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안림동은 안심과 어림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한다.
어림의 지명유래에서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의 술수에 넘어가 파멸에 이른 삼국사기의 기록과 유사한 민담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난 기록에서 충주지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충주 안림동의 어림(御林)도 의림사(義林寺)의 의림(義林)이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도림(道淋)의 일화에서 와전된 것이라면 어림(御林)의 유래는 달라진다. 백제 개로왕은 한강의 위례성을 잃고 전사하였고, 아들 문주왕은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도림의 일화에서 보듯이 개로왕은 궁궐의 중수 뿐만 아니라, 천도를 위한 준비를 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왜 웅진으로 천도하였을까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초기에는 한강의 하류 부근에서 말갈.예맥 등과 충돌은 했지만, 고구려와 신라와 마한 등과는 친밀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과 충돌하면서 보복전쟁과 국경분쟁이 시작되고, 백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지만, 근초고왕 말기에는 고구려가 안정되면서 소수림왕의 보복침략으로 고전하고, 광개토대왕에게는 한강유역을 유린 당하고, 장수왕 때에는 수도의 함락과 개로왕의 전사로 한강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나제 동맹으로 한강유역 일부를 회복하지만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진출로 금강을 기반으로 하다가 패망한다.
삼국분쟁 시의 전쟁기록도 한강유역은 고구려와 금강과 미호천 유역은 신라와 주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의 한강유역에 대한 간략사에서 백제는 남한강 유역인 충주지역을 지배한 기록이 없지만 중원문화권 역사에서는 삼국초기의 역사가 모두 백제시대로 간주된다. 이는 북한강과 남한강 유역에 존재한 동예 또는 맥국 등의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서 고조선 이후 고대국가인 부여, 옥저. 동예, 예맥, 낙랑, 진한, 마한, 변한 등의 역사가 사라진 것은 일정강점기에 서술된 식민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당시의 역사를 규명하기 보다는 설화와 전설로 말살시키는 역사관으로 이어졌다.
충주시 안림동의 어림과 남산성(금봉산성)에 나타난 민담설화에서 백제의 구이신왕과 개로왕이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남산성(금봉산성)은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한 것일까 ? 현재 잔존하는 성은 신라에서 축조한 것인데, 축성설화에는 마고선녀와 구이신왕이 등장한다. 마고선녀의 축성설화는 특히 중원문화권인 남한강과 미호천 유역에 많이 등장하고, 개로왕의 할아버지인 구이신왕은 재임기간이 짧아 삼국사기 기록에도 나타나질 않는다. 또한 어림과 대궐터에서는 개로왕과 아들인 문주왕이 등장한다. 그 당시의 남한강의 지배권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 아직도 미궁에 쌓여있는 미을성, 탁장성. 완장성 그리고 사천성과 봉현성은 어디에 있으며, 그 지배세력을 누구일까 ?
남산성은 금봉산성, 동악성, 마고성, 한미산성"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산성으로 불리운다. 백두대간에 계립령과 죽령이 있었다면, 충주에는 발치와 심항현이 있는데, 심항현은 고을이 아니라, 마즈막재로 불리우는 고개로 심항산 영액이라는 차단성과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조령관문이 개설되면서 계립령과 더불어 발티재와 심항현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사라진 역사 속에서 어림의 유래와 더불어 대궐터와 향교터 등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 안심의 벌뜰에서 (옛)충주 소년원 부지를 바라본다. 얼마 후면 소년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돌아가는 발길에 그 곳에 향교터와 문서등이가 왜 잔존하고 있을까 ? 하는 의문이 자꾸만 떠오른다. 고교학창시절 안림동 과수원길을 따라 흙먼지를 날리며 행군을 가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추억도 ~~~
충주향교의 연혁
충주향교는 1398년(태조 7) 계명산(鷄鳴山) 아래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을 때, 참판공(參判公) 석감(石鑑)과 판결사(判決事) 석천수(石天壽)가 위패(位牌)를 계명산으로 옮겨 병화(兵火)를 피하였다고 한다.
석감과 석천수는 향교 정문 앞의 숙종 연간에 건립된 쌍성사(雙聖祠)에 배향되어 있다.
1629년(인조 7)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897년(고종 34)에 교궁(校宮)을 중수하였다.
1936년 군수 김석영(金錫永)이 명륜당을 신축하고 대성전과 동무·서무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치사재(治事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향교의 배치는 내삼문을 중심으로 전면 낮은 곳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후면 높은 곳에 문묘(文廟)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양무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는 맞배지붕 건물이며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명륜당은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이며, 외삼문은 소슬삼문으로 되어 있다.
이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대성전에 5성(五聖)·송조4현(宋朝四賢)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1976년부터 명륜학원을 운영하여 한문·서예·경전 등을가르치고 있으며, 매년 춘계 석전 때 충주시 중원군의 효자(孝子)와 효부(孝婦)를 표창하고 있다.
●충주-향교(忠州鄕校)【고적】향교말에 있는 충주 향교. 충주향교의 창건 연대와 그 장소는 정확하지는 못하고 다만 여수월마을 동북방 400m 지점이었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기와장이 출토되었다고 함.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서 건립한 것은 1579년 3월이고, 그후 1897년과 1936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 다른 지방의 문묘에서는 볼 수 없는 호성사(護聖祠)가 있는 것이 특징임.(교현동 유래에서)
어림에서 바라본 계명산과 (옛)충주소년원
어림에서 바라본 여수골과 벌뜰
어림에서 바라본 만리산
안림동 벌뜰의 과수원
어림과 대원고등학교
어림과 염해천
어림마을
어림의 대궐터
안심마을과 계명산
(옛)충주소년원 정문에서 바라본 안심마을과 용산동
계명산의 여수골
(옛)충주소년원 부지 입구
(옛)충주소년원 정문
(옛)충주소년원 담장
(옛)충주소년원 담장
(옛)충주소년원 담장
(옛)충주소년원 담장 옆 농로
어림과 마즈막재
안림동 벌뜰
안림동 벌뜰
三國史記 第 二十五卷 百濟本紀 第 三 盖鹵王(개로왕)
제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기간 20년>
二十一年秋九月(이십일년추구월) : 21년 가을 9월,
麗王巨璉帥兵三萬(려왕거연수병삼만) :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來圍王都漢城(래위왕도한성) :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王閉城門(왕폐성문) : 왕이 성문을 닫고 있었다.
不能出戰(불능출전) : 능히 나가 싸울 수가 없었다
麗人分兵爲四道夾攻(려인분병위사도협공) :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又乘風縱火(우승풍종화) :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焚燒城門(분소성문) : 성문을 태웠다.
人心危懼(인심위구) :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或有欲出降者(혹유욕출항자) :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王窘不知所圖(왕군불지소도) :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領數十騎(영수십기) :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出門西走(출문서주) :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麗人追而害之(려인추이해지) :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先是(선시) : 이보다 앞서
高句麗長壽王陰謀百濟(고구려장수왕음모백제) :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求可以間諜於彼者(구가이간첩어피자) :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時浮屠道琳應募曰(시부도도림응모왈) :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愚僧旣不能知道(우승기불능지도) :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思有以報國恩(사유이보국은) :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願大王不以臣不肖(원대왕불이신불초) :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指使之(지사지) : 일을 시켜 주신다면
期不辱命(기불욕명) :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王悅(왕열) : 왕이 기뻐하여
密使譎百濟(밀사휼백제) :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於是(어시) : 이에
道琳佯逃罪(도림양도죄) :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奔入百濟(분입백제) : 백제로 왔다.
時百濟王近蓋婁好博奕(시백제왕근개루호박혁) :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道琳詣王門告曰(도림예왕문고왈) :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臣少而學碁(신소이학기) :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頗入妙(파입묘) :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願有聞於左石(원유문어좌석) :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王召入對碁(왕소입대기) :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果國手也(과국수야) : 과연 국수였다.
遂尊之爲上客(수존지위상객) :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甚親昵之(심친닐지) : 매우 친하게 여겨
恨相見之晩(한상견지만) :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道琳一日侍坐(도림일일시좌) :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從容曰(종용왈) : 조용히 말했다.
臣異國人也(신이국인야) :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上不我疎外(상불아소외) :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恩私甚渥(은사심악) :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而惟一技是效(이유일기시효) :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未嘗有分毫之益(미상유분호지익) :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今願獻一言(금원헌일언) :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不知上意如何耳(불지상의여하이) :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王曰(왕왈) : 왕이 말했다.
第言之(제언지) : "말해 보라.
若有利於國(약유이어국) :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此所望於師也(차소망어사야) :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道琳曰(도림왈) : 도림이 말했다.
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대왕지국사방개산구하해) :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是天設之險(시천설지험) :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非人爲之形也(비인위지형야) :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是以四鄰之國(시이사린지국) :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莫敢有覦心(막감유유심) :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但願奉事之不暇(단원봉사지불가) :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則王當以崇高之勢(칙왕당이숭고지세) :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富有之業(부유지업) : 부유한 치적으로
竦人之視聽(송인지시청) :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而城郭不葺(이성곽불즙) :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宮室不修(궁실불수) :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先王之骸骨(선왕지해골) : 또한 선왕의 해골은
權攢於露地(권찬어로지) :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百姓之屋廬(백성지옥려) : 백성의 가옥은
屢壞於河流(루괴어하류) :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臣竊爲大王不取也(신절위대왕불취야) :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王曰諾(왕왈낙) : 왕이 말했다.
吾將爲之(오장위지) :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於是(어시) : 이에
盡發國人(진발국인) :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烝土築城(증토축성) : 흙을 구어 성을 쌓고,
卽於其內作宮室樓閣臺榭(즉어기내작궁실루각대사) :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無不壯麗(무불장려) :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又取大石於郁里河(우취대석어욱리하) : 또한 욱리하에서
作槨以葬父骨(작곽이장부골) :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緣河樹堰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연하수언자사성지동지숭산지북 ) :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是以倉庾虛竭(시이창유허갈) :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人民窮困(인민궁곤) :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邦之Ꞇ杌(방지얼올) : 나라의 다급하고 급박한 형세가
甚於累卵(심어루란) :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於是(어시) : 이에
道琳逃還以告之(도림도환이고지) :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長壽王喜將伐之(장수왕희장벌지) :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乃授兵於帥臣(내수병어수신) :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近蓋婁聞之(근개루문지) :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謂子文周曰(위자문주왈) :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予愚而不明(여우이불명) :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信用姦人之言(신용간인지언) :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以至於此(이지어차) : 이렇게 되었다.
民殘而兵弱(민잔이병약) :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雖有危事(수유위사) :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誰肯爲我力戰(수긍위아력전) :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吾當死於社稷(오당사어사직) :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汝在此俱死(여재차구사) :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無益也(무익야) : 유익할 것이 없으니,
盍避難以續國系焉(합피난이속국계언) :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문주내여목협만치조미걸취) :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를 데리고
木劦祖彌皆複姓隋書以木劦爲二姓(목협조미개복성수서이목협위이성) :
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未知孰是(미지숙시) :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南行焉(남행언) : 남쪽으로 떠났다.
至是(지시) : 이 때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尒萬年(고구려대로제우재증걸루고이만년) :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등이
再曾古尒皆複姓(재증고이개복성) : 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等帥兵(등수병) : 군사를 거느리고
來攻北城(래공북성) :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七日而拔之(칠일이발지) : 7일만에 함락시키고,
移攻南城(이공남성) :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城中危恐(성중위공) :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王出逃(왕출도) :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已(려장걸루등견왕하마배이)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向王面三唾之(향왕면삼타지) :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乃數其罪(내수기죄) : 죄목을 따진 다음
縛送於阿且城下戕之(박송어아차성하장지) :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桀婁萬年本國人也(걸루만년본국인야) :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獲罪逃竄高句麗(획죄도찬고구려) :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論曰(론왈) : 논평한다
楚昭王之亡也(초소왕지망야) : "초명왕이 망할 때
鄖公辛之弟懷將弑王曰(운공신지제회장시왕왈) : 운공 신의 아우 회는 마침 왕을 시해하고 말하기를
平王殺吾父(평왕살오부) : '평왕은 나의 아비를 죽였으므로
我殺其子(아살기자) : 나는 그 아들을 죽였다
不亦可乎(불역가호) : 이 또한 옳지 않은가.'하자
辛曰(신왈) : 신은 말하기를
君討臣(군토신) : '임금이 신하를 쳐 죽였는데
誰敢讎之(수감수지) : 누가 감히 이를 원수라하겠는가
君命天也(군명천야) : 군명은 천명이다
若死天命(약사천명) : 만약 천명에 죽으면
將誰讎(장수수) : 누구를 원수라 하랴.'하였다
桀婁等自以罪不見容於國(걸루등자이죄불견용어국) :
그런데 재증과 걸루 등은 스스로 죄를 져서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으므로
而導敵兵(이도적병) : 도망하여 적병의 향도가 되어
縛前君而害之(박전군이해지) : 전의 임금을 묶어 보내고 이를 살해하였으니
其不義也(기불의야) : 그 불의는 됨은
甚矣(심의) : 아주 심한 것이다
曰然則伍子胥之入郢鞭尸何也(왈연칙오자서지입영편시하야) :
그렇다면 오자서가 영에 들어가서 초왕의 시체를 매질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曰楊子法言評此(왈양자법언평차) : 양자 법언에 이를 논평하여 "
以爲不由德(이위불유덕) : '덕이 따르지 않는 인이다.'라고 하였는데
所謂德者(소위덕자) : 이른 바 덕이란 것은
仁與義而已矣(인여의이이의) : 인과 의일 따름이다
則子胥之狠(칙자서지한) : 곧 자서의 사나움은
不如鄖公之仁(불여운공지인) : 운공의 어진 것만 같지 못하니 .
以此論之(이차론지) : 이로써 이를 논한다면
桀婁等之爲不義也(걸루등지위불의야) : 재중과 걸루 등이 의롭지 못한 짓을 한 것은
明矣(명의) : 명백하다."
충주산성(충주디지털 문화대전에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동과 안림동의 경계인 남산 정상부에 축조된 고대 산성.
- [개설]
충주산성은 해발 636m의 남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계곡 상단을 에워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축 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된다.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충주산성은 동악성(桐岳城, 凍嶽城)·남산성(南山城)·금봉산성(錦鳳山城)·마고성(麻姑城) 등으로도 불린다.
- [건립경위]
충주산성의 축성과 관련해서는 삼한시대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는 설과 보은 삼년산성 등에서도 확인되는 남매축성설 등이 전하고 있다. 마고선녀의 축성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던 마귀할미가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마구 살상을 하여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천산 누독복으로 쫓겨나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후 500년이 지난 후 마귀할미가 개과천선하는 기미가 보이자 천제께서 금봉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살라고 하면서 북두칠성을 따라 7일 이내에 축성하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한편, 『조선약사(朝鮮略史)』에는 백제 구이신왕 때에 쌓고 475(개로왕 21)에 보수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개로왕이 충주 안림동 일대에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전설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김윤후(金允候)가 주민과 함께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낸 충주산성 전투 기록과 맞물려 역사의 현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신라 국원소경(國原小京)의 설치와 관련하여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고, 주로 사용한 시기도 신라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 [위치]
충주산성이 있는 남산(금봉산)은 지세가 험하고 가파른 요새로 북쪽으로 해발 774m의 계명산(鷄鳴山)을 마주하고 있으며, 두 산 사이는 옛 지리지에 심항현(心項峴)으로 기록된 마스목재 혹은 마즈막재(마지막재)라고 부르는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충주 분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북쪽은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을 막는 영액(嶺阨)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멀리 청풍 방면, 남쪽으로는 월악산과 계립령 방면에서 오는 재오개, 서남쪽으로는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북상하는 노루목과 대림산성, 서쪽으로는 멀리 음성 방면과 망이산성, 서북쪽으로는 충주시내와 탄금대, 장미산성 등이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 [형태]
충주산성은 평면의 굴곡이 심한 부정형으로 테뫼식과 포곡식의 중간적인 형태로 동향으로 면을 열고 중앙에 능선을 포함하고 있다. 산의 지세에 따라 성의 긴 지름이 남북 방향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에서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수용하였고, 서쪽 성벽은 산중턱 부분을 통과하고 있다. 계곡부를 향하고 있는 동문을 제외하면 계곡이 서로 엇갈리는 능선의 꼭대기에 문을 배치하였다. 서쪽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2개의 깊은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곳에는 특이한 형태의 저수조와 수구문을 축조하였다.
- [현황]
충주산성은 1984년 충주공업전문대학(현 충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성벽의 윤곽 측량과 내부 시설 등에 대한 대략적인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은 둘레 1,120m, 높이 7~8m로 동문지를 비롯한 북문지, 서문지, 남문지 등 4개소의 문지와 동문지 남쪽의 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길이 60~75㎝, 두께 15~20㎝가량의 자연할석을 사용하여 쌓았다.
면석을 가공하였으며, 흙과 모래를 사용하지 않고 폭 4~5m로 높이 5.5~6m가량 쌓았는데 한 단은 가로로 쌓고, 한 단은 세로쌓기 하여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다. 성벽의 상단이 하단보다 10°가량 안으로 기울어 있다. 산능선을 가로지르는 구간은 외측에 기단부를 따로 두지 않고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내면에 협축하였다.
계곡부에 해당하는 동벽 구간은 성내 쪽으로 현저하게 내만하여 축조하였는데, 이는 성내에서 성의 바깥으로 향하는 토압과 수압을 견디도록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부는 외측에 3.8m 이상의 기단 석축을 만들고 이 석축 위에서 1m 이상 성내측으로 물려서 성벽을 구축하였는데, 성벽 중간 지점부터 내외협축하였다.
문지는 모두 4개소가 발견되었는데 동문을 제외하고 북문지는 북쪽 회절부, 남문지는 남쪽 회절부, 서문지는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거식에 가까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한편 동문지는 계곡 방향에 있어 성벽의 바깥에서 4m 이상 성벽 위에 문이 시설된 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6년에는 동벽 구간의 3개 지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성벽 잔존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성벽은 내외겹축(內外夾築)되었으며 성벽 상면의 외연(外緣)을 따라 작은 할석으로 축조된 너비 1.1m, 높이 0.7m가량의 평여장(平女墻)이 미석(楣石) 없이 시설되었음이 조사되었다. 또한 성내에는 성벽 안쪽을 따라 일정한 깊이에 빗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배수로가 마련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계곡부를 통과하는 성벽에는 체성(體城)의 외측 하단에 별도의 기단 보축(補築)을 마련하고 있어 신라의 석축성벽임이 확인되었다.
1993년 수구의 유실 위기에 따라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출수구(出水口)의 안쪽에 배수구로 유입되는 입수구가 발견되어 신라 산성의 가장 전형적인 성벽통과형 수구가 밝혀졌다. 또 물이 수구로 한꺼번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과 도수로(導水路)의 일부, 숯가마도 확인되었다. 특히 동문지 남측 측벽 조사에서 문의 개구부 안쪽으로 반원형의 방벽(防壁) 시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1998년 동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문의 개구부의 안쪽에 반원형의 방벽을 가지고 있어 성벽과 성내에서 1차로 사다리 식의 계단을 별도로 이용하여 문구(門口)로 내려가고 다시 문구에서 성 밖으로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이 가능한 형태의 전형적인 현문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또한 적은 양의 물이 빠지는 배수로를 개구부에 만들어 방벽으로 차단된 물이 집수지에 모여 성문을 따라 배수되도록 고안한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 배수로는 3차례에 걸쳐 변화하고 있어 점차 문의 개구부 바닥이 높아졌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동문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6세기 중엽이후의 신라 유물로 확인됨으로써 신라 국원소경의 설치와 관련되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2~2003년에 걸쳐 이루어진 동문지 남측 집수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둥근 모양의 석축 호안 하부로 방형 혹은 오각형의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 시설은 당초 1, 2차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조사 결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바닥을 마름모꼴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아래쪽을 사다리꼴로 만든 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으며 계곡부에 해당하는 남서모서리는 후대에 석축하여 보강하였다. 이곳에서 마구류와 토기, 기와, 목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충주산성에 출토된 토기류는 문양과 형식상 인근의 충주 누암리 고분군과 황룡사 1차 가람 및 2차 가람 기반 다짐토 내에서 출토된 토기, 안압지에서 출토 토기와 견주어 볼 수 있으며, 시기는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와류는 대부분 선조문 계열로 모골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단양의 적성, 온달산성과 청주의 부모산성, 보은 매곡산성 등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비교된다.
- [의의와 평가]
충주산성은 신라의 전형적인 축성기법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유물만이 출토되고 있어 신라의 국원소경 설치라는 당시 역사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충주산성에서 확인된 동문지는 개구부의 안쪽에 반원형의 방벽을 갖춘 구조로 성벽과 성내에서 1차로 별도의 계단을 이용하여 문구로 내려가고, 다시 문구의 바닥에서 성 밖으로 사다리를 이용해야 출입이 가능할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현문의 구조인 문구의 개구부에 문짝을 달아 세운 문비(門扉)를 갖춘 형태와 다른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곡의 남북으로 자리한 동문지의 집수시설 및 배수장치와 저수지는 계곡의 물을 배수하는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성내의 복잡한 지형과 수압, 토압 등 여건을 최대한 고려한 시설로서 당시 축성술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 『충주산성종합지표조사보고서』(충주공업전문대학 공업박물관, 1984) |
• 『충주산성 및 직동고묘군 발굴조사보고서』(충주공업전문대학 공업박물관·충주시, 1986) |
• 김규영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1989) |
• 『충주산성 동문지 발굴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9) |
• 『충주산성 동문 남측 저수지 시·발굴조사 보고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5) |
▣ 충주 안림동 지명유래안림-동(安林洞)【동】본래 충주군 북변면(北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심리(安心里), 범의동(凡衣洞), 어림리(御林里), 교동(校洞) 일부를 병합하여 안심과 어림의 이름을 따서 안림리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됨.
●갈바탕-번던【버덩】계명산에 있는 버덩. 옛날에 농초인 갈을 뜯던 곳이라 함.
●계명-산(鷄鳴山)[계족산(鷄足山), 심항산(心項山) 오동산(梧桐山), 동악산(東岳山), 객망산(客望山)]【산】충주시 동북방 안림동(安林洞) 용탄동(龍灘洞) 종민동(宗民洞)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775m. 이 산명의 유래는 백제때 마고성주(麻古城主)의 왕족이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지금의 官衙公園)을 왕복하던 중 길바닥에 지네(百足蟲)가 우글거려 피해를 입자 관내에 지네 퇴치령을 내려 잡았으나 피해가 날로 더해가므로 성주가 산신에게 기도를 하니 하루는 꿈에 용두백발(龍頭白髮)의 한 노인이 나타나 '닭을 기르면 없어진다' 하므로 닭을 많이 방사했더니 과연 없어졌다고 함. 그후 다시 지네가 못 나오도록 심정산(心頂山)을 계족산(鷄足山)이라 고쳐 불렀다고 함. 이 산정에 조선조때 심항봉수(心項烽燧)가 있어서 동으로는 청풍면 오현(吾峴)과 서쪽으로는 이류면 마산봉수(馬山烽燧)에 응하였음. 그리고 동단에 2,280척의 석성이 있음. 이 산에 대하여 불미한 전설이 있어 1958년 8월 18일 시의회를 거쳐 계명산(鷄鳴山)이라 개칭함.
●곡-말【마을】계명산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
●구-렁【들】안심 앞에 있는 깊은 들.
●남산-절(南山-)【절】큰말림번던에 있는 절.
●냉-정(冷井)[약막약수터]【약】약막에 있는 약수터. 물이 차서 땀띠에 잘 듣는다 함.
●느티나무-거리【터】옛날에 느티나무가 서 있었던 터 대원고등학교 동쪽 소로거리.
●느티나무-구렁【골짜기】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음. 용산,교현동과 경계를 이룸.
●다락-골【골짜기】지대가 다락처럼 높음.
●대궐-터【터】어림에 있는 옛 대궐 터. 조선사략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蓋鹵王) 21년(475)에 개로왕이 이곳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역사를 시작하였다가, 같은 해에 태자 문주왕(文周王)이 곰나루(熊津)로 옮겼다 함. 그 후 이 근처를 소경(小京)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에 준비하였던 초석이 지금도 남아 있음.
●도장골-들【들】안림 서북쪽에 있는 들. 산혈이 돌아 있으므로 마치 토청이나 울을 막은 것처럼 되었는데, 옛날에 도둑들이 소를 훔쳐다가 이 속에 감추어 두고, 길러 가면서 잡아 먹었다 함.
●떡갈-봉【산】계명산의 한 줄기. 떡갈나무가 많았음.
●마당-참【마을】안심에 딸린 마을. 찬물이 났었다 함.
●마즈막-재 [심항현]【고개】계명산과 남산 사이에 있는 고개. ① 옛날에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의 사형수들이 이 고개를 넘어와 숲거리에서 처형되었으므로,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였음. ② 계명산의 옛 이름인 심항산(心項山)에서 땀.
●멍석-마루【산】계명산의 한 봉우리. 옛날 천지개벽 때 멍석 하나 깔 만큼만 남았었다 함.
●무시랑-등【들】문서등이 앞에 있는 들.
●문서-등이【터】어림에 대궐 터를 닦을 때, 문서를 넣어 두던 창고가 있었다 함.
●바른-골【골짜기】안심에서 바로 보이는 골짜기.
●바른-바텡이【고개】큰골 안에서 바로 곧게 올라가는 고개.
●방아장-골【골짜기】화장장 동편 골짜기.
●배채-골【골짜기】약막에서 마즈막재를 향해서 왼편으로 올라간 골짜기.
●배천이-구렁【골짜기】계명산에 딸린 골짜기. 뱃줄바위가 있음.
●뱀-골【골짜기】약막에서 마즈막재로 올라가는 골짜기.
●뱀산-골【골짜기】이미정골 반대편 서북쪽으로 약바위가 있는 골짜기.
●번-던【마을】남산 버덩에 있는 마을.
●벌-들1【들】안심 뒤 벌판에 있는 마을.
●벌-들2【들】안림 서쪽 벌판에 있는 들.
●범-의(凡衣)【마을】→ 약막.
●붉은-언덕1【터】안심 앞에 있는 언덕. 흙이 붉음.
●붉은-언덕2【길】붉은언덕 옆에 있는 길.
●사-덕이【마을】계명산 줄기의 도랑 가에 있는 마을.
●사덕이-들【들】사덕이 근처에 있는 들.
●산지당-골【골짜기】옛날부터 산제를 지냈음.
●새절-골【골짜기】새전봉에 있는 골짜기. 새절이 있었음.
●새절-봉【산】계명산의 한 봉우리. 새절골이 있음.
●생교-터【터】문서등이 근처에 있는 향교 터.
●서드물-들【들】약막 남서쪽에 위치한 들
●선-바우【바위】계명산에 서 있는 큰 바위.●섬-말【마을】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마을.
●성-째【산】예전에 봉현성(鳳峴城)이 있었음.
●쇠옹-골【골짜기】통시골 밑 서쪽에 있는 골짜기.
●쇠전거리【터】황새모랭이 동쪽 안림교 부근의 우시장터. 1969년에 충의동에서 옮겨왔다가 1984년 11월에 가주로 또 옮겨 갔음.
●싸리-봉【산】계명산의 한 봉우리. 싸리나무가 많았음.
●아랫-말【마을】안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아랫절 터【터】임이정 골 밑에 있는 절터. 아랫절이 있었음.
●안림-교(安林橋)【다리】동촌과 안림 어림에 있는 다리. 1965년 6월에 놓았음.
●안-말【마을】→ 안심.
●안-심(安心)[안말]【마을】안림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예부터 피란지로 안전한 곳이라 함.
●앞-등산【산】안심 앞에 있는 작은 동산.
●약-막(藥幕)[범의]【마을】안림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 약막약수터가 있으며 마을어구에 650년되었다는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음.
●약막-들【들】약막마을 앞에 남쪽으로 있는 들.
●약막-약수터(藥幕藥水-)【샘】→ 냉정. 토벽에서 많은 양의 냉수가 용출됨.
●약막-지【연못】약맛마을 상사골에 있는 저수지 없어졌음.
●약바위-골【골짜기】남산절터골 서남쪽 약바위가 있는 골짜기.
●양달-말【마을】어림의 양지쪽에 있는 마을.
●어-림(御林)【마을】백제 문주왕(文周王)이 가행궁(假行宮)을 짓고 있던 솔밭이라는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
어림바위-골【골짜기】밤나무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 바위 밑에 더울때도 어름이 있다함..
●어림-다리(御林-)【다리】약달말과 응달말 사이에 있는 다리.
●어림앞-들【들】어림앞에 있는 들.
●웃-말【마을】안심 위쪽에 있는 마을.
●웃절-터【터】아랫절터 위쪽에 있는 절터. 웃절이 있었음.
●음달-말【마을】어림의 음달쪽으로 있는 마을.
●이-꼴[이골]【골짜기】임이정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이미정-골【골짜기】남산밑 쇠옹골과 퉁시골사이에 위치한 골짜기
●작은-말림【산】큰말림 동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
●잔치-참【마을】어림과 약막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옛날 사형수들이 마즈막재를 넘어와 숲거리 사형장까기 가는 도중 한참 쉬었다 가는 장소였다고 함.
●재피-등【고개】칼날같은 재 등성이만 타고 올라감.
●절-골【골짜기】절이 있었음.
●주막-거리【마을】약말로 들어가는 길목에 주막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고 술도 팔고 하던 곳.
●지네-골【골짜기】계명산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지네가 많았다 함.
●진-등【길】긴 등성이길.
●진실-재【고개】올라가는 길이 긺.
●진컬-양지【버덩】안심 뒤에 있는 버덩. 여름이면 물이 나서 짊.
●찬샘-골【골짜기】찬샘이 나는 골짜기.
●치랏-골【들】안림 서북쪽에 있는 들.
●칼바우-골【골짜기】칼바우가 있는 골짜기.
●큰-골【골짜기】계명산에 딸린 큰 골짜기.
●큰구렁-골【골짜기】뱀골 서북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골짜기
●큰-말림【산】남산절 뒤에 있는 산. 어림에서는 좀 크게 보임.
●큰말림-번던【버덩】계명산에 있는 버덩. 권정승이 부인의 묘를 쓴 후 터를 더 사들여서 말렸다 함.
●태-봉【산】남산의 한 봉우리. 높이 602m.
●터-골【골짜기】계명산에 있는 골짜기.
●터골-숲【숲】터골에 있는 숲.
통시-골【골짜기】약바우 밑 서쪽에 있는 골짜기.
●퉁수-골【골짜기】새절골과 지네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한덕-산【마을】어림에 딸린 마을.
●한자막-골【골짜기】남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한재막-골【골짜기】쇠옹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황새-머리1【마을】어림에 딸린 마을. 서쪽에 황새의 머리처럼 생긴 산이 있음.
●황새-머리2【길】황새머리 근처에 있는 길.
●황새머리-들【들】어림마을 아래쪽 황새머리 부근의 들
'역사의 뒤안길에서 > 옛날 지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권근의 호 "양촌"은 그가 살았던 충주시 소태면 양촌 마을에서 딴 것이다. (0) | 2012.10.22 |
---|---|
말흘산(末訖山)과 용천산(龍天山) (0) | 2012.02.27 |
제천 와룡산 와룡산성 답사기 (0) | 2011.11.09 |
노은(老隱)과 소고(蘇古)에 대하여 (0) | 2011.11.03 |
충주시 용산동 유래(용정과 용산) (0) | 2011.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