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성의 석축은 강원도 산골짜기의 돌담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면서도
부족한 듯한 부정형의 성돌에서 전쟁 속에 살아야하는 절규가 느껴진다.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대부분의 성들은 틀에 박혀있는 계획된 것들이지만,
와룡산성에서는 마치 산적의 소굴에 들어온 것같은 묘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
와룡산성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기에 와룡산성에 대한 명칭도 월형산성 또는 북형산성 등으로
해석하는 지방자치단체와 향토사학자들이 있지만, 이는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이다.
남한강에 늘어선 대부분의 산성들이 신라에서 축조 또는 재축한 성들이지만, 신라에서 축조한 산성들도
기존의 토성이나 석성을 재축 또는 증축한 경우가 많기에 단순히 외형만 보고, 신라의 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성의 주체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삼국의 마지막 승자인 신라가
한강유역의 성들을 마지막으로 관리하고 정비하였을 뿐이다.
와룡산성은 주변의 큰 산성인 조령관문과 대림산성과 덕주산성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이다.
와룡산 고산사의 창건 시기가 신라 말기로 전해지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된 시점에서
와룡산성과 같은 허술한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르며, 이는 정국의 혼란기나 전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무신정권 시에 나타난 민란이나 몽고 침입 때 축조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열산성은 망루에 불과한 청풍의 망월산성 보다는 덕주산성이나
대림산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국원성은 장미산성이 아닐까 한다.
와룡산성을 돌아보며 태화산성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태화산성은 남한강을 바라보며 정양산성(왕검성)과 대야리 산성
그리고 온달산성을 마주보고 있지만 그들과는 닮은 것이 없어 보였다.
와룡산성이 왜 태화산성과 닮은 것처럼 보였을까 ?
다시 그 높은 태화산을 올라 가고픈 충동이 생긴다.
참고자료 - 三國史記 第 七卷(新羅本紀)
제30대 文武王 下(문무왕 하) <661~681 재위기간 20년>에서 발췌
十三年春正月(십삼년춘정월) : 13년 봄 정월,
大星隕皇龍寺在城中間(대성운황룡사재성중간) :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拜强首爲沙湌(배강수위사찬) :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歲賜組二百石(세사조이백석) :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二月(이월) : 2월,
增築西兄山城(증축서형산성) :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夏六月(하육월) : 여름 6월,
虎入大宮庭殺之(호입대궁정살지) :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秋七月一日(추칠월일일) : 가을 7월 1일,
庾信卒(유신졸) : 유신이 사망하였다.
阿湌大吐謀叛付唐(아찬대토모반부당) :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事泄伏誅(사설복주) :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妻孥充賤(처노충천) :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八月(팔월) : 8월,
以波珍湌天光爲中侍(이파진찬천광위중시) :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增築沙熱山城(증축사열산성) :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九月(구월) : 9월,
築國原城(축국원성) : 국원성
古薍長城(고완장성) : 예전의 난완성·
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주양성) :
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
一名迭巖城(일명질암성) : 혹은 질암성
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달함군주잠성거열주만흥사산성) :
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
歃良州骨爭峴城(삽량주골쟁현성) : 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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