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도에 오갑산 관한리 임도를 라이딩한 후기를 다시 읽어보고 오갑산을 찾았다.
여주와 음성 그리고 충주시에 걸쳐있는 오갑산은 육산으로 산행을 하는 맛은 없지만,
작은 산에 비해 산행거리도 길고, 삼태봉에서 오갑산에 이르는 능선의 시야가 좋고,
오갑산 북쪽 능선을 따라 헬기장들이 자리하고 있어 쉬어가면서 산행하기 좋은 산이다.
또한 오갑산 관한리(어우실)에 개설된 관한리 임도는 오갑산 5~6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산악자전거 초보자도 쉽게 라이딩할 수 있으며, 임도와 등산로가 연계되어 산행코스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산경표에 따라 산줄기를 구분하는데, 오갑산은
한남금북정맥의 보현산에서 분기하여 부용산과 수레의산(수리산)과 원통산을 지나
청미천과 섬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점동면 삼합리의 합수점(대오마을 단진개섬)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 벌어진 4대강 살리기 사업에서 단진개섬을 점동면 도리마을 앞에 있는
도리섬이라고도 했었다.
이번 산행은 등산이라기보다는 오갑산 정상 부근의 이진터를 조사하기 위하여 올랐던
것이라 산행후기보다는 오갑산의 유래와 이진봉 부근의 진터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았다.
오갑산에는 정상표지석이 세 개나 서 있다. 오갑산에 인접한 자치단체에서 행정구역
등을 빌미로 불필요한 영역 표시를 하여 등산객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기에 정상표지석
설치는 산림청이 주관하여 설치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한 오갑산에 대한 지명표기나
유래도 민담에 의한 설화를 정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갑산에서 "오"자는 까마귀(烏)와
오동나무(梧)로 표기되고, "갑"자는 갑옷(甲)과 산허리(岬) 또는 누르다는 뜻의 압(壓)과
압(押) 등으로 표기 되는데, 이는 산의 형상을 표현함에 까마귀와 자라(거북)를 상징으로
나타낸 차이에 불과하다.
옛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에는 오압산(烏鴨山)으로 기록되어
오갑산(烏岬山)보다는 오압산(烏鴨山-검은 오리산)이라는 지명표기가 조선조 초기로 더 오래된
것이기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민담설화는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추측되며, 오갑산 관할구역도
음죽현보다는 여주목에 속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오갑산의 삼태봉과 이진봉 사이에 있는 질마재(서천고개)는 노루목처럼 잘록하다는 표현으로
자라를 형상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오갑산은 삼형제 부근의 능선을 따라 까마귀가 많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오갑산(烏岬山)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는 충주시 앙성면 모점리의
오갑사지 출토유물에서도 오갑사(烏岬寺)란 금석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오갑산(梧甲山)이란 표현은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하면서 그를 미화하기 위하여 오동나무가
많은 산으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한다. 흔히 산이름에 오동나무를 뜻하는 오(梧)를 사용하지만,
오동나무가 잘 자라는 산은 거의 없다. 오동나무는 대표적인 활엽수로 침엽수인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서는 도태되는 수종인 것이다. 하지만 까마귀는 고구려 상징으로 삼족오(三足烏)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오갑산(烏岬山)은 고구려의 엣지명인 노음죽현의 주산이 아닐까한다.
남한강의 청미천 유역은 보현산과 칠장산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으로 둘러싸여 금강의 미호천
유역과 대립하고, 영남대로와 서해바다를 잇는 요충지이기에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한강을
지배하는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갑산(烏岬山)을 중심으로한 지배세력이
오갑산과 망이산(마이산)을 남한강의 청미천 유역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삼았을 것은 아닐까한다.
오갑산 정상을 이진봉이라고도 하는데, 이진봉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조.명 연합군이 주둔했다는
유래로 나타난다. 이진봉(夷鎭峰)에서 이진(夷鎭)에 대한 지명 유래는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군대
의 주둔지를 일컷는 것이지만, 오갑산 이진봉은 산성이라기 보다는 작은 망루 또는 보루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의 실태를 실펴보면 명나라 원군이 성이나 보루를 만들기보다는
조선군들이 그를 대신했으며, 초병과 매복에 따른 정탐과 기습도 지역정세를 잘 아는 지역민들이
담당했기에 조.명 연합군의 주력군인 명나라 군대가 작은 망루인 오갑산에 주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오갑산 아래의 삼태봉도 오갑산의 소개에서 봉화대로 소개되지만 봉화대보다는 작은 보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갑산 주변에서 이여송과 명나라 원군에 대한 유래는 생극의 이성터와 충주의
두무소 그리고 달천의 달래강 유래에서도 나타나지만, 본래의 지명유래라기 보다는 이진(夷鎭)
또는 왜성(倭城)을역사적인 큰 사건인 임진왜란과 이여송에 대한 유래로 변천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이진봉 주변에는 토사를 절취한 흔적들이 산재하여 토루보다는 야영지와 망루를 구축한 것으로
보여지며, 북측의 국수봉과 오사고개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에 조성된 헬기장은 오늘날에도 오갑산이
군사적으로 요충지임을 대변하는 것 같다. 따라서, 오갑산도 청미천 건너 저멀리 보이는 망이산
또는 마이산의 망이산성처럼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가 한강유역을 놓고 혈전을 벌이는 격전지의
한 모습이 아닌가한다.
관한리 임도 입구에서 바라본 오갑산
산골어부의 오갑산 관한리 임도 라이딩 후기
http://blog.daum.net/topgwon2002/17134753
오갑사지(충주향토자료)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모점리 동막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충주 지역에는 명창 3년(1192)명 기와편이 출토되는 곳이 두 곳 있는데, 수안보면의 중원 미륵리 사지와 앙성면의 오갑사지가 그곳이다. 중원 미륵리 사지의 경우, 1977년 청주대학교박물관팀의 조사 때 출토된 평기와에 ‘명창삼년대원사주지승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 ‘명창삼년금당개개□□□대원사주지대사□와립□□□□□□□사월현조(明昌三年金堂改蓋□□□大院寺住持大寺□瓦立□□□□□□□四月現造)’ 등의 금석문이 쓰여 있었다.
한편 오갑사지에서는 ‘명창삼년임자칠월□□오갑사지사대□□□□□□□(明昌三年壬子七月□□烏岬寺知事大□□□□□□□)’라는 금석문이 쓰인 기와가 수습되었다. 이는 의종 연간에 발표된 신령(新令)에 따라 충주 지역에서 명창 3년에 사원 보수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금석문에서 오갑사라는 사찰 명이 분명하게 나와 있으나 문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기와의 명문에 따르면 오갑사는 명창 3년에 사찰 중창이 시행된 것이므로 1192년 이전부터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크게 불사가 진행된 후 1232년(고종 19)부터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전란의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오갑사지 석불좌상만을 남긴 채 사찰은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잊혀진 것으로 여겨진다.
동막은 20여 호의 가구가 오갑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형성한 농촌 마을인데, 앙성면소재지인 용포에서 앙성중학교를 지나 원주 쪽으로 가다 보면 강촌을 못 미쳐 왼쪽으로 모점리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가면 모점저수지를 끼고 돌아 저수지의 거의 끝부분에 동막이 위치한다.
동막 어귀에 들어서서 북쪽 언덕을 바라보면 강년홍의 조립식 창고 옆쪽에 오갑사 석불좌상이 남향으로 서 있다. 이 불상은 복련의 하대석과 팔각의 중대석, 앙련의 상대석을 갖춘 불상대좌 위에 앉은 좌불이다. 오갑사 석불좌상이 위치한 민가 앞에 약 3,306m²(약 1,000평)의 밭이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시대의 와당이 수습되었다. 연화문수막새, 당초문암막새, 귀목문암막새 등과 명문평와가 출토되고 있어 민가를 포함 약 9,917m²(약 3,000평)이 절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원 미륵리 사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발굴, 조사되고, 복원이 시도되고 있으나 오갑사지는 절터의 규모를 규명하는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방치될 것이 우려되므로 발굴 조사 등을 실시하여 사역(寺域) 등을 확인할 필요하다.
[참고문헌] |
• 『문화유적분포지도』-충주시(충주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8) |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 김예식, 「명창3년명와를 통한 중원지방의 불사」(『예성문화』1, 예성동호회, 1979) |
• 김현길, 「중원지역의 사지」(『폐사지조사보고』,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2) |
오갑사지 석불좌상(충주향토자료)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모점리 동막마을에 있는 고려시대 석불좌상.
오갑사지는 1978년에 새롭게 확인된 사지로, ‘오갑사(烏岬寺)’, ‘명창삼년 임자(明昌三年 壬子)’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1192년(명종 22)경에 창건되었거나 중창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상은 이 절터에 있던 것으로 현재는 동막마을 주민 강연홍 소유의 담배 건조실 근처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의 앞에는 탑의 부재인 옥개석이 놓여 있는데, 가로·세로 83㎝ 크기의 넓적한 정방형이다.
불상의 일부분은 파손되었지만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이다. 광배는 사라졌으나 대좌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이 모두 완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는 나발이며 머리 꼭대기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육계가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몸에 비해 작고 통통하고 곡선으로 표현하여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얼굴 표정은 다정해 보이지만 짧은 목, 상체에 비해서 큼직한 하체, 두꺼운 옷 속에 감추어진 신체 등은 다소 불균형하게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공이 보이고 눈은 거의 일직선으로 표현하였다. 법의는 편단우견으로 왼손에 걸친 옷주름이 양쪽 무릎을 거쳐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양쪽 무릎 사이에도 옷주름을 표현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두껍고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발은 결가부좌하였으며 수인은 손목 부분이 파손되어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항마촉지인으로 보인다. 등 뒤의 옷주름도 앞면과 같이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대좌 상대석의 윗면에는 폭 약 2㎝, 길이 3㎝ 정도의 홈이 파여 있어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석에는 3겹의 연화를 양각하여 앙련을 표현했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모서리에 우주가 표현되었다. 하대석은 2㎝가량 홈을 판 다음 복련을 조각하여 부드러움을 더하였으며 지대석에는 안상까지 표현하였다.
얼굴의 일부와 머리가 떨어져 나갔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부드러운 얼굴은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지만 짧은 목, 상체에 비해 큰 하체, 두꺼운 옷 속에 감추어진 신체 등 다소 불균형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 『사지』(충청북도, 1982) |
• 『충북 유적, 유물 지명표』(충북대학교박물관, 1985) |
• 『문화유적분포지도』-충주시(충주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8) |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 박상일, 『충북의 사지』(청주대학교박물관, 2007) |
• 김현길, 「중원지역의 사지」(『폐사지조사보고』,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2)
|
오갑산 등산 안내도
삼태봉에서 바라본 오갑산
삼태봉(옥녀봉) 이정표
삼태봉과 오갑산 안부의 서천고개 이정표
삼형제 바위에서 바라본 삼태봉
삼형제 바위에서 바라본 오갑산 이진봉
오갑산에서 바라본 삼태봉
음성군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석(이진봉)
오갑산 이진봉 정상의 전경
여주군에서 설치한 오갑산 정상 표지석
충주시에서 설치한 오갑산(국수봉 정상 표지석)
한남금북정맥 오갑지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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