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급 [李尙伋, 1571 ~ 1637]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에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당부(戇夫). 아버지는 동몽교관 이희선(李喜善)이며 어머니는 정환(丁煥)의 딸 창원정씨(昌原丁氏)이며, 형은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이다.
[활동사항]
이상급은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사가 되었다. 당시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뜻이 맞지 않아 일시 병을 빙자하여 사직한 일도 있다. 뒤에 형조좌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이때는 정조(鄭造)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는데, 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사직하고 충주 지역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다. 형 이상길(李尙吉)도 벼슬을 버리고 함께 후진 교육에 뜻을 같이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고 단천군수·연안군수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로 치군(治軍), 축성(築城) 등 군비를 확장하는데 힘을 쏟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로 들어간 형 이상길을 찾아가던 중 적병에 살해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504번지 엄동(奄洞) 몽산(夢山) 아래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충강공 이상급 신도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상급의 신도비.
[개설]
이상급(李尙伋)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당부(戇夫)이며,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조 때 안찰사가 부임하자 풍기군수였던 이상급은 속관(屬官)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임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직신(直臣)의 기품이 있어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올라가 인조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간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건립경위]
1714년(숙종 40)에 신도비명을 받아 1716년(숙종 42)에 건립하였다.
[위치]
충주시 주덕읍 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에서 우회전한다. 덕신초등학교 정문이 나타났을 때 왼쪽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음동마을로 직진하면 왼쪽으로 이상급 묘가 나타난다. 좌회전하여 약 200여m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산자락 밑에 이상급 신도비각이 보인다.
[형태]
팔각형의 대리석 신도비로 대석은 높이 68㎝, 폭 55㎝이며, 동일한 크기의 8면 중 6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였고 대칭되는 2면에는 동물 문양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부분에는 8개의 큼직한 연꽃을 새겼고 그 위에 8각형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은 한 면이 26㎝로 8면의 크기가 동일하고 높이는 약 200㎝ 정도이다. 이수는 비신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4각의 형태이다. 크기는 78×78×68㎝로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보여준다. 8각형이라는 형태의 특이성과 조각의 섬세함과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신도비이다.
[금석문]
제액은 예서체로 ‘증이조판서행병조참지이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行兵曹參知李公神道碑銘)’이라 음기하였고, 비제는 3.5×2.5㎝ 크기로 ‘유명조선국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병조참지 이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正大夫兵曹參知李公神道碑銘幷書)’라 하고, 찬자(撰者)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송시열(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宋時烈)’이며, ‘현손남 진사 정상전(玄孫男進士鋌相 篆)’이라는 글이 있고, ‘진사 정복(進士綎僕)’이 글씨를 썼다.
[현황]
충강공 이상급 신도비가 위치한 사락리 음동마을에는 경녕군 묘와 신도비, 재실인 명덕사가 마을 왼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종어씨(咸從魚氏)들의 선산이 그 옆으로 있다. 마을의 중앙에 이상급 묘가 정비되어 있고, 묘의 앞에는 재실(齋室)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산자락을 돌아서 약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위치한다. 이상급 묘 오른쪽 작은 도랑 건너에는 윤증(尹拯)이 찬한 이련(李堜)의 묘갈이 있으나 관리가 소홀하여 송시열과 의를 절단한 윤증과의 관계가 벽진이씨 문중 묘역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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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시지』(충주시, 2001) |
• 『충주의 금석문』(충주문화원, 2006) |
• 『충주의 문화재』(충주시, 2008)
이상급[ 李尙伋 ] 신도비문(神道碑文)
내가 앞서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는데 이제 또 내 친구의 부탁을 받고서 참지공(參知公)의 비명을 짓게 되었으니 공은 충숙공의 아우이다. 한 집안에서 훌륭한 인재가 어찌 이리도 많은가? 아! 세도(世道)는 쇠퇴하였는데도 이 분들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상급(尙伋)이고, 자(字)는 사언(思彦)이다. 신라 말엽에 이총언(李悤言)이라는 분이 있어서 고려 태조의 건국을 도운 공로로 성주 장군(星州將軍)에 제배(除拜)되어 그 후손이 드디어 관향을 성주로 쓰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약동(李約東)이 문재와 무재를 겸비하였는데, 시호(諡號)는 평정(平靖)으로 청백리(淸白吏)로 역사에 이름이 올랐다. 좌랑(佐郞) 이소원(李紹元), 참봉(參奉) 이유번(李有蕃), 군수(郡守) 이석명(李碩明), 교관(敎官) 증 찬선(贊善) 이희선(李喜善)은 바로 공의 고조ㆍ증조ㆍ조ㆍ고(考)이다. 찬성공이 도사(都事) 정환(丁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으니 공은 그중 넷째이다.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도 학문에 힘써서 나이 35세에 진사(進士)로서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저작(著作)ㆍ박사(博士)를 거쳐서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서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제경(帝京)에서 춘신절(春申節)을 하례하였다. 그러나 채 돌아오기도 전에 도중에서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공이 그네들과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미워하여 청환(淸宦)의 길을 막아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 얼마 안 되어 질병으로 면직되었다가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나갔다. 이때 이웃 군에 어떤 적당(賊黨)이 형구[械]를 부수고 도망친 사건이 일어나서 조정이 현상금을 내걸어 체포한 자에게 작상(爵賞)을 내리고 이어 상금의 액수에 따라 벼슬도 차등을 두어 내렸는데 공은 상공자(上功者)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실적을 낮추어 모면할 수 있었다. 뒤에 흉인(凶人) 정조(鄭造)가 안찰사(按察使)로 나가자 공이 그의 속관(屬官)이 되는 것이 부끄러워서 곧장 벼슬을 그만 두고 충주(忠州)의 별장으로 돌아와 밭갈이와 낚시질로 낙을 삼으니 책을 끼고 학문을 배우러 오는 제생(諸生)이 매우 많았다. 이때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공은 스스로 계청(啓請)하여 따랐고, 어떤 추악한 출신의 권귀자(權貴者)는 일부러 찾아와서 청환(淸宦)의 선발에 올리고자 하니 떠나지 말라고 요청하였으나, 공은 빙그레 웃으며, “감히 할 바가 아니오.” 하였다. 이는 당시 간당(奸黨)들의 음모가 무르익어 모후(母后)를 폐위하기까지 하는 등 이륜(彛倫)이 파괴되어 공과 충숙공이 다 같이 벼슬길이 달갑지 않아 본래의 신조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인조가 반정을 하면서 제사(諸司)의 벼슬에서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가려는데, 제공이 유임시키도록 계청하기를 공을 간관(諫官)의 자리에 붙잡아 두는 것이 옳지, 외직(外職)에는 적당한 바가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장령(掌令)과 집의(執義)에 임명되어 꼿꼿한 직신(直臣)의 풍채가 있었다. 그러나 공을 달가워하지 않는 자가 점점 많아졌고,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하려고 국정을 논의하는 자들이 안동(安東)은 매우 중요한 보루이므로 오늘날 방어를 할 자로는 이 아무개에 앞설 사람이 없다고 하여, 이에 공이 상의원 정(尙衣院正)에서 안동으로 나가게 되었다. 부임을 하여서는 곧 혼조(昏朝, 광해군) 때 적체된 포흠(逋欠)을 모두 청산하는데, 그중 어떤 호족이 요행을 노리자 공이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임금의 은혜가 간활(奸猾)에게 편중하게 된다.” 하고, 드디어 일체 징수를 독촉하고 전세(田稅)의 절반을 견감(蠲減)하여 주었다. 또 상사(上司)와 시비를 다투다가 상사가 임금에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계문(啓聞)하여, 공이 법정에 나아가 문초를 받고 논체(論遞)되었다. 뒤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서용(敍用)되어 사간(司諫)으로 옮겼는데, 세자의 가례(嘉禮)를 논하면서 세자빈은 마땅히 신지1)(莘摯)의 정통 가문에서 간택해야 되지, 역신(逆臣) 집안의 가까운 친척을 간택의 대열에 섞어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임금이 내심 깊이 생각하여 둔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임금의 뜻을 크게 거스르게 되어 당장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대신의 강력한 간쟁(諫爭)에 힘입어 간신히 체직(遞職)으로 면하였다.
오랜 뒤 병자호란으로 장군의 임무를 맡아 나가는 자가 있어서 계청하여 군영의 종사관이 되었고, 진휼사(賑恤使)를 따라 나가 호남에서 모곡을 하였으나 조정에 돌아와서는 역시 용관(冗官) 산직(散職)에 맴돌았다. 이윽고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나갔는데, 단천군은 은화(銀貨)가 생산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는 이(利)의 소굴이므로 관인(官人)이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였다가는 신명(身名)이 안타깝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손을 씻고 봉공(奉公)하여 세공(歲貢) 외에는 단 한 푼의 잉여라도 모두 민간의 요역(徭役)에 대용하였다. 이전에는 군정(軍丁)의 도망자와 사망자에 대한 군포(軍布)를 모두 이웃이나 종족에게 물려 왔는데, 공이 또 사사로운 잡비를 절감하여 그 잉여로 충당하고 아전들의 침탈(侵奪)을 면하여 주었다. 또 북쪽 변방은 문학을 숭상하지 않았는데, 공이 그중에서 조금 뛰어난 자를 맞아다 스승으로 삼아서 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친히 공자(孔子)의 사당에 나아가 알현(謁見)하고 이어 제생(諸生)들과 강론을 한 결과 얼마 안 되어 문예(文藝)가 계획대로 부흥되었다. 이때의 안찰사(按察使)가 바로 공이 사간으로 있을 적에 지적한 사람으로, 진실로 일찍부터 공에게 나쁜 감정을 품어 왔던 터이나 역시 마음속으로 승복하여 고과(考課)를 최상으로 장문(狀聞)하였으며, 공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이경증(李景曾)공이 어사(御史)로 그곳에 갔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공의 덕정(德政)을 되새겨 칭송하였다.
이어서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치적(治積)이 한결같이 단천에 있을 때와 같았다. 연안은 지난날 외로운 성(城)으로 왜구(倭寇)를 잘 막아냈고, 더구나 오늘날처럼 외우(外憂)가 한창 많은 때일수록 사전의 대비가 없을 수 없다며 전쟁 장비들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기계들이 모두 잘 정비되었다. 당시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계문(啓聞)하여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옷감 한 벌을 내려주었다. 공이 평소에 비시(鄙視)하던 사람이 도사(都事)가 되어 온 것을 공이 넌지시 풍자하여 그가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하여 그 사람은 참노(慙怒)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가고 공 역시 스스로 면직을 청원하여 돌아왔다.
보덕(輔德)에 임명되어서는 세자가 공이 시무(時務)에 숙련함을 알고 강론이 끝날 적마다 특별히 공에게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물어 보았는데, 세자는 공이 진달하는 말에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인렬 왕후(仁烈王后)의 국상 때에는 공이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서 논공(論功)을 받아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 이때 국가가 이미 병란을 겪을 조짐이 보여서 공이 매번 군대 정비와 병기 수선, 성지(城池) 수축과 장수 선발을 주장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이들이 대단하게는 여겼으나 제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대가(大駕)가 적을 피하여 남한산성으로 파천하게 되자 공이 말고삐를 잡고 호종(扈從)하였는데, 풍설(風雪)을 무릅쓴 지 40여일 만에 큰 병을 얻어서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면서도 오직 국사(國事)만을 마음 아파하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대가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을 당하자 공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화의의 폐해가 여기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인가?” 하였다. 이때 공의 형 충숙공이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공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야겠다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병을 무릅쓰고 강화도로 달려가다가 적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서 그만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2월 3일 도상(道上)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 66세였다. 충주(忠州) 황금곡(黃金谷) 해좌(亥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공은 어릴 적부터 의지가 확고하여 구차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성동(成童)이 채 못되었을 적에 맏형이 충숙공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손을 잡고 돌아오는데,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동네 앞을 메웠으나 공은 문을 닫은 채 글만 읽었다. 아버지 찬성공이 이상히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뒷날에 나도 할 것인데 내다보기만 할 필요가 무어 있겠습니까?”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끝내 성취가 있을 줄 알았다. 충숙공을 섬김에 아버지처럼 하였다. 평소 생업을 일삼지 않아서 서울에 집이 없다가 늙고 나서는 차마 서로 떨어져 살 수가 없어서 드디어 충숙공의 집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좌(對坐)하니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미담으로 삼았다.
태학(太學)에 들어간 뒤로는 사람들과 함부로 만나지 않고 벗하는 사람은 다 일시의 명사들이었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마침 군흉(群凶)들이 당로(當路)하여 세염(勢焰)이 이글거리는 데다 공이 어떤 일을 당하면 화복을 따져서 흔들리거나 굽히는 일 없이 앞장을 섰다.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에는 이웃 고을에 이이첨(李爾瞻)의 무리가 있어서 이이첨에게 환심을 사고자 하여 일부러 찾아와 앉아서 은근히 화해를 붙이는 것을 공이 완곡한 말로 뼈저리게 풍자하여 물리치자 듣는 사람이 혀를 내둘렀다. 또 어떤 이가 정조(鄭造)의 측실(側室) 딸이 매우 아름답다는데 공은 어찌 첩으로 맞아들이지 않느냐고 하자 공이 정색을 하고 나무라기를, “내가 어떻게 정조의 딸을 첩으로 삼을 수 있으며 사대부가 어찌 차마 그의 대문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성명(聖明)을 만난 이후로는 더더욱 꼿꼿하고 아부하지 않아서 분촌(分寸) 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아서 가끔씩 겉으로는 추중(推重)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실제 배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시종 방황하고 외곽을 겉돈 것도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앞뒤로 37곳의 벼슬을 거치면서도 요직으로는 간관(諫官) 두 번과 서연관(書筵官)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포부가 있기로서니 어떻게 펼쳐 볼 수가 있었겠는가? 오직 주현(州縣)에만 누차 부임하였으나 그때마다 심력(心力)을 다하여 언제나 소민(小民)을 보듬어 주고 무단(武斷)을 억제하는 데 힘썼다. 도의를 저버리고 명예를 구할 생각은 전혀 없어서 부임하는 고을마다 활리(猾吏) 행민(倖民)이 눈을 흘겨보았으니 얼음과 같은 그 신조는 이루 다 지적하여 말할 수 없다. 때문에 끝까지 감히 흠은 잡지 못하고 도리어 추모하며 새겨서 칭송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무엇보다도 의리의 변론에는 언론이 준엄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참람하게 우리에게 국호를 쓰자 홍익한(洪翼漢)공이 대의(大義)의 명분으로 좌절시키고 척화(斥和)하려는 것을 공박하였는데,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이를 비난하였으나 공은 홍공의 주장을 극력 옹호하였다. 뒤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상황이 위급해졌을 때에는 평소에 공의 주장을 정론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조차 앞서 한 말을 숨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본래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며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으니, 그의 지론은 구차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찌 신명(神明)이 공의 충분(忠憤)에 감격하여 마침내 적인(賊人)의 충심을 달래서 그의 소원을 이루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충숙공이 선원(仙源) 김 상국(金相國, 김상용(金尙容)) 제공(諸公)과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한 일과 비록 그 죽음의 과정은 조금 다르다 하더라도 난세에 영원히 남긴 그 충절의 정신은 똑같다 하겠다. 대개 공의 중형과 아우 모두가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충숙공은 성품이 자상하고 온화하여 남과 마찰이 없으므로 공이 본래부터 사법(師法)을 삼았으나, 질박(質朴)하고 견확(堅確)하여 이해 관계를 돌아보지 않음은 충숙공도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인정하였다.
난리가 끝난 뒤에 임금이 호종 공신(扈從功臣)에 추록(追錄)하고 대사헌을 추증하였는데 뒤에 아들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오름으로 해서 이조 판서가 추증되고 부인 역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첨지중추부사 박주(朴胄)의 딸이다. 언제나 공경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공의 뜻을 받들며 공이 내외의 많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끝까지 털끝만큼도 누를 끼치지 않아 육친(六親)이 모두 칭찬하였다.
장남 이연(李堜)은 부인의 초상에 슬픔으로 상심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일찍 죽고, 차남 이인(李 )은 곧 야수(野叟)로, 문과에 급제하여 늘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에 있으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바른말을 하다가 역시 세상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딸은 참봉 윤명거(尹溟擧)에게 시집갔다. 이타(李埵)는 첨지이며, 이곤(李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이배(李培)는 막내이다. 이연의 두 아들은 이지웅(李志雄)과 이지걸(李志傑)인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지웅은 벼슬까지 하였다. 이인의 3남은 이지술(李志述)ㆍ이지도(李志道)ㆍ이지규(李志逵)이고, 3녀는 이만성(李晩成)ㆍ이창령(李昌齡)ㆍ유정기(兪正基)에게 각각 시집갔다.
내가 외로운 아이로서 늘 공을 선우(先友)로 섬겼는데, 공이 일찍이 나에게 가르쳐 주기를, “너의 숙부 평사공(評事公)이 언젠가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서로 경계하여 절대로 방납(防納)의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한 바 있어서 내가 나의 친구의 말을 감히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대개 방납이란 형세가(形勢家)가 모리(牟利)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이른바 ‘한 지국의 정의감은 가장 미칠 수 없다.’는 것과 자로(子路)가 이른바, ‘오래 전에 한 약속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는다.’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역시 공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공은 혼박하고도 견후하도다. 돌덩이 속의 옥과 같은데, 누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랴? 사람들이 공을 두고 하는 말, 흑백이 없다 하였네. 스스로 의리를 지킨 공이라, 참으로 나라의 직인(直人)이었네. 혼탁한 시대에도 살대처럼 곧았는데, 더구나 도덕의 시대이랴. 비굴하게 굽히지 않으니, 아껴주는 사람 적었네. 저들이 종종걸음쳐 나아가면, 나는 느긋이 물러났지. 명도(名途)에 겸손 지켜 교활히 얻는 벼슬 부끄러워하였네. 사간원과 사헌부 벼슬, 자리가 따스할 겨를 없었네. 큰 고을에서 험난한 고을, 그리고 변방 고을에까지, 쾌도로 자르듯이 기마 타고 평보 하듯이 잘 다스려 간호들 진땀빼며 헐떡이고, 노소가 기뻐서 춤추었네. 만년의 문안 처리, 남들은 고생스럽다 하여도 공은 오히려 한숨지으며, 이것으로나마 충성하겠다고 하네. 작록이 조금 오르고 나서는 세상일이 그지없이 되었네. 마침내 길가에서 죽다니, 운명도 너무 나빴네. 비록 운명은 나빴어도, 그 몸만은 고결하였네. 오늘날의 혼미한 사람들 살아 있어도 즐겁지 않다네. 핍박하는 명령을 공봉하려다 모욕과 질책도 감수하니 공과 비교하여 볼 때 누가 잃고 누가 얻었는가? 죽음의 길 함께 가서 황천 깊이 갇히고 마는데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유감이냐고 공은 응당 자위하겠지. 더구나 훌륭한 아들 있어 공의 풍채 잘 이어받았고 손자와 증손자들 역시 학문 품행 게을리 하지 않네. 이것을 일러 복을 탔다 하지, 하늘의 정한 이치 틀림없네. 나의 비문 처음서 끝까지 백세를 두고 풍마 우쇄 없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