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시대의 흐름과 배경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 인명과 지명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같은 지명으로 볼 수 있을까 ? 충주를 청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 신라의 강수는 임씨일까 ? 석씨일까 ? 국원성과 중원경이 무슨 뜻이길래,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우길까 ? 삼국사기의 낭자곡성과 낭성이 어디길래, 자곡과 비성을 낭자가 빠진 (낭)자곡성과 (낭)비성으로 볼까 ? 사열이현이 무엇이길래, 성열현을 청풍현이라고 해석할까 ? 역사에서 오류와 왜곡은 무엇이 다를까 ? 신라의 9주 5소경 체계에서 현재의 충청북도는 동북부 지역인 나토군(제천), 사열이현(청풍), 적산현(단양)은 삭주인 북원경 관할이고, 중북부 지역인 국원성(충주), 잉근내군(괴산), 금물내군(진천), 도서현(증평), 잉홀(음성)은 한주인 중원경 관할이며, 중서부 지역인 서원(청주), 대목악군(천안 목천), 기매현(천안 풍세), 구지현(세종 전의)은 웅천주 관할이며, 남부 지역인 삼년산군(보은), 고시산군(옥천), 길동군(영동)은 상주 관할이었다. 충청북도란 작은 행정구역이 신라시대에 4개 지역으로 분할된 것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신라의 왕도인 경주에서 보면 5소경은 변방일 뿐이다. 신라의 9주 5소경이란 지방제도는 고려의 양광도와 조선의 충청도로 재편되고, 현재의 충청북도란 행정구역이 된다. 충청북도에서 동북부는 강원도고, 중북부는 경기도고, 중서부는 충청도고, 남부는 경상도에 편제되었다는 이야기는 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일 뿐이다. 고대사와 현대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하여 까마득한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 한다. 역사는 지나간 기록일 뿐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에 나타난 지명들을 고찰하여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국원소경에 관한 영역을 추정하고, 그에 따른 한국사의 오류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삼국시대의 지명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명이 어색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고유의 명칭을 표기한다면 전국에 동일한 지명이 수없이 난립하여 혼란을 초래할 것이고, 통폐합에 따라 두개의 명칭을 고수하다가 보면 신조어와 같은 이상한 지명들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사 뿐만 아니라, 향토사에서 지명을 왜곡하는 사례는 너무 흔해서 그 진위조차도 구분하기가 어렵다. 특히 고대어를 모르면서 현재의 한글과 한자로 고대지명을 풀이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충주의 향토사에서도 고구려 지명인 상모면이 왜색이 풍기는 수안보면으로 개칭되었고, 이류면은 작은 원터의 명칭인 대소원면이 되었으며, 가금면은 석탑의 별칭인 중앙탑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충주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나타난 지명들도 마찬가지다. 지명을 바꾸는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수없이 존재한다. 지명을 바꾸면서도 지역의 특성을 살려서 보다 좋은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원성의 역사는 ?
충주시의 연혁에 의하면 국원성은 충주의 옛 지명이라고 한다. 국원성이란 지명은 충주시의 건치 연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지명이다. 국원성은 국원소경과 중원경으로 이어져 왔기에 장미산성과 중앙탑 일대로 추정한다. 이는 삼국시대의 무덤인 고분들의 분포와 유적에서도 나타난다. 국원성과 중원경은 달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충주읍성과 충주산성은 달천의 동쪽에 위치한다. 동달천과 서달천은 무엇이 다를까 ? 동달천인 청풍의 유래는 사열이일까 ? 사을미일까 ? 충주고구려비와 충주탑평리칠층석탑은 왜 장미산성 아래에 있을까 ? 국원성이란 지명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한산군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생긴 지명이다. 삼국사기 지리편에는 북한산군은 양주라 하고, 남한산주는 광주라고 하기에 국원성은 남한산주의 중심이 아니라, 최전방의 군사 요충지일 것이다. 훗날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지배하면서 국원소경이 신주의 중심이 되고 남한산주인 광주가 최전방 요충지로 자리를 바꾼다. 삼국사기에는 낭자곡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처음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전투의 기록은 없고, 백제가 신라의 영역을 침범하여 양국의 관계가 좀 거북해졌다는 것이다. 낭자곡성은 신라의 땅은 아니지만, 신라에 우호적인 세력이 지배했다는 이야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낭자성과 낭비성을 청주의 옛 지명으로 비정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자곡과 비성일 뿐이며, 후대에 서원술성이 나타나고, 상당현도 고려사 지리지에 등장한다. 청주의 고지명은 낭성보다는 청천의 옛지명인 살매현에서 찾아야 하지만, 부모산성이나 우암산성 보다도 후대에 만들어진 상당현과 상당산성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북도와 충주시의 연혁에서 고대사는 마한과 백제라고 하지만, 역사서와 지리지에는 청주와 달리 충주는 고구려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지배기간은 불과 백여 년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삼한과 삼국의 접경지였던 충주지역에서 이어지는 삼국시대의 정서는 백제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떠올린다. 이는 백제의 미을성도 한산하이고, 고구려의 국원성도 한산군이고, 신라의 국원소경도 한산주(한주)라는 것이다. 국원성의 역사가 한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과 경기도는 삼국시대가 아닌 조선왕조의 한양도성을 떠올릴 뿐이다. 국원성과 국원소경의 역사에서 신라의 9주 5소경과 중원경은 까마득한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충청도에서 충주라는 지명은 고려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지명이지만, 충주의 고대사는 충주성과 충주읍성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국원소경의 이야기인 것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예맥이 지배한 강원도를 무시하지만, 예맥이라는 명칭도 고구려의 별종이라기 보다는 한반도를 문화권으로 하는 정치세력일 뿐이다. 고구려의 국원성의 지리적 특성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삼국의 접경지이다. 삼국이 충돌한 남한강 유역에서 노음죽현과 사열이현 사이에 존재했던 국원성의 영역은 얼마나 될까 ? 크게는 한강이지만, 작게는 달천과 청미천 유역이다. 국원성의 영역도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삼국의 국경선이 아닌 조선팔도와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놓고, 까마득한 세상을 상상할 뿐이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연혁과 주. 군. 현의 변화에 따른 지명들이 나타난다. 12세기 중엽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당시의 고문서들을 인용하여 편찬되었으나, 원삼국시대와는 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렸기에 신라의 9주 5소경과 고려의 5도 양계를 중심으로 기술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사 지리지나 세종 지리지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 지리서에도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기술되어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의 지방제도보다는 현재의 행정구역에 따른 시각으로 고대역사를 바라본다. 삼국시대 한강유역의 국경선은 700년에 걸쳐서 수없이 변경되었기에 특정세력이 한강을 지배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역사의 흐름에서는 무의미하다. 삼국의 역사는 나라마다 최고의 전성기를 기준으로 역사를 쓰는 것이 관례일 것이지만, 반대로 보면 상대국은 소국 또는 무능한 국가로 전락한다. 삼국의 전쟁사에서 신라가 승리하였기에 우리의 고대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역사의 향기는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기간에 따라 지역적 특색이 다르게 나타난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는 보았을까 ?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가 없어도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를 더 자세히 이여기할 뿐이다.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없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국원성(400년경)과 국원소경(550년경)과 중원경(750년경)이란 지명은 같은 시대가 아니라, 35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는 역사란 것이다. 지금 부터 350년 전이란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때쯤이라고 상상하면 될 것이다. 무엇을 상상할까 ? 350년이란 세월은 중국의 역대왕조도 영위한 적이 없다. 중국을 통일했다는 진시황과 진나라는 몇년이나 버텼을까 ? 고작 38년 이다. 일제강점기 36년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 한장의 글로 350년이란 세월을 표현할 수도 없지만, 점 하나만 잘못 찍어도 전혀 다른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수없이 많은 오류와 왜곡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를 부정하기보다는 왜 그랬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국원성의 설치시기는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는 충주 고구려비뿐만 아니라, 국원성의 설치 시기도 추정만 할 뿐이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비문에도 설치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사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371년에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한강 일대는 물론이고, 서해와 일본열도까지 지배한 것으로 과장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공격을 하고, 신라와 가야와의 분쟁을 외교전으로 유지한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을 죽이지만, 그 후환이 두려워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옮긴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391년에 왕위에 오르고, 393년에 신라의 실성을 인질로 잡고, 396년에는 백제의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신라와 백제를 속국으로 삼는다. 광개토왕비에 400년에 신라를 침입한 가야 또는 왜를 정벌하고, 고구려 장수왕은 425년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고,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저항하자, 475년에는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금강과 낙동강의 상류까지 점령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삼는다. 삼국시대의 전쟁사에서 국원성의 설치 시기와 충주고구려비의 설치 시기는 언제일까 ? 371년에서 475년까지의 백년의 전쟁사에서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에 나타나는 지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396년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 때, 예맥이였던 강원도 지역은 누가 지배를 했을까 ?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기 이전에 한강의 지류인 임진강 북부와 북한강과 남한강 상류는 고구려 영역에 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이끄는 5만의 군사의 이동 경로는 남한강의 중심인 국원성을 경유하여 죽령과 조령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고려시대에 태조 왕건의 전투경로 뿐만 아니라, 거란과 여진, 합단적과 홍건적의 침입 경로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일부에서는 남한강을 백제의 영역으로 간주하지만, 백제는 396년에 속국이 되었기에 종주국인 고구려의 원정군이 속국의 영토를 통과하거나 속국 내에 군영을 설치하는 사례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김춘추와 고구려와의 외교에서도 죽령과 조령인 계립현 또는 마목현이 나타나는 것도 고구려가 예맥지역인 강원도를 영토로 인식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백제가 북한강 유역인 춘천과 남한강 유역인 충주를 지배했다고 하지만, 이 지역들은 일시적인 분쟁지역이기에 백제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난 지명으로 백제가 낙동강 상류인 영주까지 점령했다고 주장하지만, 한강의 지류인 달천 유역인 괴산(괴주)도 일시적인 분쟁지역이었을 뿐이다. 충청북도의 연혁에서 동북부 지역인 제천과 단양과 청풍이 전통적으로 삭주인 강원도에 속했던 것이고, 중북부인 충주와 괴산 그리고 진천과 음성과 증평이 한산군인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것도 국원성의 설치에 따른 것으로 추정한다. 향토사에서는 국원성과 충주고구려비를 설치한 년도가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당시의 역사의 흐름과 배경을 고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국원성과 인접한 지역들의 지명들을 살펴본다. 어떻게 변했을까 ? 왜 그렇게 변했을까 ? 현재란 의미는 무엇일까 ? 미래를 우려하는 것도 바보지만, 과거에 집착하는 것도 바보들이 하는 망상이다. 하지만, 그 망상들이 모여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인 것이다.
1. 남한산군과 국원성에 대하여
2. 개차산군과 노음죽현에 대하여
3. 잉근내군과 상모현에 대하여
4. 금물내군과 도서현에 대하여
5. 나(내)토군과 사열이현에 대하여
6. 국원성과 9주 5소경에 대하여
7. 쇠금과 쇠철에 대하여
8. 성열현과 사열산성에 대하여
9. 낭성과 낭비성에 대하여
10. 가야와 국원소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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