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에는 열두대가 없다.
충주 탄금대를 다녀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충주시민도 탄금대와 열두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지만, 열두대는 없다. 열두대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패한 신립장군의 무용담을 미화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의 탄금정이 있는 절벽을 일컷지만, 탄금대에 세워진 신립장군에 대한 비석들과 유래비는 모두 최근에 세워진 것들이다. 신립장군이 열두번이나 뛰어 올랐다는 열두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당시의 총사령관인 신립장군이 열두대에서 무엇을 지휘하고, 어디로 활을 쏘았을까 ? 삼국지와 같은 소설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구한말에 쓴 이만도의 향산집에는 아홉번 뛰었다는 신립장군의 무용담이 나타난다. 그 상상력이 열두대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 임경업 장군의 일화에는 어릴 때 놀았다는 삼초대가 있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이 쓴 "탄금대기"가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된 녹취록을 근거로 쓴 지명유래가 오늘에 이른다. 임진왜란 충주전투는 달천뜰에서 전개되었는데, 왜 탄금대가 패전지로 각인되고, 흉지로 전락했는지 되새겨볼 일이다. 왜곡된 신립장군의 무용담과 왜곡된 비석들은 사라져야하고, 그곳에는 탄금토성과 양진명소사가 복원되어야한다. 하지만, 오늘도 충주 탄금대에는 왜곡된 신립장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열두대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흐름과 머무름 속에서는
탄금대는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다. 하지만, 탄금대에는 우륵선생이 살았던 신라시대의 유적은 없다. 가야금에 관련된 탄금대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나타난다. 고려시대 김부식(1075~1151년)이 쓴 삼국사기와 탄금대에 흐르는 이야기를 채록하여 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임진왜란 충주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되어 오늘날 탄금대를 이야기한다. 탄금대에 맴도는 전설은 조선시대 선비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탄금대와 우륵이 쉬었다는 금휴포는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이며, 누암의 청금정은 조선 중기에 신익성의 낙전당집에서 나타나고, 사휴정과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다산 정약용의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조선 후기의 기록이고, 열두대와 탄금정은 근. 현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물길따라 오가면서 가야금과 가무를 즐기는 우륵의 신선놀음을 상상했을 것같다. 하지만,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전으로 신선놀음은 패전을 넘어 패망이라는 슬픔과 눈물로 신립과 함께 죽어간 팔천고혼의 넋을 달래는 곳으로 변한다. 탄금대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 없어도 우륵의 전설이 맴도는 것처럼,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흔적이 없어도 신립장군의 전설이 맴도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기록과 유물이 있어야만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허구일 뿐이다. 선비들이 노닐던 탄금대 금휴포에는 그런 역사가 머물러 아직도 패전과 패망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있다.
탄금대기비(彈琴臺記碑)
충의 주됨이 진역의 중에 당하여 교악이 남에 환옹하고 한수와 달천이 동과서로서 내회하여 산명야옥천미석수하며 수운이 일방으로 영을 간하여 낙에 연결하고 일방으로 경성을 거쳐 해에 달하니 진실로 남북의 인후요 교통의 요충으로서 고로부터 국원 또는 중원을 칭해옴이 도이함 아니라 바야흐로 고구려와 신라가 패를 쟁하매 마현죽령을 필선으로 하여 혈전을 중첩하고 및 신라 의를 득하매 차지로서 소경을 삼아 귀척자제와 육부몽민을 사하여 이를 실하니 이래일천년에 한결같이 경과 도와 목과 영으로서 국중에 중시되고 권석섭토가 사규중에 일물아닐이 없다. 대문산일록이 양수의 교회점에서 벽개척절하여 천인앙고의 벽이 일도분유의 창강을 포하고 주조원근의 풍물을 관령하는 자를 탄금대라 이르니 일즉 악성우륵이 일대독득의 묘조와 천고불전의 비음을 청풍유수에 탄주하여 현중의 우와 지하의 파로써 천을 격하며 신을 동하던 지라 그러나 이조오곡은 전진이 사막허가니와 후의 기대임하는 인으로 하여금 유구유신의 감개를 금치 못하게 하는 자이 별로 존함이 있다. 선조용사의 왜란에 국에 비 없고 해에 환이 닥쳐 구망의 간에 영이남이다 적의 유린에 맡겨지고 조정이 창황하여 숙장신립을 기하여 순변사로 삼아 보장한위의 책을 위비하였으니 유세의 하에 천참이 또한 용되지 못하고 적의 대중이 분로해 영을 넘어 일시에 살도하니 거의 천이요 인력이 저주할 바가 아니었다. 입이 본대 역전상승의 명장이요. 막좌에 김여물같은 이가 있으되 사 차에 지하여는 計를 도검의 상투에 구할수 없음을 알고 결연히 퇴로를 단하고 주부를 심파하고 일전필사의 배수진을 금포탄두에 포하니 의 와와전에 없고 지 옥쇄에 전함이라 뇌격전격 끝에 악권투조한 일군장졸이 혼연 순국성인의 일단으로 화하고 입은 영웅미사의 심과 천지불마의 한을 장강백파에 투고하니 어찌그리 장쾌 여 늠열함 정대광명하기 적일랑월과 같으뇨 천은 비록 정경 기승을 간하였으나 인은 넉넉히 저양의 고촉 계승코 여 있어 활적의 심담을 한율케 하였음이 모론이며 또는 돌기예봉을 차주하여 한도의 급을 소완한 공도 가몰치 못할 것이다. 대저 칠년풍마대소백전에 의기영웅으로 천고에 광요할 자는 특히 금산 진주아 함께 금포를 거할 거이요. 삼자의 중에서도 초두수범의 장거로서 금포 추하여 최를 삼지 아니치 못할 것이어늘 세에 혹 부의를 문함은 다만 영웅의 진면목을 성패이외에 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대상으로 부 모를 방하여 빙촉할진대 일구일학 다(?)영의 승지요 일외일오가 무비 회심의 명구라 화국의 문장은 강수가 탁이하고 입신의 필법은 김생이 난언하며 김윤후의 적개는 산성이 첩첩하고 최홍사의 행검은 도안이 냉냉하며 담연녹무에 예성의 古宅이 의포하고 두붕청화에 양촌의 유탑이 은약하며 우의는 포대선동에 표불하고 범번은 경비사탑하며 조운의 구참은 포곡에 역력하고 도이의 공로는 극진이 황예하니 지사흥감의 경과 소인 영탄의 정이 일대를 환하고 서로 영발하여 거의 응접에 가치 못할 것이 있다. 하물며 서풍낙일에 단월을 요지하면서 삼척용천만권서황천생아하여를 낭연일음할 때에 의기 남아의 장회가 울불하고 강혈이 비등하여 획연한 장소로 천지를 열파치 말지 아니케 하는 호흥은 진실로 부운원수롱 도휴와 조비어약춘화추월의 심상한 승개에 중의상상 발영케 하는 곳에 무궁한 광예가 忠의 내일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충의 사ㅣ능희 자구자려하여 지령을 발양하고서 사적을 증상하기에 퇴타함이 없을 진대 충의 과긍이 昔日의 국원소경에 있을 것 아니라 도리어 당래세계에 대한 인물의 연수와 문화의 원천됨에 있을 것이요. 그러할진대 이 대에 내유하는 인의 충에 향한 탄미흠송이 더욱 가리히 못할 것이다. 월악이 아아하며 한수가 양양하며 만고청풍이 장취코 단치 아니하리니 충의 지어찌 강좌의 일오구로 말며 탄금의 대 어찌 한인의 일공극지됨에 그치랴 일편정민이 이를 타일에 험힐 것이다.
단군기원사천이백팔십칠년사월일 충청북도
비문은 육당 최남선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로 군수 정희택이 세우려 계획하고 후임군수 김용은이 완성한 것이다
낙전당집 제1권 / 시(詩)○칠언고체(七言古體)
〈청금정도〉에 쓰다〔題聽琴亭圖〕
노인은 세상일에 종사하기 견디지 못해 / 衰人不堪供世事
초가집 한 채 동회 골짜기에 지었네 / 誅茅一把東淮谷
거문고와 책은 뒤집혀 좌우에 버려졌고 / 琴書顚倒拋左右
북창에 시원한 바람 부니 홀로 조용히 누웠네 / 北窓淸風臥幽獨
어디선가 온 박생이라는 미소년이 / 何來朴生美少年
소매에서 용면의 그림 한 폭 가져왔네 / 袖中龍眠畫一幅
이것이 누암에 있는 청금정이라 하는데 / 言是樓巖聽琴亭
정자는 월탄의 첫 번째 구비를 마주했네 / 亭臨月灘第一曲
상류의 형승은 대략 알고 있으니 / 上游形勝領略盡
신라의 유적도 이목에 남아 있네 / 羅代遺蹤在耳目
손으로 우선의 백 자 누대 가리키니 / 指點于仙百尺臺
산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 있네 / 金生廢菴山之足
무엇보다 옛날 탄수가 살던 전원이니 / 最是灘叟舊田園
회옹의 강가 집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 何如淮翁江上屋
백 이랑 논은 푸른 빛 드물지 않고 / 百頃䆉稏靑不稀
천 줄기 버들은 묶은 것처럼 빽빽하네 / 千柄芙蓉森如束
묻노니, 그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 問汝此中何所事
위로는 늙은 형 섬기고 아울러 친족 거두네 / 上事老兄兼收族
처자는 손수 물 긷고 절구 찧으니 / 妻兒手自操井臼
가난한 선비의 생애는 벼슬을 바라지 않네 / 貧士生涯不干祿
손님 맞아 낚시 드리우면 고기 제법 팔팔하고 / 迎賓垂釣頗潑刺
닭 잡고 기장밥 지어 나물 섞으리라 / 殺鷄爲黍雜野蔌
회옹이 기뻐하며 약속하는 말 있으니 / 淮叟欣然有成言
가을이 오면 도담, 귀담, 옥순봉 찾아 / 秋來欲訪島龜玉
일엽편주 타고 차례로 청금정에 오르면 / 扁舟歷登聽琴亭
그림 속의 산천이 응당 빽빽하리라 / 畫中山川應簇簇
이에 술잔 들고 위쪽에 시를 쓰니 / 於是把酒題上頭
지는 노을과 외로운 따오기 저버릴 수 있으랴 / 肯負落霞與孤鶩
[주-D001] 용면 : 송(宋)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주-D002] 우선의 …… 가리키니 : 탄금대를 말한다. 우선은 우륵(于勒)이다.[주-D003] 탄수(灘叟) : 이연경(李延慶, 1484~1548)으로, 호는 탄수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공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주-D004] 닭 …… 지어 :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하조장인(荷蓧丈人)이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묵게 하면서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論語 微子》[주-D005] 도담(島潭), 귀담(龜潭), 옥순봉(玉筍峯) : 모두 단양(丹陽)의 지명이다. 《林下筆記 卷13 文獻指掌編 湖西四郡》[주-D006] 지는 …… 있으랴 : 당(唐)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넓은 하늘과 한 가지 빛이라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구절이 있다. 《古文眞寶 後集》
낙전당집 제4권 /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광릉의 배 안에서 청금정 주인을 만나 구봉(九峯 송익필(宋翼弼))의 시에 화운하다〔廣陵舟中逢聽琴亭主人和九峯詩〕
점점이 보이는 구름과 산, 면면이 드러난 언덕 / 點點雲山面面堆
작은 산마루 가파른 곳에 몇 칸 집이 열렸네 / 小崢嶸處數椽開
눌옹의 시는 삼강의 풍경을 담아냈고 / 訥翁詩攬三江色
우륵의 가야금은 만고의 누대에 전하네 / 于勒琴傳萬古臺
두 번째〔其二〕
나는 백로 멱 감는 오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 飛鷺浴鳧自朝暮
떠가는 구름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 浮雲流水還今古
배 안에서 구봉의 시에 하나하나 화운하며 / 舟中細和九峯詩
술잔 잡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강에서의 오후 / 把酒沈吟江日午
[주-D001] 눌옹(訥翁) : 박상(朴祥, 1474~1530)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신익성 (申翊聖) (1588 ~ 1644)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의 부마.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전론자로 척화론을 주장하였으며, 칼을 뽑아 주화파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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