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지리지에 나타난 충주목의 규모는 1천 8백 71호에 인구는 7천 4백 52명. 청풍군은 1백 91호에 인구는 6백 56명. 제천현은 4백 15호에 인구는 1천 2백 35명이다. 충청도 충주목은 청풍군에 비하면 10배, 제천현 보다는 5배가 큰 지방이지만 조선시대 고지도나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충주읍성의 촌락은 북문다리와 지곡다리와 대수정다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조선초기에 충주읍성에는 몇 명이나 살고 있었을까 ?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국원성과 중원경은 어떤 모습일까 ? 충주의 옛 지명 중 붉골을 "붉다"로 보고 미을성(未乙省)을 달리 해석한 주을성(朱乙省). 중원고구려비의 나타난 우벌성(于伐城) 외에도 마고성. 완장성, 국원성, 중원경. 탁장성. 사천성 등이 있는데, 성의 규모나 성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위에 열거한 성들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성처럼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충주의 대표적인 산인 계명산과 남산에 대한 유래를 적어본다.
계명산과 남산은 옛지명이 오동산과 금봉산으로 불리운다. 계명산은 해방 이후인 1958년에 계족산에서 계명산으로 개명되었고, 계족산이란 명칭도 조선 말기인 갑오경장 전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도 계명산을 오동산으로 걔명하자는 의견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는 "닭"보다는 "봉황"이 좋아 보였던 것은 아닐까 ? 오동산(梧桐山)과 금봉산金鳳山)은 봉황새와 연관된 지명이며 오동나무와 봉황에 대한 지명은 상고시대 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봉황은 오동나무에 앉는 새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와 고분벽화의 사신은 봉황과 같은 의미이며, 신라의 상징인 "계림"도 "닭"으로 상서로운 것이다. 하지만 계족산이란 지네와 계족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잘못 사용된 것은 아닐까 ?
세종지리지의 오성 봉수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심항산 봉수로 표기되며, 심항산과 오동산과 금봉산을 구분한다. 고지도와 지리지에 나타난 충주의 산들을 살펴보면 대림산.금봉산.계족산.심항산.객망산.오동산.연주산.종당산,견문산 등이 있다. 계족산. 금봉산. 대림산. 견문산(대문산).객망산(광명산 또는 팽고리산)과 달리 오동산.심항산,종당산,연주산 등은 그 위치가 지도에 따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계명산의 주봉인 오동산은 연수동 금곡의 두루봉으로 표기되고, 종당산은 교현동의 만리산과 금가면의 김생사지 부근으로 혼기되어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취옥석 광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토사에서는 심항산을 계명산 정상. 남산정상. 마즈막재 안부. 종민동의 종산 등으로 해석하는데, 심항현(心項峴)은 길목을 의미하는 뜻으로 마즈막재 안부를 이르는 지명이다.
대동여지도와 청구도에서는 계명산은 오동산으로 남산은 심항산으로 표기되고, 호서읍지 등에는 계명산은 계족산으로 남산은 금봉산으로 표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심항산과 심항산 봉수의 기록이 고지도와는 달리 나타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인하여 심항산 봉수대와 동악성의 위치가 논란으로 남아있다. 고지도에서는 심항산 봉수가 남산(금봉산) 정상의 한미산성과 같이 표기되거나, 마즈막재의 작은 봉우리로 표기되어 심항산 봉수대의 위치가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계명산(오동산)보다 먼 종댕이산은 봉수대의 위치로 부적절하고, 봉수터로 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종당산은 비갈(碑碣)을 만드는 돌의 산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갈이란 비석을 만드는 대리석으로 충주백석 또는 충주취옥석으로 불리우며, 충주 백석은 충주댐(민마루)과 목벌동(목벌)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묘비석의 재료로 쓰인 비갈은 남한강 수운을 따라 운반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당산은 두루봉(종대기). 민마루(민종). 종댕이. 종중산. 종산 등으로 해석되어 특정지역을 거론하기가 어렵지만 충주백석이 있는 민마루와 목벌 부근으로 추정하면 종당산은 충주읍성의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거나 동북쪽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동악성을 금봉산성(한미산성)으로 비정하는데, 다른 지리지에 나타난 거리가 동쪽 13리(동창 10리)로 기록되어 충주시 살미면 신당리 부근의 동악산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충주목의 동창과 신당진과 포탄진 등이 충주호에 수몰되어 유적지를 찾을 수가 없고, 금봉산성(한미산성)의 위치와 거리를 오기한 것으로 추정하면 동악성을 금봉산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마즈막재란 지명유래는 항(項)을 단위를 나타내는 항(項)보다는 사람의 목덜미란 의미로 해석하여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충주 부근에서도 노루목(단월), 남벌(목벌) 등과 충남 장항의 지명도 목(項)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심항산(心項山)에서 정(頂)자를 항(項)자로 오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는데, 심항산은 목덜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를 뜻하는 심정산이 된다. 이는 하늘재의 탄항산(월항삼봉)과 단양의 말목산(마항산)의 유래도 유사하다. 심항산 영액이라고 불리우는 마즈막재 차단성은 청풍현에서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는 곳으로 마즈막재 안부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견해는 계명산은 오동산. 남산은 금봉산. 심항산은 심항현(心項峴)또는 심항치(心項峙)가 변형된 마지막재로 추정한다. 심항산에서 심(心)은 화(火)와 같은 의미로 풀이하면 봉수대를 표현하지만 산의 명칭에는 화(火)자를 쓰지 않기에 심(心)자로 그를 대신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고지도에서 봉화대를 크게 표현한 것을 볼 수도 있고, 봉화대의 위치가 여러 곳이 지목되는 것은 심항산 봉수대가 시대에 따라 옮겨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글을 마치며 심항산과 심항산 봉수에 대한 더 많은 고증으로 마즈막재의 유래가 재조명되어 사형수에 따른 오명을 벗었으면 한다. 그리고, 충주에 대한 역사를 바로알기 위해서는 기존의 향토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참고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충주목에서 발췌]
(산천)
대림산(大林山) :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심항산(心項山) :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견문산(犬門山) :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오동산(梧桐山) :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진포(辰浦) :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江)이라고도 한다
진도 포탄진(浦灘津) : 동북쪽으로 25리인데, 제천(提川)으로 통한다.
신당진(新塘津) : 동쪽으로 25리인데, 청풍(淸風)ㆍ황강역(黃江驛)으로 통한다.
동창(東倉) : 동남쪽 10리. 청풍과의 경계이다.
(봉수)
대림산 봉수(大林山烽燧) : 남쪽으로 연풍현(延?縣) 주정산(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심항산 봉수(心項山烽燧) :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 봉수(馬山烽燧) : 동쪽으로 대림산과 심항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가섭산(迦葉山)에 응한다.
망이성 봉수(望夷城烽燧) :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竹山縣) 건지산(巾之山)에 응한다.
(고적)
대림산성(大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사을미(沙乙味) : 본래는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이었는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 주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
참고자료 - 세종 지리지/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목)
○ 봉화가 4곳이니,
오성(梧城)【동쪽으로 청풍(淸風) 오현(吾峴)에, 서쪽으로 익안(翼安) 마산(馬山)에 응한다.】,
대림성(大林城)【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馬山)【서쪽 음성(陰城) 가섭산(伽葉山)에 응한다.】,
망이산(望伊山)【동쪽으로 음성 가섭산에, 서쪽으로 죽산(竹山) 검단산(儉丹山)에 응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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