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산과 들/산길 따라서

[스크랩] 등곡지맥의 끝자락(등곡산-황학산)

산골어부 2009. 2. 20. 13:02

 오늘은 충주호 주변의 지맥 중에

등곡지맥과 황강임도를  트레킹했다.

충주호 100마일 우회코스인 쇠시리재를 넘으면서

등곡산 산행과 황강임도을 라이딩 해야지 하면서도

늘 미뤄 오다가 일정을 바꿔서 다녀 왔다.

오늘 산행에서는 상황버섯 하나를 횡재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연료가 떨어져서 긴급 서비스를 받는 수모를~~~

 

 

 

 

등곡지맥 끝자락은 충주호를 따라 산행하는 코스 중

가장 조용하고 경관이 좋은 곳이다.

등곡지맥을 종주하시는 분들은

월악나루-중치재-등곡산-떡갈봉-쇠시리재-월형산~~~~~

등곡산을 산행할 때는

상탄지리 월악 주유소-쇠시리재-떡갈봉-등곡산-황학산-황학사터-황강리로 산행하고

황학산 등산로 입구인 황학사터에서 황강임도를 따라 장자봉 안부와 중치재를 넘어

상탄지리의 월악 주유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등곡산에서 장자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잘 형성되어 있으나,

황학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산행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잡목들이 우거져 있지만 최근에 정상 표지석과 등산로가 정비되어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등곡지맥의 끝자락은 충주호 반대편의 천등지맥과 맞닿는 곳으로

황강리와 명오리 일대의 호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호수 건너의 죽방치와 배오개치는 다도해를 연상케 한다.

등곡지맥과 황강임도 끝자락에는 주민은 살고 있지 않지만,

임도가 개설되면서  수몰지역 위 황학사터 아래에

과수원들이 경작되고 있으며, 임도를 따라 이어지는

충주호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산악자전거를 타고 ~~~~

오늘은 디카도 없고, 날씨가 흐려서

폰카로 대신했자만~~~~~

다음에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구석구석을 ~~~

 

 

 명나라 풍수인 두사충이 잡은 충주호안의 이암묘소

 

 

 

 

두사충(杜士忠) 이야기
沙月 李盛永(2008. 3. 22)
    2003년 10월 1일 발간된 『연안이씨 이야기』 책에 본인이 기고하여 ‘桑田碧海 渡船參拜를 豫言한 황강의 副護軍 墓’라는 이야기가 수록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에 상전벽해(桑田碧海) 도선참배(渡船參拜)를 예언한 두사충(杜士忠)이란 사람이 실제 인물로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수행해서 조선에 나왔다가 난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만경(萬頃) 두씨(杜氏)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이 2008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대원군 책사 박유봉’이란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다만 부호군 묘에 얽힌 이야기 중에는 ‘두사충(杜士忠)’이라 했는데, 조용헌 살롱에서는 '두사충(杜思忠)'으로 이름 가운데 글자의 한자 표기가 다르나 이야기 내용으로 봐서는 동일인이다. 두 이야기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함께 올린다.
桑田碧海(상전벽해) 渡船參拜(도선참배)를 豫言(예언)한
黃江(황강)의 副護軍(부호군) 墓(묘)
2003. 10. 1. 연안이씨 이야기 중에 沙月 盛永
    충주댐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월악나루나 단양으로 향하면서 월악산 영봉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올려보다가 시선을 낮추면 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황학산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 황학산이 충주호에 잠기면서 여러 개의 반도(곶: 串)와 같은 지형을 만들었는데 가장 멀리 튀어나온 곶(串)의 끝머리에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아슬아슬하게 자리잡고 있는 묘지 하나가 눈에 띈다. 행정구역으로는 제천시 한수면 북로리 작곡(鵲谷
: 까치골)이다.
충주호반에 아슬아슬한 묘지 하나, 부호군(副護軍 諱 巖)의 묘
갈수기라 수면이 많이 내려갔지만 만수기에는 묘 뜰 앞 제절까지 물이 찼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묘가 물가에 있어 충주호에 놀고 있는 물고기와 오가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묘를 쓴 400여년 전에는 물가가 아니라 해발 140여 미터의 황학산 중턱에 있었고,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을 이곳에서는 황강(黃江)이라 불렀다.

    이 묘지에 얽힌 이야기다.
    우리 延李의 판사공(判事공 諱 賢呂)의 8대손 저헌공(樗軒公 諱 石亨)의 여섯 손자 중 넷째(六長派 中 四派),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孝長)의 둘째 아들 부호군공(副護軍公 휘 巖)의 묘다.
    이암(李巖)은 중종과 선조 때에 살았다. 후에 부호군(副護軍
: 종4품의 무관직)에 증직(贈職)되어 후손들이 「 부호군공(副護軍公) 」이라 부른다.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자라 역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선공감(繕工監
: 토목과 영선을 맡은 관청)의 감역(監役: 감독관)으로 일하다가 중종14년(서기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종형 정헌공(正軒公 諱 夔)이 조광조의 제자라는 이유로 사화에 연루시켜 파직되는 세태를 보고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충주(忠州)로 낙향하여 수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선조 4년에 별세하였다.

    세월은 흘러 선조25년(서기1592년)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참혹한 병화에 휩쓸릴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明)나라 원군의 장수로 온 이여송(李如松)이 와서 보니 조선의 산세가 웅장하여 장차 큰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국에 연락하여 천문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士忠)이라는 도사를 불러 데리고 다니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산의 혈(穴)을 자르고 다녔다 한다.
    그 때 부호군의 둘째 아들 청계당공(淸溪堂公 諱 麟瑞)이 의흥(義興
: 현 경북 軍威에 있음) 현감으로 있었는데 마침 이곳에 들른 두사충(杜士忠)을 만나 알게 되었다. 극진히 대접하였더니 감사의 뜻으로 묘 자리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여 고향 중주로 안내하였다.

    며칠간 충주 일대의 산을 둘러보던 두사충(杜士忠)이 황강(黃江: 현 제천시 한수면 일대의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월악산 북쪽 줄기(사실은 1161.5m의 문수봉 줄기) 끝자락 황학산 기슭에다 묘자리를 잡아주며 말하기를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쇠갓(鐵冠)을 쓴 사람이 지나가는 시각에 하관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400년 후에는 이 산소 앞 들판에 물이 차서 상전벽해(桑田碧海
: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다)가 되고, 산소의 제절(除節) 아래서 물고기가 놀면서 파도를 일으키며, 후손들이 도선참배(渡船參拜: 배를 타고 와서 참배) 해야 하고, 자손 중에는 유능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고 예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말들이었다. 멀쩡한 산 중턱이 ‘상전벽해’는 무엇이며, ‘묘 앞에서 고기가 파도를 일으키며 놀고, 도선참배’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래도 중국에서 유명한 천문지리에 통달한 도사의 말이니 믿어보기로 하고 부호군 묘의 이장을 서둘렀다.

    부호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려고 일꾼들이 땅을 파니 큰 바위가 나와 며칠을 걸려 바위를 깨었더니 갑자기 바위 밑에서 벌 떼가 몰려나와 산 밑 황강 가 들판에 퍼져 온 들판을 까맣게 덮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이 들판을 ‘벌들’이라 불렀다 한다.

    두사충(杜士忠)이 하관시간을 정해주지 않고 ‘쇠 갓을 쓴 사람이 지나갈 때’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해를 운구해 놓고도 하관하지 못하고 ‘쇠 갓 쓴 사람이 지나갈 때’를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관할 때를 답답하게 기다리는데 이 때 어떤 아낙네가 들일에 점심밥을 이고 나갈 때 소나기 잦기 때문에 소나기가 오더라도 빗물이 점심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광주리 위에 솥뚜껑을 덮어 머리에 이고 산 아래 지나가는 지나가고 있었다. 상주 청계당공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쇠 갓을 쓴 사람, 바로 저것이다. 빨리 하관 하여라”

    이렇게 해서 부호군 묘지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부호군의 묘를 이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두사충(杜士忠) 이야기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직접 와서 보고 명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호군공의 종증손(從曾孫) 되는 월사공(月沙公 諱 廷龜)의 손자 정관재공(靜觀齋公 諱 端相)은 이곳 동쪽 인근의 청풍부사로 있을 때 직손과 함께 참배하고 “과연 명당”이라고 칭송하였고, 정관재공의 사위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도 이 묘에 와서 보고 “풍수지리에 맞는 명당”이라 하였다.
    또 이곳이 고향인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도 이 묘에 와서 보고 ‘내사군(內四郡
: 주변 4개 군)에서는 으뜸 가는 명당’이라 칭송하였다.

    묘를 이장한지 412년이 지나 충주댐이 완공되었다. 묘 앞애 황강과 벌들이 모두 물에 잠기어 바다처럼 되니 두사충(杜士忠)이 말 한데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또한 묘지로 가는 길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성묘를 하려면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매년 묘사 때면(10월 4일) 함께 모여 도선참배(渡船參拜)하여 묘제를 올리니 400여 년 전에 두사충(杜士忠)의 예언이 아주 적중한 셈이라 놀라워하고 있다.
(중략)

    황강과 벌들이 상전벽해가 되었는데도 부호군의 묘는 원상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후손들이 두사충(杜士忠)의 예언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주댐 공사 당시 정부에서는 수몰예정선인 해발 145m 이하의 모든 분묘는 모두 이설 또는 이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이 묘는 해발 142.7m에 있어 수몰 예정선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문중회의를 거쳐 400여 년 동안 전해내려 온 두사충(杜士忠)의 말을 믿고 당국에 현상보존을 청원하면서 ‘수몰이 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공증을 해주고 이장하지 않았는데 과연 만수위 때도 묘의 제절(除節) 바로 아래까지만 물이 차고 묘뜰과 봉분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충주댐나루에서 월악나루와 단양을 오가는 유람선이 이 묘지 앞을 지날 때면 이 묘에 얽힌 이 이야기를 안내양의 낭낭한 목소리로 녹음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출처 : 충주호 산길 따라 이어지는 쪽빛 투어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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