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건축문화/전통건축

도산서당의 옥사도자(屋舍圖子)

산골어부 2019. 5. 23. 09:18




풍기 금계 금선정



금계집 외집 제6권 / 시(詩) - 황준량


차운하여 스님에게 주다 절구 2수 〔次贈山人 二絶

도산 상공을 위하여 서당을 짓는 스님에게 주는 시이다.


내가 생계 꾸린 것이 비둘기만 못하여 / 治生我亦拙於鳩
평생에 한 골짝의 계모를 이루지 못 하였네 / 未遂平生一壑謀
도산에서 일 마치고 남은 칼날 있거든 / 辦了陶山餘刃在
날 위해 가을에 금계에도 꾸며 주게나 / 爲吾粧點錦溪秋


집 짓느라 온갖 고생하는 그대 가련한데 / 憐汝經營飽險艱
올 적마다 차가운 눈바람 띠고 오네 / 來過正帶雪風寒
여장 풀자 또 계선의 시구 얻었으니 / 解裝又得溪仙句
생각은 벌써 구름 낀 아득한 곳으로 들어가네 / 思入雲山縹緲間
[주-D001] 도산(陶山) …… 스님 : 
이황이 1557년(명종12) 57세 때 공조 참판에서 물러나서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그 이듬해에 친히 건축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옥사도자(屋舍圖子)를 그렸다. 당시 용수사(龍壽寺) 승려였던 법련(法蓮)이라는 스님이 공사를 시작하여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 정일(靜一) 스님이 뒤를 이어서 이황의 나이 61세 때인 1561년(명종16) 가을에 완성했다. 《퇴계집》 권3에 수록된 〈도산잡영(陶山雜詠)〉에 나온다.
[주-D002] 남은 칼날 있거든 : 
여력이나 솜씨를 비유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지금 내가 칼을 잡은 지 19년이나 되고 잡은 소도 수천 마리를 헤아리는데, 칼날이 지금 숫돌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시퍼렇다. 소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는 틈이 있는 공간이 있고 나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것을 그 틈 사이에 밀어 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해서 칼을 놀릴 적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D003] 금계(錦溪)에도 꾸며 주게나 : 
황준량도 이 무렵에 고향 풍기에 정자를 짓고 은거할 계획을 했다. 그런 생각이 〈금계복정기(錦溪卜亭基)〉와 〈유금선대(遊錦仙臺)〉, 〈금계벽정사기 선점일절(錦溪闢精舍基 先占一絶)〉 등 여러 시에 드러난다. 장점(粧點)은 좋은 땅 가려 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주-D004] 계선(溪仙)의 시구 : 
토계(兎溪)에 은거한 이황이 승려에게 지어 준 시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황이 서당을 짓다가 경주에 볼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을 때, 법련 스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소감을 적어 준 〈증사문법련 병서(贈沙門法蓮 幷序)〉라는 시가《퇴계집》 속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퇴계집


退溪先生文集卷之十五 / 書

與李大成


滉卜得陶山下棲息之地。最是晩幸。而未及結屋。遽有此行。一何造物者之多戲劇耶。其地雖已占斷。自度事力了然。未敢出意營構。蓮僧乃奮力擔當其事。是則一奇遇也。滉來時。面約蓮僧云。先燒瓦後結屋。前月中。得寯兒書。蓮意欲先結屋。開春。不違始役。屋舍圖子。須成下送。則於冬月無事時。稍稍鳩伐材料云云。滉思之。蓮計似倒著。然堯以萬乘之尊。尙茅茨不翦而可。況山人隱約盤旋之所。寧辭姑草蓋以待瓦乎。又蓮之續以燒瓦。雖未可必。要以眼前突兀見此屋爲喜。故欲聽其所爲。已成圖子送于寯。令招蓮示而說之。不意寯以其外家葬事。下去宜春。不見其圖也。寯還當在歲除春初之間。雖來見圖子。冬時已過了。且其圖未免疎脫不可用。今改寫一圖下送。但直付蓮僧。必未曉破。念惟梧翁與月川趙士敬在陶山相望之處。他日屋成。杖屨來往。必先必多於溫溪,烏川諸君。其指授蓮僧以結構規畫。宜無外視之意。故敢以呈浼。須速招蓮。詳細說諭。使其心歷歷知得而爲之。如有盛意未穩處。亦望招士敬。與之消詳示及。爲佳。其所以堂必南向正方位。便行禮也。齋必西偏對園圃。尙幽致也。其餘房室,廚藏,門庭,窓戶。皆有意思。恐此制不可易也。南邊三間。梁與楣長皆八尺。北邊四間。楣與南同。而梁長七尺。以其後有假簷故也。其中東西二間。梁八尺楣七尺。如此則其庭甚小如斗。然此二間。須極低棟短簷。使猶可以納明。則庭小何妨。況堂齋之用。皆不向內庭。但令可取明於廚竈等足矣。如何如何。精舍之名。姑就山名。取弘景隴上多白雲之語稱之。未必爲定號也。壽樂堂。擬其欲如此云耳。非今欲倂成之。古人未成屋而先立名號。固有之。故戲效之耳。滉明春歸計懸懸。時未定早晩。若吾未歸前就役。須煩往與寯相度議處。庶無後悔。又幸之大也。


성재집


惺齋先生文集卷之三 / 記 - 금난수(琴蘭秀, 1530~1604)

陶山書堂營建記事


嘉靖六年丁巳。先生得書堂基址於陶山之南。有感賦二詩。其後再往視陶山南洞。有五言古詩。遂欲移建書堂於此。而有浮屠法蓮者。請幹其事。而未及結屋。戊午七月。先生赴召入都。寫屋舍圖子一本。書與碧梧李丈。使之指授蓮僧而結搆焉。又與趙士敬書曰陶山精舍之卜。最是晩來關心事。蓮闍梨勇自擔當。不待吾歸而欲事營葺。今聞蓮僧化去。有此魔事云云。法蓮死後。淨一者繼而營建。與蘭秀書曰陶山事。有僧欲任。陶瓦次第。將有可望。然豈如蓮僧之勇自擔當耶云云。庚申七月始役。十一月堂成。堂凡三間。軒曰巖棲。齋曰玩樂。合而扁之曰陶山書堂。堂之西搆精舍八間。軒曰觀瀾。齋曰時習。寮曰止宿。合而扁之曰隴雲精舍。其所以堂必南向正方位。便行禮也。齋必西偏對園圃。尙幽致也。其餘房室厨藏門戶。皆有意思。所揭扁額。皆先生手書。而敬齋箴,白鹿洞規,名堂室記。亦揭于壁上。自是又號陶翁。先生筆法端勁雅重。非如他名家尙奇怪而已。或因人求懇。時書屛簇。而未嘗見其對人揮灑。或當寫未畢而有自外至者。雖常居門下者。亦必藏而待之。其謹嚴類如此。
巖栖軒。位勢面陽。用三間之制。而三面立退柱。東面覆翼簷。故頗極瀟灑。室中西北壁造書架。而西則隔限半寢而空其中。蘭秀問書架之不設燕寢下方者亦有意乎。先生曰此是余之寢處及起居之所。經訓在後背之未安。故如是爾。中有古書千餘卷。分揷左右書架。又有一花盆一書床一硯匣一几一杖寢具簟席香爐渾天儀。南壁上面後橫架。置衣箱書笥。此外無他物。書架所儲書籤。整齊不亂。每於槐夏淸明之日。出而曝曬。與溪上所藏書。互相往來。故時有盈縮。嘗使蘭秀出兩處書簿。通共計數。凡一千七百餘卷。侍座之日。先生或有考覽處。命抽第幾架第幾行第幾卷某書。而抽出撿視。無一差誤。先生之力量精神。亦可見其一端矣。
節友社。在巖栖軒東麓下。辛酉三月所築也。先生一日自溪上步出陶山。有詩一絶日花發巖厓春寂寂。鳥鳴澗樹水潺潺。偶從山後携童冠。閒到山前問考槃。蘭秀嘗問此詩有上下同流各得其所之妙。而與曾點浴沂氣像。濂溪庭草。一般意思同。先生曰李德弘輩亦有此語。而但推言之太過耳。
淨友塘。堂之東偏鑿小方塘。種蓮其中。取濂溪之意名以凈友。
幽貞門。堂前出入處。掩以柴扉。名以幽貞。取易履道坦坦幽人貞吉之意也。
天淵臺。戊午三月。令僧愼如輩臨水築臺。始名滄浪者此也。臨江斗截。境界敞豁。甲子夏。蘭秀自孤山往拜先生。先生杖屨逍遙於臺上。時風日暄姸。景物和暢。天理流行。無所滯礙之妙。可得於仰觀俯察矣。先生曰今日遇會心境。君此際來到。又得會心人矣。因進而問曰鳶飛魚躍。子思子引之以明上下昭著之理。而特言鳶之飛魚之躍何也。先生曰凡事物之自然者。是理也。鳶之戾天。魚之躍淵。豈勉強而爲之歟。纔涉於有所作爲。非理之自然也。
天光雲影臺。癸亥三月所築也。在天淵臺西麓上。與天淵臺齊等。一名天雲臺。
谷口門。在天淵臺雲影臺兩麓間。出入之洞門。一名谷口巖。
濯纓潭。在天淵臺下。辛酉四月旣望。泛舟濯纓潭。先生令姪㝯,孫安道及李宏仲。以淸風明月分韻得明字。有不知百歲通泉下更有何人續正聲之句。
盤陀石。在濯纓潭中。水漲則入水中。記中與齊俱入四字。語出莊子。先生借用之耳。齊水之旋磨處也。
石磵臺。在雲影臺西聲洞洞口。壬戌三月。先生乘舟抵靑溪。名其臺曰靑溪。卽石磵臺也。每年夏秋之交。官家築漁梁於此臺下。故先生未嘗往來焉。嘗與聾巖李先生遊此臺。有踏靑詩。李剛而來留陶山數日而還。先生送別于此臺。先生書唐人詩他日相思來水頭之句以贈。
辛酉。李君美與趙士敬,琴士任,金愼仲,琴夾之,壎之,金惇敍及蘭秀。約搆數間齋室於隴雲之側。以爲讀書肄業之所。先生嘉其意而許之。李君欲張大其事。兩度出文。遠近願入者亦多。以至設施之境矣。先生與士敬書曰㝯姪軰欲於陶山構小屋。意與聞遠,德弘等隨便草造。故不爲禁止。今聞兩道出回文。與於其事者二十餘人云。爲今之計。不得已又當止之。速以此意通于聞遠。若往竹溪。必過榮川而見㝯等。詳告停之云云。其後始事諸人。與鄭士誠搆齋於前日所擬之地。名曰亦樂齋。
先生著記。在辛酉十一月。卽先生回甲之歲。遞參判移拜同中樞府事時也。有陶山言志詩及雜詠詩。
明宗大王丙寅。自上命畫陶山堂齋及遠近山川形勢。令礪城君宋寅書記與詩。列爲屛風。張之卧內。
隆慶四年庚午五月。先生出陶山。與諸生講啓蒙。九月又講心經啓蒙。附先生言行數條
萬曆二年甲戌春。一鄕士子議。陶山先生講道之所。不可無書院。乃就書堂後數步而闢地營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