계 대며 / 不病以爲病
잠심하여 관호 위로 거슬러 갔네 / 潛心溯關湖
스스로가 산촌의 낙 잘 보전하며 / 自全山埜樂
편안하게 칠 척의 몸 보전하였네 / 安保七尺軀
나의 이번 걸음 진정 우습거니와 / 可笑今我行
문 나서서 세 번이나 말 바꿔 탔네 / 出門三易駒
다행히도 황강에서 배를 타고는 / 幸登黃江船
사흘 동안 물오리와 함께 짝했네 / 三日伴浮鳧
마암에다 철관 몹시 험난하거니 / 磨巖鐵串險
천험인 이 탄금대서 산 등졌다네 / 天設是負隅
아홉 번 뛴 장군의 한 서려 있거니 / 九超將軍恨
오열하는 소리 배에 들리어오네 / 嗚咽聞餘桴
맑은 유람 별천지의 위에 오르니 / 淸遊別天上
풍류와 흥 애당초의 생각과 맞네 / 風興夙計符
해는 장안 하늘 위를 비치거니와 / 日下長安上
번화함은 그 옛날에 없던 바이네 / 繁華昔日無
상전벽해 뒤바뀜에 마고 울었고 / 桑海麻姑泣
세월 빨라 운당포서 맘 느꺼웠네 / 歲色感簹鋪
맘속으로 계획하긴 남지 지난 뒤 / 準擬南至後
몸 돌려서 온 길 다시 가려고 하네 / 擡頭復初途
이미 집의 아이에게 고해 주어서 / 已告舍中兒
겨울철 옷 보내오지 말게 하였네 / 冬衣莫役奴
늦고 빠름 관계없는 것이지마는 / 久速無關係
감정 많아 구구한 맘 일어나누나 / 多感念區區
남지에서 묵은 회포 말을 하거니 / 南枝說宿懷
북산에서 죄 돌리지 아니하리라 / 北山不歸辜
나의 밭에 농사 내가 지었거니와 / 我田有我稼
바라건대 가뭄 없어 풍년 들기를 / 願豐無旱枯
돌아가는 사람 서서 재촉을 하매 / 歸人方立促
새벽녘에 화로 낀 채 언 붓 녹이네 / 呵凍擁晨爐
한스러운 건 북당 편지 없는 것이니 / 恨闕北堂書
효오께서 대신 알려 주길 바라네 / 代報望孝烏


 

[주D-001]전모(典謨) : 옛 성현(聖賢)들의 훈계(訓戒)하던 말로, 《서경》의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익직(益稷)〉 등의 편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2]향화(香火) …… 갔네 : 임금의 능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향산이 1883년(고종20) 겨울에 현종(顯宗)의 능인 숭릉(崇陵)의 헌관(獻官)이 되어 제사 지낸 것을 말한다. 향산은 이 제사를 마친 뒤 곧바로 시골로 돌아갔다. 창오(蒼梧)는 중국 구의산(九疑山)의 별칭으로,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다가 이곳에서 붕어하여 장사를 지냈던 곳이다. 전하여 돌아간 임금의 능소(陵所)를 가리킨다.
[주D-003]거북 …… 부끄럽거니 :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뜻인 듯하다. 반악(潘岳)의 〈추흥부(秋興賦)〉에 “종묘에다가 거북 뼈로 제사를 지냄이여, 푸른 물로 몸 돌아가길 생각하누나.〔龜祀骨于宗祧兮 思返身于綠水〕”라고 하였다.
[주D-004]호련(瑚璉) :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쓰는 예기(禮器)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재를 뜻한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공자가 “너는 호련이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05]송대(松臺) :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에 있는 송암정(松巖亭) 일대의 솔숲을 말하는 듯하다. 송암정은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둘째 아들인 권동미(權東美)가 창건하였다.
[주D-006]筇屨健 : 《향산전서》 상(上) 권2에는 ‘筇鳩健’으로 되어 있다.
[주D-007]봉호(蓬弧)의 맘 : 천하를 유람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봉호는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을 말한다. 고대(古代)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주D-008]관호(關湖) : 염락관민(濂洛關閩)과 같은 말로, 흔히 송나라의 이학(理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9]황강(黃江) : 단양에 있는 역(驛)의 이름이다. 이곳에는 한강으로 통하는 나루가 있다. 향산이 숭릉 헌관이 되어 올라갈 때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간 듯하다.
[주D-010]마암(磨巖)에다 …… 험난하거니 : 충주 탄금대(彈琴臺)의 지세가 험난하다는 뜻이다. 마암은 탄금대의 열두대 아래에 있는 바위를 말하는 듯하다. 철관(鐵串)은 달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에 있는 지명으로, 현지에서는 쇠곳이, 쇠곶이, 쇠꼬지 등으로 불리는데, 이곳에 쇠를 보관해 두는 ‘쇠곳〔金倉〕’이 있었다고 전한다.
[주D-011]천험인 …… 등졌다네 :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을 말한다. 신립 장군은 왜적들을 조령에서 막자는 부하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전군이 몰살당하였다.
[주D-012]아홉 …… 있거니 : 신립 장군의 한이 서려 있다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립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들과 싸울 때 활을 너무 많이 쏘아 활이 열을 받아서 화살이 나가지 않으므로 열두 번이나 남한강으로 내려와 활을 강물에 식힌 뒤 올라가서 다시 싸웠다고 한다. 지금 탄금대에는 열두대라는 험난한 바위가 있다. 향산은 이곳을 아홉 번 내려왔다가 올라간 것으로 본 것이다.
[주D-013]상전벽해(桑田碧海) …… 울었고 : 오랜 세월이 지나 옛날의 자취가 다 사라졌다는 뜻이다. 마고(麻姑)는 선녀 이름으로, 마고산에 살며, 손톱과 발톱이 새의 발톱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아주 오래 살아 3천 년마다 한 번 변하는 동해(東海)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흔히 장수하는 여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神仙傳 王遠》
[주D-014]세월 …… 느꺼웠네 : 지난 일을 생각함에 감개가 인다는 뜻이다. 주희(朱熹)가 젊은 시절에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다가 그 벽간(壁間)에 “빛나는 영지는 일 년에 꽃이 세 번이나 피는데, 나는 유독 어찌하여 뜻만 있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고.〔煌煌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는 글이 씌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무척 동감하였다. 그런데 40여 년이 지난 뒤에 우연히 다시 둘러보니, 그 글은 이미 없어졌으나, 지난 일에 감회가 일어나므로, “언뜻 지나는 백년 세월 그것이 얼마나 되랴. 세 번 꽃피는 영지는 무엇을 하려는고. 나이 늦도록 금단을 이룬 소식이 없으니, 운당포 벽 위의 시가 거듭 한탄스럽네.〔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라고 읊으면서 슬퍼하였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주D-015]歲色 : 《향산전서》 상(上) 권2에는 ‘暮色’으로 되어 있다.
[주D-016]남지(南至) : 동지(冬至)를 남지라 칭한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5년 기사에 “춘왕정월(春王正月) 신해(辛亥)에 해가 남지하였다.” 하였다.
[주D-017]남지(南枝) : 무명씨(無名氏)의 〈고시(古詩)〉에 “호지의 말은 북풍에 몸을 의지하고, 월지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짓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고향을 그리는 정을 말할 때 끌어다가 쓴다.
[주D-018]북산(北山) :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있는 산인 종산(鍾山)으로, 육조(六朝) 송(宋)나라 때 주옹(周顒)과 공치규(孔稚圭)가 은거하던 곳이다. 주옹은 나중에 세상에 나가 회계군(會稽郡)의 해염 현령(海鹽縣令)으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도성으로 가는 길에 종산에 들르려고 하자, 공치규가 종산의 산신령의 뜻을 가탁(假託)하여 “여러 동학(洞壑)이 비웃고, 많은 산봉우리가 꾸짖는다.”라는 등의 내용으로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조롱하였다.
[주D-019]北山不歸辜 : 《향산전서》 상(上) 권2에는 이 구절 아래에 ‘臥龍何事起 苦涉五月瀘’라는 2구절이 더 있다.
[주D-020]북당(北堂) : 부모가 거처하는 집으로, 전하여 부모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21]효오(孝烏) : 효자(孝子)를 뜻하는 말이다. 까마귀는 새끼가 자라서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하여 까마귀를 자오(慈烏) 또는 효오라고 한다.

 

 

열두대(디지털충주문화대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북쪽 남한강 변의 절벽 위에 있는 바위.

[명칭유래]

신립 장군이 1592년 탄금대 전투 때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이곳에서 강 아래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해서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에 근거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강과 열두대 사이의 경사가 너무 심해 오르내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환경]

탄금대 열두대대문산 북쪽의 깍아지른 절벽의 꼭대기에 있는 바위이다. 열두대남한강에는 용섬이 있고 강 건너편에는 가금면 유송리와 오석리가 있다. 남한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달천탄금대 지역에서 합류한다. 이곳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남한강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충주조정지댐 쪽으로 흘러간다. 열두대에서 보면 이러한 남한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황]

해발 고도 100m 정도의 구릉성 산지로 남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북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열두대는 북쪽 가파른 절벽 위에 형성된 바위이다. 길가에는 충혼탑과 팔천고혼위령탑이 있고,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노래비가 있다. 이들을 지난 다음 북서쪽으로 가면 탄금대 토성과 토성을 지나 구릉에 오르면 육당 최남선이 찬한 탄금대기비(彈琴臺記碑)가 있다. 탄금대기비를 지나면 2층 누각으로 된 탄금정이 있다.

탄금정 오른쪽 아래로 계단이 나 있는데, 이 계단을 조금 내려가면 절벽 끝 지점에 열두대가 있고, 탄금정에서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는 신립 장군 순절비가 있다. 신립 장군 순절비에는 도순변사 신립 장군이 종사관 김여물 장군과 함께 8,000명의 군사로 왜적 10수만을 맞아 싸우다 이곳 열두대에서 47세로 순절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남한강을 따라 왼쪽으로 가금면 창동리 청금정중원 창동 마애불 등이 있고, 더 북쪽에 있는 가금면 탑평리에는 중앙탑이 그리고 장천리 장미산에는 충주 장미산성이 있다. 이곳에서 오른쪽 남한강의 상류인 금가면 유송리에는 충주 김생사지, 북진나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