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水安保)면 연혁과 지명유래
연혁
- 고대에는 삼한 중 마한에 속함
-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국원성 잉근내군 상모현에 속함
-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중원경 괴산군 상모현에 속함
- 1018년 고려 현종 9년 상모현을 장연현으로 고치고 장연현과 함께 충주목의 속현으로 삼음
- 1403년 태종3년 장연현과 장풍현을 연풍현으로 개칭
- 1895년 조선 고종32년 말기 현을 폐지하고 연풍군에 귀속 고사리면과 수회면으로 분할
- 1914년 4월 1일 연풍군을 폐지하고 괴산군으로 2개면을 병합편입 되어 괴산군 상모면이 됨.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원군에 편입
- 1989년 1월 1일 문강리와 토계리를 살미면으로 편입
-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 상모면으로 편입
- 2005년 4월 1일 수안보면으로 명칭 변경
천 년을 지켜온 상모(上芼)가 사라진 수안보
충주시 수안보면이 개명된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수안보면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모면을 수안보면으로 개칭하기위해 지역정체성과 지명의 유래를 거론하였지만, 그는 단지 명칭변경을 위한 변명과 핑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내세운 논지를 빌리자면 수안보면보다는 충주시라는 지명부터 국원이나 중원으로 변경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한다. 최근 한국지역지리학회지에 발표된 '지명을 통한 장소정체성 재현과 지명역역의 변화' 논문에서 지역정체성에 대한 연구에 수안보면의 사례가 소개 되었고, 지방 일간지에서 수안보면의 개명효과에 대하여 자화자찬하는 기사를 보고, 이에 대하여 수안보면의 지명을 다시금 고찰해보고자한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는 문경새재와 토끼바리로 유명한 진남교반이 문경시(점촌)에 있다. 문경시 마성면의 토끼바리란 곳을 지날 때면 충주 달천강변의 협곡인 노루목과 대림산성이 떠오르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관문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충청도에 위치하는 곳으로 지리적으로 너무나도 흡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백두대간인 소백산에서 속리산에 이르는 길목마다 산맥을 넘는 고개에 차단성이 축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문경새재와 하늘재에는 철옹성같은 관문성(조령관문과 덕주산성)이 버티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한강으로 가는길을 조령관문이 막아서고, 조선시대 이전에는 덕주산성이 낙동강 유역인 경상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문경새재의 고갯마루을 초점이라고 한다. 충주의 상모와 문경의 상초는 초점과 같은 의미이며, 초점은 하천이나 행정구역의 경게선보다는 백두대간의 산줄기인 하늘재에서 이화령에 이르는 분수령으로 특정고개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데, 문경의 옛지명인 고사갈이현과 상모면의 옛지명인 고사리면은 문경새재인 조령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늘재의 옛명칭에서 나오는 마골, 계립, 겨릅 등처럼 마(麻)가 우거진 고개나 모(芼)가 우거진 고개가 아니라 험난한 산들이 들어선 고갯마루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모면의 유래는 고구려 때부터 이어온 것으로 상모현(上芼縣)에서 유래한다. 상모현(上芼縣)을 풀이하면 풀이 우거진 고을이라는 뜻으로 계립령의 속칭인 마골(麻骨)과 지릅과 겨릅(경상도 방언) 등도 같은 의미로 추정되며, 상모현(上芼縣)은 초점(草岾)과 윗푸실 또는 상초리(上草谷) 등으로 문경새재에도 변형되어 잔존한다.
초점(草岾)이란 풀고개이다.
1. 땅의 이름 2. 절의 이름 a. 고개 (재) b. 재 (재)
[부수] 山(뫼산) [총획] 8획 [난이도] 한자특급II岾 (재 재)1. 〚國字〛 국음은 “재”. 재. 길이 통하여져서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 ...
[부수] 山(뫼산) [총획] 8획
수안보의 지명유래는 수회촌와 안부역을 합성하여 변형된 것이다.
수안보면의 지명유래에서 수안보란 명칭이 고유지명인 것처럼 해석하지만, 수안보란 명칭은 조선시대 말기에 생겨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수회촌와 안부역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지명이고, 상모면의 옛지명인 고사리면도 한수면의 옛지명인 사열이현 또는 문경의 옛지명인 고사갈이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옛부터 수안보면은 행정구역으로도 충주의 관할구역 내에 속해 있는 곳이다. 수안보면이 괴산군의 연풍현에 속했던 것은 조선시대의 지방제도인 군현제도와 역원제도에 따라 그를 관할하는 충주목의 속현으로 연풍현이 생겨나면서 구분된 행정구역일 뿐이다.
수안보(水安保)에서 보(保)는 "지키다,"란 의미에서 보루(堡壘)란 의미보다는 마을공동체 조직인 두레와 보처럼 온정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공동으로 목욕 등을 하기 위한 물막이보(洑)나 두레우물(井)로 추정된다. 수안보의 지명에서 물탕거리란 명칭도 옛지명이라기 보다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물안보나 물안비는 수안보와 유사한 지명의 유래로 보여지며, 대안보는 안부역이 있던 마을이 대촌을 형성함으로 대안부로 부르다가 대안보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서에 등장하는 지명은 안부역과 온정(溫井)으로 표기될 뿐이다. 수안보란 명칭은 조선말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수안보면을 온천이란 의미를 부각한다면 온정면이 바른표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수안보면의 지명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개칭된 것을 다시 상모면으로 되돌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상모면의 유래와 연혁을 왜곡하는 것은 더 나쁜 선례를 만드는 것이다. 수안보 온천의 침체를 지명에서 찾기보다는 온천의 활성화를 위해서 온천 주변의 관광인프라를 구축해야하는 것이다. 70년대의 단순한 온천관광이 아니라, 새로운 관광의 메카니즘에 걸맞는 시설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며, 수많은 숙박시설과 온천탕이 아니라 관광객이 편안하게 쉬고 갈 수있는 시설의 개선과 마구잡이식으로 온천수를 뽑아 자원을 고갈시키기보다는 천연 온천수의 수질보호를 위하여 그 사용량을 제한하여 그 희귀성을 강조해야하고, 저온의 광천수를 온천수로 위장하는 온천과 외국의 사우나를 모방한 가짜 온천들과 차별화하는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온천특구의 지정에 따른 시설지원과 온천축제에 따른 낭비성 예산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관광인프라를 구축해야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에 존재하는 상모(上芼). 초점(草岾). 마골(麻骨).계립(鷄立)이라는 지명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를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지역의 변천사를 정립시키고, 향토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2013년 충주세계조정경기장이 건립 중인 탑평리 유적지의 경우처럼 그 유적지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중앙탑 주변의 유적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원문화유산이다. 그 유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정경기장의 계획 당시에 반영했다면 지금과 같은 시행착오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2013년 충주세계조정경기장 계획에서 현지의 역사성은 무시된채 추진되어 예산낭비와 전시행정의 선례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충주시민 뿐만 아니라 중원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역의 큰 행사인 조정경기대회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를 추진하면서 지혜롭지 못한 발상들을 질책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존계획을 밀어붙여 유적지를 훼손하기보다는 유적지도 보존하고, 대회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세종 지리지] 충청도 / 충주목 /◎ 연풍현(延豊縣)
○ 고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장연(長延), 장풍(長豐) 두 현(縣)을 모두 충주(忠州) 임내(任內-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덧붙어 있는 지역으로 호장(戶長)이 통치)에 붙였는데, 본조 태조(太祖) 3년(1394년) 갑술에 합쳐 장풍현(長豐縣)으로 하고,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종(太宗) 3년(1403년) 계미에 연풍현으로 고쳤고, 13년(14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육익(六翼)에서는 장연(長延)을 옛 상모현(上芼縣)이라 하였다.】금상(今上-세종)) 11년 기유에 충주(忠州) 동촌(東村)의 리(里) 5를 떼어 이에 붙였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문경(聞慶)에 이르기 10리, 서쪽으로 괴산(槐山)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문경 임내 가은(嘉恩)에 이르기 3리, 북쪽으로 괴산에 이르기 20리이다.
○ 호수가 1백 43호요, 인구가 3백 41명이다.
○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20명이요, 선군(船軍-해군)이 13명이다.
○ 장연(長延)의 성이 3이니, 이(李), 신(申), 윤(尹)이요, 망성(亡姓-옛 문적에는 있으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이 2이니, 음(陰), 예(艾)요, 내성(來姓-다른 고장에서 이주해 온 성)이 2이니, 석(石), 안(安)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 장풍(長豐)의 성이 1이니, 안(安)이요, 망성이 4이니, 진(秦), 석(石), 우(祐), 시(時)요, 속성이 2이니, 김(金), 우(禹)이다.
○ 땅이 메마르고, 산이 높고 기후가 차다.간전(墾田)은 1천 11결(結)이요,[논이 9분의 1이다.]
○ 토의(土宜-토산물)는 콩, 조, 기장, 팥, 메밀, 뽕나무, 가래나무[추(楸)]요,
○ 토공(土貢-공물로 바치는 토산물)은 꿀, 밀[황랍(黃蠟-벌집을 만들기 위하여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
옻[칠(漆-옻칠)], 종이, 느타리[진이(眞茸-참버섯의 북한어)], 석이버섯, 곰의 털, 족제비털,
잡깃[잡우(雜羽-여러 가지 잡다한 날짐승)],
잇[홍화(紅花-잇꽃의 꽃과 씨. 엉거시과에 딸린 두해살이풀)]이요,
○ 약재(藥材)는 인삼, 백출(白朮-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삽주덩어리뿌리), 마뿌리[산약(山藥)]요,
○ 토산(土産)은 송이버섯, 신감초(辛甘草-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승검초. 뿌리가 당귀이다)이다.
○ 온천(溫泉)【현(縣) 북쪽 20리 안부역(安富驛) 서쪽에 있고, 집 9간이 있다.】
○ 역(驛-공문을 지방에 전달,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 1이니, 안부(安富)요,
○ 봉화가 2곳이니, 마골점(麻骨岾)은 현의 북쪽에 있고,【동쪽으로 문경(聞慶) 탄항(炭項)에, 서쪽으로 주정(周井)에 응한다.】, 주정(周井)은 현의 북쪽에 있다.【남쪽으로 마골점에, 북쪽으로 충주(忠州) 대림성(大林城)에 응한다.】
【영인본】 5책 626면
【태백산사고본】
원 문
◎ 延豐縣: 高麗顯宗戊午, 長延、長豐兩縣, 皆屬忠州任內。 本朝太祖三年甲戌, 合爲長豐縣, 始置監務。 太宗三年癸未, 改爲延豐縣, 癸巳, 例改爲縣監。 【六翼云: “長延, 古上芼縣。” 】 今上十一年己酉, 割忠州東村里凡五以屬之。 四境, 東距聞慶十里, 西距槐山二十里, 南距聞慶任內嘉恩三里, 北距槐山二十里。 戶一百四十三, 口三百四十一。 軍丁, 侍衛軍二十, 船軍十三。 長延姓三, 李、申、尹; 亡姓二, 陰、艾; 來姓二, 石、安; 續姓一, 金。 長豐姓一, 安; 亡姓四, 秦、石、祐、時; 續姓二, 金、禹。 厥土塉山高, 風氣冱寒, 懇田〔墾田〕一千十一結。 【水田九分之一】 土宜, 菽、粟、黍、小豆、蕎麥、桑、楸。 土貢, 蜂蜜、黃蠟、漆紙、眞茸、石茸、熊毛、黃毛、雜羽、紅花。 藥材, 人蔘、白朮、山藥。 土産, 松茸、辛甘草。 溫泉 【在縣北二十里安富驛, 西, 有屋九間。】 一, 安富。 烽火二處, 麻骨岾在縣北, 【東準聞慶炭項, 西準周井。】周井在縣北。 【南準麻骨岾, 北準忠州大林城。】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연풍현(延豐縣)
동쪽으로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문경현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50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이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장연(長延)으로 고치고 장풍현(長豐縣)과 함께 충주(忠州)에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1394)에 두 현(縣)을 합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장풍현이라 일컬었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만들었다. 세종(世宗) 11년(1429)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떼어 붙이고, 성종(成宗) 7년(1476)에 또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떼어서 붙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상모(上芼)ㆍ장연(長延)
【성씨】 장연(長延) 이(李)ㆍ신(申)ㆍ음(陰)ㆍ애(艾)ㆍ윤(尹)ㆍ김(金)ㆍ석(石)ㆍ안(安)
모두 내성(來姓)이다.
장풍(長豐) 안(安)ㆍ진(秦)ㆍ석(石)ㆍ우(祐)ㆍ시(時)ㆍ김(金)ㆍ우(禹)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계립령(鷄立嶺) 세속에서 마골재[麻骨岾]라 한다.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이른바,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 한 것이 이 땅이다. 주정산(周井山) 현 북쪽 38리에 있다. 조령(鳥嶺)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 현 동북쪽 15리 경상도 문경현 경계에 있는데, 험하고 막힌 요해지(要害地)이다. 이화현(伊火峴) 현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 공정산(公正山) 현 동쪽 5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현 서북쪽 34리에 있다. 정자산(亭子山) 장풍현에 있다. 경항산(景項山) 현 동북쪽 20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현 동남쪽 20리에 있다. 또한 문경현 조에 보인다. 마본산(馬本山) 현 서쪽 22리에 있다. 만수산(萬壽山) 현 동북쪽 35리에 있다. 장항산(場項山) 현 북쪽 37리에 있다. 송현(松峴) 현 서북쪽 20리에 있다. 우점(牛岾) 현 북쪽 10리에 있다. 이화천(伊火川) 현 서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화현(伊火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조령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온정(溫井) 현 북쪽 30리, 안부역(安富驛) 서쪽에 있다.
【토산】 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신감채(辛甘菜)ㆍ잣[海松子]ㆍ꿀[蜂蜜].
【봉수】 마골점 봉수(麻骨岾烽燧)
동쪽으로 문경현 탄항산(炭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주정산(周井山)에 응한다.
주정산 봉수(周井山烽燧)
북쪽으로 충주 대림산(大林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골재[麻骨岾]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안부역(安富驛)
현 북쪽 28리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현 북쪽 9리에 있다.
신혜원(新惠院)
현 북쪽 20리에 있다.
온정원(溫井院)
온정 곁에 있다.
연경원(延慶院)
현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각연사(覺淵寺)
정자산(亭子山)에 있다.
원통사(元通寺)
장항산(場項山)에 있다.
선정사(禪頂寺)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공정산(公正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장풍 폐현(長豐廢縣)
현 서쪽 20리에 있다.
【제영】 산 빛은 난간 앞에 많다
김분(金汾)의 시에, “물 소리는 수풀 밖에서 급하고, 산 빛은 난간 앞에 많다.” 하였다.
시내 소리는 땅을 따라 다 한다
서거정(徐居正)의 시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5리이다.
고사리(古沙里)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40리이다.
수회(水回)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면의(勉義)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5리이다.
장풍(長豐)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토산】 대추[棗].
세종 11년 기유(1429) 1월 16일(계해)
충청도의 행정구역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건의를 올리다
호조에서 계하기를,
“충청도 연풍현(延豐縣) 사람들이 상언(上言)하기를, ‘본현은 원래 충주(忠州) 경내로서 장연(長延)ㆍ장풍(長豐)의 두 구역에 속해 있었던 것인데, 지난 계유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사방이 큰 산으로 둘려 있고 토질이 척박하여, 민호가 겨우 1백 80호에 밭이 4백 50결(結)이요, 또 남북에서 모여드는 곳에 위치해 있어 본조(本朝)의 사객(使客)과 왜객(倭客)의 내왕이 심히 빈번한데다가, 더욱이 쇠를 제련하여 배를 만들기 때문에 요역(徭役)을 지탱할 수 없어 다 흩어져 도망하오니, 청컨대 개 어금니처럼 서로 들쑥날쑥한 괴산군(槐山郡) 동면(東面)의 모향리(毛香里)ㆍ갑탄장령(甲呑長嶺)ㆍ내화석원(乃火石院)ㆍ대성산(代城山)ㆍ내율곡(內栗谷)ㆍ사개평(沙介平)ㆍ오전(吾田)ㆍ각호(角乎)ㆍ각연동(覺淵洞)과 충주(忠州) 동면(東面)의 관동(官洞)ㆍ온정(溫井)ㆍ오산(五山)ㆍ추동(楸洞)ㆍ원통(原通)ㆍ미내(彌內) 및 충주 관내의 감물내미(甘勿內彌)ㆍ안부역(安富驛) 등의 땅을 떼어 본현에 부속(附屬)시켜 본현으로 하여금 부성(阜盛)하게 하여 그 관호(官號)를 잃지 않도록 하여 달라.’ 합니다.”
하니, 본도에 명을 내려 이를 분변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본도에서 계하기를,
“괴산 동면의 각호ㆍ각연ㆍ오전 및 안부역 등의 땅은 괴산과의 거리가 심히 머오니, 마땅히 떼내어 연풍에 붙이는 것이 옳겠사오며, 내화석원ㆍ대성산ㆍ내율곡ㆍ사개평ㆍ갑탕장령ㆍ모향리 등의 땅은 연풍과의 거리가 심히 머오니, 전대로 본군에 붙여 두는 것이 편리할 것이요, 감물내미 등의 땅은 양읍(兩邑)과의 거리가 비록 엇비슷하나, 연풍현과는 큰 산으로 서로 막혀 있으니, 그대로 본주에 붙여 두는 것이 편하겠고, 관동ㆍ온정ㆍ오산 등의 땅은 본주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떼어서 연풍에 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추동ㆍ원통ㆍ미내 등의 땅은 비록 연풍과 멀고 또 막혀있으나, 연풍 동면은 땅이 좁고 민호가 적으니, 마땅히 모두 떼어 내어 연풍에 붙이는게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5년 기묘(1459) 8월 12일(신유)
충청도 도관찰사에게 안보에 목욕하러 간 우찬성 권남을 잘 대접하라고 하다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안숭효(安崇孝)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우찬성(右贊成) 권남(權擥)이 충주(忠州) 안보(安保)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니, 영미(營米) 15석(石) 및 음식물을 내려 주고, 만약 사람을 사역(使役)시키고자 하면 또한 들어 주라.”
선조 26년 계사(1593) 윤 11월 2일(임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여 정세를 논의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척장(戚將)이 말하기를, ‘정윤우(丁允祐)는 갈 것 없다.’ 하였는데, 이제 내려가려 하니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알아서 하라. 공조 판서를 호(胡)ㆍ심(沈)이 데려가려 하는데 보내야 할 것인가? 내려가서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성을 쌓으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설험(設險)하고 청야(淸野)하면 지킬 수 있겠으나, 경상도는 결코 할 만한 사세가 못 됩니다. 신이 영남(嶺南)에 있을 때에 홍정(弘靖)의 군사 2천 명에게 두 달의 양식을 장만하여 주어 모처(某處)를 수축하려다가 미처 하지 못하고 올라왔습니다. 대개 관방을 설치한다는 말은 매우 옳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아가 싸울 수 있고 물러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만약에 들에서 싸운 것이라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낙동강(洛東江)에는 설험(設險)하여 관방을 굳게 해야 할 것이나, 날씨가 춥고 철이 늦어서 할 수 없는 사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핑계대고 전혀 하지 않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인동(仁同)ㆍ대구(大邱)ㆍ조령(鳥嶺) 및 문경(聞慶)에서 15리쯤 되는 토천(土遷), 곧 신라 때의 구현(嫗峴)이 있는 곳은 다 지켜야 합니다. 조령을 지킨다면 안보(安保)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는데 이곳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화약과 화포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전에 세운 포루(砲樓)를 수리하여 설치하면 적이 성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 29년 병신(1596) 4월 2일(무술)
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충원이 신을 보고 모조(某條)에 대해서는 그 소임을 면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충원의 공은 적지 않습니다. 충원이 만약 그 곳에 요새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조령은 필시 보전될 형세가 없었을 것이니, 조령으로부터 안보(安保)ㆍ수회(水回) 등지에 이르기까지 인연(人烟)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모두 충원의 힘이었습니다. 그가 미천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모두 얕보기 때문에 비방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정경세가 아니었다면 충원은 더욱 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경읍(聞慶邑)의 지명유래
1)
상(위)푸실(上草谷)·상초(上草)
먼 옛부터 이곳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보며 신라 46대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가 이곳 상초를 지나다가 주흘산에 혜국사를 창건하자 마을이 형성되어 평산신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에 들과 산에는 풀과 갈대가 무성하였다 하여 상푸실이라고 하였다. 특히 조령성 축조 때는 많은 인원이 거주한 곳이다. 조령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바로 안에 있었던 마을이나 지금은 새재 주차장 부근으로 모두 이주하여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2)
동화원(東華院)·동애원(東愛院)
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에서 문경쪽으로 재를 내려오다 왼편에 있는 첫 마을이다. 충북과 접경지역인 이곳은 1400년경 밀양박씨(朴氏)가 산전(山田)을 일구며 살았다. 높은 곳에서 보면 동쪽에 해 뜨는 것이 보이고 산에 꽃이 피어 화려하다 하여 동애원으로 부르다가 후에 동화원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한다. 이곳도 원(院)이 있어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는 등 편의를 도왔던 곳이다. 70년대 이전까지도 화전민이 많이 거주하여 초등학교 분교가 설립된 곳이었으나 정부의 화전민 정리사업으로 모두 떠났다.
1)
푸실(草谷)·하초(下草)
조선시대에 한양을 잇는 옛길은 새재를 넘게 되어 있었는데 문경읍에서 약 2㎞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새재로 진입하는 첫 동네가 푸실이다. 고려말 공양왕때 이 마을에는 나무가 없고 풀만 무성한 게곡이 연결되어 있었다. 계곡의 제일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푸실·아랫푸실·하초(下草)라 불려지게 되었다.
2)
중푸실(中草谷)·중초(中草)
하초에서 새재쪽으로 약 200m 위쪽에 위치한 동네로 중푸실이라고 불러오다가 현재는 중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자료 - 충주지명유래] 수안보면
▣ 상모-면【면】충주시 13개 면의 하나. 본래 연풍군(괴산군)으로서 고사리면이라하여 미륵, 석문, 대사 냉천, 발화, 뇌곡, 안보, 온정의 8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회면의 고운, 중산, 주막, 강진, 문산, 토계의 6개리를 합하여 고구려 때의 상모현의 이름을 따서 상모면이라 하여 미륵, 사문, 화천, 온천, 안보, 고운, 중산, 수회, 문강, 토계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63년 1월 11일 중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로 편입되었음. 동쪽은 제천군 한수면, 북쪽은 살미면, 서쪽은 괴산군 장연면, 남쪽은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와 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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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리(溫泉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고려사에 보면 '長延縣 高句麗 上芼縣 顯宗 9년 稱今名來屬有溫泉'이라 하여 고려 현종 9년(1018)까지 상당 기간 '上芼縣'으로 호칭되었을 뿐만아니라 온천과 유관한 지역임을 알 수 있음. 1895년 연풍현이 군으로 승격될 때까지 온정동(溫井洞)으로 고사리면에 속하던 것이 1914년 전국 부군면 통폐합 조처에 따라 행정 체계상 연풍군이 괴산군에 속하게 되면서 수회면과 고사리면을 통합하여 상모면으로 개칭하였는데 온정동도 온천리로 개명되었음. 1937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오산, 탑동, 관동으로 분리되었음. 온천 1구는 3번 국도 서쪽(양짓말, 물탕거리, 장터거리 일부), 온천 2구는 3번 국도 동쪽(새터말, 장터거리 일부)으로 나누어졌으며, 1985년 10월 1일 면사무소 남쪽을 온천3구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광덕 빌라 지역을 온천 4구로 분구하였음.* 온천 1,2,3,4리●동진-이(東津-)【마을】면사무소 남쪽, 관동 입구에 있는 마을로 온천리 동쪽을 흐르는 개울 근처에 있다는 뜻임.
●물-안보(水安堡, 물안비)【마을】물탕거리가 있는 마을을 말했는데, 수안보로 통용됨.
●물탕-거리【마을】물탕(온천) 주변을 일컬었음.
●새터-말(新垈)【마을】수안보 북쪽 입구, 도로 동북쪽 산 밑에 형성된 마을.
●수안보-석탑【탑】수안보 지서 내에 3층석탑과 미륵불이 있음.
●수안보-온천【온천】高麗史 顯宗條에 상모현에 온천이 있다는 기록이 있음.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온천지대가 농경지로 있을 때 피부병을 앓던 거지가 이 근처에 쌓아 놓은 볏짚 속에 살면서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수를 먹고 씻고 하였더니, 드디어 병이 완치되었으므로 이 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음. 이 온천은 유황, 라디움 온천으로 피부병, 위장질환에 효험이 있음.
●양지-말【마을】석문천 서쪽 들판에 있는 마을.
●장터-거리【마을】물탕거리 남동쪽에 있는 5일장이 열리던 곳.
●조산(趙山, 造山)【산】수안보 남쪽, 천주교 뒤에 있는 산. 조감사 묘지가 있으며, 정상에 팔각정이 있음.
●황-산(黃山)【산】수안보 서북쪽에 있는 산. 높이 294m. 흙이 황토로 온천수가 발원된다고 하여 옛부터 명산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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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烏山, 오미)
●오-산(烏山)[오미]【마을】온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세종실록 11년 1월조에 吾山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산 마을은 6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됨. 선조 34년(1601년)에 합천 이씨인 절충장군 이흡(李洽)이 여주(혹은 원주)에서 이 곳으로 이거한 후 후손들이 300여 년 동안 세거하고 있음.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는 100년마다 천하일색의 미인이 출생한다고 함. 오황후도 이 곳 일색봉(一色峰)의 정기를 받아 출생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을 오미(吳美) 또는 일색촌(一色村)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오산(烏山)은 이 곳에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까마귀는 길흉을 잘 알고 효조(孝鳥)라 하여 연풍향교 직원이었던 이상기 이장 당시부터 쓰기 시작한 동명이라 함. 수안보에서 석문천을 따라 충주 방면으로 약 2㎞쯤 내려오면 서쪽에 옛날 봉수를 올리던 주정산 밑에 동향으로 자리잡은 마을. 마을 앞 동남간에 일색봉이 있는데 그 정상에 합천 이씨들이 대대로 보호해 온 열락정(說樂亭)이 있음. 이 정자는 조선조 신축년(1601년)에 세워졌다고 함. 동북쪽에는 적보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수안보를 향해 진등이 있고, 서쪽으로는 주정산이 둘러있으며, 남쪽으로는 황산이 있어 수안보와 분리됨.
●건넌-말【마을】마을 앞에서 3번 국도를 건너 동쪽에 있던 마을로 한알유스호스텔 건립으로 인해 없어짐.
●그렁목-재[그렁목이]【고개】수안보에서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로 넘어가는 고개.
●노부-란【마을】오산 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로 밭 가운데에 원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출토됨.
●당골내치-기【마을】당골과 석문천이 합수하는 부분에 있던 마을로 스키장 조성으로 없어짐.
●동그락-봉【산】당골 내치기에서 남동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에 있던 산으로 높이 225.7m.
●동무-산【산】마을 입구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216.5m.
●봉수-대(烽燧臺)【터】주정산 정상에 있으며 마골첨 봉수와 대림산 봉수를 연결함.
●신-촌【마을】오산들 위에 있는 마을.
●열락-정(說樂亭)【정자】선조 때 세워졌으며, 합천 이씨가 대대로 보호해온 정자.
●일색-봉【산】마을 앞 동남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 열락정이 있으며 높이 200m.
●주정-산【산】마을 서쪽에 있는 산으로 장연면과 경계를 이루고 온정(溫井)을 둘러싸고 있다는 뜻으로,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으며, 높이는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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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官洞, 관골)
●관-동(官洞)[관골]【마을】온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온천리를 온정 1구, 관동, 탑동, 오산으로 분구하면서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고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에 통합되었음. 고구려 시대부터 상모현의 현청이 있어서 관동이라 전해지는 이 마을은 현청터가 소멸되어 정확한 규모와 위치를 알 수가 없음.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에 있으며 적보산 줄기 7부 능선의 가파른 언덕에 정남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 북쪽은 적보산을 경계로 수회리, 중산리와 접하고, 동쪽은 직마리재를 넘어 고운리와 접하고, 서쪽은 가파른 솔밭길을 지나 면소재지와 접하고, 남쪽은 푯대주봉(앞산)을 넘어 안보리 머리골과 접함.
●닭의-비알【산】첩푸산 줄기인 불뚝고개에서 목쟁이를 거쳐 내려온 산등성이 남쪽의 급경사 지역.
●동-진(東津)【마을】용천천 입구에 있는 마을로 수안보 동쪽을 흐르는 개울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임.
●불뚝-고개【고개】도장골에서 산길을 따라 중산리 법수로 넘어가는 고개로 양쪽에 581.3m, 592m의 봉우리가 있음.
●산달-매기【산】기골과 새터말 사이 산등성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302.3m.
●소리-봉【산】민락골 막바지 서쪽에 있는 산.
●안다리-골【마을】다리골 막바지 첩푸산 능선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로 6.25때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화전 정리로 없어짐.
●적보-산(積寶山)【산】→ 첩푸산. 첩푸산의 다른 이름으로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님.
●첩푸-산[적보산]【산】수회리, 중산리, 온천리가 접해 있는 산으로 높이 698.5m.
●표대주-산[앞산]【산】마을 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을에서는 앞산이라고 부르며 높이398.3m임. 산 정상에 일제 시대에 설치한 수준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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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동(塔洞, 안탑골, 바깥탑골)
●탑-동(塔洞)【마을】온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온천리를 온천 1구, 관동, 오산, 탑동으로 분구하였으며, 1963년 중원군으로, 1995년 도농복합에 따라 충주시에 통합됨. 이 마을을 탑동이라 한 것은 고려 시대 유물로 보여지는 3층 석탑이 마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전설에 의하면 고려 말엽 이 마을 일대에 큰 절이 있었으나 수차례의 난으로 사찰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3층 석탑과 약사여래 입상만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음. 근년에 창사한 봉불사는 이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함. 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용두산 기슭에 북향한 마을로 동쪽은 석문천을 따라 대안보와 접하고, 서쪽은 망월산을 넘어 괴산군 장연면과 접하고, 북동쪽은 석문천을 건너 물안보와 접하며, 남쪽은 화천리 은행정, 괴산군 장연면과 접함.
●귀빗돌-산【산】양지말과 탑골 사이 도로상의 서쪽에 있는 벼랑.
●독장-골【골짜기】삼밭골을 지나 서쪽으로 난 골짜기로 옛날 독(옹기)을 굽던 곳이라고 하며, 쇠부리하던 곳으로 쇠똥이 발견됨.
●망월-산【산】봉불사 뒤에 있는 산으로 정월 대보름에 달을 보러 올라가는 산.
●봉불-사【사원】고려 말엽부터 있었다고 하나 거듭 소실되었고 현재의 절은 근년에 세워졌으며, 석조 약사여래입상을 봉안하고 있음.
●안탑-골【마을】탑골 골짜기가 큰 안탑골과 아홉사리로 갈라지는 주변에 있는 마을.
●홍두깨-등【산】귀빗돌산 위의 산등성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364.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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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리(安保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연풍군 고사리면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안보(大安保:머리골, 안보), 복계(洑溪), 뇌곡(雷谷), 선권(仙卷)을 합하여 안보리라 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법정리동을 분구할 때 대안보, 복계, 뇌곡으로 나누어졌고,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으며, 1985년 9월 23일자로 중원군 조례 926호에 의해 10월 1일자로 안보리 복계에서 선권이 분구되었음. 1995년 시군통합에 의해 충주시에 편입됨.* 대안보(大安保)
●대안-보(大安保)【마을】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2㎞쯤에 있는 마을. 동남쪽 동부산과 북쪽 조산 사이의 평탄한 들판에 위치함. 동남쪽으로 동부산이 있어 뇌실과 경계하고, 남서쪽으로는 새고개들이 있음. 석문천이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데 그 남쪽은 음지말, 그 북쪽은 양지말로 나뉘어졌고, 음지말이 옛 역촌의 중심지여서 5기의 비석이 있음.
●돌-고개[박석고개]【고개】물안보에서 대안보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길이 질퍽질퍽해서 돌을 깔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며, 서낭당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3번 국도 확포장 공사로 서낭당과 함께 없어짐.
●동부-산【산】대안보와 뇌실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3번 국도 남동쪽에 위치함.
●마방-거리【마을】안부역이 이곳에 있을 때 말을 매어두던 곳으로 음지말에 있었음.
●머리-골2[원이곡]【마을】표대주봉 능선과 성재 사이에 있는 대안보에 딸린 마을.
●양지-말【마을】석문천을 경계로 해서 북쪽에 있는 마을.
●용두-산(龍頭山)[용두봉]【산】온천리 탑골과 대안보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480.5m.
●윗동진-이【마을】성재 밑 머리골 입구에 있는 마을로 대안보에 딸림.
●음지-말【마을】석문천을 경계로 해서 남쪽에 있는 마을.
* 선권(仙卷, 仙坤)
●선-권(仙卷)【마을】1985년 9월 23일자 중원군 조례 제 926호에 의해 동년 10월 1일자로 안보리 복계에서 분구되었음.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3번국도를 따라 약 2㎞쯤 가면 미륵리로 통하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우측(남쪽)은 복계(洑溪) 마을이고, 좌측(북쪽)은 선권 마을임. 북쪽은 성재를 넘어 머리골로 이어지고 동쪽은 곰지골에서 흐르는 도랑이 석문천과 합류하여 대사와 경계를 이루고 있음. 남쪽은 미륵리로 통하는 지방도를 경계로 복계 마을과 접경하고, 서쪽은 3번 국도로 대안보와 접하고 있음. 마을 뒤 성재에서 뻗어내린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마을 앞쪽(남동쪽)에 신선봉이 솟아 있어서 신선이 책을 보면서 등천하는 형국이어서 선권이라 하였다 함.
●마-등(馬騰)【터】지나가던 선비들이 마당숲 앞에 이르러 인사를 하지 않으면 말굽이 떨어지지 않아 말에서 내려서 성황신에게 절을 한 후 지나갔다고 함.
●명지-구멍【굴】진고개와 성재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수직굴로 명주실 한타래가 풀릴 정도로 깊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수 없음.
●성황-당【당집】20여년전 쯤까지 동고사를 지냈으나 이유없이 동네 청년들이 많이 죽고 새마을 사업 영향으로 철거하였는데, 미륵사 주지가 원래 5평 정도의 건물이 있었던 것을 2평 정도의 건물을 지어 복원시킴. 주지의 말에 의하면 꿈에 세 명의 성황신이 머물 곳을 지어 달라고 교대로 현몽하여 복원하였다고 하며 남신이 가운데에, 여신이 양쪽에 모셔져 있음.
●진-고개【고개】마당숲 뒤에서 웃동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비만 오면 질퍽질퍽하여 붙여진 이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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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계(洑溪, 복거리)
●복-계[洑溪, 보거리, 복거리]【마을】안보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 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안보리를 대안보, 복계, 뇌곡으로 나누어진 마을로, 1963년에 중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자로 시군통합에 의해 충주시에 편입됨. 마을 뒤에 넓은 들이 있고, 이 곳에 큰 보가 있어서 '복거리'라고 부르다가 '洑溪'가 되었음.《연풍읍지(延豊邑誌)》에는 이 곳을 '후평'이라 하였음. 대안보에서 미륵리로 향하는 597번 도로 우측(남쪽)에 펼처진 큰 들 복판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마을임. 서쪽으로는 3번 국도를 경계로 대안보와 접하고 북쪽은 597번 도로를 경계로 선권과 접하며, 동쪽으로는 곰지골에서 흘러나와 석문천과 합수하는 도랑을 경계로 대사와 접하고 있음.
●동부-산【산】대안보에서 3번 국도를 건너 남쪽, 옥실골 왼쪽에 있는 산. 높이 291.5m.
●속사-매기[동초목산, 석새머리]【산】복계에서 석문천을 건너 남쪽에 있는 산으로 화천리와 경계가 되며 높이 612.5m.
●음달-말【마을】석문천 남쪽에 있는 마을로 10여 호가 거주함.* 뇌곡(雷谷, 뇌실)
●뇌-곡(雷谷)[뇌실]【마을】안보리 행정리동의 하나.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3㎞ 지점에 좌우로 산재한 마을. 대안보에서 3번 국도를 건너 남쪽에 있는 옥실[玉洞]에 1가구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소실되어 없으며, 사시천을 건너 서쪽의 그리실에 6가구, 3번 국도 왼쪽(동쪽)에 30여 가구가 있다. 북쪽은 동부산을 경계로 대안보와 접하고, 서남쪽은 사시천을 건너 은행정과 접하고, 남쪽은 속사매기 산줄기를 경계로 화천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산을 넘어 탑동과 접함.
●그리-실[문이곡]【마을】뇌실에서 3번 국도를 건너 서쪽에 있는 마을로 경상도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갈 때 연풍.요골.은행정을 거쳐 그리실에 다다르면 항상 글 읽는 소리가 들려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문이곡(文耳谷)이라고도 하였음.
●문이-곡(文耳谷)【마을】→ 그리실.
●범탄-골[범턱골]【골짜기】그리실 입구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의 형상이 범이 턱을 고이고 있는 형상임.
●새-고개【고개】대안보에서 뇌실 사이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곳. 연풍 현감이 안보[역말]에서 유숙할 때, 마을 사람들이 '동네에 화재가 잦아 근심이다'라고 하자 현감이 지형을 살펴 보고 말하기를 '소금을 마을 남쪽에 묻으면 액막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소금을 살 돈이 없었다. 이에 수령이 소금을 사 주어서 그것을 땅에 묻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후 주변에 느티나무를 몇 그루 심었음. 그래서 이 곳을 새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여-실(女室, 녀실)【마을】뇌실 마을을 그리실 쪽에서 바라보면 여자가 가랑이를 벌리고 누어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생긴 말. 여자의 음부에 해당하는 마을 위쪽에 샘이 있고, 마을에서 상수원으로 사용함.
●옥실-골【마을】대안보에서 3번 국도를 건너 남쪽에 있는 마을로 1가구 살다가 현재는 없음. 활석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임.
●탕건-봉【산】구무정산 능선에 있으며 탕건을 벗어 놓은 것같이 윗쪽이 평평하여 붙여짐. 높이 318.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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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리(花泉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연풍군 고사리면 발화동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은행정(아랫말, 윗말, 아홉사리), 발화동(아래바라골, 윗바라골), 냉천동(사시동, 찬물내기)을 합하여 발화동의 화자(花字)와 냉천동의 천자(泉字)를 따서 화천리(花泉里)라 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하였음.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은행정, 발화, 사시동으로 분구되었고,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에 편입됨.* 은행정(銀杏亭)
●은행-정【마을】화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4㎞쯤 가면 괴산군과 경계한 피난봉 아래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마을. 윗말과 아랫말이 동남 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산고개를 넘어 아홉사리가 있음. 남쪽 화봉을 경계로 발화와 접하고, 서남쪽으로 피난봉이 괴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 서북간에 와우형인 일자산이 있고, 마을 입구를 흐르는 사시천을 건너 3번 국도가 지나감. 윗말에 500여년의 은행나무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생김.
●구무정-들【들】마을 입구에 있는 들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떡거머리 총각이 소꼴을 베고 있는데 큰 스님과 상좌가 지나가다가 비가 오려하자 스님이 빨리 가자 하니 상좌가 좋다고 하면서 춤을 아홉번 추었다. 스님 일행이 지나간 후 생각해보니 이상해서 쫓아가 춤을 춘 이유를 물으니, 춤을 추던 곳에 집을 지으면 조(粟) 천석을 하는 부자가 날텐데 하였다. 그 후 여씨(呂氏)가 집을 짓고 부자가 되었다고 하나 그 터를 정확히 찾을 수가 없다. 발화 쪽에서 보면 탕건봉에서 구무정산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춤을 추는 모습이라 하며 춤을 출 때 손목 부분이 명당 자리라 함.
●용-바위【바위】은행정과 연풍면 요골의 경계 능선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용머리 같이 생김. 가뭄이 들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제물은 돼지머리를 쓰며, 돼지피를 용머리에 뿌리면 그것을 씻기 위해서 비를 내린다고 전해 옴.
●윗-말【마을】아랫말을 지나 동신수(洞神樹)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마을.
●일자-산(一字山)【산】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서 보면 일자(一字)같이 생겼으며 풍수지리상 와우형(臥牛形)의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함. 높이 426.5m.
●탕건-봉【산】구무정들과 그리실 사이에 있는 산으로 탕건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을에 문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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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화(發花, 바라골)
●발-화(發花)[바라골]【마을】화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화천리를 발화, 은행정, 사시동으로 나눔에 따라 발화동이 되었음.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4㎞쯤 올라가서 작은 새재로 오르는 지점의 평탄한 들 안에 자리잡은 마을임. 남동쪽으로는 선녀봉에서 내닫는 능선을 경계로 사시동과 접하고, 서북쪽은 용바위에서 내닫는 능선을 경계로 은행정과 접하고, 북동쪽으로는 속사매기 정상에서 공동묘지를 따라 사시천 서쪽 들 안에 펼쳐져 있으며, 대사골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을 경계로 윗말(윗바라골)과 아랫말(아래바라골)로 나누어짐.
●모야-골2[주막거리]【마을】발화 앞쪽, 소조령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1979년 국도 확포장 공사로 인하여 접도 구역의 마을 전체(7가구)가 이주하였고, 마을터에는 노원(路園)이 만들어졌음.
●아랫-말[아래바라골]【마을】대사골에서 흘러내린 도랑의 서쪽(우측)에 있는 마을.
●윗-말[윗바라골]【마을】대사골에서 흘러내린 도랑의 남쪽(좌측)에 있는 마을.
●주막-거리【마을】→ 모야골. 모야골의 다른 이름이며, 영남 가도 옆에 주막들이 있었음.
●화-봉(花峰)[꽃뱅이]【산】잣나무골과 대사골 사이, 마을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307m. 산의 모양이 꽃이 활짝 핀 것 같아서 발화 마을의 유래가 됨.* 사시동(沙柴洞, 냉천동)
●사시-동(沙柴洞)[냉천동]【마을】화천리 행정리동의 하나.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 약 4㎞쯤 올라가면 괴산군과의 경계인 소조령 아래에 남향한 마을. 동남쪽으로 역마봉이 솟아있고 소조령에서 범안당골 오른쪽 능선으로 발화동과 접하며, 화천리 공동묘지를 거슬러 올라 속사매기 높은 봉과 동남의 역마봉에 이르기까지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임. 이 마을은 원래 냉천동(冷泉洞)이라 하였는데, 큰범안당골 돌 틈 사이에서 솟아나는 찬물은 여름철에도 손발을 오래 담그지 못할 정도로 차가움. 사시동이라는 이름은 일제 시대에 생겼는데,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고 함.
●가재-들【들】3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들로 30~40마지기 정도 되며, 주변 도랑에서 가재가 많이 잡힘.
●고려장-터【묘지】설매등 아래, 3번 국도 왼쪽(북동쪽)으로 수저, 청자 접시, 마구 등이 출토됨.
●냉천-동(冷泉洞)【마을】3번 국도 아래 찬물내기골 주변에 있던 마을로 큰범안당골에 있는 찬샘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영남대로상에 마방과 주막이 있었음. 일제 시대에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쇠퇴하여 현재의 마을로 이주함.
●대추나무-골【골짜기】마을 왼쪽(북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대추나무가 많았음.
●덕-구렁【묘지】찬물내기골 왼쪽, 마을 바로 위에 있는 작은 골짜기 주변으로 옛날 어린애들의 무덤인 애장이 있던 곳임.
●새-동네【마을】가재들 입구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부터 일곱집 정도 거주하였으며, 5.16후 주택 개량이 되었음.
●설매-등(雪梅-)[썰매등]【산】안골 다음에 있는 산등성이로 풍수학상 매화낙지형국의 명당터가 있다고 함.
●소자모-골[효자막골]【골짜기】새동네 왼쪽(동족)에 있는 골짜기로 효자가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고 하며, '효자막골'이라고도 함.
●썰매-등【산】→ 설매등. 설매등의 다른 이름으로 나뭇군들이 나무짐을 썰매로 끌었다고 함.
●역마-봉【산】상모면과 연풍면의 경계인 작은 새재의 왼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m이며, 풍수학상 갈마음수형국의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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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리(寺門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연풍군 고사리면의 대사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대사(大寺:한절, 곰지골)와 석문동, 오정암(오종바위)를 합하여 사문리라 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음.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 부락 단위로 분구함에 따라 대사와 석문으로 나누어짐.* 대사(大寺)[한절]
●대-사(大寺)[한절]【마을】사문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 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사문리를 대사와 석문으로 나눔에 따라 '대사'라 부르게 된 마을임.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96년 충주시로 편입되었음. 이 마을은 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 마을 자리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함. 지금도 절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음. 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미륵리 방향으로 2㎞쯤 올라가면 신선봉아래에 위치한 마을임. 서쪽으로는 곰지골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경계로 복계, 선권과 접하였고, 남쪽은 신선봉을 넘어 연풍면 안터와 접하였고, 동쪽은 석문동과 접하였으며, 북쪽은 곰지골을 넘어 고운리와 접하였고, 동북쪽은 꼬부랑재를 넘어 한수면 송계리와 접하였음.
●갈-번데기【마을】곰지골을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첫 번째 골짜기 주변에 갈씨(葛氏)가 살던 곳으로 현재는 터만 있음.
●강진-터【터】강씨(姜氏)와 진씨(陳氏)가 살던 곳으로 고장자골 아래쪽에 있음.
●고장자-골[고정자골]【골짜기】마을 동남쪽에 있으며 옛날 고씨(高氏) 부자가 살던 골짜기라 함.
●곰지-골【골짜기】선권과 한절의 경계가 되는 골짜기로,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산을 넘으면 상모면 고운리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넘어가면 한수면 송계리 골미(고얏골)에 다다름.
●뒷창-들【들】마을 뒤쪽(북서쪽)에 있는 들. 동네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 구실을 하는 들이라는 의미임.
●산신탁-골[산신터골]【골짜기】산신터골이라고도 하며 산삼을 캐러 다니던 심마니들이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곳이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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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동(石門洞)
●가마터-골[가무테골]【골짜기】감나무집 우측에 있는 골짜기. 가무테(가운데)골이라고도 함.
●떡갈-봉【산】석문동과 제천시 한수면 송계 3리와의 경계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산등성이가 끝나는 곳에 위치한 봉우리로 모심기 전에 갈풀을 하러 다니던 곳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있음. 높이는 각각 516.6m와 515m임.
●마패-봉(馬牌峰)[마역봉]【산】매약동 골짜기를 올라가서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와 경상북도 문경시와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 925.1m. '마역봉'이라고도 함.
●말바위-골【골짜기】새절골 도랑과 섬바위골 도랑이 합류하는 골짜기로 아랫말옆을 지나 석문다리 밑에서 석문천과 합류함. 새절골과 섬바위골이 만나는 지점 아랫쪽에 말바위가 있음.
●산지당-골1【골짜기】매약동 골짜기에서 바른골이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로 심마니들이 산신들에게 산제를 지내던 곳이 있음.
●새절-골【골짜기】말바위골에서 말바위를 지나 우측으로 갈라지는 골짜기로 옛날 절터가 있음.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 곳에 두 명의 스님이 절을 짓고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한 스님이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다른 스님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찾다가 법당에 들어가 보니 스님은 보이지 않고 흰 기둥 하나가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기둥을 밀었더니 기둥이 무너지면서 빈대가 법당 바닥에 가득하고 스님의 뼈가 쓰러졌다고 함. 겁에 질린 스님은 절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쳤다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도 돌틈사이에서 빈대가 발견된다고 함. 안보리에 있는 미륵사 주지가 이 곳에서 수도를 하고 있으며 가을철이면 도토리를 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함.
●석-문【성문】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왜병을 막기 위해 야문재 주변에 성을 쌓고 성문을 돌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도 성의 흔적이 남아 있음.
●석문-동(石門洞)【마을】사문리 행정리동의 하나.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미륵리를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약 5㎞ 쯤 가면 좌우로 높은 산이 솟아있고, 지릅재에 오르기 전 석문천 좌우에 산재한 마을. 지릅재에서 동남간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야문재가 있고 문경새재 동화원으로 가는 산길이 있음. 전설에 의하면 신립 장군이 이 곳에서 왜군을 막으려고 성을 쌓고 그 성문을 돌로 만들어 문을 열고 닫았다 하며, 성 아래 마을을 석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쇠꼬지-골【골짜기】가마터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로 철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고 하며 주변에서 쇠똥이 수습되고 있음.
●신선-봉(神仙峯)【산】석문동과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967m.
●야문-골【골짜기】지릅재에서 동남간으로 난 골짜기로 야문재를 넘어 문경새재 동화원에 이름.
●야문-재【고개】야문골과 동화원 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714m.
용-추(龍湫)【웅덩이】매약동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형성된 골짜기로 용이 이 곳에서 승천하였다고 함.
●운박-골【골짜기】석문동에서 매약동 쪽으로 가면서 산지당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
●원-터【터】현재 감나무집이 있는 곳으로 옛날에 이 곳에 숙박 시설인 원이 있었다고 함. 혹은 절터였다고도 함. 일제 시대에는 병참터였다고 함.
●점-터(店터)[주음터]【터】쇠꼬지 골에서 채굴된 쇠를 녹이던 곳으로 쇠똥이 수습됨.
●조통-골【골짜기】섬바위골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로 위쪽에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와의 경계에 신선봉이 있음.
●풀무-골[풀미골]【골짜기】아랫말 뒤쪽(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무혈이 있어서 불꽃이 올라오는 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고 전함. 6.25 전쟁 때 약 1개월 간 인민군 사령부가 주둔하다가 후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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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彌勒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미륵리는 연풍군 고사리면 미륵리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말, 점말, 지릅재를 미륵리라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음. 미륵당 아래 토현(土峴:흙벼루)이란 마을도 고사리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에 편입되었음. 1963년에 중원군으로, 1995년 1월 1일에 충주시로 편입되었음.
●고려-굴【굴】사문리에서 지릅재를 지나서 첫번째 골짜기에 있는 굴로 고려시대부터 수정을 생산하였다고 전하여짐.
●까마귀-골【골짜기】작은 달목골에서 597번 도로 건너에 있는 골짜기로 쇠부리한 곳이 있어서 쇠똥이 발견됨.
●닷돈-재【고개】송계계곡내 팔랑소 남쪽에 있는 고개. 옛날에 인적이 드물어 산적들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닷돈씩 받고 통과시켰다 함.
●동무-등갱이【산】수안보초등학교 미륵분교가 위치한 산.
●마골첨-봉수[봉화재, 봉우재, 봉우뚝]【봉수】사문리 오종바위골과 미륵리 작은 달목골 사이에 위치한 봉수대로 오산 주정산 봉수대로 연결됨. 봉화재, 봉우재, 봉화뚝으로도
불림.
●말무더-미2【무덤】수안보초등학교 미륵분교 앞에 있는 큰 무덤으로 온달장군이 이곳에서 적병(신라군으로 추정됨)과 싸우다가 그의 말이 창에 맞아 죽자 이 곳에 묻었다고 함.
●박쥐-봉【산】지릅재 북쪽에 있는 산. 높이 782m.
●부-봉【산】점말에서 남쪽을 큰달목골을 올라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에 있는 산.
●북나무-골【골짜기】미륵뒤골을 올라가다가 좌측으로 갈라지는 골짜기. 북나무가 많이 자람.
●수정-골【골짜기】사문리에서 미륵리를 향하다가 까마귀골 전에 위치한 골짜기로 수정 광산이 있어서 수정골이라 함.
●안-말[내촌]【마을】미륵당 북쪽에 있는 마을. 미륵대원지 발굴로 말무덤이, 점말로 이주하여 마을이 없어짐.
●작은달목-골【골짜기】사문리에서 지릅재를 넘어 미륵리로 가는 597번 도로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진등골 전에 있으며 사기를 굽던 곳이 있었음.
●점-말【마을】말무더미 서쪽에 있는 마을. 1976년 안말에서 이주하면서 한옥마을 형성. 백자 가마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송계계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됨.
●지릅-재【고개】사문리와 미륵리 경계 지역에 위치한 고개.
●포암-산(布巖山)【산】경상북도 문경군과 경계에 있는 높이 961m의 산.
●하늘-재【고개】미륵당 동남쪽에 있으며 경북 문경군 관음리로 넘어가는 고개. 한훤령(寒暄嶺), 계립재(鷄立嶺, 鷄立峴)로도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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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리(古雲里)【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연풍군 수회면 고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고운, 시여골을 합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중원군에, 1995년 시군통합으로 충주시에 편입됨. 전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인 적보산 능선 중턱에 고운사(古雲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부근에서는 지금도 기와장이 많이 나오고 있어 이 마을의 유래로 추정됨. 북쪽으로는 중산리 법수동과 장승배기에서 접하고, 동북간에는 살미면 공이동으로 넘어가는 갑둥이재가 있고, 동쪽으로 꼬부랑재를 넘어 한수면 송계리 골미(고얏골)와 접하고, 동남쪽은 안보리 곰지골과 통하며, 남쪽은 직마리재를 넘어 온천리 관동과 접함.
●가시골상-봉【산】가시골 골짜기를 올라가서 공이동과의 접경 지대에 있는 산.
●갈비-봉【산】은구뎅이 왼쪽에 있는 산으로 소나무가 우거져 갈비를 많이 긁던 곳으로 높이 412m.
●강진-말림【산】문산리 강진 사람이 소유했던 산으로 큰골 모퉁이 뒤쪽에 있음.
●골-담【마을】큰말에 딸린 마을로 양짓말로 올라가기 전에 있음.
●곳집-거리【지점】장승배기에서 마을로 올라가다가 중산천에 놓인 다리에서 오른쪽 산 밑에 있는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 주변을 말함.
●꽃-봉[문필봉]【산】갑둥이재 오른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461m이며, 이 산에서 핀 꽃이 공이동에 떨어져 매화낙지형국의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함.
●망대-봉【산】한수면 송계리, 살미면 공이동, 상모면 고운리의 삼각 지점에 있는 산으로 높이 731.8m이며, 1984년 정상에 헬기장을 닦음.
●못-둥치【마을】숲안말 남쪽, 연못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됨.
●성-재【산】직마리재 왼쪽(동쪽)에 있는 성터로 생각되는 돌무더기로 안보리 성재와 이어짐.
●셋집-담【마을】시여골 입구, 하녀골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아랫쪽에 있는 마을.
●숲안-말【마을】마을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큰 숲이 있었음.
시여-골[윗말]【마을】중산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
●직마리-재【고개】온천리 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낭당(느티나무)이 있었으며, 동쪽으로 가면 고운리, 남쪽으로 가면 머리골, 서쪽으로 가면 관동이 나옴.
●진-등【산】갑둥이재 아래, 가시골과 갑둥이골 사이에 있는 긴 산등성이로 황강들로 뻗어내림.
●큰골-모퉁이【마을】큰말과 시여골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현재 1호가 거주함. 중산천 건너에서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부엌터와 기와장이 나옴.
●큰-말[아랫말]【마을】고운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직마리재에서 흘러내린 도랑과 시여골에서 흘러내린 중산천이 합수되는 곳 좌우에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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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中山里)【리】연풍군 수회면 중산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미, 신대, 법수를 합하여 중산리라 하여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음.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마을 단위로 분구할 때 상촌(중산, 법수)과 신대(새터말)로 나누어졌음. 1963년 중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도농복합에 따라 충주시에 편입됨. 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충주 방면으로 약 7㎞쯤 가면 중산.고운으로 가는 지방도가 나옴. 돌방머리(삼거리)에서 400m쯤 가면 신대, 800m쯤 가면 중산(웃망), 1500m쯤 가면 법수가 나옴. 북쪽으로 대미산 줄기가 살미면 용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장승배기를 경계로 고운리와 접하고, 남쪽은 첩푸산(적보산)을 경계로 온천리와 접하며 서쪽은 돌방머리와 높은 벌을 잇는 선을 경계로 수회리와 접하고 있음.●법-수(法守)【마을】중산리 자연마을의 하나.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상촌에서 분구되어 이장이 따로 있었음. 임진왜란 무렵에 2호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은 저수지 안에 수몰된 마을 한 가운데에 있었던 느티나무 수령으로 보아 500여년 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동북쪽으로는 대미산 줄기로 살미면 공이동과 접하고, 북쪽은 첩푸산 줄기와 중산저수지로 상촌과 접하고, 남동쪽은 장승배기를 경계로 고운과 접하며, 남서쪽은 첩푸산 줄기를 경계로 온천리와 접함.
●된양-지[주막거리]【마을】대미산을 등지고 서향한 곳으로 주막촌(3호)을 이루었고 중산과 고운, 공이동간의 쉼터 구실을 하였으나 저수지로 수몰됨.
●밭가무-테【마을】윗말 위쪽, 바랑골과 모약골이 합수하는 지점 오른쪽 밭 가운데 1호가 거주함.
●벌통바위-골【골짜기】바랑골을 오르다가 모약골을 지나 오른쪽(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바위 밑에 토종벌통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
* 상촌(上村, 중산, 중미)
●상-촌(上村)[중산, 중미]【마을】중산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중산리를 상촌(웃말,법수)과 새터(新垈)로 분구했고, 1963년 중원군에 편입,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에 통합되었음. 동쪽은 대미산을 경계로 살미면 공이동과 접하고, 동남쪽은 법수를 지나 장승백이에서 고운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사장터와 갈골을 경계로 신대와 접하며, 남쪽은 남쪽은 적보산 능선이 법수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된배미를 지나 솔고개를 넘어 용천리와 접하고 있음. 고운리 시여골에서 발원한 중산천이 마을 앞을 지나 수회리에서 석문천과 합류함. 1980년 법수와 웃말 사이에 있는 범바위 근처를 막아 중산저수지를 축조하여 장연, 상모, 살미 3개 면의 400여 정보의 논에 관개하고 있음.
●골-말【마을터】원래 상촌 마을터로 사장터에서 된배미로 가다가 왼쪽(북쪽)에 있었으며, 물을 찾아 현재의 마을로 이동함.
●구봉산 제1-봉【산】첩푸산(적보산) 줄기 밑에 중산에서 수회에 걸쳐서 9개의 봉우리 중의 하나로 지당골 위에 있는 산으로 높이 430m.
●된-배미[導仁坪]【마을】안말에서 웃고개를 넘어 된배미골 안에 있는 마을.
●바깥-말【마을】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중산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
●사장-터(射場-)【터】중산과 신대의 경계에 있는 들로 진터배기에서 쉬던 지방관이나 군사들이 활을 쏘던 곳으로 진터배기 북쪽 산 맡에 있음.
●안-말【마을】대미산 줄기 밑에 길게 늘어선 마을.
●진터-배기【터】사장터 남쪽, 신대와 상촌 중간에 위치하며, 영남지방의 관리가 충주 방면으로 갈 때 진을 치거나 쉬어가던 곳으로 소나무가 두그루 있음.
●할딱-고개【고개】웃고개가 너무 급경사여서 넘으려면 숨이 턱에 차서 할딱거린다고 하여 붙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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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新垈, 새텃말)
●신대(新垈, 새텃말)【마을】예전에 이곳에 주막이 있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주막에서 묵어갔다하니 느티나무의 수령으로 보아 마을이 형성된 것이 300~400여년 전으로 보임. 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충주 방면으로 7㎞쯤 가면 중산.고운리로 갈려지는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좌우로 산재한 마을. 동쪽은 대미산 기슭에 자리한 상촌과 접하고, 서쪽은 감투바위산으로 수회리와 접하고, 남쪽은 적보산(첩푸산)이 앞산인데 그 산능선을 넘으면 법수의 꼭대기와 접하며, 북쪽은 마을 뒷산인 갈마고개 능선을 따라 살미면 용천리와 접하는 마을로 상촌에서 새로 생긴 마을임.
●돌빵-머리[돌팍머리]【마을】3번 국도와 중산-고운 간 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 주변에 있던 마을로 주막이 있었으나, 현재는 1호만 거주하며 시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음.
●청룡-머리【마을】청룡산 왼쪽(동쪽)에 있는 마을.
●청룡-산【산】마을 앞, 신대교 건너에 있는 능선 끝 봉우리
⊙수회-리【리】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연풍군 수회면 주막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무두리, 원통, 새터를 합하여 수회리라 하였으며, 괴산군 상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수회, 원통, 신원으로 분구되었음.* 수회(水回, 무두리)
●수-회(水回)[무두리]【마을】수회리 행정리동의 하나. 전래되는 마을 이름이 "무두리"가 된 것은 동북간으로 흐르는 중산천이 마을 뒤를 돌고, 서쪽으로 석문천이 싸고 돌아 신원과의 사이에서 합수하여 마을 주위에 물이 모인다하여 "물돌이"를 무두리라 불렀음. 수안보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충주 방면으로 5㎞가다 보면 도로 좌우편에 집단을 이루고 형성된 마을. 적보산 아래 형성된 마을로 마을 중앙에 3번 국도가 지나갔으나 새로이 건설된 4차선 도로가 마을 북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 신원, 원통과 경계를 이룸. 동북쪽은 돌빵머리와 높은 벌로 중산리 신대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석문천으로 원통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중산천을 경계로 신원과 접하며, 남쪽은 양문 휴게소 위쪽에서 온천리 오산과 접함.
●노장-골【마을】마을 동북쪽 수회교를 지나 감투바위 옆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노씨(盧氏) 부자가 살았다하며 현재는 양지농원이 있는 곳임.
●말-구미【바위】옛날 길에 위치하며 구랑골을 지나 다시 절벽이 시작되는데 영남 과객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길이 좁아서 말과 함께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던 곳이라 함.
●맹정승-묘【묘지】무두리 뒷들에 맹정승의 묘가 있었는데 비석을 묻고 묘를 없앤 후 농경지로 만들었음.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다리 공사에 비석을 사용하려 했으나 일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비석, 문무관석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음.
●비석-거리【터】연풍군 수회면 지역으로 마을 뒷쪽(북쪽)에 여러 기의 비석이 서 있던 곳. 현재 연풍 현감 정후의의 불망비가 마을 회관 앞에 옮겨졌으나 쓰러진 상태로 있어서 복원이 요망됨.
●산-집[산마을]【마을】수회교 남쪽,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로 8호가 살았는데 큰 바위를 모시다가 깨뜨린 후 생활이 곤란해져서 다른 곳으로 이주함. 유씨네 선조 산소가 있었는데 경찰학교에서는 존속시키려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동네에 안 좋다고 하여 이장시키고 현재는 경찰학교 사택이 있음.
●수회-창【터】숙종 46년(1720년) 관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이 곳에 북창(北庫 12간, 西庫 6간)을 설치하였음.
●안목-비【골짜기】적보산에 이는 골짜기로 목이 부러진 돌부처가 있는 안쪽 골짜기를 말함. 이 석불은 수안보에 살던 일본인 佐佐木이 수안보로 운반해갔는데 현재 수안보 입구 서낭댕이에 있는 것이라 생각됨.
●용산-테미【산】수회교 좌측(북쪽)에 있는 작은 능선 끝으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높이 202m.
●원-터【터】수회에서 마당바위를 돌아서면서 도로 확장 전에는 밭이 있었는데 원터와 주막이 있었음.
●장터-거리【마을】수회 초등 학교 앞 3번 국도 건너에 장터가 있었음. 이 곳은 영남과 기호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문물의 교류가 잦은 이유로 무두리 장시가 일찍이 발달했고, 매월 1일과 6일인 수회장은《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된 유서 깊은 장시임. 1895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수회면 사무소가 설치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현재의 수안보 온천 소재지로 옮기면서 상모면이 됨. 또한 수회장도 수안보 온천에 목욕객이 증가하면서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수안보로 옮기게 되었음.
●함박-골【골짜기】수회교의 북쪽, 용산테미 우측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함씨(咸氏)와 박씨(朴氏)가 거주하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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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元通)
●원-통(元通)【마을】수회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새터와 원통을 합하여 신원이라 하여 수회리에서 수회와 분구했다가 다시 신원과 원통으로 분구함. 수안보에서 3번 국도를 따라 충주 방면으로 5㎞쯤 가다가 수회 마을 300m 전, 석문천을 건너 여러 개의 산등성이를 경계로 산재한 마을로 남서쪽으로 주정산 줄기를 등지고 동북향으로 자리잡았으며, 석문천과 중산천이 합수하여 마을 앞을 흐르고 토현(土峴)[독메, 흙두들기], 원퉁이(큰말)이 있음.
●그진-봉【산】마당바위 맞은 편(남쪽) 포플라나무 단지 위쪽에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높이 294m.
●안비-들【들】마을 앞에 있는 수회리 제1의 곡창으로 기러기가 날면서 올뱅이를 잡아먹는 형국임. 벽진 이씨의 묘가 있으나 기러기 날개에 석물을 세우면 기러기가 날지 못한다 하여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있음.
●용-머리【굴】강등의 산등성이가 석문천과 만나는 곳에 있는 굴로 6.25때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함.
●원천-사(源泉祠)【사당】불수자(弗須子) 윤구(尹求)가 쓴《4천년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延豊 源泉祠 肅宗 辛卯年 李箕洪 字汝九 號直齊 完山人 官執義'란 기록이 있음.
●윗양-지【들】마당바위 맞은 편, 석문천 건너에 있는 급경사 지역의 바위 서들로 6.25전쟁 때 폭탄 투하로 큰 웅덩이가 형성됨.
●토-현(土峴)[독메, 동메]【마을】양질의 점토가 있어서 옹기를 굽던 마을로 옹기 가마는 파괴되었음.
●패랭이-번던【산】원통의 남서쪽 증골과 큰골 사이, 장연면과 경계에 있는 넓고 평평한 지역으로 옛날에 지관이 이 곳에서 명당 자리를 찾아내고는 패랭이를 벗어 놓고 춤을 추었다고 함.
●흙두들-기【마을】→ 토현. * 신원(新元, 새터)
●신-원(新元)[새터]【마을】수회리 행정리동의 하나. 1937년 법정리동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새터와 원통은 합구된 상태로 두었는데, 합구된 마을의 명칭은 신대의 신자(新字)와 원통의 원자(元字)를 따서 신원(新元)이라 불렀음. 그 후 원통과 분구되어 독립 자연부락이 되면서도 이 마을 명칭은 그대로 신원으로 남게 되었음. 수회에서 중산천을 건너 1㎞쯤 북쪽, 대미산 줄기에서 이어지는 산 밑에 남향한 마을. 중산천과 석문천이 합수한 후 마을 앞을 흐르고, 동남쪽은 수회와 접하고, 서쪽은 문강리로 넘어가는 돌고개가 있고, 북쪽은 영남대로로 통하는 장고개를 넘어 살미면 세성리와 접함.
●안-말【마을】산 밑에 원래부터 있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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