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대사의 중심에는 국원성(國原成)이 존재한다. 그러나, 국원성과 국원소경에 관한 고찰이 미미하여 국원성과 국원소경은 물론이고, 중원경도 지명만 나열할 뿐이다. 발굴조사에서도 그와 관련된 유물은 미미하고, 충주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도 비석의 발굴 과정과 비문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들어서면 한국사가 아니라, 향토사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 고구려비 전시관에는 고구려의 이미지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사 연대표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지배한 역사는 물론이고 국원성 이전의 고대사가 백제(마한)로 표기되어 있어, 고구려는 백제 또는 신라의 지배자가 아닌 철기군으로 무장한 침략자로 묘사될 뿐이다. 이는 충주의 고대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백제가 건국초기에 말갈과 싸운 것은 말갈의 영역에 건국을 했기 때문이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는 말갈과 예맥에 대한 역사가 없기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지배하는 과정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시기는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한 475년 이후로도 추정할 수도 있으나, 광개토왕비와 충주 고구려비 등으로 밝혀진 내용조차도 충주의 고대사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충주의 고대사는 삼한 또는 삼국의 국경선 변화가 혼란하기에, 특정한 세력이 지배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고구려(150년)와 백제(150년)의 통치기간을 합하여도 약 300년 정도에 불과하다. 원삼국시대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와 비슷한 세력의 소국일 뿐이다. 기원전에서 4세기 말까지의 충주의 고대사를 마한(백제), 진한(신라), 예맥(고구려) 중 어떤 세력이 지배했을까 ? 충주의 고대사를 왜 마한(백제)으로 인식했을까 ? 이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부정하는 역사학계와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에도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 영역으로 나타나지만, 충주시 연혁이나 향토사에서 충주의 고대사는 청주의 고대사를 빌어와 마한과 백제로 표기될 뿐이다. 이 글은 국원성의 지명유래를 고찰하면서 국원성의 본래 지명과 위치비정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최근에 발굴 조사된 자료를 근거로 보완하여 추정해본 것이다. 고대 역사문화의 분류에서 중원역사문화권의 중심인 국원성의 역사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의 흐름과 머무름 속에는 모든 것이 쉼 없이 변화한다. 역사란 관점도 특정한 시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과 머무름에 따라야 한다.
예맥과 진한에 대하여
충주고구려비에 나타나는 우벌성은 어디에 있을까 ?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낭자곡성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 충주는 마한의 역사일까 ? 충주는 백제의 땅이었을까 ? 조선시대 김종직의 시처럼 "진한이라 천년의 국원고을"이라고 인식했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는 충주의 역사가 마한과 백제땅으로 변한다. 이는 임진왜란 충주전투 이후에 충주의 지세가 쇠락하고, 충청도의 관아도 청주와 공주 등으로 이관되면서 백제의 역사를 답습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남한강의 역사가 충청도라는 지방제도에 따라 충주라는 작은 도시로 전락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가 발굴된 이후에도 한국의 고대사뿐만 아니라, 충주의 향토사도 변하지 않았다. 충주고구려비와 남한강을 바라보며 충주의 고대사에 "왜"란 화두를 던져보자. 충주의 고대사는 왜 사라졌을까 ?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 [시(詩)]
경영루에서 차운하다[慶迎樓次韻]
진한이라 천년의 국원 고을에 / 辰韓千載國原區
다시 층루가 있어 동북방 모퉁이를 눌렀네 / 更有層樓壓艮隅
길은 옥구사로 나서 바르게 경계를 지었고 / 路出玉鉤森作界
땅은 금잔지를 나누어 그림을 이루었도다 / 地分金盞簇成圖
웅대한 바람은 또 옷깃을 헤쳐 받을 만하고 / 雄風且可披襟受
취한 글씨는 갓 벗고 읊는 것도 무방하겠네 / 醉墨休妨露頂呼
서북으로 바라보니 어느 곳이 서울이런가 / 西北望京何處是
외로운 돛대 아득히 푸른 들판에 닿았구나 / 孤帆渺渺接平蕪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예맥과 말갈 등은 한강의 지류인 북한강과 임진강 유역에서 백제와 충돌하고, 동해안을 따라 신라와 충돌하지만, 신라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이는 중국의 진. 한시대에 고조선과 동이족의 유민에 따른 이합집산으로 소국들이 등장한다. 고조선이란 고대국가가 강력한 왕권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것도 아니기에, 한반도 전체를 고조선으로 볼 수도 없고, 고구려나 백제와 신라도 소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시작되었고, 삼한인 마한과 진한과 변한은 진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국가나 지배세력은 민족과는 거리가 먼 정치집단의 권력에서 형성되기에 종족이나 민족을 운운하는 것도 구시대의 산물이다. 삼국사기는 왜 삼한과 삼국으로 정립했을까 ? 이는 고려 시대에 역사를 쓴 김부식의 관점이다. 고려시대의 역사관은 당시의 영토를 기준으로 삼국사를 썼고, 북방세력의 침입에 따른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픈 열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신라의 역사를 승계했지만, 고구려를 뿌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이후에 나타나는 수많은 소국들은 지배세력과 영역에 따라 삼국으로 정립되어 사라진다. 가야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면 사국사가 되는 것이고, 영산강 유역의 해상세력을 포함시키면 오국사가 되는 것이고, 남. 북국시대나 후삼국시대로 분리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와 남. 북한으로 분단된 역사를 천년 후에는 어떻게 정리될까 ? 대한제국은 조선 말기로 표기될 뿐이고, 일제강점기와 남. 북한으로 분단된 역사는 새로운 국가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한의 장수와 맥국의 거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낭자곡성과 국원성이란 지명은 백제가 아닌 신라의 영역임을 말해준다. 삼국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낭자곡성은 신라와 충돌 없이 백제가 지배하지만, 와산성과 구양성에서는 신라와 충돌한다. 하지만, 낭자곡성이라는 지명은 서기 63년(백제 다루왕 37년, 신라 탈해왕 8년) 이후로는 나타나질 않는다. 백제 다루왕이 서기 63년에 점령한 낭자곡성은 어디일까 ? 낭자곡성은 청주로 비정하기도 하고, 충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무주공산인 낭자곡성을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정리하면, 서기 40년에는 맥국의 거수가 신라와 친교를 맺고, 서기 61년에는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신라에 바치고,항복을 한다. 삼국사기의 맥락으로 보면 낭자곡성은 복암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낭자곡성은 점령했지만, 와산성과 구양성은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를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낭자곡성 뿐만 아니라, 복암성과 와산성과 구양성의 위치를 알 수가 없기에 청주와 충주 일대로 비정하는 것 뿐이다.
신라의 아달라왕이 계립령과 죽령을 개설했다는 것은 한강 상류까지 신라영토를 확장하고 계립령과 죽령에 관문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백제로 도망간 사건이 발생한 후인 서기 167년(아달라왕 14년)에는 일길찬 흥선의 2만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고, 아달라왕이 9천의 기병을 이끌고 한수의 빼앗긴 두 개의 성과 영토를 되찾는다. 서기 190년에는 백제 초고왕이 구양성과 와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지만, 백제 고이왕은 신라 첨해왕과의 괴곡과 괴곡성 전투에서 패하고, 서기 286년에는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고 사망한다. 낭자곡성을 청주나 충주로 비정하면, 청주와 충주는 서기 63년에 백제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만, 백제가 청주나 충주에 진출한 시기는 초고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청주나 충주지역의 발굴조사에서도 백제시대의 유물은 3세기 초기에서 4세기 말까지는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세기 초기에서 4세기 말까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지만, 고구려 고국원왕(331~371년) 때 중국의 연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여 왕모와 왕비는 물론 선왕인 미천왕의 무덤 속 시신까지 전리품으로 갖고 철군을 한다. 고국원왕은 연나라에게 패전하고 치욕을 겪으며 국력이 쇠약해진다. 백제의 근초고왕(346~375년)은 371년에 전란을 수습하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그 후환이 두려워 수도를 한수 이남으로 옮기지만, 고구려는 소수림왕(371~384년) 때 국가체계를 확립하고, 375년에 백제의 수곡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광개토왕은 391년부터 영토확장을 시작하고, 396년에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속국으로 만든다. 이 시기에 백제는 신라와의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372년에 독산성주가 신라로 도주했지만 분쟁이 아닌 외교로 무마된다. 그리고 신라 내물왕(356~402년)은 393년에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지만, 조카인 실성이 401년에 돌아와 402년에 내물왕의 아들을 제치고 신라왕이 된다. 백제의 전성기라는 근초고왕의 영광은 불과 40여 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근초고왕(346~375년)의 누락된 기사를 신라 흘해왕(310~356년)에서 찾아보면 312년에 왜왕이 아들의 혼처를 요청한다. 344년에도 왜왕이 흘해왕의 딸과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한다. 345년에는 왜왕이 신라에 절교를 통보하고, 346년부터를 왜가 신라를 공격한다.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외교사신이 왕래하면서 왜의 침입은 사라진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침입하기 전에 주변국과 외교에 성공하여 고구려를 침입했지만, 고구려 고국양왕이 연나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저항하지만, 고구려 광개토왕은 삼한을 정벌하여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는다. 3세기 초에서 4세기 말까지 백제가 지배한 남한강 유역은 얼마나 될까 ? 일시적인 분쟁은 있었겠지만, 점령한 기록은 나타나질 않는다. 낭자곡성을 충주로 비정한다고 해도 백제가 충주를 지배한 기간은 길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탄금대 토성과 제철유적에 대하여
탄금대 토성과 탄금대 제철유적지 발굴조사에서 3~4세기 전후의 마한 또는 백제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전한다. 장미산성과 탑평리 고대도시 유적지에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한 기간이 짧았기에 그 유적과 유물은 신라에 비하면 일부분에 지나질 않는다. 유물 분류에서 마한의 기준은 무엇일까 ? 또 진한과 예맥의 기준은 무엇일까 ? 삼국의 국경선의 변화와 신라시대의 9주 5소경은 무엇을 의미할까 ? 한강유역에서 한주와 삭주와 명주는 왜 분리하였을까 ? 우리나라의 고대사에서 유물을 전시할때, 삼한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로 분류하는 것은 그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탄금대 토성과 제철유적은 신라와 가야의 제철유적과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을 것이다. 경주와 울산, 김해 등의 제철유적은 충주의 제철유적과 차이가 없다. 초기 철기시대는 시기만 다를 뿐 지배세력에 따른 특징이 모호하기에 마한과 백제 유물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삼한의 소국들이 영역을 확장하면서 나타난다. 발굴조사에 따른 분석은 역사학계나 고고학자들이 하겠지만, 학계나 조사기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이다. 한강유역에서 한강과 북한강과 남한강과 임진강의 차이는 무엇일까 ? 충주 탄금대(달천)와 진천 석장리(미호천)는 무엇이 다를까 ? 지배세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쉽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충주의 고대사를 삼한이나 삼국의 틀에 가두는 논쟁은 당시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기득권 세력에 따라 좌우되기에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충청북도 충주시의 고대역사를 청주와 같은 마한과 백제의 역사로 보는 발상은 현재의 지방제도와 관료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기원전에서 4세기 말까지의 충주의 고대사를 마한(백제), 진한(신라), 예맥(고구려) 중 어떤 세력이 지배했을까 ? 고대사의 특성상 특정세력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한(백제)으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마한이 삼한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기는 하지만, 그 영역은 크지 않다. 중국의 혼란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동명성왕(주몽)과 대무신왕(무휼)의 이야기도 아주 작은 소국들의 전쟁사로 추정된다. 백제의 근초고왕(346~375년) 시대를 백제의 전성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역사소설이나 대하사극에 등장하는 백제의 근초고왕은 삼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까지 지배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충주의 제철유적에서도 칠지도와 철산지가 충주로 비정된다. 칠지도를 충주로 비정하려면 충주의 지배세력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어야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삼국사기가 아닌 일본서기를 빌어 쓴 섬나라의 왕으로 비화된 느낌이다. 고대사의 흐름에서 대륙의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전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가 일본(왜)을 지배했다는 논리도 무리가 따른다. 역사라는 것이 사건을 기초로 전개되지만, 역사를 쓰는 과정에서 전설 같은 이야기가 기록된다. 막장 드라마나 소설처럼 흥미가 없으면 역사란 단편적인 사건에 불과하겠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과 시각은 다르기에 역사는 편집되고 왜곡되는 것이다. 충주의 고대사를 정립하면서도 대하사극 같은 왜곡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글도 개인적인 편견과 오만일 수는 있지만, 충주의 고대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어떨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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