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에서/옛날 지명들

명산대천(名山大川) - 충주 대문산에서

산골어부 2010. 5. 4. 23:41

 

남한강 물길과 수운의 시작이었던 탄금대 금휴포는 충주의 관문이었다. 

왜 대문산(大門山)을 태문산(太門山)도 아닌 견문산(犬門山)이라고 할까 ?

명산대천(名山大川)인 대문산 양진에서 제를 지내던

금휴포(琴休浦)의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어데로 가고,

우륵의 가야금과 신립의 눈물만이 대문산 자락에 흐르는가 ?

대문산이 개모양이 아니라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왕을 견공이라고 비꼬지 말고 대왕이나 태왕이라고 부르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문산 자락에 들어서면 우륵과 신립을 추모하는 비석과

주현미의 탄금대 사연이라는 슬픈 노래비 등

충주의 기를 누르는 조잡한 돌맹이들만 가득하다.

대문산 강변에 있는 금휴포(琴休浦) 나루와 양진명소(楊津溟所)는

국가의 국태민안과 용왕님께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던 명당인데,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힘없이 죽어간 귀신들만 달래고 있다.

우륵의 망국의 한과 신립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비석들이 아니라,

대문산 탄금대가 지난 날의 슬픈 이야기로 동정을 받기보다는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이 명산임을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

 

 

 

대문-산(大門山) [견문산]산】금대 북쪽에 있는 산. 반송산(盤松山)의 줄기로 남한강이 견문산으로 흘러 여름 장마 때면 달천평야가 물에 잠기어 농사에 피해가 크므로, 김생(金生)이 이를 근심하여 하룻밤이 도술을 부려 반송산의 중허리를 끊어 남한강 물을 견문산 북쪽으로 흐르게 하고, 견문산 서쪽에서 달천강과 한강 상류와 합류하게 만들었다 함. 속설에 의하면 개벽 때 달천강 상류인 보은 속리산으로부터 개 모양의 산이 흘러 와서 들어누었다 하여 견문산이라 하며, 그 후 잘못 읽어 지금은 흔히 대문산이라 함. (충주시 지명유래에서)

 

(참고자료 - 탄금대 양진명소)

 

한강 수신에 대한 신앙 - 양진명소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 아래 금휴포구에 큰 하천으로서의 한강을 제사 지내는 양진명소가 있었다. 금휴포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다가 쉬던 곳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에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는데, 국가적 제사를 대.중.소의 중요성에 따라 나눌 때 소사에 해당된다. 이는 국가적인 제사이기도 하였지만 큰 강변에 있음을 볼 때, 또한 수로를 이용한 선운과도 관련있는 제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양진명소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다. 고려의 국가적 제사를 참고하여 조선의 태종 14년(1414) 8월에 예조에서는 전국의 유명한 산과 강을 명산대천으로 가려서 국가적 제사에 대한 사전의 제도를 마련하고자 중국의 제도와 고려 시대의 예를 참작하여, 종묘 등을 제사, 악과 해독을 중사로 하고, 명산대천을 소사로 하여, 정하여진 곳에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케 하고자 하였다.

이 때에 충청도에는 계룡산, 죽령산, 양진명소를 소사로 정하고 제사를 하도록 태종 14년 8월 윤허를 받았다.

이후 양진명소는 계속적으로 국가적 제사장소로서 일년에 두 차례 춘추로 조정에서 향축을 내려서 제사하게 하였다. 이곳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충북 지역에는 단양의 죽령에서는 산신을 충주탄금대의 양진명소에서는 용신에게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국가적인 행사로서 제사를 거행하였으니, 양진명소에서의 제사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그중 가장 큰 것은 한상에 대한 제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종실록」의 지리지에서 양진명소를 "강원도 대관령 서쪽에서 발원하여 평창.영원을 지나 영춘.단양.청풍을 거쳐서 충주에 이르러서는 연천을 이루고 경기의 여흥으로 흘러오는 큰 하천이다"라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련에서 생각할 때 양진명소가 갖는 의미는 남한강 유역의 조운과 밀접한 것임을 알게 하며, 특히 여천의 조창과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게 되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곳에 모신 신이 오룡이었으므로 이 용신에게 치성을 드리면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일러서 「양진명소오룡굿」이라 하여 근래에 발굴하여 1979년 제20회 전국민속경연대회을 출품하여 장려상을 받은바 있다. 이 행사는 영신.오신.송신 굿의 3단계로 전개된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에는 또한 양진명소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 장소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양진명소의 강 건너편이 아닌가 생각할 따름이다. 이곳에서도 봄과 가을에 충주목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던 곳이었다.

양진명소에는 제단, 혹은 사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서 행하는 제사는 명산대천에 대한 제례가 행하여진 것이며 그 절차는 「세종실록」예지의 기록에 자세하게 진설에 대한 그림도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