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쇠금(金)에 대하여

산골어부 2022. 6. 15. 11:18

음성 망이산성 출토 철갑

금(金)에 대하여

 

탄금대 주변의 지명에서 금대, 금제(쇠저울), 금곶(쇠꼬지), 금천, 금탄, 금가, 가금, 금곡(쇠실) 등은 금(琴)보다는 금(金)으로 표기된다. 금(金)이란 지명유래는 수없이 많은 의미로 표기되지만, 탄금대 주변에서 나타나는 금(金)은 금속(金屬) 중에서 주로 쇠(鐵)를 의미한다. 이규경의 연철변증법에는 "하은주 시대에 쇠는 놋쇠이며, 구리로 만든다."라고 하기에, 금(金)은 쇠철(鐵)보다도 더 넓은 의미이며, 쇠부리란 의미도 쇠철(鐵) 뿐만 아니라, 모든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금부리와 쇠부리는 모두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탄금대 일대에서 금(金)이란 지명은 지질에 따른 자연환경과 시대에 따른 역사를 잘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누가 돌을 맞을까 ? 농담이지만, 김씨가 흔하다는 이야기다. 신라와 가야 출신 왕족도 김씨고, 대장장이 출신도 김씨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탈해왕이 대장장이인 야장(冶匠) 출신이라고 한다. 문헌기록으로 따지면 석씨인 탈해왕은 신라 쇠부리의 시조가 된다. 또한 김알지에서 파생한 신라김씨(김씨족단)도 쇠부리 출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기록에 나타난 것일 뿐이며, 철기문화는 그보다도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원삼국시대에 나타나는 정치세력은 중국의 진. 한 시대에 고조선의 멸망으로 대부분이 전란을 피해 이주한 세력으로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집단들이었다. 원삼국시대에 쇠부리는 최첨단 기술이기에 철제무기로 무장한 무리가 고대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초기철기 시대에 청동이나 황금으로 무장한 장식용 창과 방패는 더 좋은 철제무기와 철갑을 두른 철갑기병에게 무참하게 쓰러졌다. 청동기문화였던 단군신화는 그렇게 사라졌다. 고조선과 삼한의 역사도 또 그렇게 사라져 갔다. 철기시대의 상징인 철갑을 두른 개마무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철갑기병이다. 초한지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들의 무용담은 흥미진진하다. 관우와 장비가 휘두르는 무기는 무쇠팔과 무쇠다리로 만든 고철 로보트처럼 소설 속에 존재한다. 고려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무쇠로 만든 불상과 오늘날 특수강철로 만든 로보트를 비교하면 어떨까 ? 무쇠로 주조된 무기와 무쇠로 만든 로보트는 무슨 차이일까 ? 철갑기병이 다니던 시대가 끝나고, 천년이 흐른 뒤에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가마솥과 철불상. 그리고 또 천년이 흐른 뒤에 나타나는 무쇠로 만든 마징가 제트는 오류일까 ? 금(金)과 철(鐵)의 차이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 역사를 쓰면서 시대와 사실을 혼돈하면 소설 같은 연금술이 되는 것이다.

 

무쇠와 깡쇠에 대하여

 

고려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는 고려시대의 충주 철산과 철소의 현황이 잘 표현되어 있다. 탄금대와 다인철소가 있던 익안현의 달천지역뿐만 아니라, 충주지역에는 남한강의 대표적인 수석인 오석(烏石)뿐만 아니라, 쇠덩어리 같은 돌멩이와 쇠똥구리를 흔하게 볼 수가 있었다. 충주철산은 산골짜기의 너덜지대나 노천에서 철광석을 채굴하기에 하천변에서 채취하는 사철(沙鐵) 또는 사금(沙金)과 다르다. 노천에서 채취하는 충주의 철광석은 철분의 함유량이 적어 경제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철광석과 사철과 목탄 외에도 합금에 필요한 다른 금속인 금. 구리. 주석과 중석 등도 충주지역에서 출토되기에 다른 철산지보다 유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지리지에는 청풍군 며오지(旀吾之)에서 사철이 난다고 기록하는데, 며오지는 가차된 지명으로 옛 한수면 명오리로 추정되며, 남한강 모래밭에서 채취한 사철은 칼을 만드는 깡쇠를 생산하는데, 노천에서 채취한 철광석보다 더 유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인철소에서 다인(多仁)이란 지명은 달(達)과 같은 의미이기에, 이는 신라의 고대 제철유적인 울산의 달천광산과 의성의 다인면 등과 유사하고, 삼국사기에는 대구의 달구벌이 달구화(達句火)로 기록되어 달(達)이란 지명이 쇠부리와도 연관된 지명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최근에 발굴된 제철유적은 발굴조사에 따른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이 고려와 조선시대의 소규모 유적들이다. 충주의 다인철소 주변의 제철유적은 대부분이 고려시대에 있던 유적으로 원삼국시대와는 무관하다. 고대의 제철유적을 고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철광산이나 제련소를 근거로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원삼국 시대에 형성된 칠금동 제철유적과 고려시대의 다인철소와 현대의 제철산업은 그 차원이 다르다.

 

제철유적을 고찰하는 것은 그 뿌리와 연혁을 찾는 것이다. 제철유적의 고찰에서 쇠부리란 용어도 문헌으로 남겨진 것이 없다. 다만, 한글이 창제되면서 한글표기에 따라 시우쇠. 물쇠. 불린쇠. 달군쇠 등으로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삼국시대의 역사도 삼국사기에 의존하는데, 쇠부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더욱 어럽다. 제철유적의 발굴조사에 따른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지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다. 선 후기에 쓴 이규경의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에는 연철에 대하여 소개되어 있다. 철의 분류에서 무쇠(수철, 생철), 시우쇠(숙철, 연철), 참쇠(정철), 뽕쇠(깡쇠,강철) 등이 있지만, 이에 대한 속성은 전문 기술자들의 소관일 뿐이다.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을 쓴 이규경도 당시의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역사학자는 금속학자가 아니지만, 최근에 울산 달천철장의 쇠부리축제나 국립충주문화재연구소에서 제철유적과 제철기술을 재현하고 있다. 재현된 가마는 무쇠로 만드는 주물공장이나 작은 대장간을 흉내 내는 정도일 것이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된 것은 구리보다 철이 흔하기 때문이다. 더 좋고 더 많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쇠부리 기술이 발전된 것이다. 지금은 탄소섬유만으로도 강철보다도 더 좋고 강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충주제철유적의 고찰에서 일본의 칠지도를 충주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왕에서 하사한 칠지도를 만드는 기술을 재현하면 어떨까 ? 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나 할 일이다. 무쇠(水鐵)가 아닌 깡쇠(鋼鐵)을 만드는 연금술은 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대소원면과 주덕면 일대는 철뿐만 아니라, 놋쇠를 만드는 구리도 생산되며, 노은면과 앙성면 일대에서는 금 뿐만 아니라 주석과 중석 등 다양한 중금속들이 산출된다. 철제 농기구나 생활도구는 삼국시대에도 일반화된 제철산업이다. 철제 무기가 없으면 농기구를 들고 가서 싸워도 죽창보다는 나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휘두르는 칼과 창은 물론이고, 왕관을 만드는 세공기술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부곡이나 도성 내의 특수부서에서 제작한다.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이나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그 제도와 부서의 기술자나 물품의 숫자까지도 나타난다. 수년 전에 괴산군의 가마솥 제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리고, 수십년 전에는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무모하지만 대단한 도전이었다. 고려시대의 철불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무모하지만 대단한 도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라나 백제의 연금술에 비하면 예술이나 기술면에서도 수준이 대단히 떨어지는 발상들이다. 초한지에서 유방과 항우의 장수들이 신무기를 휘두르는데,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무휼이 개마무사를 몰고 다니는데,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국가로 발전하지도 못한 나라의 칠지도가 대단한 보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촌극일 뿐이다. 진흥왕과 우륵의 가야금에 대한 탄금대 이야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보다도 까마득한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명주실로 만든 가야금 열두 줄을 초고강도의 철선인 피아노선으로 바꾸면 어떤 소리가 날까 ? 물론 상상이지만, 가야금을 서양 현악기처럼 바꾸면 된다. 이것이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차이다. 역사는 복원이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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