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년 기묘년(己卯年)(1759년)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里, 寶連洞里, 楮田里, 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정조 4년 (1780년)대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 寶連洞, 楮田里, 文巖里,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1789년) 기유년식(己酉年式)
福城洞面
智藏洞, 龍堂洞, 山亭洞
元戶: 四百五十二, 口:一千八百
男: 八百六十八, 女:九百三十二
老隱峙面
天龍洞, 大方洞, 保蓮洞, 楮田洞, 偶城洞, 文巖洞, 金本洞, 大德洞, 安樂洞, 法洞
元戶: 五百九十二, 口: 二千八百七十六
男: 一千三百十一, 女: 一千五百六十五
호서읍지(湖西邑誌)-고종8년(1871년)
西 福城洞面
智莊里, 龍堂里, 山井里
西 老隱峴面
天龍里, 大方洞, 寶連洞里, 楮田里, 文巖里, 素美里, 古莊朴里, 自作里, 法洞里.
충청북도 각군읍지(忠淸北道 各郡邑誌)-광무 2년 (1898년) 이후
西 福城洞面
鳳凰川,龍堂,堂城,槐亭,本卜,河南,釣台,伐川
西 老峴面
老峴, 天龍, 大方, 寶連, 于城, 文巖, 薪田,新興, 安樂, 大德, 法洞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국망산(國望山-주 서쪽 51리에 있다),
천룡산(天龍山-주 서쪽 50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주 서쪽 28리에 있다)" 라는 기록과
천룡산에는 "옛 석성(石城)이 있다." 라고 기록된다.
하지만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소고(蘇古)가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서는 노은면 지역에 노은(老隱)과 소고(蘇古)가 나타난다.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옛 명칭인 고장박리와 소미리에서 가신리의 옛 명칭이 소고가 아닐까 하는 추정할 수도 있는데, 이는 임오군란에 따른 신흥동의 형성과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면사무소가 가신리 가정자 마을에 설치되었다가 현재의 연하리로 이전된 기록에도 나타난다.
소고(蘇古)의 위치를 노은면 신효리 솟대울(효죽) 또는 원대(금부리) 로 추정할 수도 있고, 고지도에서 국망산과 보련산 사이에 표기되어 소고(蘇古)가 노은면 연하리(보련골)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노은면은 큰개울(한천)을 기준으로 수상과 노은과 수하(수룡)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노은초등학교가 설립되고 그 후에 수상초등학교와 수룡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노은면 소재지인 연하리를 기준으로 생성되었던 지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소고(蘇古-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라고 기록되어 솟대울 또는 원터가 노은면의 중심이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신효리와 수룡리에는 쇳대울, 무쇠점, 금부리 등이 있는 곳이다. 쇳대울이란 유래는 효죽마을 유래보다는 원터의 유래로 보인다. 이는 쇳대 또는 솟대가 원터(주둔지)의 깃발이나 소도(蘇塗)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쇳대울과 금부리를 쇠똥밭이라고도 하는데, 쇠똥이란 소의 배설물인 소똥이 아니라 야철지의 쇠똥구리를 일컷는다. 소고(蘇古)는 원터 또는 효죽의 솟대터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충주목사였던 이국현의 애민비가 북충주인터체인지 부근에 방치되어 있는데, 이는 충주에서 노은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거나 마을의 어귀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한포천으로 원대(금부리)와 효죽(솟대울)이 분리되어 있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개울가의 마을이 사라져서 분리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소고(蘇古)를 해석하면 "깨어나다(되살아나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어 무엇이 되살아난 곳인지는 되새겨 볼 만하다.
개칭송비1
개칭송비2
조선조 초기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을 정리한 사사혁파에 나타나는 충주 보련사는 조선이 건국하기 이전에 보련산 기슭에 존재한 대사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사혁파에 나오는 "결"이란 단위를 환산하면 약 3천평에서 6천평에 이르는 경작지로 세롱실록에 기록된 사원전 150결은 약 50 ~ 100만펑에 이르는 땅을 소유하는 사찰이다. 또한, 승려 70명과 노비 70명으로 제한한 것은 그보다 많다는 것을 제제한 규정이다. 천룡마을 뒷산 기슭에 위치한 천룡사지를 보련사지로 단정하기 어려우며, 천룡사는 보련사에 딸린 말사로 볼 수도 있는데, 보련사에 대한 기록들이 천룡사지에 대한 기록으로 와전되어 보련사와 천룡사가 혼재되어 전해진다. 그리고, 보련사지로 알려진 보련골은 일제강점기에 광산시설의 형성으로 사지가 훼손되어 보련사의 절터는 찾을 수가 없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과 폐광지대와 보련골에 산재한 절터의 흔적에서 그 규모와 시대를 추정할 뿐이다. 현재의 보련사(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176-8)는 보련산 기슭이 아니라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보련사지가 보련마을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대동지지나 대동여지도에 나타나는 노은면 소고(蘇古)에 대한 지명의 고찰에서 소고(蘇古)가 무슨 뜻의 고유명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은면을 대표하는 곳일 것이다. 현재의 노은면 소재지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것이며, 보련사와 천룡사는 같은 절인지, 아니면 시대를 달리하는 별개의 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 따른 민담들이 산재한다. 또한 이번 답사에서 노은면의 집성촌들이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노은면 지역이 전란이나 질병 등으로 인하여 폐현되었다가 다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민담설화에서 국망산과 노은고개의 유래도 일제감점기에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국원왕과 국원성, 근초고왕과 광개토대왕, 장수왕과 개로왕, 국망산과 국사봉, 봉황성과 무쇠봉, 보련사와 천룡사 등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얽힌 역사의 진실 속에서 보련이와 장미의 전설이 풀어지기를 ~~~.
참고자료
건흥5년명금동광배(국립청주박물관)

건흥5년명금동광배 뒷면
광배의 중앙에는 단순한 두광과 신광을 새기고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함께 주조되었다. 주연부의 화염문은 매우 강한 율동감을 가지고 있으며 화불(化佛) 3구가 부조되어 있다. 부처와 2구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일광삼존불(하나의 대형 광배면에 삼존불을 배치)의 배치와 치솟는 불꽃무늬, 보살상에 보이는 율동적인 조형성, 명문의 형식이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1963년 7월 경상 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불상)과 비슷하며 충주지역이 한때 고구려의 영토였음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흥5년명금동광배 뒷면
건국 이후 불교에 대한 억압책으로 시행한 사원정리.
에 따라 사원소유의 사원전(寺院田)과 법손노비(法孫奴婢)를 몰수했고, 국가에서 지정한 사찰 이외에는 혁파했다. 사원은 고려시대에 왕실이나 귀족들에 의해 토지와 노비 등을 희사받아 성장하기 시작하여, 수조지가 약 10만 결에 달하기도 했다. 고리대나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일반백성을 자신들의 전호(佃戶)나 노비로 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많은 토지를 모았다. 이것은 국가에 세를 내야 할 토지와 양민의 감소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건국 이후 사사혁파를 시행했다. 고려말에 실시한 과전법에서 먼저 사사전을 면세지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사원에 대한 개인의 토지희사 금지,
(賜牌)와 희사에 의해 조성된 사원전의 회수 조치가 내려졌다. 사사혁파는 조선건국 주체였던 정도전(鄭道傳) 계열의 주도로 추진되었으나 전면적 혁파는 태조의 신불(信佛) 등의 이유로 실시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사사혁파 조치는 국가가 정한 사원 이외의 것들을 혁파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1402년(
2)에 밀기부비보사사(密記付裨補寺社)로 정한 70개의 절과 승려 100명 이상의 사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찰을 혁파하려 했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중략) 1424년(세종 6)에 다시 대대적인 사원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기존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해 조계·천태·지남 등 3종을 선종으로 하고, 화엄·자은·중신·시흥 등은 교종으로 하여 36사를 남겨 각기 나누어 속하게 했다. 그 36사는 한양에 흥천사·흥덕사·유후사(留後司)에 속한 숭효사·연복사·광명사·신엄사, 개성의 관음굴·감로사, 양주의 승가사·장의사·소요사·개경사·회암사·진관사·대자암, 공주의 계룡사, 진주의 단속사, 경주의 기림사, 구례의 화엄사, 태인의 흥룡사, 고성의 유점사, 원주의 각림사, 단율(段栗)의 정곡사, 안변(安邊)의 석왕사, 경기도 해풍의 연경사, 송림의 영통사,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사, 충주의 보련사, 거제의 견암사, 합천의 해인사, 거평의 서봉사, 전주의 경복사, 회양의 표훈사, 황해도 문화(文化)의 월정사, 해주의 신광사, 평양의 영명사 등을 말한다. 후에 강릉의 상원사가 추가되어 37사가 되었다. 이러한 사사혁파는 그 과정을 통해 사원세력의 대폭적인 약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유교에 지배적인 위치를 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종실록-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4월 5일(경술)
불교의 혁파에 관해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을 남겨두자는 예조의 계
교종(敎宗)에 소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가 3천 7백 결입니다. 서울 흥덕사는 원속전이 2백 50결이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유후사 광명사(廣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신암사(神巖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개성(開城) 감로사(甘露寺)는 원속전이 40결인데, 이번에 1백 6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경기 해풍(海豊) 연경사(衍慶寺)는 원속전이 3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주고, 거승은 2백명이며, 송림(松林) 영통사(靈通寺)는 원속전이 2백결이고, 거승은 1백명이며, 양주(楊州) 장의사(藏義寺)는 원속전이 2백 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이며, 소요사(逍遙寺)는 이번에 속전이 1백 50결이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충청도 보은(報恩) 속리사(俗離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忠州) 보련사(寶蓮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경상도 거제(巨濟) 견암사(見巖寺)는 원속전이 50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1백 2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입니다. 전라도 창평(昌平) 서봉사(瑞峯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전주(全州) 경복사(景福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강원도 회양(淮陽) 표훈사(表訓寺)는 원속전이 2백 1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50명입니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월정사(月精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는 원속전이 2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평안도 평양(平壤) 영명사(永明寺)는 원속전이 1백결인데, 이번에 5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지명유래 ▶ 노은면 |
▣ 노은-면(老隱面)【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충주군 지역으로서 충주시내에서 약 25㎞지점에 있으며 동쪽은 충주시 가금면(可金面), 서쪽은 음성군 감곡면(甘谷面), 남쪽은 신니면(薪尼面)과 주덕읍(周德邑), 북쪽은 앙성면(仰城面)과 인접해 있음. 본래 적리면(赤離面)이라 칭하다가 노은현(老隱峴)의 이름을 따서 노은현면(老隱峴面)이라 하여 법동(法洞), 대덕(大德), 안락(安樂), 가정(佳亭), 문암(文岩), 신전(薪田), 저전(楮田), 우성(于城), 하남(河南), 입장(立場), 보련(寶蓮), 연화(蓮花), 신대(新垈), 외대방(外大方), 내대방(內大方), 효죽(孝竹), 원대(院垈), 매탄(梅灘), 천룡(天龍), 원우(院隅), 수철(水鐵), 노현(老峴), 산막(山幕), 팔송(八松)의 24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가흥면(可興面)의 팔송리(八松里) 일부를 편입하여 법동(法洞), 대덕(大德), 안락(安樂), 가신(佳新), 문성(文城), 연하(蓮河), 신효(新孝), 수룡(水龍)의 8개리로 개편 관할함. 1914년에 가신리(佳新里)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가 1916년 지금의 연하리(蓮河里)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 TOP | 목차 ]연하리(蓮河里) ⊙ 연하-리(蓮河里)【리】노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노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남리(河南里), 입장리(立場里), 보련리(寶連里), 연하리(蓮河里), 저전리(楮田里), 우성리(于城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하와 하남의 이름을 따서 연하리라 함. 1916년 이후 면소재지로서 노은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충주시내에서 약 30㎞지점에 있음. 자연마을로 가마골(釜谷), 하남(河南), 보련골(寶蓮), 입장(立場), 연화(連花) 등이 있음.* 연하 1리●연하1-리【마을】연하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노은면의 행정중심지로 노은면사무소, 노은지서, 노은우체국, 노은농협, 노은초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충주시내에서 520번 지방도를 따라 앙성으로 넘어가는 삼거리 서쪽으로 형성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148가구, 509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입장, 연하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하며 버섯을 특작함. ●연-화(蓮花)【마을】입장 동남쪽에 있는 마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혈(穴)이 있었다고 함. ●입-장(立場)【마을】연하리에서 가장 큰 마을. 노은면의 중앙지점으로 옛날에는 가시밭이었는데 장(場)이 서면서 마을이 이루어짐. ●장구-배미【논】새터 남쪽에 있는 논.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 함. ●하입-장(下立場)【마을】입장 아랫쪽에 있는 마을.* 연하 2리●연하2-리【마을】연하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연하 1리에서 수룡 3리 사이에 보련산 남쪽으로 형성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42가구, 146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보련골, 상입장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보련-골(寶連)【마을】상입장 동편 보련산 밑으로 있은 마을. ●보련사-터[붉은절터]【터】보련산에 있는 옛 절터로 조선초기에는 국가에서 급전(給田) 까지 하였던 거찰(巨刹)이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음. 다만 고려때 절이 있었다 하며 `붉은 절터'라는 전설이 있을 뿐임. 현지에는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음. 보련사터로부터 서쪽계곡을 따라 산성으로 올라가다 보면 절터가 네 곳이나 확인되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이 주변에 절이 아홉군데나 있었다고 함. ●보련산-성(寶蓮山城)【성】보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토.석축(土石築)된 산성. 대부분 붕괴되고 일부 잘 남아있는 곳도 있음. 봉황산성(鳳凰山城), 천룡산성(天龍山城)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서쪽으로 하남고개, 북쪽으로 가흥의 병참로, 남쪽으로 노은에서 주덕 및 생극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지키는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됨. 샘보-들【들】샘보가 있는 들. * 연하 3리●연하3-리【마을】연하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노은면에서 앙성면으로 넘어가는 49번 도로를 따라 보련산 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42가구, 14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하남, 가마골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하며 과수원이 많음. ●가마-골2 [부곡]【마을】하남 북동쪽 보련산 밑으로 있는 마을. 산골의 생김새가 가마솥 같다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가마솥을 만들던 곳이 있었다고 하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됨. 대번광산이 생기면서 번창하여 큰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2가구만 존재함. ●가막-골【마을】가마골에서 보련산 쪽으로 높은 곳에 있는 마을. ●하-남(河南)【마을】입장 동북쪽에 있는 마을. 보련골에서 북쪽으로 약 700m지점에 있으며 남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음. ●하남-고개[하남현]【고개】하남에서 앙성면쪽으로 넘어다니는 고개 [ TOP | 목차 ]]신효리(新孝里) ⊙ 신효-리(新孝里)【리】노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노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대리(新垈里), 외대방동(外大方洞), 효죽리(孝竹里), 원대리(院垈里)와 매탄리(梅灘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와 효죽의 이름을 따서 신효리(新孝里)라 함. 충주시 주덕읍과 접경지역으로 자연마을로 상신대(上新垈), 하신대(下新垈), 골대방(外大方), 대울(孝竹), 원대(院垈) 등이 있음.* 신효 1리●신효1-리【마을】신효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노은면에서 주덕읍으로 통하는 525번도로 삼거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86가구, 28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상신대, 하신대, 골대방골, 쟁골 등이 있음. 밭농사를 주로 하며 복숭아를 특작함. ●건진-봉【산】자양동 앞에 있는 산. 높이 202m. 양쪽 가장자리는 끊어지고 가운데만 솟아 있음. ●골대방-골[내대방(內大方)]【마을】대방골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외대방에서 갈림. 4개마을(골대방골, 자양골, 대방골, 웃대방골)이 한 마을을 형성함. ●농바우-골【골짜기】덕련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 농바위가 있음. ●느티나무-거리【길】쟁골 북쪽에 있는 길. 경지정리로 인해 남아 있는 길은 없으며 느티나무만 있음. ●독-골[턱골]【골짜기】신효 1리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독점이 있었으며 자양골과 골대방골의 중간지점에 있음. ●두음-평(斗音坪)[둠배미들]【들】하신대 앞에 있는 들. 주덕읍 덕련리로 나가는 큰 길가에 위치하고 있음. 건진봉 아래의 북쪽에 있으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관통할 계획임. 옛날에 이곳에 비룡소(飛龍沼)가 있었다고 함. ●붉은대기-들【들】골대방골 동쪽에 붉은대기산이 있고 그 북쪽에 있는 들. 근처의 흙이 붉다고 함. ●붉은대기-산【산】골대방골 동쪽에 있는 산. 높이 184.5m. ●비룡소-터(飛龍沼)【터】둠배미에 있는 소 터.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함. ●신대-삼거리(新垈三巨里)【길】신대에서 노은면과 가금면, 주덕읍으로 가는 갈림길. ●자양-골[쟁골, 재양골, 자양곡, 외대방]【마을】대방골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 양지쪽에 있으므로 햇볕이 잘 듬. ●자지-봉【산】골대방 뒤에 있는 산. 높이 350m. 산모습이 오뚝함. * 신효 2리●신효2-리【마을】신효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신효 1리와 수룡 1리 사이에 520번 지방도 양옆으로 한포천 사이에 형성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70가구, 247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원대, 효죽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개칭송-비【비】솟대울 너머 구수룡초등학교 가는 쪽에 있었으나 경지정리때 없어 졌다고 함. 연대추정이 불가능한 비문이 있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했다고 함. 전해오는 이야기는 주인이 술에 취해 들에서 잠든 사이 불이 나자 개가 개울에서 몸에 물을 축여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고 하여 개를 칭송하는 비석을 세웠다고 함. ●내효-죽(內孝竹)【마을】효죽에 딸린 마을. ●매지-봉【산】저자실 북쪽으로 있는 산. 높이 350m. ●매-탄(梅灘)[매녀울]【마을】솟대울에 딸린 마을. 한포천 옆에 있음. ●원-터[원대]【마을】솟대울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주덕방면인 소남산(小南山)고개를 왕래하는 과객들을 위해서 원집이 있었고 마을밑에 금부처가 묻혀있다고 함. ●작살-골【골짜기】투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작살처럼 생겼다 함. ●저자-실[재자실]【마을】효죽 동쪽 약 50m 지점의 마을로 옛날에 장터를 이루었다 함. ●투구-봉【산】원터 동쪽으로 있는 산.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아 혈(穴)을 자름. 100여년전에 마을 주민들이 쇠말뚝을 뽑아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함. 산 정상부는 투구 형상이고 하단부는 삼지창 모습을 하고 있음. ●효-죽(孝竹)[솟대울]【마을】신효리 동쪽으로 신효리에서 주가 되는 마을. 옛날에 동구에 솟대가 있었다고 함. 마을을 다시 내효죽과 외효죽으로 구분함. [ TOP | 목차 ]수룡리(水龍里) ⊙ 수룡-리(水龍里)【마을】노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충주군 노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룡리(天龍里), 원우리(院隅里), 수철리(水鐵里), 노현리(老峴里), 산막동(山幕洞), 팔송리(八松里), 매탄리(梅灘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철과 천룡의 이름을 따서 수룡리라 함. 노은면 동쪽 끝에 위치하며 북으로 앙성면, 동으로 가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수철, 천룡, 팔송, 동막, 원우 등이 있음.* 수룡 1리●수룡1-리【마을】수룡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노은면의 최남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가금면 하구암리와 경계를 이룸. 1997년 8월 조사시 75가구, 250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원우, 수철, 논고개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노은-고개【고개】원모랭이 동쪽에 있는 고개. 가금면 하구암리로 넘어 다니는 고개. ●노-현(老峴)[논고개, 노은고개]【마을】노은고개 밑에 있는 마을. ●뱅길-이【마을】구수룡초등학교 뒷편에 있는 마을. ●산-막(山幕)【마을】중간말 남쪽으로 있는 마을. ●수-철(水鐵)[무쇠점]【마을】원모랭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고려때 무쇠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던 점이 있었다고 함. 지금도 쇠똥이 많이 보인다고 함. ●원-우(院隅)[원모랭이]【마을】수룡 1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신효리 원터로 가는 모퉁이에 있음. ●주막-거리【마을】520번 지방도에서 원모랭이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 ●중간-말【마을】뱅길이에서 산막 중간에 있는 마을. ●큰-저수지【못】무쇠점 동북쪽으로 있는 큰 저수지.* 수룡 2리●수룡2-리【마을】수룡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수룡 3리와 가금면 봉황리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47가구, 143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동막, 산막, 팔송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국사-봉(國師蜂)【산】수룡리에서 앙성면 능암리 사이에 있는 산. 높이 480m. ●동-막(東幕)【마을】수룡리 동쪽에 있는 마을. ●산-막(山幕)[산막골]【마을】원모랭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산막을 치고 살았다 함. ●쇠바우-봉【산】동막 동쪽에 있는 산. 높이 371.4m. ●팔-송(八松)【마을】천룡 동북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 여덟그루가 있었음. ●학-바우【바위】동막 남쪽 한포천변에 있는 바위. 병풍같은 바위에 날개를 펼친 학모양의 바위가 있음. 날이 가물때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함. 학이 태어날 때의 발자국이 있고 선녀가 목욕하던 자리에 옷자국이 있다고 함.* 수룡 3리●수룡3-리【마을】수룡리의 행정리동의 하나. 보련산 동쪽으로 수룡 2리 사이에 자리한 마을. 1997년 8월 조사시 22가구, 8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천룡, 대상 등이 있음. 논농사를 주로 함. ●고양-바우【바위】수룡 3리에 있는 바위. 모양이 고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이 생겼다 함. ●대-상【마을】천룡 서쪽으로 있는 작은 마을. ●무지-치【마을】천룡 동쪽에 있는 마을. ●무지치-폭포【폭포】무지치 뒷산에 있는 폭포. 놀이터가 됨. ●수룡-폭포【폭포】보련산에 위치한 삼단폭포로 중간의 폭포가 떨어지는 웅덩이는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곳으로 옛날에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고 함. |
보련산 등산지도
보련산 등산지도
보련산 정상 표지석
보련산 남릉(700봉)- 보련산성 남문 치성터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의 와편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의 와편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서문지 부근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서문지 부근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서문지 부근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서문지 부근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서문지 부근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외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외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외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외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내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내측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남문지
보련산성 남서측 치성터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치성터 성벽
보련산성 남서측 치성터
보련산성 남서측 치성터
보련산성 남서측 치성터
보련산성 남측 치성터 와편
보련산성 남측 치성터 와편
보련산성 동남측 성벽과 화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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