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부리와 쇠부리에 대하여
노은면 수룡리란 지명은 수철(水鐵)과 천룡(天龍)을 합성한 지명이다. 노은면 수룡리에는 무쇠점이란 곳이 있다. 무쇠를 한자로 표기하면 수철(水鐵)이다. 무쇠로 만든 솥이 무쇠솥이다. 무쇠점은 쇠를 캐거나 부리는 사람들이 사는 촌(村)이다. 수룡리와 인접한 신효리에는 원대 마을이 있다. 원대는 본래 금부리로 원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금부리를 한자로 표기하면 금부리(金釜里) 또는 금부리(金夫里)로 표기할 수도 있다. 전자는 가마골인 부곡(釜谷)이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야철지라는 뜻이지만, 표기만 다를 뿐 같은 지명이다. 세종지리지에는 노은면 보련동에 자기소가 있다고 기록되는데, 자기소를 가마골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강수는 중원경 사량 임나가량 사람이고, 강수의 처는 부곡(釜谷)에 사는 대장장이의 딸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다인철소(多仁鐵所)라는 부곡(部曲)은 몽고군과의 충주전투에서 공을 세워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되기도 한다. 금부리와 쇠부리는 무엇이 다를까? 금부리는 야철지를 일컫는 것이고, 쇠부리는 쇠를 만드는 것이다. 쇠부리업은 요즈음 말로 제철업 또는 제철산업이란 뜻이다. 쇠부리는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울산의 달천유적을 연구한 분들이 어원의 고증을 통해 "쇠를 부리다 또는 쇠를 불리다."라고 한다. 노은면 지명유래에는 개칭송비와 금부처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이는 후대에 와전된 것으로 개칭송비는 원터가 있던 원대 마을 입구에 있던 충주 목사의 송덕비이고, 금부처는 대장간터 또는 폐허가 된 철장(鐵場)의 쇠똥구리 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대 마을에서 나타나는 원터, 금부리, 쇠똥밭, 쇳대울, 솟대울, 솟대, 효죽, 송덕비 등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기록된 노은면의 소고(蘇古)라는 지명에서 야철지 또는 고대의 유적지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금부리와 쇠부리는 무엇이 다를까? 보련산 자락에 있는 쇠바위봉과 무쇠봉은 무슨 의미일까 ? 바보 같은 상상을 역사란 그늘에 펼쳐본다. 어쩌면 역사의 그늘이란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유로움일 것이다.
탄금대(彈琴臺) 금대리(琴臺里)에 대하여
1948년도에 탄금대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쳐다본다. 무엇이 다를까 ? 우륵은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 신립은 배수진을 쳤을까 ? 탄금대 토성의 토루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탄금대 서측편에도 또 다른 토성으로 추정되는 곳이 보인다. 초등학생도 건너 다니던 달천강에서 빠져 죽었다는 신립과 김여물 장군의 이야기가 있지만, 역사는 지나간 기록일 뿐이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고, 금휴포는 우륵이 쉬었다는 강나루라고 한다. 어쩌면 탄금대와 금휴포는 고려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상상이 아닐까 한다. 강 건너편에는 김생이 머물렀다는 김생사지가 있고, 중원경 사량에는 강수와 강수의 처가 살았다고 하지만, 탄금대에는 우륵과 가야금에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수많은 이야기가 맴돈다. 우륵이 중원경이었던 탄금대에서 몇 년을 살았을까 ? 아니, 탄금대에 올라 몇 번이나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 역사는 지나간 기록이지만, 역사적 사실보다는 전설 같은 민담이 역사의 기록으로 전하기도 한다. 탄금대 토성과 탄금대 제철유적지의 발굴조사에서 3~4C 전후의 백제계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라시대의 유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옛 문헌에 나타나는 우륵과 탄금대에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이 임진왜란 이후에 신립 장군의 배수진과 더불어 패망과 패전의 한으로 나타난다. 신익성의 낙전당집에는 누암의 청금정. 다산 정약용의 시. 문집에는 사휴정과 성열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칠금동과 열두대. 최근에 지어진 탄금정 등이 있으며,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가야금(伽倻琴)의 금(琴)은 본래의 지명이 아닌 후대에 변천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탄금대 입구에 형성된 마을을 금대(琴臺) 또는 금대리(琴臺里)라고 하지만, 탄금대 토성과 탄금대 제철유적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는 양진명소사가 있는 탄금대는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기보다는 우륵선생이 대가야에서 귀화하여 국원소경에서 정착하여 지냈기에 남한강 뱃길인 탄금대에 우륵의 전설이 깃든 것으로 추정한다. 탄금대 토성은 수참과 역참 등에 따른 특별관리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철기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제련시설도 폐쇄되고, 조운제도의 변천에 따라 수군(선군)도 사라진다. 그리고, 탄금대에 형성된 금대란 마을도 금대(琴臺)가 아닌 쇠꼬지란 의미의 금곡(金谷)이나 금곶(金串)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한다. 탄금대에는 회도(回島)와 회도리(回島里)라는 지명이 잔존하는데, 회도(回島)는 탄금대섬으로 추정된다. 회도(回島)는 본래의 지명이라기 보다는 조선시대 후기인 1872년 지도와 호서읍지에 나타나기에 탄금대 지형과 면리제에 따른 지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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