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일까 ?

산골어부 2022. 6. 30. 12:24

망이산성에 올라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마이산(馬耳山)에는 망이산성(望夷山城)이 있다. 마이산은 안성의 칠장산과 더불어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경계로 금강의 미호천과 남한강의 청미천이 분기하는 한남금북정맥에 위치한다.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인 속리산에서 시작해서 맹동의 소속리산에서 삼성의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낮은 구릉으로 형성되어 마루금조차도 분간하기 힘든 곳이다. 한남금북정맥에서 칠장산 또는 칠현산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누어져 경기와 충북과 충남의 경계가 만나는 삼도봉이 된다. 예전부터 음성군의 삼성. 생극. 금왕. 맹동. 대소 등을 충주의 외서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주목의 특별관리지역인 임내(任內)로 군현(郡縣)을 설치하거나 수령을 파견하지 않는 특수한 지역이다. 면리제와 달리 임내(任內)라는 것은 향. 소. 부곡과 속현에도 속하지 못하고, 향리들의 득실에 따라 나타나는 험지일 뿐이다. 이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이나 선거구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가장 치열하게 분쟁을 벌인 곳이 금강유역의 미호천 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는 백제유적의 발굴조사에서도 나타나는데,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은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누리다가 4C말 부터는 백제의 유적들이 사라져 버린다. 망이산성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지배하고,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던 곳이 아닐까 한다. 망이산성 배후에는 마국산과 더불어 죽주산성과 설성산성과 설봉산성 등이 버티고 있는데, 미호천 유역의 대모산성과 추성산성과 부모산성보다 더 견고해 보이는 것같다. 삼국시대부터 청미천 유역은 죽산현과 음죽현 또는 노음죽현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외서촌 지역이 음성현이나 진천현에 속하지 못하고 별도의 현을 만들지 못한 것은 견아상입지나 월경처와 달리 충주목의 지배력이 신라 중원경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충주목의 속현인 익안현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중원경의 치소가 충주목으로 이전했으면, 달천의 서부지역에 군현을 설치해야 하지만, 충주목에서 먼 망이산성 까지 직접 관장하여 벌어진 병폐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충주읍성이 황폐화되어 충청감영이 충남지역으로 옮겨진다. 지방제도와 행정구역의 변화에서 왜 외서현도 아닌 외서촌일까 ? 이 글은 망이산성을 중심으로 추정한 중원역사의 흐름일 뿐이다.

 

 

왜 충청북도일까 ?

 

오래전에 산악자전거를 타면서 라이딩 코스를 답사하던 중에 칠장산과 망이산에 올라 왜 충청북도일까 ? 하는 망상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충청북도는 왜 작고 못생겼을까 ? 그리고, 충청북도가 꼬부라진 고구마가 되어 한반도 중앙에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충청도가 지도상으로는 좌도와 우도인데, 왜 북도와 남도일까 ?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별 것도 아니겠지만, 정답만 외우는 사람들에게는 농담거리일 것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보고들은 외서촌에 사시는 종친들. 시제와 명절 때가 되면 큰산소와 작은산소에 성묘하러 오고가시던 아버지와 어르신들은 왜 외서촌이라고 했을까 ? 하지만, 지방제도에서 향. 소. 부곡과 지리서에 나오는 속현과 임내, 그리고 월경처 등은 관심이 없다. 지명이나 향토사도 해당 지역민들의 관심사이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기에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취급된다. 얼마 전에 망이산성을 다시 답사하면서 충청도와 외서촌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 그에 대한 망상을 남겨본다.

 

망이산성에서 오랑캐는 누구일까 ?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동이라고 하지만, 광개토왕비에는 백제를 백잔이라 하고, 충주고구려비에는 신라왕을 동이매금이라 하고, 황룡사 구층탑에서는 주변국을 구이라고 기록하고있다.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에는 삼국사기에도 없는 역사가 숨어 있는데, 고기에는 고구려을 마한으로 보기도 한다. 백두대간의 하늘재를 계립령이라고도 하고, 마목현이라고도 한다. 계립령은 신라의 고개라는 의미이고, 마목현은 고구려의 고개라는 뜻이다. 충주의 옛지명인 국원성도 고구려식 한자지명이라는 것이다. 마목현은 온달장군의 공기돌 전설이 서린 곳이다. 마고의 전설은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 있지만, 마고, 노고, 대모, 할미 등으로 변한다. 일부에서 직산의 사산성을 백제의 위례성으로 보는 것처럼 진천의 대모산성을 마한시대의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발굴자료는 나타나질 않는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망이산성에서 오랑캐는 삼한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시대를 달리하며 모두 해당된다. 원삼국시대인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지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한의 소국인 백제가 성장하면서 371년 근초고왕 때에 한강과 금강유역의 대부분을 지배하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조카인 실성을 인질로 삼고, 396년에는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으며, 400년에는 신라를 침략한 가야를 정벌하면서 백제와 신라와 가야를 모두 고구려의 속국으로 만든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저항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에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을 점령하고, 금강과 낙동강 상류지역까지 지배한다.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을 지배하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지만, 삼국의 국경분쟁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 이어진다. 어쩌면 삼국의 전쟁사는 원삼국시대 부터 이어진 700년 전쟁일 것이다. 그리고, 국원성의 역사는 고구려의 한산군 또는 신라의 한산주의 역사일 것이다. 한산군이나 한산주의 역사는 한강의 역사인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인 지리서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만든 9주 5 소경이란 지방제도뿐만 아니라, 신라가 점령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도 기록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의 독산성. 도살성. 금현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동북지역을 지배하면서 김무력을 신주의 군주로 삼는다. 김서현은 진천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김유신을 낳는다.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와 도당산성 그리고, 김유신의 출생지가 진천에 전해진다. 그 중심에는 대모산성과 망이산성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한다. 국원성과 국원소경 그리고 중원경을 충주의 역사로 생각하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그려진 9주 5소경을 지도로 보면 중원경은 한산주 또는 한주(경기도)를 관장할 뿐이며, 서원경은 웅주(충청도)를 관장하는 변방일 뿐이다. 중원경과 서원경은 한주와 웅주로 분리된다. 삼국사기 지리편에서도 백제의 웅천주와 신라의 웅주가 다르듯이 고구려의 한산군과 신라의 한산주는 그 영역이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한주는 고구려, 웅주는 백제영역으로 구분하였기에 충주의 달천지역은 고구려 문화로 인식하고, 청주의 미호천 지역은 백제문화로 인식하는 것이다. 음성과 장호원 사람들은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 왜 그럴까 ? 즉 충주는 경기도이고, 청주는 충청도라는 것이다.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는 동서로 나누어지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원경과 서원경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역사의 인식에서 충주와 청주가 다른 것도 삼국시대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원성의 영역은 ?

 

신라시대의 지방제도에 따른 9주 5소경은 고려와 조선의 개국뿐만 아니라, 천도에 따른 행정구역의 변화에서도 왕성이 있는 수도권을 제외하고 지방의 행정구역은 계승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군현제의 정착을 위해 군현의 합병과 분리를 계속해왔지만, 결국은 실패하여 조선말기까지 임내(任內)라는 특별지역이 존재한다. 중원경이나 서원경이라는 명칭이 거창하지만, 면리제로 보면 충주면이고 청주면이다. 경복궁과 청와대의 주소는 어떻게 될까 ? 왕권시대가 아닌 지금은 대통령도 국회의장도 투표권 한장을 행사해야 한다. 특권이란 권력을 가진자들이 누리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지만, 합법화된 특권을 누리는 것이 법치주의고, 민주주의다. 고구려의 국원성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살고 있다. 이는 수도권이 누리는 특권 때문이다. 말로는 지방자치와 국토의 균형발전을 외치지만,  중앙집권제에 따른 정치적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특별관리지역이란 것도 향. 소. 부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방이나 관청 또는 지역특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중원경과 서원경도 신라가 진출하여 개척할 당시에는 정복지역인 가야 또는 예맥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개국과 천도로 인하여 왕권의 중심이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겨 가면서 5도 양계에 따른 양광도는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수원으로 분리되고, 충주는 충북의 북부지역을, 청주는 충북의 중부지역을 관장하게 된다. 조선의 개국과 천도로 인하여 왕권의 중심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진 팔도체계에 따라 양광도가 경기도로 편입되면서 양광도의 남부지역을 경기도에 내어 주고 충주는 강원도 원주목의 제천과 단양과 영춘을 받고, 청주는 경상도 상주목의 보은. 옥천. 영동을 받아 꼬부라진 고구마처럼 남게 된다. 어찌 보면은 팔도체계에서 충청도란 지명을 유지한 것도 신라의 9주 5 소경 덕분일 것이다. 충청도가 동도와 서도가 아닌 남도와 북도로 정립된 것도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흐름으로 본다. 외서촌과 망이산성은 안성과 음성과 진천의 중앙에 있는 산성으로 한강과 금강 그리고, 서해바다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지만 알맹이는 서울과 청주와 충주에 빼앗기고, 봉화대만 남은 곳이 외서촌이라고 한다. 충주목에서 외서촌을 관리한 이유 중에 하나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참제도와 봉수제도에 따른 기득권 확보가 아닐까하는 추정도 해본다. 지금은 터널과 교량으로 산과 강을 가로지르고, 스마폰으로 소통하는 시대이기에 지형적인 특성은 현대문명으로 극복하지만, 아직도 자연조건에 따른 특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해서 설치한 신주와 가야의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 대모산성이 있는 외서촌이다. 외서촌은 마한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점령하여 살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지방자치도 외에 특별시와 직할시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존재하며, 권력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많은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충주목에서 임내라는 외서촌의 역사는 오지도 험지도 아닌 지방제도의 희생물이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경계선보다는 지역민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지방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음성과 진천과 증평군의 행정구역과 선거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한다. 멀리 혁신도시가 보이고, 농다리가 보인다. 충청북도의 행정구역에서 북부 3군 또는 남부 3군의 홀대론이 등장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경기도에 살듯이 충북도민의 절반이 청주인 미호천에 살고 있다. 이제는 세종특별자치시까지 생겨났다. 충청북도라는 작고 못생긴 땅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알짜배기 땅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 그 알짜배기 땅 중에서 노른자위 땅이 외서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같다.  멀리 보이는 충북혁신도시가 제기능 발휘하려면 외서촌과 같은 시행착오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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