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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중원미륵사지와 석굴사원

산골어부 2013. 4. 23. 15:52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이 계립령을 개척하였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신라가 점령한 한강유역을 수복하겠다고 출전하였다가 죽는다. 그 후 고구려는 신라의 김춘추에게 한강유역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신라의 찬란한 천 년 역사도 부패와 타락으로 국운이 쇠락하여 고려에게 귀속되어 사라진다. 미륵사지에 얽힌 전설은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한이 서려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치열한 영토분쟁과 후삼국의 시대상이 미륵사지의 미륵불과 덕주사 마애불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 월악산 일대에 있는 덕산의 신흥사와 고산사 등에서도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설화가 전해지며, 고산사가 있는 와룡산성과 월악산의 덕주산성 뿐만 아니라, 죽령과 계립령 일대의 수많은 산성들이 치열했던 전쟁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미륵사지는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미륵세계를 바라는 중생의 소박한 꿈이 담긴 듯하다.

 

미륵사지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계립령의 미륵대원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유사를 쓴 시기가 고려후기인 충렬왕 때로 기나긴 몽고전란이 끝난 후의 역사를 반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절요에서 나타나는 대원령, 대원사, 월악신사는 조선초기의 기록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계립령은 계립, 마골, 겨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늘재와 미륵사지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미륵사지의 미륵불이 북녘의 북극성을 바라보는 가람배치로 특이한데다가 미륵사지의 본존불인 미륵불을 모신 본당인 미륵당이 석조와 목조를 겸한 건축구조물경주의 석굴암과 유사하지만 축조석굴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대부분의 석굴사원이 험한 산기슭에 위치하여 신성스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미륵사지는 대중불교에서 흔히 나타나는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처럼 평지에 건립되어  보호벽을 두른듯한 형태로 보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미륵리 일대에서 미륵사지의 입지를 살펴보면 가람배치에 유리한 지형과 넓은 터가 산재하는데도 미륵사지는 계곡을 따라 위치하여 폭우에 유실될 수 있는 아주 불리한 곳에 있지만, 미륵사지 좌우측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은 암석이 산재한 너덜지대를 형성하여 석재채취가 쉽고, 적은 인력과 비용으로 쉽게 조형할 수 있는 작은 암석으로 부재를 만들어 토축하여 축조하는 기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계곡에 위치하는 가람배치에서 사찰의 본당인 대웅전 주변에 물길이 있는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사지에서 가람의 배치가 비대칭으로 나타난 것은 미륵당 뒷편과 서측면이 유실되어 붕괴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일부에는 미륵사지 건립 시에 석재를 수로로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미륵사지에 쓰여진 석재의 크기는 작은 것들이라 토축기법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전통건축 축조기법에서 작은 계곡을 수로로 이용하여 석재를 운반한 사례는 나타나질 않는다.

 

미륵사지 미륵당은 석굴사원이 지니는 독특한 시각효과와 기후변화에 대비한 구조가 목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본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하여 석굴형태로 변한 것은 아닐까 ? 하는 의문도 남는다. 그리고 수많은 목조 건축물들이 화재로 소실되고 석조물의 풍화와 붕괴가 촉진되어 사라졌지만 천년을 이어온 미륵사지는 그를 세운 사람들의 소박한 천년의 꿈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최대 걸작품인 경주 석굴암을 연상하면서 미륵사지와 미륵불 뒷편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그에 대한 의문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축조된 석굴사원은 경주의 석굴암과 미륵사지의 미륵당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석굴은 축조연대나 축조방식 그리고 입지조건이 너무 다르게 나타나며 사원을 축조한 주체도 중앙권력과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달리 보고 있다. 미륵사지의 발굴조사에 따른 연구는 추리가 아니라, 보다 체계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미륵사지에서 "왜"란 화두를 던지며 사지에 숨겨진 의문들을 열거해본다.

 

1. 미륵사지는 "왜" 북쪽을 바라볼까 ?

2. 미륵사지는 "왜" 계곡을 끼고 있을까 ?

3. 미륵사지는 "왜" 축조석굴사원일까 ?

4. 미륵불은 "왜" 분리되었을까 ?

5. 미륵리 삼층석탑은 "왜" 비보사탑일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석굴사원은 굴원(窟院), 석굴(石窟) 등으로 불린다. 바위 속이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이 되고, 강당과 참선당이 되며, 방실(房室)과 주방이 된 이른바 석굴 속의 사원이라는 것이다. 건축자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졌고, 이 암석 건물의 벽면이나 천정 등에까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기 때문에 지상의 일반 사원 보다는 첫째, 훨씬 더 장엄하고 정교하며 신앙적으로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 산자 수명한 심산유곡에 자리 잡았고, 우기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셋째, 풍화나 부식에 강하고 파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이나 화재같은 온갖 재난에 강한 반영구적이라는 점이다. 넷째, 간선도로 상이거나 마을과 지근거리에 있는 산록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방 상인이나 외국 무역상 소국의 왕이나 관료, 공인이나 의사 등이 드나들어 석굴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 다섯째, 가장 성스러운 성산(聖山)에 조영했기 때문에 종교적 영감이 충만한 성소가 될 수 있다.

 

석굴사원은 만든 기법에 따라 몇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자연석굴, 둘째, 굴착석굴, 셋째, 축조석굴이다. 첫째, 자연석굴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수도처로 삼은 굴로써 인도 왕사성 영축산의 설법지 주위로 있는 가섭굴 등과 전정각산 석굴이 가장 유명하며, 우리나라는 천성산 석굴 등이 유명하다. 둘째, 굴착석굴은 바위를 뚫어 만든 석굴인데 인도의 바라바르석굴이 최초의 석굴이며, 아쟌타, 에롤라석굴, 중국의 돈황, 운강, 용문석굴 등이 가장 저명하다. 셋째, 축조석굴(築造石窟)은 벽돌형돌인 모전석이나 큰 판석을 쌓아 석굴 형식으로 조성한 석굴을 말하는데, 간다라 스와트지역의 붓카라 제3사지 석굴이나 우리나라 토함산 석굴이 가장 대표적이다.

 

 

 

 

미륵리에서 바라본 월악산

 

 

미륵사지

 

 

미륵사지와 수로

 

 

미륵사지 후면 

 

 

미륵사지 후면 

 

 

미륵사지 후면 

 

 

미륵사지 후면 

 

 

미륵리 원터(미륵대원지) 

 

 

미륵리 삼층석탑

 

 

 

 

중원 미륵리 사지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 [변천]

중원 미륵리 사지는 1963년에 고고미술사학회(현 한국미술사학회)에 의해 고려 석실 사원지로 소개되었고, 1965년에는 경주 석굴암 복원을 위한 자료로 제시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 24일에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이 각각 국보 제166호와 제16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 21일에 각각 보물 제95호와 제96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석실 사원이 위치하였던 상모면(현 수안보면)은 행정 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여 문화재 지정 명칭은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과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이다.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 조사는 1977년부터 시작되어 2차, 3차, 4차, 5차의 발굴 조사와 석실에 대한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사찰 이름으로 대원사(大院寺)가 확인되었고, 대원사지 동쪽에서 원지(院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이 이곳에 있었고, 많은 출토 유물을 통하여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같은 발굴 성과를 통하여 1987년 7월 18일에 충청북도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 국립공원 월악산과 함께 중요한 자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6년 9월에 수안보온천과 연계한 문화 유적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주변 정비 과정 중에 재대석, 장대석, 초석 및 건물지로 보이는 유구와 유물들이 노출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제1차 조사는 1977년 8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이루어졌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으로, 1978년에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를 간행하여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1차 조사를 바탕으로 석굴 실측 조사가 실시되었고, 1979년 2월 15일에 석굴 실측 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제2차 조사는 1978년 9월 15일부터 1978년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으로, 보고서는 1979년 8월 20일에 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이 있는 석실의 앞쪽으로부터 석등, 괴산 미륵리 사지 오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 제269호인 귀부(龜趺), 당간지주, 중문지에 이르는 사지의 중심 지역과 하천 서쪽의 건물지 등 가람 배치에 있어서 중심권에 해당하는 지역을 발굴하여 유구의 현상을 파악하였다.

제3차 조사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담당하여 1982년 11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고, 보고서는 1983년 1월 15일 간행되었다. 당시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안말마을 입구였다. 조사 결과 새로 조성된 마을의 지하에서도 상당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사찰의 권역을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연차적으로 토지 매입과 정비 계획이 추진되었고, 안말마을은 1986년에 현재의 점말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4차 조사는 1990년 7월 16일부터 1990년 11월 30일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안말마을 지역과 사지 중심 지역의 동쪽 구릉지, 그리고 당시 사찰 권역 내에 있던 세계사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안말마을 지역에서 원지(院址)와 관련된 유구를 찾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결과 보고서는 1992년 6월 30일에 간행되었다.

제5차 조사는 제4차 발굴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이고, 조사 기간은 1991년 7월 3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제4차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담장지 유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찾지 못하였다. 한편 석실 금당의 서쪽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중요한 건물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기단 석렬만이 확인되었다. 또한 동향으로 된 요사 1동의 유구가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5차까지 진행되었던 발굴 조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중원 미륵리 사지에는 석실과 석조물이 있는 하천의 동쪽 면을 중심으로, 하천 서쪽의 평지에는 부속 건물인 요사(寮舍)와 승방(僧房)이 있고, 후대의 건물인 세계사(世界寺)가 있던 언덕과 그 서쪽의 구릉지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규모의 건물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지의 외곽으로는 동서의 산 능선에 돌담장을 설치하여 사역을 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 [현황]

현재 중원 미륵리 사지의 석실 상부의 목재구조(木材構造)는 남아 있지 않고, 하부 석실 중심에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위치하고 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 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현재 사적 제3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의의와 평가]

중원 미륵리 사지는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한 유적이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 있지 않으나 석실 구조물 중앙에는 주존불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봉안되어 있으며 1977년 발굴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礎石)들이 발견되어 평면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발굴 조사 때 ‘미륵당(彌勒堂)’, ‘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1192년(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였다. 그 후 곧 복원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다시 중수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쳐 18세기에 다시 한 번 중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등이 끊긴 것은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사원지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 덕주공주가 지은 월악산덕주사를 바라보도록 북쪽을 향해 지은 석실사원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8)
• 『중원군 미륵리 석굴 실측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미륵리사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79)
• 『미륵리사지 3차 발굴조사보고서』(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3)
• 『미륵리사지 4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2)
• 김영진·박상일, 『대원사지, 미륵대원지』(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미륵리사지 5차 발굴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박물관, 1993)
• 『충주시 문화유적』(청주대학교박물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