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기록들

달천강은 감물내를 흐르는 강이다.

산골어부 2010. 7. 17. 22:05

 

 

 

 

 

 

달천강의 유래를 찾아서

 

달천강의 유래를 찾는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또한 달천강의 유래를 찾았다고 해서 달천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에 회자되는 고유명칭과 유래들을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달천강의 유래가 궁금한 것일까 ? 잘못 와전된 유래와 설화로 본래의 지명 유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명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꿀 수도 있겠지만은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달천강에는 달천과 달강, 달내와 달래, 단내와 단강, 단냇물과 단물내, 감물와 감물내 등이 나타나듯이 달천강 유역에는 달에 대한 지명들이 산재하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달천의 유래는 달다(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달천강 주변의 지명들을 보면 유난히 달(月)에 대한 지명들도 많다. 해와 달에 대한 지명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널려 있는 것이지만 달천강 주변의 지명과 설화 등을 조사하면서 달천의 유래를 추리해 보았다.

 충주목 고지도에서는 서측은 달천(達川)이고, 동측은 월천(月川)이다. 그리고 두갈래의 물줄기가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만나 남한강의 옛지명인 금탄 또는 금천을 만들어 낸다. 백두대간 분수령인 하늘재에서 흘러내리는 동달천은 월천(月川), 덕천(德川), 송계(松溪)라고도 한다. 월천(月川)은 월악산 자락의 덕주사 계곡과 덕산의 억수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으로 현재까지도 하천지명으로 불리워지는 지명이다. 그러나, 덕천은 덕산과 덕주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송계는 소나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악산 주변의 하천을 월천(月川) 또는 덕천(德川)으로 부르는 것은 기존의 달천강 유래인 감천(甘川)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감물면은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에서 유래하는데, 감물내미는 지명을 한자로 가차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감물면의 주산인 박달산(朴達山)과 구월리(九越里)의 주월산(舟越山)은 달(達) 또는 월(越)로 표기되어 달(甘)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단월동(丹月洞)의 월은사(月隱寺) 그리고 달천동(達川洞)은 달(月)과 달(達)로 표기되어 달(甘)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지명유래에서 단군신화에 따른 "곰. 감. 검"의 유래로 보면 박달산은 신성한 산으로 볼 수도 있으며, 감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검(儉)의 변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삼국시대의 금물노국(今勿奴國)과 고려시대의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은 곰과 금, 감과 검으로 고유언어를 차음하는 과정에서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단군에 얽힌 지명유래로 보면 박달과 감물은 달천의 유래가  곰과 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달천(達川)과 박달(朴達)에서 달(達)은 옛날에 '산'의 뜻으로 씌어 온 말이기 때문에 '아사달'이나 '달구벌' 같은 옛 땅이름으로도 불러왔다. '아사달'은 단군 임금이 하늘로 올랐다는 산으로, '아침의 땅' 또는 '새로 개척된 땅'의 뜻이 있고, '달구벌'은 '대구'의 옛 이름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땅'의 뜻을 담고 있다고도 보고 있다.

 

수달에서 유래하는 달천(獺川)은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의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수달강은 달천에 수달이 많이 서식하는 것을 나타낸 속칭으로 분류되고 있다. 또한 단강(丹江)이란 지명은 달천보다는 남한강의 또 다른 지명인 금탄(金灘)과 단강(丹江)과 황강(黃江)으로 예를들면 단양 / 단월 / 단강 / 단암 / 단현 / 여강 등 황토물이 흐르는 붉은 강 또는 아름다운 강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달천강의 유래는 달이라는 어원의 해석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달천의 유래에서 달(獺), 덕(德), 감(甘), 월(月), 단(丹) 등에 따른 설화나 고서의 기록보다는 감물의 지명유래인 감물내에서 금(今)과 감(甘)의 이두문자를 차음한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달천강은 감물내라고 할 수 있다. 감물내는 마한시대의 금물노(今勿奴 )와 잉근내(仍斤內)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의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으로 변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물노국(今勿奴國)은 괴산이 아닌 진천을 지칭하는 지명이지만, 금물노(今勿奴)란 옛 지명은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중원문화권 속하는 음성과 괴산과 진천과 이천과 여주는 고려말기까지 같은 역사성을 지니는 곳이다. 금물노나 감물내미에서 쓰인 금(今)과 감(甘)은 "달다" 란 의미가 아니라, 소리를 차음한 것으로 의미가 없는 이두문자인 것이다. 감을 "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큰물내미가 되는 것이다.

 

달천의 유래는 단냇물보다는 감물내를 흐르는 강으로 결론를 내리고 싶다. 멀고 먼 옛날 고조선과 삼한시대의 이야기로 금...곰...감...검...달...벌... 등 알 수없는 말들을 꺼내어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또한 금(今)과 감(甘)을 금(金)과 연계하여 유추하면 감물은 금탄(金灘)과 금천(金川/金遷)의 유래인 가야국 이야기까지 언급하게 된다. 즉, 감물과 금탄은 같은 줄기의 강으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참고자료 - 괴산의 유래) 

삼한시대에는 금물노국(今勿奴國)과 잉근내국(仍斤內國)이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잉근내현·상모현·도서현이 됐고,

다시 신라에 속해 괴양현과 도서현이 됐다.

995년(고려 성종 14) 충주·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中原道)에 속했다가,

1018년(현종 9) 괴주 지역이 괴주군(槐州郡)·장연현(長延縣)·장풍현(長豊縣)·

청천현(靑川縣)·청당현(淸唐縣)·청안현(淸安縣)이 됐다.

 

(참고자료 - 감물면의 유래)

마한시대에는 금물노국(今勿奴國)이라 칭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으로,

조선시대에는  감물내이었다가 

현재의 괴산군 감물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

 달천(達川) :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감물내(甘勿內) : 본래는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이숭인(李崇仁)의 시 - 膽彼月岳橫中原 漢江之水初發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참고자료 - 여강의 유래)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여강에 대해 “여강(驪江)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驪江)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

 

(참고자료 -  택리지)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하였다.

 

 

 

 

 

 

 

 

(참고자료 - 한산주( 고려사절요에서)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삼았고 1주(州) 1소경(小京) 27군(郡) 46현(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삼국사》에 의하면, 한주(漢州)는 본래 고구려 한산군(漢山郡)이며 영현(領縣)은 2이니, 황무현(黃武縣)은 본래 고구려 남천현(南川縣)이요,  - 《고려사》에는 남매(南買)라 하였다. 거서현(巨黍縣)은 본래 고구려 구성현(駒城縣)이다.  - 《고려사》에는 멸오(滅烏)이라 하였다.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다. 괴양군(槐壤郡)은 본래 고구려 잉근내근(仍斤內郡)이다. 소천군(?川郡)은  - 1본에는 기천군(沂川郡)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인데  - 《고려사》에는 성지매(省知買)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황효현(黃驍縣)은 본래 고구려 내근현(乃斤縣)이며, 빈양현(濱陽縣)은 본래 고구려 양근현(楊根縣)이다.  - 《고려사》에는 항양(恒陽)이라고 하였다. 흑양군(黑壤郡)은  - 1본에는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今勿奴郡)인데  - 《고려사》에는 만노(萬弩), 혹은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 하였다. 영현(領縣)은 2이니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고구려 도서현(道西縣)이며, 음성현(陰城縣)은 본래 고구려 잉홀현(仍忽縣)이다. 개산군(介山郡)은 본래 고구려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영현(領縣)은 1이니 음죽현(陰竹縣)은 본래 고구려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다. 백성군(白城郡)은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적성현(赤城縣)은 본래 고구려 사복홀(沙伏忽)이요, 사산현(蛇山縣)이 있다. 수성군(水城郡)은 본래 고구려 매홀군(買忽郡)이다. 당은군(唐恩郡)은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인데 영현(領縣)은 2이니 차성현(車城縣)은 본래 고구려 상홀현(上忽縣)이며,  - 1본에는 차홀현(車忽縣)이라고 하였다. 진위현(振威縣)은 본래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