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건축문화/전통건축

퇴계 이황선생이 그린 옥사도자(屋舍圖子)

산골어부 2019. 5. 24. 13:42

노은(老隱)과 은둔(隱遁)

 

나의 고향은 충청도 노은(老隱)이다. 노은(老隱)이라는 지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첩첩산중인 두메산골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산골오지에 살겠다고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현상은 까마득한 옛날에도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는 노은(老隱)이라는 산골로 들어와 나를 촌놈으로 만들었을까 ? 조상을 탓하던 나도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같다. 시골집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많아지고, 텃밭과 시골집을 어떻게 바꿀까를 고민하곤 한다. 고향으로 가는 것은 귀향인가 ? 낙향인가 ? 아니면, 은둔인가 ? 나는 벼슬도 없고, 한 일도 없는 아주 평범한 바보다. 아직도 내게는 조상이 물려준 문중의 선산과 묘소도 있고, 아흔을 넘기신 노모도 홀로 계시고, 친구와 이웃, 그리고 친인척도 몇몇은 남아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하여 고향이라는 옛정감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타향보다는 고향이 좋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여정도 쉽지는 않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이가 들면 초원같은 자연 속에서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꾼다. 하지만, 욕심쟁이들은 평생을 바친 욕망 때문에 죽을 때까지 평소의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속세의 인연들을 훌훌 털고 신선처럼 노닐고 싶어하지만, 막연한 상상은 마구 꼬인 마음과 몸 때문에 생각처럼 따라 주질 않는다. 선비들의 귀향도 대부분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로 향한다. 그리고,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별서인 초당과 서당을 짓고 마음을 수양하며 삶을 마친다. 하지만, 일부의 못된 사람들은 그 초당과 서당마저도 시정잡배들의 집합소로 만든다. 이 글은 퇴계 이황선생이 직접 터를 잡고 설계한 도산서당에 관한 것이다. 대학자인 퇴계 이황선생이 아니라, 노은(老隱)이라는 은둔(隱遁)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도산잡영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삶이 잘나타나 있다. 고건축답사기를 보면 온갖 찬사와 건축이론을 꺼내어 극찬하지만, 까마득한 옛날부터 먼저 살다간 옛성현들이 겪은 삶들이다. 다만, 유적과 기록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선비들의 안빈낙도와 이상을 잘표현하였기에 귀감으로 삼는 것이다.  대학자란 명성과 달리 초가삼간 같은 작은 집에서 공간이나 사물마다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고 시를 짓는 모습은 좀생이 또는 좀생원같은 옹졸한 촌노처럼 보이지만, 도산서당에 깃든 통찰력과 세밀함은 퇴계 이황선생이라는 대학자가 들려주는 지혜이며 이상이다. 퇴계 이황선생은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도 본가 근처에  서당을 짓다가 포기한 적도 있으며, 동암의 양진암과 계상의 한서암 등을 지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퇴계연보에 나타난 선생의 행적을 보면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집착했는지를 잘보여준다. 대학자인 퇴계선생의 고심과 다리품을 팔아 장만한 터와 설계도면인 옥사도자를 직접 그려 자신이 원하는 집을 지은 것이 도산서당이기에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 건축가 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도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  쉽지는 않다. 돈과 힘만 있으면 좋은 땅도 사고 좋은 집도 살 수 있고 지을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원하는 집을 지으려면 큰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혜롭기보다는 쉽게 얻은 지식과 재산으로 편안하게 적응하며 산다.

 

퇴계 이황선생은 국가로 부터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을 중수하고, 낡고 폐허가 된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상량문과 편액, 그리고 중수기를 쓰면서도 왕족과 사대부들의 큰 가옥이 아니라. 산골의 초가같은 오두막집을 왜 구상했을까 ? 퇴계 이황선생은 사립문과 옹달샘 그리고 뜨락의 풀포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해가며 글을 짓는 소일로 하루를 보냈을까 ? 상상 속에서는 도인같고 신선같아 보이겠지만, 노년의 전원생활은 평범한 시골 늙은이의 삶처럼 보일 뿐이다. 늙은이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나 후학을 가르치는 것도 부질없는 망상이다. 하지만, 퇴계 이황선생은 노년에 편안한 본가의 삶보다는 별서인 도산서당에서 벽창우같은 옹고집으로 선비의 이상을 즐긴 것처럼 보인다. 도산서원을 답사하면서 퇴계선생의 후학들이 도산서원을 건립하면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와 역락서재인 영역을 분리하여 조금은 떨어진 곳에 도산서원을 계획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선생의 의도와 달리 도산서원이라는 굴레 속에 종교적 사원의 일부분이 되어 퇴색해버린 느낌이 든다. 도산서당과 달리 현재의 도산서원을 바라보면, 퇴계 이황선생의 명성으로 그 후학이나 후손들이 국가의 재물을 마구 쏟아 부어 도산서당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도산서당을 역사문화관광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혈세를 쏟아 붓고 있다. 도산서원을 관광삼아 다녀갈지라도 도산서당에 새겨진 퇴계 이황선생의 고뇌와 지혜만이라도 알았으면하는 바램이다.

 

전사옹(田舍翁)과 도옹(陶翁)의 옹고집

 

경북 안동 일대의 고건축을 답사하다가 보면은 선비들의 삶이 느껴진다. 도산서원을 다녀갈 때마다 떠올리는 인물은 농암 이현보와 서애 유성룡이다. 농암과 퇴계와 서애는 무엇이 다를까 ?  분강서원과 도산서원, 그리고 병산서원 뿐만 아니라, 서원과 종택의 입지는 무엇이 다를까 ?  퇴계 이황은 스승인 농암 이현보의 삶을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서애 유성룡도 선배인 그들의 삶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유산도 형식은 같지만, 남겨진 유산이 던져주는 의미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유적지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일반인들의 관점이 아닌 권력과 부를 가진 선비들의 사상과 삶이기에 선비들의 청렴과 안빈낙도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이는 조선시대가 오늘날과 같은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신분계급에 따라 차별하는 왕권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통령은 5년 짜리 임시계약직이지만, 단기선출직임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을 담보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 잘못된 아집으로 인해 전직 대통령들의 삶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질 않는다. 고향으로 귀향한 대통령도 자신만의 안식처를 구상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귀향과 낙향과 운둔은 무엇이 다를까 ?  퇴계 이황선생의 귀향과 은둔과정을 살펴보면 전원생활을 꿈꾸는 오늘날의 도시민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시대가 변하여도 자연 속에서 살고픈 마음은 인간의 본성처럼 느껴진다.

 

전사옹(田舍翁)과 도옹(陶翁)은 누구일까 ? 태백산과 청량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같은 시대을 살았던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이다.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스승과 제자이다,  퇴계 이황은 스승인 농암 이현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농암 이현보가 낙향할때, 나룻배에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만 실었다고 전하고, 퇴계 이황도 풍기군수를 사임하면서 책 두어 상자만 갖고 귀향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이는 선비로서의 청렴을 강조한 이야기일 뿐이다. 도산서당을 초가삼간에 비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반 서민은 산 중의 나무도 함부로 재목으로 쓸 수도 없고, 기와집은 꿈에서나 그려볼 일이다. 하지만, 도산서당을 선비들의 가옥이나 별서와 비교하면 초라하다. 이현보나 이황선생은 정치가보다는 대학자였기에 현실정치에서 권력과 지위에 연연하지는 않은 측면도 있지만, 더 높은 권력과 지위를 물리치고 귀향한 인물들이다. 권력의 명분 싸움에 밀려 낙향한 선비나 죄의 유무를 떠나 귀양을 간 선비들과 달리 스스로 귀향한 선비였기에 추앙받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이상과 학문은 별 볼일 없는 나에게도 그 유적들을 돌아보게하고, 그 생각들을 되새기게 한다. 지금 나에게 도산서당을 준다고해도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내 삶과 이상이 퇴계 이황선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산서당이 그리운 것은 내가 원하는 집을 짓고 살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명현의 지혜를 돌아보는 것이다. 노은(老隱)이라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 곳에는 나의 고향집이 있다. 촌노가 되어 살아갈 시골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  내가 구상해서 지은 시골집도 이제는 낡아버렸지만, 문명이라는 산물 덕분에 퇴계 이황선생보다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산서당의 지혜를 빌어 나의 마지막 쉼터를 새롭게 바꿔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소일(消日)로 보내는 노옹(老翁)이 아닌 신선처럼 날아다니고 싶다.

 

 

 

 

 

 

 

 

(참고자료)

퇴계집

 

退溪先生文集卷之十五 / 書

與李大成

 

滉卜得陶山下棲息之地。最是晩幸。而未及結屋。遽有此行。一何造物者之多戲劇耶。其地雖已占斷。自度事力了然。未敢出意營構。蓮僧乃奮力擔當其事。是則一奇遇也。滉來時。面約蓮僧云。先燒瓦後結屋。前月中。得寯兒書。蓮意欲先結屋。開春。不違始役。屋舍圖子。須成下送。則於冬月無事時。稍稍鳩伐材料云云。滉思之。蓮計似倒著。然堯以萬乘之尊。尙茅茨不翦而可。況山人隱約盤旋之所。寧辭姑草蓋以待瓦乎。又蓮之續以燒瓦。雖未可必。要以眼前突兀見此屋爲喜。故欲聽其所爲。已成圖子送于寯。令招蓮示而說之。不意寯以其外家葬事。下去宜春。不見其圖也。寯還當在歲除春初之間。雖來見圖子。冬時已過了。且其圖未免疎脫不可用。今改寫一圖下送。但直付蓮僧。必未曉破。念惟梧翁與月川趙士敬在陶山相望之處。他日屋成。杖屨來往。必先必多於溫溪,烏川諸君。其指授蓮僧以結構規畫。宜無外視之意。故敢以呈浼。須速招蓮。詳細說諭。使其心歷歷知得而爲之。如有盛意未穩處。亦望招士敬。與之消詳示及。爲佳。其所以堂必南向正方位。便行禮也。齋必西偏對園圃。尙幽致也。其餘房室,廚藏,門庭,窓戶。皆有意思。恐此制不可易也。南邊三間。梁與楣長皆八尺。北邊四間。楣與南同。而梁長七尺。以其後有假簷故也。其中東西二間。梁八尺楣七尺。如此則其庭甚小如斗。然此二間。須極低棟短簷。使猶可以納明。則庭小何妨。況堂齋之用。皆不向內庭。但令可取明於廚竈等足矣。如何如何。精舍之名。姑就山名。取弘景隴上多白雲之語稱之。未必爲定號也。壽樂堂。擬其欲如此云耳。非今欲倂成之。古人未成屋而先立名號。固有之。故戲效之耳。滉明春歸計懸懸。時未定早晩。若吾未歸前就役。須煩往與寯相度議處。庶無後悔。又幸之大也。

 

 

조선왕조실록(중종)

중종 37년 임인(1542) 7월 3일(신해)

 

동지중추부사 이현보가 병때문에 전리로 돌아가다

 

동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가 병 때문에 전리(田里)로 돌아가고자 하니, 급유(給由)하라고 전교하였다. 【이 현보는 호조 참판으로 병으로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정사(呈辭)하고 전리로 돌아가니 조정의 사대부들이 강가에 나와 전송하였는데, 이는 영원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 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여덟 군현(郡縣)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늙어서 부모의 상을 당해 예를 다했고, 상을 마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서 참판에 이르렀다. 하루아침에 호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집에 있으면서는 담담하게 지냈고, 틈이 있으면 이웃을 찾아가 도보(徒步)로 상종하면서 전사옹(田舍翁)으로 자처(自處)하였다. 집 앞에 큰 시내가 있어 배를 띄울 만했는데, 가끔 손님과 더불어 중류(中流)에서 노[枻]를 두드리며 두건(頭巾)을 뒤로 높이 제쳐 쓰고 서성거리니,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마치 신선과 같았다.
【원전】 18 집 59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퇴계선생연보 제1권

 

25년 명종(明宗) 원년 (병오) 46세
11월,  양진암(養眞菴)을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위에 짓다. 이보다 먼저 작은 집을 온계리 남쪽 지산(芝山) 북쪽에 지었으나, 인가가 조밀하므로 아늑하고 고요하지 못하였다. 이해에 처음으로 퇴계 아래의 두서너 마장 되는 곳에 집을 빌려 살면서, 동쪽 바위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양진암(養眞菴)이라 이름하였다. 시내는 속명이 토계(兎溪)였으나, 선생은 토(兎) 자를 퇴(退) 자로 고치고, 이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27년 (무신) 48세
1월, 외직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단양 군수에 임명되다.
10월, 풍기 군수로 전임되다. 형 대헌공이 충청 감사가 되자, 단양이 그 관내에 들어가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28년 (기유) 49세
12월, 감사에게 글을 올려 백운동서원의 편액(扁額)과 서적을 청하였더니, 감사가 왕에게 아뢰어 내려 주다. 백운동은 군의 북쪽 소백산 아래 죽계(竹溪) 위쪽에 있었는데, 전조(前朝)인 고려 때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곳이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군수가 되었을 적에, 비로소 그곳에 서원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하고, 또한 여러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생은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없었다가 이제 처음으로 생겼기 때문에, 위에서 시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혹시 그대로 없어져 버릴까’ 염려하여, 감사에게 글을 올려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송나라의 고사에 의거해서 책을 내려 줄 것과 편액을 왕명으로 내려 줄 것과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어서 배우는 자가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하고,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을 시켜 기문(記文)을 짓게 하며,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서원의 흥성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병으로 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장을 올려 관직에서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돌아오다. 행장이 쓸쓸해서 오직 책 두어 상자 뿐이었다.
 
29년 (경술) 50세
2월, 처음으로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고 살다. 이보다 먼저 하명동(霞明洞) 자하봉(紫霞峯) 아래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했고, 다시 죽동(竹洞)으로 옮겼으나 또 골이 좁고 시냇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계상(溪上)으로 정하였으니 무려 세 번이나 옮겨 살 곳을 정한 것이다. 한서암(寒栖菴)을 짓다. 집의 이름을 정습(靜習)이라 하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4월, 광영당(光影塘)을 파다. 한서암 앞에 있으니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뜻을 취해서 이름 지은 것이다.
8월, 형 좌윤공(左尹公) 이해(李瀣)가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다.
 
33년 (갑인) 54세
2월, 동궁(東宮)의 상량문을 짓다.
4월,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7월,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쓰다
12월,〈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니, 상께서 말을 하사하시다.
 
36년 (정사) 57세
3월, 도산(陶山) 남쪽에 서당 지을 터를 마련하다. 다시 서당 지을 땅을 정하고 감상이 있어서, 〈두 번째 가서 도산 남쪽 골을 보면서〉라는 등의 시를 지었다.
 
 
37년 (무오) 58세
3월, 창랑대(滄浪臺)를 지었다. 후에 천연대(天淵臺)라 고쳤다. 4월, 오담(鼇潭)에서 노닐다.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위해 오담 근처에 서원을 세우고자 하여 그 터를 둘러 보았다.
 
39년 (경신) 60세
11월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완성되다. 이로부터는 또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였다. 당(堂)은 3칸인데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정사는 7칸인데,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매양 도산에 이르면 항상 완락재에 거처하면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고개 숙여 읽으며 우러러 사색하기를 밤낮으로 계속했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과 잡곡밥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 나갔기 때문에 각고(刻苦)한 공부와 담박한 생활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견뎌 내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하였다. 선생은 도에 더욱 근접해 갔고 조예도 더욱 깊어져서 스스로 즐겼고, 바깥 물정을 부러워하지 않은 까닭에, 비록 궁하고 모자라는 가운데에서도 여유가 있고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어서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그 뒤에 학생들이 정사 서쪽에 집을 짓자 그곳에 거처하면서 이름을 역락(亦樂)이라 하였으니, 논어의 ‘자원방래(自遠方來)’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