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금면 장천리「저우내」마을 아랫편으로 솔 무더기가 있어 노송청파를 즐겨 관광
객이 끊인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 나루 이름이 목계나루이기 때문에 속칭「목계솔밭」이라고 부르고 있
는 것이다. 이 솔밭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조때「목계」나루는 내륙 하항으로 성황을 이루어 왔었다. 그런데「목계」나루는
매년 큰 화재가 나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이 수 백년간 전통이 되다 시피
되어 화재 하면 공포에 떨고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까지 하고 있
을 때이다. 때마침 나룻배에서 내린 방갓을 쓴 두사람이 나룻터 한 구석에 앉아서
패찰을 내놓고 산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곳 촌노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그 옆으로 다가서서 말을 걸었다.
「뉘 시길래 이
냉습한 곳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요?」그러자 그 방갓쓴 두 사람은 마을
노인을 쳐다 보더니「이 곳에 사는 지요?」하고 나서 혹 이마을에 회재가 잦지 않
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목마른 사람이 샘을 만난 것처럼 어떻게 그런 내용을 잘 아느냐며 말을 이
었다. 무릇 액이 오는 것을 아는 자는 액을 쫓을 줄도 아는 법인데 그 방액은 없겠
느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방갓을 빗고 나서 손가락으로「부흥산」을 가르켰다.
저 산이 불의 정기가 강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불속에서 물장난을 하며 살고 있는
형국인데 더구나 이 강물은 이 산을 외면하고 흐르는 형국이니 사람들이 조금이라
도 저 산신의 비위를 거슬르면 화마가 닥치는 것은 정칙이라며 이 강물을 저마을
쪽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을 노인이 몸가짐을 다듬고 도대체
누구냐고 다구쳐 묻자 후일 알것이라며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청장 이여송의 모사인 두사충과 그와 같이 풍수를 공부하며 다니는 금강산
중의 수행승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방갓쓴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동리 사람들을
재촉하여 강물을 돌리기로 했다. 온 동민들은 물론 많은 인원을 품을 사서 흙을 파
다가 강 가운데다 산을 만들었다. 반년이 넘어서야 강물을 목계쪽으로 돌리게 됐고
그 산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것이 곧 오늘날의 목계 솔무덕이 인것이
다. 따라서 한강물이 목계 부흥산 밑을 질러 나가므로「남한강」의 수신과「부흥산
」의 산신이 상극이 되어 물과 불이 견제하게 됐다고 하는 것이다.
한편 이 상극되는 산신과 수신을 위한 시키기 위해서 산제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곧
지금 있는「부흥당」의 시초가 된것이다.
또 한가지의 전설은 옛날「목계」를 비롯한 이 지방에 가뭄이 심해서 기우제를 여
러번 지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목계」촌장과 가금면「저 우내」의 촌장의 꿈에 용이 비를 주기 위해서
목계나루에 걸쳐 있는데 강이 넓어서 몸이 불편하다며 강 가운데
섬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지금의 솔밭을 쌓아서 용의 다리를 놓아 줌으로
용이 비를 내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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