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하늘재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에서

산골어부 2013. 4. 28. 13:26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은 미륵리 미륵사지에서 하늘재를 오르다가보면 최근에 유명해진 "김연아 닮은 소나무" 뒷편의 돌무더기에서 시작하여 동편의 포암산 등산로에 있는 밤나무 밭으로 이어진다. 대원령산성은 위치와 형태는 하늘재 북측에 위치하여 미륵리에서 하늘재로 올라오는 적을 막는 형태로 삼국시대에 신라에서 구축하거나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견훤이 후고구려의 왕건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원령산성을 돌아보며 조선시대에 축성된 덕주산성과 조령산성을 비교해본다.


왜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이 한훤령산성(寒喧嶺山城)으로 변했을까 ?

 

 하늘재는 계립령(신라)-대원령(고려)-한원령(조선)-한훤령(?)-하늘재(현재)로 변천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훤령산성(寒喧嶺山城)은 조선말 고종 때 정혼(鄭混)의 한훤령관방방략(寒喧嶺關防方略)을 근거로 한다. 계립령(鷄立嶺)은 삼국사기, 대원령(大院嶺)은 고려사절요, 한원(漢院)은 조선왕조실록과 한수집(권상하)에서 나타나는데, 조선왕조실록과 한수집(권상하)에서 나타난 한원(漢院)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대원(大院)과 표기만 다를 뿐, 그 의미는 "크다"로 해석된다.  그런데, 한훤령(寒喧嶺)과 하늘재란 지명이 근래에 회자되어 정착되어 있다.  한훤령(寒喧嶺)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민족문화대백과의 행영성에는 대원령산성이 한훤령성(寒萱嶺城)으로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한원(漢院)이 한훤령으로, 한훤령이 한울령으로, 한울령이 하늘재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대원령이 하늘재로 변한 것은 역사를 모르는 사대부들이 지명을 한문으로 잘못표기한 되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재에 있는 산성도 문경시는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 충주시는 한훤령산성(寒喧嶺山城)으로 표기한다. 일부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머무른 어류성(御留)으로 보기도 하는데, 어류성(御留)에 대한 위치는 하늘재 외에도 주흘산 안부, 조령산성 동암문. 탄항산(월항산) 아래의 평전 등으로 전해지지만, 어류성(御留)은 석축으로 둘러싼 산성이 아니라, 주둔군 지휘부가 있던 주둔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조령산성 축성기록을 살펴보면 어류(御留)를 근거로 동암문 일대에 산능선을 따라 성첩을 있는 산성과 성벽에 야문(암문)이 설치된다. 하늘재에 있는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은 북측에서 침입하는 적이나 고개를 통제하는 관문성으로 추정되며, 대원령산성(大院嶺山城)을 행영성으로 보는 견해는 어류성 또는 어류성 유지의 위치를 잘못 비정한 때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자료]조령산성 부근 고지도

 

 조령산성 고지도

 

 조령산성 고지도

 

조령산성 고지도

 

탄항산 등산지도

 

벌천부곡(伐川部曲)과 평천재(문경시 자료)

 

평천리

 

주흘산 동쪽 계곡에 위치한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전통적 산간오지 마을로서 1300년경 한 보살 노파가

암자를 창건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고, 고려말부터 평산신씨들이 이주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개척되었다.

이곳은 평평한 내와 토지가 기름져서 벌내 또는 평천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신라.고려시대에는 벌천부곡

(伐川部曲)이 있던 곳이다. 세종 14년(1432)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 문경현조에 보면 그때까지도 벌천부곡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로는 부곡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이후에는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선비들이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와 정착을 하여 선비들이 사는 마을로 인심좋고 화목한 마을로 오늘에

이른다.

 

월항(月項) - 달목이·달매기

평천재로 오르는 들머리 마을이다. 1850년경 남양홍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마을 뒷산 목너미로 달이

진다고 하여 달목이 또는 달매기로 불렀다고 한다.

 

개그늘

개음리(蓋陰里,개그늘)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복주(현 안동)에 피난했다가 1362년 왕이

돌아가는 길에 어류동(御留洞)에 유숙하면서 주흘산정(主屹山頂) 전좌문(殿坐門)에 매일같이 거동하여

계립령로(지릅재길)를 바라보며 좋은 소식을 기다렸는데 그때 보개(寶蓋,일산)의 그늘이 동리를 덮었다

하여(개그늘)이라 불렀다.

 

 

 

 

 

 

 

 

 

 

 

 

 

 

 

 

 

 

 

 

 

 

 

 

 

 

 

 

 

 

 

 

 

 

 

 

 

 

 

 

 

한훤령 산성

 

  • [정의]
  •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축조된 고대 산성.

  • [건립경위]
  • 산성의 축성과 관련한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라 북진 거점과 전초기지로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위치]
  • 한훤령 산성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충주시 미륵리경상북도 문경시 관음리의 경계로, 소백산맥포암산[961m]과 부봉[925m] 사이의 안부(鞍部)에 형성된 교통로인 하늘재[530m]에 해당한다.

  • [형태]
  • 한훤령 산성충주경북을 잇는 소백산맥한훤령(하늘재)을 막아 쌓은 행성(行城) 형태의 석성으로 둘레는 480m이다. 남아 있는 성벽은 높이 1.1~3.7m, 상부 너비 1.8~2.4m 정도이다.

  • [현황]
  • 산성은 부봉의 일부분이 완전히 붕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경상북도와 도계를 이루는 능선에서 100~250m 내려오면서 성벽이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신라계 유물이 확인된다.

  • [의의와 평가]
  • 산성이 있는 한훤령은 신라 156년(아달라이사금 3)에 계립령로가 개척되면서 그 중요성이 일찍이 강조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조령이 주로 이용되면서 중요성이 약화되었으나, 조선 고종 때에 정혼(鄭混)에 의해 한훤령관방방략(寒喧嶺關防方略)이 제기될 정도로 전략상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참고문헌]
    • 김규영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 『문화유적분포지도』-충주시(충주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8)

    • 『충주시지』(충주시,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