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의 망월산성을 답사한 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 정약용과 신채호로 이어지던 성열성과 성열현에 관한 지명유래도 역사의 오류였지만, 아직도 향토사학에서는 성열성과 성열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사열산성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후대의 기록인 대동지지에서 고성으로 성황산 유지와 삼국사기의 기록인 사열산성이 등장하는 것도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제천의 향토사와 청풍문화재단지에는 오늘도 잘못된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우륵이나 강수의 출생지에 관한 이야기는 큰 의미가 없지만, 향토사에서 내 고장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절실한 사료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성열현이나 성열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없지만, 우륵이 가야 출신으로 신라에 망명하여 신라의 음악계를 이끌었기에 역사의 인물로 전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탄금대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우륵이 국원에 머물렸다는 기록과 후대의 탄금대 유래를 근거로 진흥왕이 머무른 낭성과 하림궁을 충주 탄금대로 비정할 뿐이다. 우륵과 강수 그리고 김생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국원 또는 중원이라는 개념을 중원경이 있었던 중앙탑 일대로 국한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사이비처럼 유사성을 근거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정약용과 신채호는 무엇을 근거로 성열현을 사열이현으로 비정했을까 ? 정약용과 신채호가 박식한 대학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근거로 사열이를 성열현과 성열성을 해석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일 뿐이다. 삼한시대의 마한 54개국의 위치비정은 어떨까 ? 일제강점기에 이병도의 역사인식도 실증사학을 내세우지만 지명의 위치비정은 식민사학과 지명의 유사성과 고대어의 잘못된 해석으로 고대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했었다. 어쩌면, 이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학계의 흐름이었다. 지금도 고대지명의 위치비정이 쉽지는 않지만, 연구를 위한 추론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쉽게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들이다. 또한 청풍의 망월산성을 무슨 근거로 성열성으로 비정할 수 있을까 ? 망월산성도 성열성보다는 사열산성이나 사열이성으로 추정하면 어떨까 ? 고구려의 사열이현이란 지명도 본래의 지명을 가차한 지명으로 추정되지만, 사열산성이나 성열성도 신라식 한자지명이기에 유사성만으로 같은 지명으로 비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삼국사기의 사열산성을 사열이성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사열산성을 만월산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8월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늘려 쌓았다는 기록에서 사열산성은 기존의 산성을 증축한 성이기도 하지만, 망월산성의 축성시기와 축성방식이 국원성 일대에 축성된 신라시대의 산성인 영월의 정양산성, 단양의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충주의 남산성과 장미산성, 문경의 고모산성, 보은의 삼년산성 등과 비교했을 때, 신라시대의 산성이라기보다는 작은 보루로 추정될 뿐이다. 그리고, 같은 시기인 문무왕 13년 (673) 9월에 국원성(國原城)(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국원성(완장성)을 장미산성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장미산성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원성은 산성이기보다는 평지성으로 국원소경 또는 중원경의 읍성으로 추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나 발굴자료도 없다. 장미산성이나 탑평리 유적지 발굴조사에서 백제,고구려, 신라의 유물이 모두 나타나기는 하지만, 공성전에 따른 전투의 흔적은 발굴되지 않는다. 신라 진흥왕 때에 신라가 자랑하는 신무기인 신득의 포노를 설치한 국원소경의 국원성도 장미산성보다는 평지성으로 추정할 뿐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열산성은 어디일까 ?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살수(薩水)와 니하(泥河)는 어디일까 ? 살수(薩水)와 니하(泥河)의 위치비정도 수없이 많다. 일부에서는 살수를 괴산 청천의 옛 지명인 살매로 추정하기도 하고, 니하를 남한강의 단양 일대로 추정하기도 하기도 한다. 한강의 수계를 태백산맥의 산줄기를 따라 보면 그럴듯한 가설이기는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일 뿐이며, 원삼국시대에는 삼국의 국경과 지명이라는 것이 수없이 변하였기에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살수(薩水)와 니하(泥河)의 위치비정처럼 사열산성의 위치비정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열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8월에 증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사열산성은 기존에 있던 산성을 증축했다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의 기록에서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8월에 신라군은 석문전투에서 당나라에 패하고, 9월에는 문무왕이 당나라에게 사죄를 표하고, 신라군은 천재지변과 김유신의 사망 등으로 인하여 당나라와의 휴전과 더불어 당나라의 침입에 대하여 군사를 정비하며 지역별로 방어용 산성을 보강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8월에 한산주에 4,360보의 거대한 주장성의 축조를 시작으로 신라 문무욍 13년(673년) 2월에 서형산성을 쌓고, 8월에는 사열산성을 증축하고, 9월에는 국원성 등 8개성을 축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라 문무욍 13년(673년) 9월에 신라군은 호로(임진강)와 왕봉(한강)에서 당나라군을 격퇴시키면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전환된다. 이 시기에 축성된 11개 산성들은 새로 축성되었다기보다는 나당전쟁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있는 기존의 산성을 보수 또는 증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의 발굴조사에서도 재축 또는 증축의 흔적이 발굴되지만, 전투의 흔적이 발굴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산성들이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 정비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열산성은 어디일까 ? 삼국사기에는 청풍현의 옛지명을 고구려의 사열이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잡지에서 소사를 지내는 곳으로 월악산의 옛지명인 월형산이 사열이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열산성과 사열이성은 동일한 산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명만 유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사열이현과 신라의 청풍현의 관할구역은 어디일까 ?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은 현재의 충주호와 월악산 일대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지역은 현재의 제천시 청풍면, 금성면, 수산면, 덕산면, 한수면과 충주시 동량면, 살미면, 상모면의 일부 지역을 관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제천시의 덕산면과 한수면, 충주시의 살미면은 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동달천이었던 월천의 생활권이지만, 계립현과 월형산의 관할에 따라 변한 것이 아닌가한다. 사열이란 지명을 청풍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좋지만, 한수나 살미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 남한강 유역에서 충주의 달천을 기준으로 괴산은 서달천으로 청풍을 동달천으로 추정하면 충주의 옛지명인 국원성 또는 국원소경은 탄금대 물길의 하류인 장미산 일대로 행정구역을 구분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충주의 옛지명인 국원성 또는 국원소경이 9주 5소경의 중원경으로 정착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충주목이 이천의 노음죽 또는 음죽현을 지방제도의 재편에 따라 경기도로 이관하면서 청풍과 괴산의 일부 지역을 충주로 편입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소잉림 부곡과 광반석 부곡(사을미 부곡), 덕산향 등이 옛 사열이현에 속하며, 향토사학에서도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관할구역에 집착하기에, 현재의 관할구역에서 벗어나면 그 역사를 외면해 버린다. 월경처나 견아상입지라는 관할구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기록처럼 국원성과 중원경의 역사도 신라시대의 국원성과 중원경이 아니라, 고려시대도 아닌 조선시대의 충주목과 읍성체계로 중원의 고대사를 바라볼 뿐이다. 중원의 고대사는 국원성과 중원경도 아닌 한강 또는 남한강의 역사일 것이다.
#참고자료 1.
삼국사기의 기록들
12년(551)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娘城)註 001에 이르러 우륵(于勒)註 002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註 003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註 004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加耶國)註 005 가실왕(嘉悉王)註 006이 12줄 현금[十二弦琴]을 만들었는데, 열두 달의 음률을 본 뜬 것이다.註 007 이에 우륵에 명하여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註 008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에 따라註 009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의탁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註 010이다.
13년(552)에 왕이 계고(階古)註 001와 법지(法知),註 002 만덕(萬德)註 003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于勒)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모두 배운 후에 왕이 명하여 연주하게 하고서 말하기를, “예전에 낭성(娘城)에서 들었던 음악과 차이가 없다.”라고 하고 상을 후하게 주었다.註 004
14년(553) 가을 7월에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註 001 신주(新州)를 설치하고,註 002 아찬(阿飡) 무력(武力)註 003을 군주(軍主)로 삼았다.註 004
18년(557)에 국원(國原)註 001을 소경(小京)註 002으로 삼았다.註 003
18년(557) 사벌주(沙伐州)註 001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註 002를 설치하여註 003 사찬(沙飡) 기종(起宗)註 004을 군주(軍主)로 삼았다.註 005 신주(新州)註 006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註 007를 설치하였다.註 008
19년(558) 봄 2월에 귀족 자제와 6부(六部)註 001의 부유한 백성[豪民]을 옮겨 국원(國原)을 채웠다.
19년(558) 나마(奈麻) 신득(身得)註 001이 포노(砲弩)註 002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유신을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에 임명하고,註 119 〔선덕여왕〕 13년에 소판(蘇判)註 120으로 삼았다. 〔이 해〕 가을 9월에 왕이 명하여 상장군(上將軍)註 121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註 122·성열성(省熱城)註 123·동화성(同火城)註 124 등 일곱 성을 치게 하여 크게 이겼다.註 125 이로 인해 가혜의 나루[加兮津]를 개통하였다.註 126
〔13년(644) 가을 9월에 왕이 유신(庾信)을 대장군(大將軍)註 001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크게 이기고 일곱 성을 빼앗았다.註 002
4년(644)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註 001
9년(669)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弩師] 구진천(仇珍川)註 001 사찬(沙湌)과 함께 돌아갔다. 〔당나라에서 구진천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화살을 쏘자 30보(步)註 002 날아갔다. 황제가 묻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가 날아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구진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재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국의 재목을 가져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니, 곧 복한(福漢)註 003 대나마(大奈麻)를 보내 나무를 바쳤다. 이에 다시 만들 것을 명하고, 쏘아보니 60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 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건너면서 습기에 젖었기 때문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무거운 벌로 위협하였지만, 끝내 그 재능을 다 바치지 않았다.
12년 (672) 8월에 한산주(漢山州)註 001에 주장성(晝長城)註 002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13년 (673)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註 001을 늘려 쌓았다.
13년 (673) 8월에 사열산성(沙熱山城註 001)을 늘려 쌓았다.
13년 (673) 9월에
국원성(國原城)註 001 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註 002, 북형산성(北兄山城)註 003, 소문성(召文城)註 004, 이산성(耳山城)註 005, 수약주(首若州)註 006의 주양성(走壤城)註 007 또는 질암성(迭巖城)註 008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註 009의 주잠성(主岑城)註 010, 거열주(居烈州)註 011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註 012, 삽량주(歃良州)註 013의 골쟁현성(骨爭峴城)註 014을 쌓았다.註 015
왕이 대아찬(大阿湌) 철천(徹川)註 001 등을 보내어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지키게 하였다.註 002
당나라 군사가 말갈(靺鞨)註 001과 거란(契丹)註 002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 베었다. 당나라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註 003와 왕봉(王逢)註 004 두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註 005
북원경(北原京)註 33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평원군(平原郡)註 335이었는데, 문무왕(文武王)註 336이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註 337 5년(685)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031보(步)이다. 경덕왕(景德王)註 338은 이를 따랐다. 지금은 원주(原州)註 339이다.
나제군(奈隄郡)註 34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나토군(奈吐郡)註 341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342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제주(堤州)註 343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청풍현(淸風縣)註 34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사열이현(沙熱伊縣)註 345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346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적산현(赤山縣)註 347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현이었고 경덕왕(景德王)註 348은 이를 따랐다. 지금은 단산현(丹山縣)註 349이다.
우수주(牛首州)註 227[원주: 수(首)를 두(頭)로 쓰기도 한다.
수차약(首次若)註 228이라고도 하고 오근내(烏根乃)註 229라고도 한다.], 벌력천현(伐力川縣)註 230, 횡천현(橫川縣)註 231[원주: 어사매(於斯買)註 232라고도 한다.], 지현현(砥註 233峴縣)註 234, 평원군(平註 235原郡)註 236[원주: 북원(北原)이다.], 나토군(奈吐郡)註 237[원주: 대제(大提)註 238라고도 한다.], 사열이현(沙熱伊縣)註 239, 적산현(赤山縣)註 240, 근평군(斤平郡)註 241[원주: 병평(並平)註 242이라고도 한다.], 심천현(深川縣)註 243[원주: 복사매(伏斯買)註 244라고도 한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 이르기를 “가야국(加耶國)의 가실왕(嘉實王)註 225이 당(唐)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聲音)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하며, 이에 성열현(省熱縣)註 226 사람 악사 우륵(于勒)註 227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소사(小祀註 094).註 095 상악(霜岳)고성군(高城郡) 註 096, 설악(雪岳)수성군(䢘城郡)註 097 註 098, 화악(花岳)근평군(斤平郡) 註 099, 겸악(鉗岳)칠중성(七重城) 註 100, 부아악(負兒岳)북한산주(北漢山州) 註 101, 월나악(月奈岳)월나군(月奈郡) 註 102, 무진악(武珍岳)무진주(武珍州) 註 103, 서다산(西多山)백해군(伯海郡) 난지가현(難知可縣) 註 104, 월형산(月兄山)나토군(奈吐郡) 사열이현(沙熱伊縣) 註 105, 도서성(道西城)만노군(萬弩郡) 註 106, 동로악(冬老岳)진례군(進禮郡) 단천현(丹川縣) 註 107, 죽지(竹旨)급벌산군(及伐山郡) 註 108, 웅지(熊只)굴자군(屈自郡) 웅지현(熊只縣) 註 109, 악발(岳髮)한편 발악(髮岳)이라 이른다. 우진야군(于珍也郡) 註 110, 우화(于火)註 111 생서량군(生西良郡) 우화현(于火縣) 註 112, 삼기(三岐)대성군(大城郡) 註 113, 훼황(卉黃)모량(牟梁) 註 114, 고허(高墟)사량(沙梁) 註 115, 가아악(嘉阿岳)삼년산군(三年山郡) 註 116,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아지현(阿支縣) 註 117, 비약악(非藥岳)퇴화군(退火郡) 註 118, 가림성(加林城)가림현(加林縣), 어떤 本에는 영암산(靈巖山)·우풍산(虞風山)은 있지만, 가림성(加林城)은 없었다. 註 119, 가량악(加良岳)청주(菁州) 註 120, 서술(西述)모량(牟梁).註 121
#참고자료 2.
청풍군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현종 9년(1668)에 중궁전하 김씨(金氏) 명성왕후(明聖王后) 의 관향(貫鄕)이라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충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忠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 근남(近南)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원남(遠南)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근서(近西)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원서(遠西) 처음이 30리, 끝이 55리. 동면(東面)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수화(水化)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성지】 고성(古城) 저성(猪城)이라 칭하는데,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성황산(城隍山)에 있었는데, 유적(遺跡)이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진도】 북강진(北江津) 북쪽으로 5리에 있는데, 제천(堤川)으로 통한다. 황강진(黃江津) 역북(驛北)에 있으며, 원주(原州)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자라[鼈]
【사원】 봉강서원(鳳岡書院) 현종 신해년(1671)에 세웠고,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김식(金湜) 자는 노천(老泉), 본관은 청풍(淸風), 중종 경신년(1520)에 자살하였다. 벼슬은 부제학,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 김권(金權) 자는 이중(而中), 김식의 손자. 광해주 임술년(1622)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이조 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김육(金堉) 개성(開城)에 보인다. ○ 황강서원(黃江書院) 영종 병오년(1726)에 세웠고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다. 권상하(權尙夏) 충주(忠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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