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골에서 바라본 탄금대 합수머리
갈마골에서 바라본 충주시 전경
갈마골에서 바라본 충주시 전경
올해는 '2012년 壬辰年으로 임진왜란 420주년이 되는 해가 된다. 부에서는 십간(十干) "甲·乙(木,청색), 丙·丁(火,적색), 戊·己(土,황색), 庚·申(金,백색), 壬·癸(水,흑색)" 중에 壬(임)을 오행상 水(물)로 해석하고, 물의 색은 검다고 해서 '黑(흑)'으로 표기하여 "흑룡의 해"라고 말하지만 역사의 기록에는 임진왜란(1592년)이 시작된 해로 2012년인 올해가 임진왜란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청룡이든 흑룡이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때, 미래는 더 밝아지는 것은 아닐까 ? 임진년을 맞이하여 팔천고혼이 잠들은 탄금대 합수머리의 달천과 남한강의 유래에 대하여 고찰해본다. 우리나라에서 누런 황토물이 흐르지 않는 강은 거의 없다. 특히 장마와 더불어 홍수가 발생하면 한반도의 모든 강이 황토빛으로 변한다해도 과연이 아니다. 아마도 황포돛배도 본래의 황포가 아니라 흙탕물에 누런물이 물들어 찌들은 것은 아닐까 ? 황토물과 황포돛배에 얽힌 역사는 남한강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이야기인 것이다.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남한강은 한강의 본류이기에 남한강의 옛명칭을 고찰한다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남한강은 특별한 지역명칭이 없이 팔당댐의 양수리 두물머리를 기준으로 북쪽은 북한강이며, 남쪽은 남한강으로 분류되며, 남한강은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동강(조양강)과 서강(주천강)이 만나는 영월의 합수머리까지를 지칭한다. 남한강은 영월-단양-청풍-충주-여주-양평에 이르는 한강의 본류로 큰강이란 뜻의 한수(漢水), 대수(大水),대천(大川) 등으로 표기되어 왔으며, 남한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황강(청풍), 여강(여주) 등으로 불려져 왔었다. 특히 탄금대 주변의 남한강은 대천(大川)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금탄(金灘) 또는 금천(金遷)으로 표기되는데, 여기에 표기된 탄(灘)은 여울이란 뜻이고, 천(遷)은 벼루 또는 벼랑을 뜻하는 것으로 천(川)과 강(江)과는 무관하게 여겨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광주목의 도미천(渡迷遷)과 문경현의 토천(兎遷)을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라고 설명하고 있어 가금면의 옛지명인 금천(金遷)도 이와 같이 해석된다. 그리고, 금천(金遷)의 유래는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고구려의 국원성에 신라의 귀족과 6부의 호민들을 이주시켜 만들은 국원소경(중원경)의 역사적 사실에서 금가면의 옛명칭인 금생(金生)과 더불어 신라의 김생(金生)과 우륵(于勒과 강수(强首)처럼 신라의 가야유민들의 이주지에 따른 유래로 보아야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금천(金遷)이란 지명을 도미천(渡迷遷)과 같이 해석한다면 금천(金遷)은 남한강의 뱃길을 따라 이어지는 금탄의 벼랑길이 되는 것이다. 금탄의 벼랑길은 검단에서 시작하여 갈마골 쇠꼬지를 돌아 창동의 절벽길을 따라 누암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금천은 문경의 토천과 달리 탄금대 합수나루를 중심으로 나룻배가 항상 드나들기에 겨울철 갈수기가 아니면 벼랑길을 따라 걸어서 다니질 않는 곳이다. 남한강의 금천(金遷)은 나룻배를 탈 돈이 없거나, 나룻배가 다닐 수 없는 동절기나 홍수 때에만 다니는 길로 외롭고 처량한 벼랑길이다. 또한 창동의 마애불과 탑평리의 중앙탑은 나룻배와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아닐까 한다.
(참고자료)
세종 지리지/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목)
○ 대천(大川)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청풍(淸風)으로부터 〈시작하여 충주〉 서남쪽으로 흘러 여강(驪江)이 된다.【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로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산천조에서】
북진(北津)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고적조에서】
탄금대(彈琴臺)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 京畿 광주목 廣州牧-[산천조]
도미진(渡迷津) :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龍津)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이름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 길이 7~8리나 빙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9권/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산천조에서]
관갑천(串岬遷) : 용연 동쪽 언덕이고 토천(토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ㆍ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한다. 북쪽 깎아지른 봉우리에 옛날에 지키던 돌 성터가 있다.
[역원조에서]
견탄원(犬灘院) : 견탄 북쪽 기슭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 얼추 백 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라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 길로 길을 열어 사람과 말들이 겨우 오간다. 위로는 험한 벼랑이 둘렀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기에 길손이 쉴 곳도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쓰러진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문도를 거느리고 띠를 베 머물 집을 짓고 또 길손을 바라지하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일손을 모아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 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리를 달리하고 짐승이 머물 곳도 따로 하였다. 또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 길가는 이가 쉬어가게 하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에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 하였다. 몇 해 안 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문도와 함께 모진 돌을 깨어 치우고, 비탈을 깎아 편편하게 하여 관갑의 길을 고쳤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리 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아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 씀씀이가 부지런하고 사람을 이롭게 함이 크다 하겠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일로 인해 내게 누각 기문을 써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으므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대, 무릇 나라의 길에는 10리마다 여(廬, 초막)가 있고, 30리마다 숙(宿, 여관)이 있었다. 또 후세에는 10리마다 장정(長亭, 쉬는 집) 하나, 5리마다 단정(短亭, 작은 정자)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함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집을 두어 장사꾼과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은 따로 관리가 있어 맡은 일에 힘썼으나, 원집은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골라 돌보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들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는데,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들판은 사는 사람도 많아 원집이 없어도 잘 데가 있지만,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호랑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따위의 길손 걱정은 이보다 심한 게 없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집을 지어 막히고 호젓한 길에 사람을 들이도록 한 공은 다른 원을 지은 데에 견줘도 천백 배나 될 터이다. 나는 친구에게 불법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고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가운데 한 가지니, 그 공덕을 짓고 보은을 받는다는 내용은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고적조에서]
마암(馬巖) :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을 이름하여 황려라 하였다." 한다. 바위가 마암으로 이름을 얻음도 이때문이라 한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웅건하고 기특한 쌍마(雙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 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 하였다. 사우당(四友堂) :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任元濬)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여강(驪江)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驪江)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 강 서쪽에 마암이 있는데 크고 넓고 높고 험하며 기이하고 뛰어났다. 물은 맑아서 황려 일주(一州)가 크게 힘입었다.
세종지리지 경기 광주목(廣州牧) 여흥 도호부(驪興都護府)
○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인데, 신라가 황효(黃驍)로 고쳐서 소천군(泝川郡)의【소천(泝川)은 곧 지금의 천녕(川寧).】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황려(黃驪)로 고쳐서, 현종(顯宗) 무오(현종9년, 1018년) 에 원주(原州)의 임내(任內-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덧붙어 있는 지역으로 호장(戶長)이 통치)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또는 황리현(黃利縣)이라고도 한다.】충렬왕(忠烈王) 31년(1305년) 을사에【곧 원(元)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9년.】황비(皇妣) 순경 왕후(順敬王后) 김씨(金氏)의 고향이라 하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고,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1년(1388년) 무진에 위주(僞主) 신우(辛禑)를 이 고을에 옮기고 황려부(黃驪府)로 승격시켰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년) 기사에【곧 홍무 22년.】다시 여흥군으로 강등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원년(1401년) 신사에 중궁 정비(中宮靜妃-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의 내향으로써 여흥부로 승격시켜 음죽현(陰竹縣)의 북촌(北村) 어서이처(於西伊處)를 떼어 주고, 13년(1413년) 계사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치었다.【곧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영락(永樂) 11년이다. 옛부터 이르기를 계림(鷄林)과 평양(平壤) 등을 유수부(留守府)라 하고, 수원(水原)과 여흥 등의 부(府)를 단부(單府)라 해서, 명칭이 서로 혼동되므로, 단부를 고쳐 도호부로 하여 구별되게 하였다.】
○ 여강(驪江)【부[府治]의 북쪽에 있는데, 나룻배가 있다.】
다산시문집 제22권 / 잡평(雜評)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 주(注)에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조선(朝鮮)에 습수(濕水)ㆍ열수(洌水)ㆍ산수(汕水) 3수가 있는데, 이것이 합쳐 열수(洌水)가 되었다.’ 하였고, 반고(班固)의 지지(地志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도 탄열(呑列)과 열구(列口)를 분명 지금의 강화(江華) 교풍(交豊) 땅에 소속시켜 놓았으니, 열수는 지금의 이른바 한수(漢水)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와 광 무제(光武帝)가 모두 열수(洌水)로 이(夷)와 한(漢)의 경계를 삼았기 때문에 삼한(三韓) 사람이 열수를 가리켜 한수(漢水)라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산수(汕水)와 습수(濕水)는 분명 남북(南北)으로 두 강이 됨을 알 수 있으나, 옛사람이 나누어 지적해 놓지 않아 증거할 만한 문적이 없다. 그러나 북강(北江)의 물은 모두 뭇 산골짜기에서 나오니 이것이 산수(汕水)요, 남강(南江)의 물은 모두 원습지(原隰地)에서 나오니 이것이 습수(隰水)로서, 글자의 의미로 보아 아주 명확하여 혼동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몸소 답사하고 목격한 결과 전연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천(春川)ㆍ낭천(狼川)의 물이 산수(汕水)가 된다는 것을 단정지었다. 근년에 재차 춘천에 들어가 옛날의 들은 말로서 새로이 살핀 것을 징험하여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심원기(尋源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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