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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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荷潭)

이계집 제3권 :상유록(上游錄) 하담 세상에 전하기로 우륵 선인의 네 번째 휴양지라고 한다 〔荷潭 世傳于勒仙人第四休地〕 예전에 듣기로 우륵 선인이 / 昔聞于勒仙지초 덮개 수레 타고 훌쩍 내려와 / 芝蓋下飄然탄금대에 올라서 배회하고 / 徙倚琴臺上월락탄 앞에서 춤추었지 / 婆娑月瀨前일찍이 네 번째 쉬었던 이곳 / 四休曾此地한 번 떠난 것은 어느 해인가 / 一去是何年운수와 함께 공연히 천고를 이루었으니 / 雲水空千古긴 노래 읊조림에 생각이 아득해지네 / 長歌意渺緜[주-C001] 상유록 : 상유(上游)는 한강의 상류로 여강(驪江)의 별칭이다. 《이계선생삼편전서》에 의하면, 이계는 1769년(영조45) 봄에 영릉 한식제헌관(寧陵寒食祭獻官)이 되어 여주(驪州)에 다녀왔고, 1772년에는 진천(鎭川) 선영(先塋..

학교모범(學校模範)

율곡선생전서 제15권 / 잡저 학교모범(學校模範)하늘이 만백성을 낳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는 것이다. 천부(天賦)의 거룩한 덕을 누구나 다 받았건마는, 사도(師道)가 끊어지고 교화(敎化)가 밝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진작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비의 풍습이 경박하여지고 양심(良心)이 마비되어 부박(浮薄)한 공명만 숭상하고 실행을 힘쓰지 않아서 위로는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서 벼슬에 빈자리가 많으며, 아래로는 풍속이 날로 퇴폐하고 윤리의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져 없어지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장차 지난날의 물든 습속을 일소하고 선비의 기풍을 크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선비를 가려 뽑고 가르치는 방법을 다해서 성현의 가르침을 대략 본받아 〈학교모범〉을 만들어..

으아리꽃을 바라보며

으아리꽃을 바라보며 산골어부활짝 핀 모과꽃은보지 못했다.모과꽃 몇 송이가 남아 그윽한 향기를 휘날리며보라빛 넝쿨 속으로 숨는다. "아이보리색"아기동자같은 꽃."으아리"처음 본 으아리꽃.어감이 심상치 않다. 으아리꽃.이른 봄날에흰나비를 본 것처럼,해야 할 말을 잊고멍하니 바라만 본다. 으아리꽃.큰으아리꽃.고사리밭에 피어산아래 인연들에게잘 살라고 손짓한다. 2025. 5. 5(부처님 오신 날에)

강풍으로 바라만 본 여주 출렁다리

금광호수와 박두진 문학길하늘 전망대도 바람 때문에 흔들흔들~~~~~ 강풍으로 바라만 본 여주 출렁다리"다음에 다시 오면 되겠지요."출렁다리 통행제한기준(여주시청)순간 최대 풍속 17m/s 이상 경고 방송(20m/s 이상 운영중단)호수 12시간 강수량 100mm이상노면 적설량 10mm이상출렁다리 중앙부 가시거리 미확보 시그 밖의 안전상 필요시 통행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에 전승되는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진한의 소국으로 추정될 뿐이다. 마한과 백제 또는 고구려, 진한과 신라, 변한과 가야라는 잘못된 인식과삼한과 삼국이란 개념이 후대의 기록에서는 ~~~~~~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상주(尙州) 고령군(古寧郡) 고령군(古寧郡)註 165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註 166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註 167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녕군(咸寧郡)註 168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셋이다.가선현(嘉善縣)註 169은 본래 가해현(加害縣)註 170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하여

자찬묘비명 산골어부 묘비명도 쓰고자서전도 쓰고송덕비도 만드는위인들도 있지만 학식도 없고,벼슬도 없고,명예도 없어학생이라고들 쓴다. 재주도 없고신념도 없고따르는 자도 없으니,그저 흙으로 돌아간다. 살아서는 기쁠지라도죽어서는 뭘 알겠는가 ?흔적이 있어도 그뿐인데,왜 스스로 허물을 남길까 ? 2025. 4. 15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

포천 반월성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 629년 08월 ) 51년(629)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註 001과 서현(舒玄),註 002 부장군(副將軍)註 003 유신(庾信)註 004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註 005을 침공하였다.註 006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陣)을 펼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별로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갖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註 007 하였으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에 올라타 검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나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