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여주목의 어서이촌(於西伊村)에 대하여

산골어부 2022. 7. 14. 12:21

양광도와 황려현에 대하여

 

고려 무신정권과 원나라가 침입한 간섭기에는 고려의 왕권체계나 지방제도는 있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착하지 못하고 전란을 극복하는데, 더욱 혼란스러웠다. 고려 말기에 김취려 장군의 기록에서 거란과의 제천 박달현 전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가 나타난다. 법천사(法泉寺)는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한다. 원주에서 흘러내리는 섬강은 문막을 지나 법천사지가 있는 부론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여주시 점동면 삼합리는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세물머리이기도 하지만, 경기도와 강원도와 충청도가 분기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5도 양계라는 지방제도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는 양광도로 편제된다. 그 중에서 고구려 시대의 노음죽현(장호원)을 중심으로 하는 청미천 유역인 죽주는 광주목(이천)에 속하고, 음죽현은 충주목에 속하며, 황려현은 원주목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팔도체계인 경기도로 편제된다. 원주의 법천사(法泉寺)가 황려현에 속한 것도 고려시대의 지방제도에 따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고려의 대몽항전에서는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금당협(金堂峽)에 매복하여 몽고 군사가 다다르기를 기다려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병기와 포로가 된 남녀 2백여 명을 빼앗으며, 대몽항전인 충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몽고 군사가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나와 항복하고, 그로 인하여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귀양 보낸다. 대몽항전의 시대적 배경에서 충주전투의 승전과 국원성 승격을 이야기 하지만, 몽고군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논쟁에서 신라시대의 산성인 남산성과 장미산성에서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조선시대의 남한산성은 왜 패전의 굴레를 뒤집어 썼을까 ?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읍성이나 산성을 훌륭한 산성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한양도성과 수원성과 조령산성은 왜 무용지물일까 ?  문경새재에 세워진 조령산성과 덕주산성은 경상도에서 한양을 오고가는 백성들만 통제하는 성으로 전락했고, 한양도성과 수원성과 남한산성은 왕권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몽항전에 사용되었던 산성들은 대부분이 조잡하고 허술하다. 왜 그럴까 ? 급조된 산성일까 ?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그 흔적이  그 당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금당협과 천룡산성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여주민들이 왜 충주에 있는 천룡성에서 농성을 하였을까? 충주 창정 최수는 어떻게 여주 신륵사 부근의 금당협에 매복하였을까 ? 여주에도 파사성이 있고, 이천에도 설성산성이 있으며, 죽산의 죽주산성과 율면의 망이산성도 있는데, 왜 충주의 천룡산 천룡산성에 입보하여 농성을 했을까 ? 고려시대의 대몽항전에서 삼국시대의 산성들보다는 더 험준한 산속의 산성들이 나타나는 것은 몽고군의 전투방식과 고려의 전투방식인 청야입보와 이일대로라는 전략과 전술 때문이다. 고려는 대몽항전 초기에는 정규군이나 정예군이 있었지만, 몽고군과 전면전을 치룰 정도가 아니 였기에 몽고군이 나타나면 험준한 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전세가 불리하면 산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대몽항전에서 처인성 같은 작은 토성에서 승리하거나, 기습 공격에 따른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전쟁의 큰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죽산의 죽주산성에서 송문주 장군이 이끈 고려군이 방어에 성공하지만 그에 따른 전과는 미미하고, 야산이나 평지에 형성된 읍성이나 산성들은 대부분 항복하거나, 저항하다가 몰살을 당한다. 황려 현령이 여주민을 이끌고 천룡산 천룡산성에 칩거한 것도 공격라는 개념보다는 여주보다 산악지형인 충주로 피신한 것이다. 충주 천룡산은 보련사로 인하여 보련산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천룡산성도 보련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충주 보련사는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여주 신륵사로 통폐합되어 사라진다. 여주라는 작은 고을이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의 국경선 분쟁에서 시작되며, 행정구역이 신라의 9주 5소경과 고려의 5도 양계와 조선의 팔도체계 등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고찰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사건이 아닌 소설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시각과 관념 속에서 옛날을 떠올린다.

 

여주목의 어서이촌(於西伊村)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어서이촌(於西伊村)은 여주시 가남면과 점동면 일대로 추정된다. 어서이촌(於西伊村)은 여주의 양화천 유역인 가남면 보다는 청미천 하류인 점동면 일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음죽현의 어서이촌(於西伊村)이 여주목으로 속하게 된 것은 조선의 개국으로 한양천도에 따라 고려의 양광도가 조선의 팔도체계의 경기도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압산이 나타나는데, 오압산은 현재의 장호원에 인접한 오갑산의 옛지명이다. 현재도 오갑산은 충주와 음성과 여주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 유역은 고구려 시대에 노음죽현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 시대의 노음죽현은 현재의 안성과 이천과 여주와 음성으로 분리되어 사라졌지만, 청미천 유역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이천의 장호원과 음성의 감곡면에서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경계선 때문에 일어나는 일화는 수없이 산재한다. 고구려 시대의 노음죽현 또는 고려시대의 음죽현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지명이 충주의 외서촌이다. 충주의 외서촌은 충주목의 임내로 청미천의 상류인 대소. 삼성. 생극. 금왕. 맹동 등을 이르는 지명이다. 청미천 유역에서 경기도를 떼어내고 충청도에 남은 지역으로 충주목의 직할지인 임내라 한다. 임내는 향. 소. 부곡과 달리 월경처 또는 견아상 입지에 따른 군현의 통폐합에 따른 병폐이기도 하지만, 인접한 군현 간의 이해득실에 따른 소외지역이기도 하다. 음죽현의 어서이촌(於西伊村)과 음성현의 외서촌(外西村)이 발생한 것도 조선시대의 팔도체계에 따른 관할구역의 분쟁에서 발생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군현제나 면리제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정착하지 못한 것은 법과 제도 때문이라기보다는 지역의 토착세력과 낙향한 유림들에 의한 지역이기주의에서 발생한 사례가 많다. 음죽현의 어서이촌(於西伊村)과 음성현의 외서촌(外西村)에서 어서이촌(於西伊村)과 외서촌(外西村)은 같은 지명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청미천 유역에서 가장 큰 산은 어디일까 ?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이 있던 국망산(國望山)이다. 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의 역사는 그 속에서 흐르는 것은 아닐까 ? 마이산 망이산성(望夷山城)에서 오랑캐는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도 아닌 청미천 사람들일 것이다. 청미천 끝자락에는 세물머리와 삼합리가 있다. 경기도와 강원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물길과 산길이 이어지는 곳에서 역사의 흐름을 되새겨보면, 경계라는 의미도 사라진다. 오랑캐란 의미도 지역민 보다는 정치꾼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