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 64

달천(達川)의 유래와 포모대(泡母臺)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산천조]에서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기록은 성현의'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타난다. 고려 말에 차(茶)를 좋아하는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은 좋은 물에 대한 품평을 한 기록에서 '첫째는 충주(忠州)의 달천수(達川水)요, 두 번째는 한강의 우중수(牛重水), 세 번째가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이다.' 라고 하였을 뿐, 달천수가 왜 최고인지에 대한 근거를 어디에 두고 품격을 나누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차(茶)를 끓이는 물의 질은 지하수나 용천수보다는 하늘이 내린 천수(天水)가 제일 좋다고 한다. 따라서 달천수(達川水)가 자연 상태에서 흐르는 강물 중에서 ..

충주 안림동의 유래 - 안심과 어림

충주시 안림동은 안심과 어림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한다. 어림의 지명유래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의 술수에 넘어가 파멸에 이른 삼국사기의 기록과 유사한 민담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기록에서 충주지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충주 안림동의 어림(御林)도 의림사(義林寺)의 의림(義林)이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도림(道淋)의 일화에서 와전된 것이라면 어림(御林)의 유래는 달라진다. 백제 개로왕은 한강의 위례성을 잃고 전사하였고, 아들 문주왕은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도림의 일화에서 보듯이 개로왕은 궁궐의 중수 뿐만 아니라, 천도를 위한 준비를 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왜 웅진으로 천도하였을까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초기에는..

노은(老隱)과 소고(蘇古)에 대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년 기묘년(己卯年)(1759년)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里, 寶連洞里, 楮田里, 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정조 4년 (1780년)대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 寶連洞, 楮田里, 文巖里,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1789년) 기유년식(己酉年式) 福城洞面 智藏洞, 龍堂洞, 山亭洞 元戶: 四百五十二, 口:一千八百 男: 八百六十八, 女:九百三十二 老隱峙面 天龍洞, 大方洞, 保蓮洞, 楮田洞, 偶城洞, 文巖洞, 金本洞, 大德洞, 安樂洞, 法洞 元戶: 五百九十二, 口: 二千八百七十六 男: 一千三百十一, 女: 一千五百六十五 호서읍지(湖西..

명당과 두무소 이야기

명당과 두무소 이야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의 책사인 두사충에 얽힌 명당 이야기와 조선의 혈을 끊는다는 이야기는 두사충이 다닌 곳마다 산재한다. 충주에서도 장호원 오갑산의 이진봉과 한수의 묘지 이야기가 있으며, 남한강 장미산 자락의 명당에 얽힌 두무소(두담)의 설화는 두담의 됫산을 오를 적마다 두사충이 본 명당자리가 어디일까하는 망상에 남한강과 장미산 자락을 한번 더 바라보게한다. 하지만, 두담의 됫산에서 바라본 명당 자리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저멀리 보련산 자락의 보련산성(천룡산성)만이 눈에 들어온다. 하긴, 두사충도 찾지 못한 명당이 쉽게 눈에 보일리도 없겠지만, 두사충 자신도 훗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땅에 묻혔지만, 그 자신의 묘소 역시 명당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두사충이 찾았다는 비선혈..

충주시 용산동 유래(용정과 용산)

충주시 용산동에는 거룡승천제란 행사가 매년 정월 대보름에 거행된다. 용산동과 거룡승천제는 용산동에 있었던 용산과 용정에서 유래하는데, 그 유래와 지명의 변천에 따른 이야기들을 정리해본다. (자료사진-용정시 거룡우호공원 용두레 우물) 충주시 용산동은 용산과 용정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충주시 용산동의 용정은 용산동 용산 주변에 마을을 형성하는 본거지이며, 마을의 성지로 추정된다. 그러나, 용산과 용정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수난을 겪으며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전매청(현 담배인삼공사)과 담배원료공장이 들어서면서 용산과 용정, 그리고 석탑과 석탑천이 사라졌고, 용산과 용정 일대의 도시계획으로 석탑천이 복개되고, 전매청 부지도 아파트가 건설되어 흔적조차 없다. 하지만, 용정과 거림이라..

계명산(오동산)과 남산(금봉산)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세종지리지에 나타난 충주목의 규모는 1천 8백 71호에 인구는 7천 4백 52명. 청풍군은 1백 91호에 인구는 6백 56명. 제천현은 4백 15호에 인구는 1천 2백 35명이다. 충청도 충주목은 청풍군에 비하면 10배, 제천현 보다는 5배가 큰 지방이지만 조선시대 고지도나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충주읍성의 촌락은 북문다리와 지곡다리와 대수정다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조선초기에 충주읍성에는 몇 명이나 살고 있었을까 ?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국원성과 중원경은 어떤 모습일까 ? 충주의 옛 지명 중 붉골을 "붉다"로 보고 미을성(未乙省)을 달리 해석한 주을성(朱乙省). 중원고구려비의 나타난 우벌성(于伐城) 외에도 마고성. 완장성, 국원성, 중원경. 탁장성. 사천성 등이 있는데..

망이산과 망이산성의 유래

마이산 471.9m (馬耳山) 또는 망이산(望夷山)은 안성시 일죽면과 음성군 삼성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옛 죽산현의 관할로 망이산성(望夷山城)과 망이산 봉수대가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망이산(望夷山)은 오랑캐(夷)를 바라보는(望) 산(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는 망이산(望夷山)을 현재의 한자표기로 해석한 것으로 오랑캐(夷)에 대한 해석은 동이족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 중 이 지역을 지배한 주체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그러나, 망이산이란 이름에서 고려 무신정권시대에 공주의 명학소(현재 대전)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을 일으킨 망이와 망소이가 연상되기는 하지만, 망이산과 망이와 망소이의 난은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망이산은 망이산 봉수대처럼 옛 설성지역인 이천과 ..

달천강은 감물내를 흐르는 강이다.

달천강의 유래를 찾아서 달천강의 유래를 찾는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또한 달천강의 유래를 찾았다고 해서 달천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에 회자되는 고유명칭과 유래들을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달천강의 유래가 궁금한 것일까 ? 잘못 와전된 유래와 설화로 본래의 지명 유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명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꿀 수도 있겠지만은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달천강에는 달천과 달강, 달내와 달래, 단내와 단강, 단냇물과 단물내, 감물와 감물내 등이 나타나듯이 달천강 유역에는 달에 대한 지명들이 산재하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달천의 유래는 달다(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달천강 주변의 지명..

명산대천(名山大川) - 충주 대문산에서

남한강 물길과 수운의 시작이었던 탄금대 금휴포는 충주의 관문이었다. 왜 대문산(大門山)을 태문산(太門山)도 아닌 견문산(犬門山)이라고 할까 ? 명산대천(名山大川)인 대문산 양진에서 제를 지내던 금휴포(琴休浦)의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어데로 가고, 우륵의 가야금과 신립의 눈물만이 대문산 자락에 흐르는가 ? 대문산이 개모양이 아니라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왕을 견공이라고 비꼬지 말고 대왕이나 태왕이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문산 자락에 들어서면 우륵과 신립을 추모하는 비석과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이라는 슬픈 노래비 등 충주의 기를 누르는 조잡한 돌맹이들만 가득하다. 대문산 강변에 있는 금휴포(琴休浦) 나루와 양진명소(楊津溟所)는 국가의 국태민안과 용왕님께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던 명당..

갑신년(1944) 장마

갑신년(1944) 장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지만, 어릴 적 부터 들어 온 이야기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남한강 홍수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 보니, 갑신년(1944) 장마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안성.이천.여주등 중부지역에서 피해사례가 나타난다. 어릴 적 부터 들어온 "갑신년 장마"는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라기보다는 경기 남부와 충북 북부지역인 안성,장호원 등에 걸친 국지성 호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에서는 72년과 90년 홍수보다도 갑신년 장마를 더 큰 장마로 말하고 있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면은 그리 험한 산골은 아니라서 홍수에 따른 재해라는 것을 모르는 곳이다. 큰비가 온다고 해도 논밭두렁이나 한포천의 제방이 조금 유실되는 정도이며, 비가 그치면 몇 시간 내에 ..

충주팔경 - 모래내에 내려앉은 기러기

충주팔경 중 하나인 "모래내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찾기 위해 달천강을 따라서 돌아 다녔다. 충주에서는 모시래뜰이 가장 넓은 곳이다. 평야라고 하기에는 작은 뜰이지만, 달천강 유역에서는 가장 넓은 뜰이다. 탄금대 합수머리는 크게는 달천강이 남한강에 합류하지만, 달천강의 마지막 지류인 주덕의 요도천과 충주시내를 가로지르는 충주천이 합류되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강 유역에 홍수가 발생하면 탄금대 일대는 물바다가 되었다. 남한강 본류의 거대한 물길에 달천의 물길은 흐르지 못하고 요도천과 충주천을 따라 역류하여 탄금대 샛강과 달천 샛강 등 달천강 하류의 저지대는 모두 물에 잠겨 버렸다. 72년도 대홍수 때 쓸려갔던 가옥들과 농경지. 달천강과 남한강 주변에는 그 당시 수해복구로 지은 집들이 지금도 폐허가 되거나 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