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의 아름다운 외침
탄금대에 올라서면 탄금대 공원 안내판 옆에 탄금대 사연 노래비가 제일 먼저 보인다. 탄금대 사연의 가사에는 산새도 울고, 물새도 울고, 강물도 울고, 가야금도 운다. 비록 시류에 편승한 노래지만, 노래비는 탄금대를 울고 우는 슬픔을 간직한 장소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탄금대 사연의 작사와 작곡과 노래비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 그들은 탄금대의 진실보다는 시인 문객처럼 탄금대에 흐르는 정서를 표현했을 것이다. 탄금대의 왜곡된 역사는 탄금대기를 쓴 육당 최남선과 우륵선생 추모비를 쓴 월탄 박종화의 붓끝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역사의 진실보다는 애향심에 호소하는 잘못된 관행에서 기인한다. 탄금대기비와 우륵 추모비는 탄금대와 우륵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공적비일 뿐이다. 탄금대 토성과 양진명소사를 훼손하면서 세워진 신립장군 순절비와 순국 지지비는 역사왜곡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전으로 얼룩진 오명을 왜 탄금대가 뒤집어 쓸까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다산 정약용의 역사관과 신채호의 역사관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잘못된 역사관으로 인하여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을 제천으로 추정하는 빌미가 된다. 우륵이 고령가야인 대가야 출신이기는 하지만 고향인 성열현에 대한 지명은 위치를 비정할 수가 없다. 성열현의 위치 논란뿐만 아니라, 강수의 고향인 임나가량도 임나가야로 왜곡된다. 이런 현상은 악순환을 반복하다 전혀 다른 역사로 변질된다. 탄금대에 세워진 왜곡된 추모비와 기념비로 인하여 신립의 패전의 한이 우륵의 망국의 한으로 변질되고, 탄금대는 열두대로 왜곡되는 것이다.
(자료 충주시립 우륵국악단: 우륵의 아름다운 외침)
우륵선생 추모비에서
탄금대 주차장에는 월탄 박종화가 쓴 우륵선생 추모비가 있다. 역사소설의 대가인 박종화 선생이 쓴 우륵선생의 추모비문은 역사가 아닌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추모비문에는 "신립장군의 배수진과 천추의 한"이 언급된다. 우륵 선생이 후대의 인물인 신립과 무슨 연관성이 있었을까 ? 삼국사기에는 우륵이 가야가 멸망하기 전에 가야를 등지고, 귀순해서 진흥왕과 만난 것인데, 귀순한 악사에게 "망국의 한"을 운운하는 것은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우륵이 탄금대에서 "망국의 슬픔과 망국의 한"을 가야금으로 연주해서 지역민을 선동했다면 악사가 아니라 간첩 또는 역적으로 취급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고국인 대가야와 고향인 성열현이 그립겠지만, 삼국이 전란으로 혼란한 시기에 "망국의 슬픔과 망국의 한"을 운운하는 일은 용납되질 않는다. 우륵과 진흥왕의 만남은 진흥왕과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만남과 같은 맥락이다. 김무력도 금관가야(김해)를 신라에 복속시키고, 신라와 진흥왕을 위하여 중원경과 한강 일대를 점령하고, 점령한 신주의 군주가 된 인물이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망국의 한을 무엇으로 풀었을까 ? 김무력의 꿈은 그의 손자인 김유신과 손주 사위인 김춘추에 의해 완성되었을 것이다. 진흥왕과 김무력의 대업에 동조한 사람이 우륵일 것이다. 우륵이 가야에서 만든 12곡이 가야를 위한 것이라면, 낭성에서 연주한 5곡은 신라의 번영과 승리를 위한 애국가일 것이다. 이는 삼한통일의 꿈을 위해서 기존 세력을 혁파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전략이다. 우륵은 고국인 가야의 "망국의 슬픔과 망국의 한"이 아니라, 신라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선봉에 선 악장이었을 것이다. 강수 열전의 기사도 마찬가지다. 강수가 삼국통일을 위한 외교에서 백여 년 전에 멸망한 가야 출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충주 산골에 사는 촌놈이라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이다. 소대가리(우두)와 쇠대가리(강수)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 우리말 이름을 중국식 이름으로 표기한 것뿐이다. 소대가리나 쇠대가리는 같은 의미일 것이다.
기념비와 추모비는 무엇이 다를까 ? 공적비와 선정비는 또 무엇이 다를까 ? 탄금대에는 우륵 선생 추모비가 아닌 기념비 같은 공적비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 옭을 것이다. 중원경을 빛낸 3인의 기념비에는 우륵과 강수와 김생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 소대가리가 쇠대가리보다 무식한 표현일까 ?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열왕이 우두를 강수라고 부르려고 했으나, 임생이라고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표현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우륵과 우륵선생은 무엇이 다를까 ? 우륵선생과 악성우륵은 또 무엇이 다를까 ? 대문산이 견문산으로 전해진 것도 바보 같은 발상들 때문이다. 우륵선생 추모비보다는 우륵 선생 일대기를 세우는 것이 탄금대를 위하는 길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륵과 강수와 김생의 일대기를 탄금대 공원에 세우는 것이 기록의 보존일 것이다. 충주고구려비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 ? 단양 신라 적성비와 같은 내용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처럼 승자의 세상을 자랑한 것이다. 탄금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 탄금대의 흐느낌이 아니라, 탄금대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흘러야 하는 것이다. 역사란 그늘 아래 선 소대가리와 쇠대가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수의 실력과 소신이 역사에 남은 것이고, 소대가리 마누라인 강수의 처가 이름도 없이 역사에 남은 것은 귀천이 아니라, 청백리의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다. 탄금대에는 왜 강수의 처에 대한 기념비가 없을까 ?
[참고자료]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樂聖于勒先生追慕碑)
"忠州는 예로부터 國原城 또는 蘂城이라고 일컬어져 왔고 韓國의 中央 地帶에 位置하고 있어 中原 또는 忠州라고 불리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일찍이 新羅時代부터 文學과 歌舞가 盛行하여 可謂 文化의 고장으로서의 傳統과 面貌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特히 彈琴臺는 新羅의 樂聖 于勒이 伽倻琴을 彈奏하든 由緖깊은 곳이며 壬辰倭亂 當時에는 巡邊使 申砬將軍이 背水陣으로서 倭敵과 奮戰하다가 마침내 戰勢不利로 千秋의 恨을 남긴 채 殉國成仁한 戰跡地로서 有名한 곳이기도 하다. 樂聖 于勒은 伽耶國人으로서 王山岳先生 또는 蘭溪朴堧 先生과 더불어 우리나라 三樂聖 中의 한분이시다. 伽倻國이 新羅 法興王 十九年(五三二·AD)에 滅亡하자 樂聖 于勒은 新羅로 亡國恨을 달래었고 十二藥曲을 大成한 곳이 바로 이곳 彈琴臺의 大門山이다. 至今도 彈琴臺에는 于勒이 寓居하였다고 믿어지는 建造物의 遺趾가 발견되고 있다. 樂聖 于勒이 이곳 山上에서 山紫水明한 周圍의 風光을 바라보면서 亡國의 슬픔과 望鄕의 恨을 달래며 伽倻琴을 彈奏할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 優美 淸雅한 音曲에 陶醉하여 떠날줄을 몰랐다고 한다. 오늘도 彈琴臺에 오르면 저 아득한 千四百餘年의 歲波를 타고 哀歡에 젖은 伽倻琴의 玄妙한 音律이 은은히 들러오는 듯하며 變轉無雙한 世態의 無常함을 불현듯 일깨워 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彈琴臺하면 樂聖 于勒을 聯想하고 象徵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實로 于勒先生이야말로 新羅 眞興王代의 文化史를 아름답게 繡놓은 樂聖이시었으며 當時 이 고장 文化와 藝術에 크나큰 影響과 發展을 이룩하게 하였든 것이니 오늘날까지 連綿히 이어온 伽倻琴의 傳來와 함께 이곳 아름다운 遺蹟인 彈琴臺를 圍繞한 山河와 더불어 永遠토록 그 빛을 더하여 가리라. 이에 우리는 樂聖 于勒 先生의 偉業과 넋을 追慕하고 기리는 마음과 이 고장 文化와 藝術의 中興을 다짐하는 뜻에서 第七回于勒文化祭에 즈음하여 同志들의 뜻을 모아 삼가 이 碑를 세우노라" 西紀 一九七七年 十月 二十日 追記 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忠州支部長 醫學博士 虛齊 金豐埴外 會員一同은 碑를 세우고, 藝術院會長 文學博士 月灘 朴鍾和는 글을 지었으며, 醫學博士 西峰 金思達은 글을 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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