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건축문화/전통건축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배우는 지혜

산골어부 2019. 5. 13. 15:10

 

 

 

 

조선고적도보(1931년)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배우는 지혜

 

 

도산서원을 처음으로 답사한 것이 1985년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고건축답사라기 보다는 건축과 졸업여행을 겸한 것으로 지도교수님을 따라 다니며 교수님의 설명을 어깨너머로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쳐 답사가 아닌 관람삼아 다녀갈 때도 서원건축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인지 갔다왔다는 징표만 남기곤 했었다. 지난 2017년과 2018년에 영주에 머무르면서 경북 북부 일대의 문화재들을 답사하면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이 새롭게 보여져서 자주 찾게 되었다. 특히,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퇴계 이황선생의 학식과 지혜가 담겨져 있는 곳같았다. 도산서원을 답사할때, 도산서원를 둘러보면서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분리하여 고찰하는 것이 퇴계 이황선생의 뜻을 이해하는데 더 좋을 것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도산서원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퇴계 이황선생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국가에서 지원받는 도산서원이 건립되기 전에 축조되었기에 퇴계 이황선생의 고뇌가 오늘날의 건축주나 건축가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오하게 배어있다. 조선시대의 유교건축의 서원과 낙향한 유림들의 원림건축들이 이를 표본삼아 계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움막. 초막, 여막, 농막 등 원시주거에 비하면 초가삼간은 규모도 크고, 기능이 분화된 발달된 주거형태이다. 수간초옥 또는 수간모옥에 부엌과 온돌이 설치된다면 추위를 견디는 지혜로운 살림집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간모옥에 마루와 연못이 더해져서 무더위를 피하고 자연을 즐긴다면 초당과 정사와 같은 사대부들의 별채가 되는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이 쓴 도산서당의 답사기를 보면, 출처불명의 용어인 삼간지제(三間之制)에 따른 최소의 공간이라 내세우며, 내.외부 공간의 흐름과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누정이나 서당 또는 정사 등은 단순한 살림집이 아니라, 가옥의 본채와는 별도로 축조되는 별서 또는 별채라는 것이다. 도산서당은 서원건축과 주거건축의 중간형태로도 볼 수도 있으며,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서당과 달리 소학을 가르치는 소학교라기보다는 퇴계 이황이 머물러 공부하는 곳이다. 사대부들의 눈높이로 도산서당을 보면은 삼간이라는 기와집이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는 최소한의 공간일지는 몰라도, 서민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보면은 조선시대의 건축법에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와집에 해당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건축제한에서는 서민가옥은 2부의 토지에 10간의 가사를 소유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2부의 토지를 환산하면 약 80평(266M2)의 대지에 해당되며, 10간의 가사는 세종시대의 영조척의 길이(32.08CM)와 1간의 길이를 7척으로 환산하면, 약 50M2(15평)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착된 도량형인 1척(0.303M)과 6척(1.818M)으로 계산한 것과는 1.5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시기에 따라 다르며, 가사제한이나 가대제한이 엄격하지않아 오늘날과 같은 건축규제와는 개념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가사에서 살림집인 본채와 분리된 창고나 축사 등에 대한 규정이 없기에 주거의 형태에서는 초가삼간을 행랑채와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대부인 양반의 개념도 조선후기로 갈수록 확대되어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지위를 그대로 승계하여 가사제한도 개인의 지위보다는 문중의 권력과 부에 따라 좌우된다. 신분제도에 따른 가옥의 규모도 보와 도리의 길이와 기둥높이의 차등을 적용하기에 오늘날의 건축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퇴계 이황선생의 생전에 건립한 서재와 정사를 도산서당에 포함한 집합 건물로 보아 건축면적을 합산하면 수간모옥이라는 최소공간과는 거리가 먼 사대부들의 건축물일 뿐이다.

 

도산서당은 최소의 공간인가 ? 최대의 공간인가 ?

 

도산서당의 평면과 형태를 보면은 소수서원의 학구재와 지락재처럼 세 칸의 맞배지붕의 원형이 아니라, 축조 후에 좌우측의 박공 부위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도산서당의 외관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암서재이다. 암서재의 마루는 삼면이 기둥을 벗이나 있으며, 암서재의 후면 벽체도 기둥을 벗어나 마루 끝과 완락재의 벽장의 외벽체와 일치한다. 동편으로는 마루와 지붕이 증축된 것처럼 본체에 덧붙여져 있다. 마루널의 간격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깔려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한다. 그 다음은 완락재의 수납공간인 벽장이다. 일반적인 전통건축에서는 부엌과 방사이에 음식을 조리하는 부뚜막 위에 다락방같은 벽장이 있지만. 도산서당의 부엌에는 부뚜막이 없이 아궁이만 있어 다락방이 아닌 벽장(서고)이 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완락재 뒷면에도 벽장(서고)이  기둥에서 벗어나 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전통건축에서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대청마루와 연결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엌의 구성이다. 도산서당의 부엌은 민가의 살림집이 아니기에 취사를 하는 부뚜막이없이 벽장으로 짜여져 난방을 위한 아궁이만 있으며, 부엌에 딸린 곳간이 증축되면서 변형된 것이다. 도산서당의 좌우측 평면과 단면 뿐만 아니라, 외부 전경이 어설프게 보이는 것도 당초의 계획과 달리 본체를 축조한 후에 도산서당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었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의 외부공간에서는 정우당이란 작은 못과 담장에 설치된 작은 사립문들이 초라해 보이면서 서민주택의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는 매개체가 되어 조그마한 도산서당을 자연을 음미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도산서당은 소수서원의 학구재와 지락재와 달리 별서인 정사처럼 기거했기에 단순하면서도 주거에 필요한 공간들을 변형하여 더 아기자기한 친밀감을 더해준다.

 

 

(참고자료)

도산서당 건축면적 : 33.66M2(약 10펑)

*(평면의 기둥중심으로 개산됨)

 

1. 본체 면적(신축) : 20.15M2(약 6평)

2. 부엌 및 골방 면적(증축부분) :3.03M2(약 1평)

3. 수납장 및 마루 면적(증축부분) : 5.21M2(약 1.5평)

4. 툇마루 면적(증축부분) : 5.27M2(약 1.5평)

 

 

퇴계 이황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을 국가로 부터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으로 소수서원을 건립하면서 선대 유학자들의 삶과 이상을 분석하였을 것이다. 이는 도산잡영이나 도산기 등에 잘나타나 있다. 도산서원의 도산서당보다 먼저 세워진 순흥의 소수서원에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도산서당은 학구재와 지락재를 합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엌과 부속실들을 보면 민가의 초가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대부의 별채처럼 보이기도 하고, 민가의 초가삼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도산서당은 평면과 공간구성은 퇴계 이황선생의 고뇌가 담긴 지혜로운 유산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다산초당이나 일지암 뿐만 아니라, 별서로 지은 송시열의 남간정사나 암서재 등에서 나타나는 선비들의 허세보다는 유교건축이 시작되는 초기에 나타난 선비들의 안빈낙도가 깃들여져 있는 것같이 보여지기도한다. 안동의 하회마을의 부용대에 축조된 화천서원과 겸양정사나 옥연정사, 그리고 병산서원은 어떠한가 ? 퇴계 이황 선생은 대학자의 명성에 비하면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권력과 부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의 사후에 건립된 것들이다. 도산서당과 같이 지어진 농운정사가 도산서당과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도 후대에 개축하면서 변형된 것이며. 역락서재는 퇴계 이황선생의 말년에 제자(정사성)와 학부모들의 기부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변의 종택이나 그와 관련된 유적지들도 대부분 그의 후손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도산서당은 서민의 주거에서 나타나는 초가집이 아니다. 건물의 규모와 배치 그리고, 흙벽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민가의 초가삼간과 비슷해 보이지만, 당시의 평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은 사대부들이 선비놀음 또는 신선놀음을 하는 곳일 것이다. 한국의 전통건축에서 나타나는 정자나 누각 뿐만 아니라, 초당과 정사 등은 사대부들의 세력과 부를 자랑하는 건축물들이다. 수간모옥과 수간초옥, 초가삼간과 초려삼간이란 쉽게 말하면 서민의 오두막집이다. 오두막집같은 도산서당을 안빈낙도의 최소한의 공간이라고 한다. 도산서당을 정자나 초당과 비교하면 다소 과한 건물이지만, 정자나 초당과는 그 용도가 다르다. 또한 초가삼간인 서민의 초가집과 비교하면 요즈음 표현으로 호화판 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도산서원에 있는 도산서당은 수간모옥과 무엇이 다를까 ? 조선시대의 가사제한 또는 가대제한은 어떤 것일까 ?  오늘날 농가주택은 30평(100M2)이며, 그 부속시설도 특혜를 주고 있으며, 그 외에도 농막이라는 가시설물을 경작지에 설치할 수도 있다. 도시와 아파트 문화에서 탈피하려는 현대인들이 도산서당과 같은 전원생활을 꿈을 꾸며 동경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나이가 들면 자연으로 돌아 가고픈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선생의 이상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부가 아닌, 학자로서의 마지막 삶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주말이면 유목민처럼 산과 들을 찾아 떠나는 도시민, 안빈낙도를 꿈꾸며 찾아가는 주말농장, 무릉도원을 그리며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 눈에는 도산서당과 같은 별채가 그리울 것이다. 초원의 캐빈과 게르처럼 ~~~~

 

 


(참고자료)도산서원과 도산서당의 배치도

 

 

 

 

 

도산서당

 

 

 

 

도산서당의 마루

 

 

 

 

도산서당의 정우당

 

 

 

 

 

소수서원의 학구재와 지락재

 

 

 

 

소수서원의 학구재

 

 

 

 

소수서원의 지락재

 

 

 

 

 

 

 

 

 

[참고자료]

세종실록 세종 22년 경신(1440) 7월 27일(정묘)

 

22-07-27[02] 예조에서 대소 신료의 제택에 관한 제도를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소 신민(臣民)이 제택(第宅)을 꾸미는 데에 사치하기를 숭상하여서 상하(上下)의 등급이 없는 까닭에, 선덕(宣德) 6년에 교지(敎旨)를 내려 1품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게 하였는데, 지금 대소 신료(臣僚)의 제택이 자못 제도에 지나쳤사오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각(樓閣)의 간살과 보ㆍ기둥의 잣수[度尺]를 마감(磨勘)하여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대군(大君)의 제택은 60간 내에 누각이 10간이고, 친형제(親兄弟)와 친자(親子)ㆍ공주(公主)는 50간 내에 누각이 8간이며, 2품 이상은 40간 내에 누각이 6간이고, 3품 이하는 30간 내에 누각이 5간이며, 서인(庶人)은 10간 내에 누각이 3간입니다. 공주 이상은 정침(正寢)과 익랑(翼廊)의 보(栿) 길이가 10척, 도리 길이는 11척, 기둥 높이는 13척이고, 나머지 간살은 보 길이 9척, 도리 길이 10척, 기둥 높이 12척이고, 누각 높이는 18척입니다. 1품 이하는 정침과 익랑의 보 길이는 9척, 도리 길이는 10척, 기둥 높이는 12척이고, 나머지 간살은 보 길이 8척, 도리 길이 9척, 기둥 높이 7척 5촌, 누각 높이는 13척입니다. 그리고 서인의 집들의 간살은 보 길이 7척, 도리 길이 8척, 기둥 높이 7척, 누각 높이 12척으로 하되,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쓰게 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원전】 4 집 307 면
【분류】 주생활-가옥(家屋) / 왕실-종친(宗親) / 건설-건축(建築)



 

역락서재와 정사성

정사성 [鄭士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 자는 자명(), 호는 지헌(). 아버지는 사섬시첨정 정두(),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식()의 딸이다. 동생이 매창() 정사신()이다.

활동사항

정사성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유일재() 김언기()에게 수학하였으며 10세 때는 구봉령()에게 옮겨서 배웠다. 1561년(명종 16) 퇴계(退)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아버지 정두는 아들을 위해 직접 기숙사인 역락재()를 지어 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유감(有感)           
                                                유신(柳伸)

 

오사모 밑에 흰 털 귀밑이 찬데 / 一頂烏紗雪鬢寒
두어 칸 초가는 푸른 산을 대하였네 / 數間茅屋對靑山
10년 동안의 이은을 아는 사람 없거니 / 十年吏隱無人識
다만 은구만을 눈을 씻고 보노라 / 只把銀鉤洗眼看
 
 
 
 
[주-D001] 10년 동안의 이은(吏隱) : 
현인(賢人)이 직무가 번잡하지도 않고, 명예도 없고 책임이 중하지도 않은 낮은 관리의 자리에 숨어 산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