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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충주성과 충주산성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7. 2. 20. 16:47

 

충주성과 충주산성에 대하여

 

고려역사에 나타나는 고려 대몽항전의 승전기록은 미미하다.  고려 대몽항전은 몽고군과 싸우기보다는 산성에 칩거하여 방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주지역의 대몽항전은 다른 지역과 달리 1253년 부터 1258년 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여 여러 차례의 승전기록을 남긴다. 1231년 몽고군의 1차 침입 시에 몽고군이 충주에서 패하여 철군한 것은 아니지만, 충주에서 남하하지 않고 철군하게 된다. 몽고군이 2차 침입한 1232년 9월에는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휴가 살례탑을 활로 쏘아 죽이면서 몽고군이 철수한다.  1236년 몽고군이 3차 침입한 9월에는 송문주 장군이 죽주산성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몽고군은 1238년에 동경(경주)까지 유린하여 황룡사탑을 불태운다. 1231년 부터 1249년 까지 5차례에 걸친 몽고군의 침입으로 섬을 제외한 고려의 전국토가 전화를 입는다.

몽고군의 6차 침입은 고려가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아 1253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대몽항전은 명장 김윤후의 분전으로 승리를 거두어 국원경으로 승격되지만, 1256년 4월에는 몽고군에게 충주성과 충주산성을 점령 당하고, 충주민은 충주성과 충주산성을 떠나 월악산에 있는 월악신사로 피신한다. 그 후로도 박달현에서 전승을 올리지만, 고려는 몽고에게 항복하고 1270년에 개경환도를 한다.  고려 대몽항전에서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항전은 고려가 몽고군에게 끈질기게 저항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대몽항전 승리가 한나절 만에 끝난 임진왜란 충주전투보다도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이는 조선의 건국에 따라 고려의 역사를 말살시킨 것도 있지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를 노비 취급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관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임진왜란 충주전투의  패장인 신립과 대의명분만 앞세운 임경업을 충주를 빛낸 명헌으로 추대하는 것이다.

 

1)충주성의 양반별초와 노군잡류별초

 

충주에서 벌어진 대몽항전의 시작은 몽고군과의 싸움보다는 양반별초군과 노군잡류군과의 힘겨루기처럼 보여진다. 고려의 무신정권이 지방에 관리와 장수를 책임자로 파견하였지만 고려의 대몽항전은 정규군이 아닌 지역민들에 의한 저항이 특색이다. 고려사절요에서 1231년 몽고군의 1차 침입 시에 우종주는 충주부사로 나타난다. 하지만, 우종주는 몽고군이 충주에 들어오자 충주성을 버리고 도망간 인물이다.  우종주 뿐만 아니라 판관 유홍익과 양반 등도 도망가고, 노군잡류가 남아서 몽고군에 대항한다. 몽고군과의 교전에서 전과는 나타나지 않지만, 노군잡류가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철수한 후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망갔던 충주의 관원들이 돌아와서 노군들과 충돌하여 노군들이 난을 일으키지만 안무별감 박문수가 이끈 중앙군에 의하여 진압된다. 1232년 정월에 노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노군도령 영사 지광수가 교위가 되고, 중(스님) 우본이 대원사 주지가 되었지만, 1232년 8월에 다시 벌어진 노군의 난으로 인해 우본도 죽임을 당한다,  우본은 왜 죽임을 당했을까 ? 그리고, 충주부사 우종주가 무슨 공을 세웠길래, 대림산성에 종주바위라는 민담이 전해질까 ?  충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가 아니라, 종주바위가 민담으로 전래되는 것은 우종주의 후손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임진왜란 충주전투에 전사한 신립, 김여물, 이종장이 전사자에 대한 국가적 예우에 비하여 특별히 추증된 것도 인조반정으로 공신이 된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2)1253년 충주산성 전투에 대하여


몽고군의 6차 침입에 따른 충주지역의 대몽항전에서 1253 년 10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충주산성 전투는 충주성의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의 지휘 아래 70여일 동안 이루어 졌다. 충주산성 전투는 몽고장수 야굴이 전투 중에 병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아모간과 홍복원이 지휘하여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충주산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몽고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몽고군을 철수케한 요인이 되었다. 김윤후는 처인성에 이어 충주산성에서 승리하여 대몽항전의 명장으로 떠오른다. 1253년 충주산성의 승전으로 인하여 1254년 1월에 몽고군을 이끌었던 고려의 역신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그 가족들을 처형하였으며,  2월에 천룡성 별감 조방언과 황려 현령 정신단을 귀양보내고,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를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삼고, 전공이 있는 자와 관노와 백정도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4월에는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고려시대의 3경은 서경(평양), 남경(양주), 동경(경주)을 이르는 것인데,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한 의미는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중원경이었던 옛명성을 회복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몽고군은 고려가 강화도에서 출륙하지 않으므로 재출병하여 1254년 9월에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지만, 돌풍과 비가 쏟아질때, 산성의 군사가 반격하여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1254년 10월에는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물러난다. 1255년 10월에는 몽고병이 대원령을 넘다가  충주의 정예군사에게 1천여 명이 사살된다. 1256년 4월에는 몽고병이 충주성을 도륙하고,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이 월악신사로 올라갔는데,  돌풍과 폭우로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1258년 10월에는 충주별초가 박달현에서 몽고군을 기습하여 포로와 우마와 병기를 빼앗는다. 하지만 고려의 대몽항전은 1259년 고려 고종의 사망과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1270년에 개경환도와 더블어 막을 내린다. 몽고군의 6차 침입으로 1253년 10월에 시작하여 몽고군의 7차 침입으로 1256년 4월에 몽고군이 충주성과 충주산성을 점령할때 까지 2년 6개월 동안 계속된 충주산성 전투는 고려의 대몽항전에서 가장 큰 승전기록일 것이다.

 

 

대림산성 북측성벽

 

3)충주산성과 대림산성에 대하여

 

고려의 대몽항전에 나타나는 충주산성은 대림산성으로 추정한다. 충주산성에서 "충주"란 명칭은 특정한 산성일수도 있고, 충주성에서 관할하는 산성일수도 있다. 충주산성의 위치는 아직까지도 논란꺼리다, 다수의 의견은 충주산성을 대림산성으로 보고있지만, 그에 관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된 적이 없다. 그리고, 대림산성은 산성의 길이가 5.0KM이다. 거대한 포곡식 산성을 대몽항전 기간 중에 축조했다는 것도 의문에 쌓여있다. 조선초기에 대림창과 대림산성 대림봉수가 나타난다. 그리고 대림산성 지표조사에서 수집된 고려시대의 유물 등이 있기는 하지만, 산성의 정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질 않아 신라말기에 축성된 것을 전란 중에 재축성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충주에 잔존하는 산성 중에서 대몽항전에 나타나는 천룡성(보련산)과 월악신사(월악산)가 있는 덕주산성을 제외하면 남산성, 장미산성, 대림산성, 와룡산성, 용관동 산성, 문주리 산성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1253년 10월에 벌어진 70여일 간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산성과 9월의 폭풍우에 유리했던 산성 등을 고려하여 충주산성을 대림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축성된 남산성과 장미산성은 고려시대에 전쟁을 치룬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려가 수많은 신라의 산성들을 대몽항전 기간 중에 보수하거나 재축성하여 사용하지 못한 것은 고려의 조직이나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관동 산성이나 문주리 산성은 규모도 작고 테뫼형 산성이기에 군사들이 장기간 농성할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고산사가 있는 와룡산성은 대림산성과 비슷하지만 충주성에서 거리가 멀어 연계성이 떨어진다. 와룡산성은 1255년 10월에 벌어진 대원령 전투와 1256년 4월에 월악신사로 피신한 고려군이 입보하여 저항을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충주지역의 산성 중에 대림산성과 보련산성과 와룡산성은 비슷한 시기에 축성된 것처럼 매우 거칠게 성돌이 쌓여진 것들을 볼수 있다. 1231년 몽고군의 1차 침입 후 1253년 10월 까지 처인성 전투에서 활약한 김윤후가 충주산성 별감 낭장이 되어 충주민과 함께 충주성과 충주산성을 정비하고 재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잘 축성된 산성들이 대몽항전이나 임진왜란 때 사용되지 못한 것도 당시의 상황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곽을 보수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영월의 태화산성, 원주의 영원산성,  월악산 덕주산성의 내성, 괴산의 미륵산성 뿐만 아니라, 상주의 백화산성에 잔존하는 성벽들도 대림산성과 유사하다. 하지만, 대림산성은 거칠게 재축성되어 있지만, 성벽하부나 북문 치성터 인근에 잔존하는 성벽을 보면 신라시대에 축조한 산성처럼 견고하고 치밀하게 축성되어 있다. 고려의 대몽항전에서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위치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세종 지리지에 충주읍성은 석성으로 길이가 680보로 기록되며, 고려의 대몽항전 초기에는 충주읍성인 충주성이 비록 작지만 견고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림산성의 입구인 동문은 달천강이 홍수로 물이 넘치면 외부와 단절되는 지형이다. 이는 몽고의 7차 침입에서 1254년 9월에 돌풍과 비가 쏟아질때, 대림산성의 군사가 동문 앞에 잔류한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 아닌가한다. 충주산성 공성전에서 고려군과 몽고군의 전과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성이 함락되지않고 몽고군이 후퇴했다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전황은 1254년 9월에 차라대가 이끈 몽고군이 충주산성과 상주산성에서 퍠하긴 했지만, 1254년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4) 다인철소와 달천에 대하여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지리지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익안현과 다인철소가 나타난다. 하지만,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과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충주디지털문화대전을 비롯한 충주의 향토자료에는 다인철소민들이 유학산성에 싸운 것처럼 추정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대몽항전의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충주일대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를 승리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대몽항전의 고찰에서 몽고군의 전략전술이나 고려의 정치상황을 무시한 채  자화자찬하는 향토사를 썼기 때문이다. 고려의 대몽항전 기간 중에 몽고군이 충주철산의 철을 확보하거나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철기소를 운영했다는 기록도 없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힌반도 내에서는 철광산을 확보하기 위해 충주철산이 필요하여 삼국(백제, 고구려, 신라)이 충주철산을 지배하기 위해 싸웠지는 모르지만, 몽고군의 입장에서는 충주철산이 철과 무기를 확보하는 거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주지역의 유적분포에서도 철광산과 철기소 등에 관련된 곳도 유학산성보다는 달천 변에 있는 용관동 산성 주변에 산재한다. 특히 용관동 산성은 고려시대의 고분군과 두정리의 고분에서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곳이다.  특히 용관동 산성 주변인 산정마을이나 만적리 일대는 일제 강점기처럼 철을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노천이나 너덜지대에서 철광석을 채취하는 것이다. 익안현에 있었던 다인철소는 용관동 산성 일대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1255년(고종42년)에 익안현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아 1253년 12월 충주산성의 승전에 의한 국원경 승격에 따른 후속조치이거나, 1254년 9월에 있었던 충주산성 승리에 의한 공적이 아닌가한다.
달천(達川)의 지명유래에서 달(達)에 대한 해석도 무수히 많다. 고려 말에 차(茶)를 좋아하는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은 충주(忠州)의 달천수(達川水)를 제일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앞선 기록인 고려사절요에서 서기 1232년(고종 3년) 8월과 9월에 충주노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의 기사에 달천(達川)이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달천(達川)의 다른 이름을 덕천(德川) 또는 달천(獺川)이라 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일화로  달천의 유래가 변질된다. 달천의 유래가 "달다."라는 의미도 감물내미(甘勿內彌)의 감(甘)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물내미(甘勿內彌)의 감(甘)은 차자표기에 따른 표기일 뿐이다. 달천이 덕천(德川) 또는 달천(獺川)으로 쓰여진 시기는 한글이 창제되면서 용비어천가의 표기처럼  대천(큰내 또는 큰개울)에서  대(大-큰대)를 덕(德-큰덕)로 풀이하거나, 달천의 특산물인 달(獺-수달)로 풀이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달천(達川)에서 달(達)에 대한 해석 중에서 다인철소와 연관되는 지명들을 열거하면 "다인현(多仁縣-경북 의성), 다물(多勿-고구려의 옛땅, 국내성), 감물(甘勿-괴산 감물내미), 인담(仁潭-가금면 반천),  미을성(未乙省-국원성의 옛지명)" 등이 있다. 열거한 지명들은 물가 또는 강가에 있는 벌판이나 구릉지에 있는 곳들이다. 익안현이란 지명은 고려의 대몽항전 기간 중에  잠시 존재했던 군현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대소원은 조선시대에 봉수와 역참제도에 따라 형성된 촌락이다. 익안현에 대한 고찰에서 익안현의 관할지역은 현재의 대소원면이 아니라, 군현제에 기준에 따라 달천의 서쪽에 해당하는 신니, 주덕, 대소원 등을 포함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익안현은 일시적인 편제로 인하여 그 위상을 발휘하지 못하고 폐현되어 고려사지리지에서 충주목의 관할지역인 1군 5현에 속하지 못했고, 세종지리지에서도 다른 부곡들과 함께 지(池), 어(魚)의 집단거주지역으로 기록되어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윤후 장군은 승려 출신으로 처인성 전승에 따른 공로를 함께한 부곡민에게로 돌렸으며, 충주산성 전투에서도 신분제도에 연연하지않고, 믿음으로써 싸웠기에 그 공로가 더욱 빛났으며 고려의 명장으로 승승장구했을 것이다. 충주지역에서 벌어진 대몽항전은  30여년이라는 기나긴 전쟁과 70여 간의 치열한 전투는 명분싸움이 아니라,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고려사절요 제16권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신묘 18년(1231), 송 소정 4년. 금 정대 8년. 몽고 태종 3년

 

○ 12월에 몽고 군사가 경성의 4문 밖에 나누어 진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므로 다시 민희를 보내어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화친을 맺었다. 민희가 또 가서 몽고 사자와 함께 왔으므로, 지합문사(知閤門使) 최공(崔珙)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아 접대하였다. 이 때에 살례탑이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하자고 말하였다. 왕이 대관전(大觀殿)의 뜰로 내려가 북면하여 맞으려 하였으나, 몽고 사자가 말리므로 이에 남면하였다. 절한 다음에 잔치하여 위로하고, 금은 그릇과 비단ㆍ모시 등의 물건을 세 원수에게 보내주고, 또 사자에게도 모두 차등있게 주었다. 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보내어 토산물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사람을 보내어 당고(唐古)ㆍ적거(廸巨) 및 살례탑의 아들에게 은(銀) 각 5근, 모시 10필, 추포(麤布) 2천 필, 안첨(鞍韂)ㆍ마영(馬纓) 등의 물건을 보내었다. 정(侹)이 살례탑을 보고 멀리 뜰 아래에서 절하니 대답이 없었다. 정이 음식물을 바치니, 살례탑이 젖술[湩酪] 등으로 대접하였다. 정이 권하는 대로 마시고 먹으니, 살례탑이 크게 기뻐하였다.
○ 몽고 군사가 광주(廣州)ㆍ충주ㆍ청주 등지로 향하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임진 19년(1232), 송 소정 5년ㆍ금 천흥(天興) 원년ㆍ몽고 태종 4년

 

○ 봄 정월에
○ 충주의 관노(官奴)가 난을 일으키니, 재ㆍ추가 최우의 집에 모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주(州)의 판관 유홍익(庾洪翼)이 사자를 보내어 회유할 것을 청하니, 곧 주서(注書) 박문수(朴文秀), 전 봉어(前奉御) 김공정(金公鼎)을 임시로 안무별감(安撫別監)을 삼아 보내었다. 이 보다 앞서 주(州)의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가 매양 문부(文簿) 처리에 있어 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고 군사가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는데 의견이 달랐다. 종주는 양반별초(兩班別抄), 홍익은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더니, 몽고 군사가 들이닥치자 종주ㆍ홍익과 양반 등은 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직 노군잡류가 합력하여 쳐서 물리쳤다. 종주 등이 주(州)로 돌아와 관가와 사가의 은그릇을 점검하니, 노군(奴軍)이 몽고 군사가 약탈하여 갔다고 말하였다.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 대여섯 사람이 노군의 괴수를 죽이려고 음모하였는데, 노군들이 미리 알고 서로 모의하기를, “몽고 군사가 이르자 다 달아나 숨어 성은 지키지 않더니, 이제는 어찌 몽고 군사가 약탈한 것까지 우리에게 죄를 돌려 죽이고자 하는가. 우리가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으랴." 라고 하였다. 이에 회장(會葬)하러 오는 사람처럼 꾸민 뒤에 나각을 불어 그의 무리를 모았다. 먼저 주모자(主謀者)의 집에 가서 불을 지르고, 토호(土豪)로서 본래부터 원망을 산 자들을 모두 찾아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 또 경내(境內)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감히 은닉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가족을 멸하리라." 하니, 부인과 어린아이까지도 다 화를 입었다.
○ 안무별감 박문수(朴文秀)는 충주에서 돌아오고, 김공정은 고을에 머물러 평정(平定)되기를 기다리고, 노군도령(奴軍都領) 영사(令史) 지광수(池光守)와 중 우본(牛本) 등이 경성으로 달려가니, 최우가 크게 포상을 하여 광수를 교위(校尉)에 보(補)하고, 우본을 충주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삼았다.


○ 8월에 삼군 병마사를 보내어 충주의 노적(奴賊)을 토벌하였다.

○ 9월에 삼군이 충주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삼군이 처음 달내[達川]에 이르렀을 때, 물이 깊어 건너지를 못하고 막 다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노군(奴軍)의 적괴 2, 3명이 시내의 건너편에서 고하기를, “우리가 주모자의 목을 베어 와서 항복하려 합니다." 하였다. 이자성 등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만 하면 꼭 너희를 다 죽이지는 않으리라." 하였더니, 적이 도로 성중으로 들어가 중 우본(牛本)의 목을 베어왔다. 관군이 머물러 이틀을 진치고 있었는데, 노군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관군이 성에 들어가 나머지 당을 잡아서 모두 죽이고 얻은 재물과 마소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 살례탑이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니, 한 중이 난리를 피하여 성에 있다가 살례탑을 쏘아 죽였다. 국가에서 그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중이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한창 싸울 때에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함부러 과분한 상을 받겠습니까." 하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섭랑장(攝郞將)으로 삼았으니, 이 중이 바로 김윤후(金允侯)이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병신 23년(1236), 송 단평 3년ㆍ몽고 태종 8년

 

○ 9월에

○ 몽고 군사가 죽주(竹州)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쫓아 보냈더니, 다시와서 포(砲)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 군사가 감히 가까히 오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또 인유(人油)ㆍ소나무 홰ㆍ쑥풀 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에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冑)가 전에 귀주(龜州)에 있으면서 몽고 군사들의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익히 보았었다. 때문에 저들의 계획을 먼저 알아차리어, 번번히 여러 사람에게 고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그에 응해야 한다." 하고, 곧 명령을 내려 방비하고 기다렸다. 적이 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성중에서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무술 25년(1238), 송 가희 2년ㆍ몽고 태종 10년

 

○ 여름 윤 4월에
○ 몽고 군사가 동경(東京 경북 경주)에 들이닥쳐 황룡사탑(皇龍寺塔)을 불살랐다.

 

(참고자료 ) 몽고의 침입과 충주관노의 난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계축 40년(1253), 송 보우(寶祐) 원년ㆍ몽고 헌종 3년

 

○ 9월에
○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금당협(金堂峽)에 매복하고 몽고 군사가 다다르기를 기다려 급히 쳐서 15급을 베고 병기와 포로된 남녀 2백여 명을 빼았었다. 그 공으로 대정에 제수되었다.
○ 몽고 군대 십여 기가 갑곶강 밖에서 약탈했다.
○ 몽고 군사가 춘주성(春州城)을 몇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을 두 겹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놓고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성중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소와 말을 잡아 피를 마시는 등 사졸들의 곤함이 말할 수 없었다. 문학 조효립(曺孝立)은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더불어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 안찰사 박천기(朴天器)는 계책은 궁하고 힘은 다해 먼저 성중의 돈과 곡식을 불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리고 목책을 부수고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참호에 막히어 나가지 못해, 한 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다. 드디어 그 성은 도륙당하였다.
○ 고열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야굴의 말에, '국왕이 황제의 조서와 같이 나가서 항복하면 곧 회군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싸우자.' 합니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몽고 군사가 등주(登州)를 포위하고, 드디어 금양성(金壤城)으로 갔다.
○ 태묘(太廟) 9실(室)과 19능(陵)에, 높이는 시호를 첨가하여 올렸다.
○ 몽고 군사가 양근성(楊根城)을 포위하자 방호별감 윤춘(尹椿)이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서 항복하였다. 몽고 군대에서 정예병 6백 명을 뽑아 춘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몽고 군사 3백 명을 머물러 진압하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윤춘이 원주(原州) 방호별감 정지린(鄭至麟)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지린이 듣지 않고 성 지키기를 더욱 굳게 하니, 몽고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갔다.
○ 이현(李峴)이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성(天龍山城)을 치자,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나와 항복하였다.
○ 몽고 군사가 양주(襄州)를 함락시켰다.
○ 재신과 추신으로 치사한 사람과 문무관 4품 이상에게 명하여 군사를 물리칠 계책을 의논하게 하자, 모두 말하기를, “태자가 나가서 항복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하자, 왕이 노하여 승선(承宣) 이세재(李世材)를 시켜 힐문하기를, “태자를 보내면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구에게서 나온 의논인가?" 하였다. 환자 민양선(閔陽宣)이 나아와서 아뢰기를, “최시중도 그 의논을 옳게 여겼습니다" 하니, 왕이 노여움이 조금 풀려 이르기를 "재신과 추신은 잘 도모하라." 하였다. 왕이 또 세재를 최항(崔抗)에게 보내어 묻기를, “누가 몽고 군중에 사신갈 수 있는가?" 하니, 항이 아뢰기를, “이것은 신이 결단할 일이 아니니, 오직 주상께서 재량하소서." 하였다.
○ 야굴 등이 충주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전(前) 소경(少卿) 정수(鄭壽)가 두 아들을 데리고 경산부(京山府 경북 성주(星州)에서 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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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굴이 충주에서 병이 들었다.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렵다." 하니, 야굴이 아모간과 홍복원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정예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갔다. 영안백 희 등이 옛 서울 보정문 밖까지 따라가서 나라에서 주는 예물을 주며 군사 돌리기를 빌자, 굴이 꾸짖어 말하기를, “국왕이 강 밖으로 나와 우리 사신을 맞으면 군사가 물러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몽고대 등 10명을 보내 왔다. 왕이 강을 건너 승천부 새 대궐에서 맞는데, 야별초(夜別抄) 80명이 옷 속에 갑옷을 입고 따랐다. 몽고대가 왕에게 말하기를, “대군이 국경에 들어온 이래로 하루에 죽은 자가 몇천 몇만 명인가. 왕은 어째서 한 몸만 아끼고 만민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가. 왕이 만일 일찍 나와 맞이하였더라면 어찌 죄없는 백성들이 싸움터에서 처참하게 죽는 일이 있었겠는가. 야굴대왕의 말이 곧 황제의 말이요, 나의 말이 곧 야굴대왕의 말이다. 지금부터는 만세토록 화친하여 좋게 지낼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은가." 하고, 드디어 취하도록 마시고 갔다. 왕이 강도(江都)로 돌아왔다.

○ 12월에 제포관에 행차하여 아모간의 사자를 인견하였다.
○ 충주에서 몽고군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때 포위를 당한 지 모두 7십여 일이나 되어 군량이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金允侯)가 군사들을 타일러 격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관노의 호적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자,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몽고군이 차츰 기세가 꺾이어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송 보우 2년ㆍ몽고 헌종 4년

 

○ 봄 정월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안경공 창이 몽고군이 주둔한 곳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갖추어 군사를 먹였다. 아모간이 군사를 되돌려 갔다.
○ 경성에 계엄(戒嚴)을 해제하고, 소경 곽여익(郭汝翼)ㆍ낭장 정자여(鄭子璵) 등을 보내어 몽고 군사가 돌아가는지 돌아가지 않는지를 탐지하고, 겸하여 천룡성과 양근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 이현을 저자에 내어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그 아들 지서(之瑞)ㆍ지송(之松)ㆍ지수(之壽)ㆍ지백(之栢)ㆍ영년(永年) 등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현의 아내ㆍ누이ㆍ사위는 모두 섬에 귀양보냈다. 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사람을 중상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뇌물을 많이 받으니, 사람들이 '은상서(銀尙書)'라고 별명을 지었다. 몽고에 사신가서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에 야굴(也窟)에게 유세하기를, “우리나라 도성이 섬 속에 끼어 있어서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州郡)에서 나오니, 대군이 만일 가을 전에 갑자기 국경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이 위급하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금패(金牌)를 받은 것을 인하여 야굴을 인도하여 와서 항상 몽고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성을 달래어 항복시키고, 또 양근과 천룡 두 성을 협박하여 말하기를, “양산ㆍ동주ㆍ춘주 등 여러 성이 모두 항복을 하지 않다가 도륙을 당하였으니, 빨리 나와 항복해야 할 것이다. 만일 지키는 장수가 허락하지 않거든 곧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라." 하였다. 항복하자 스스로 다루가치가 되어 드디어 그 백성을 거느리고 충주를 쳤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몽고 군사가 돌아가자 현이 왔는데, 그동안 군중에서 노획한 부녀와 재물 보화를 전부 자기 몫으로 만들어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하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등하였다. 그가 형(刑)을 받자, 어떤 사람이 그의 입을 차며 말하기를,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느냐?" 하였다.


○ 2월에 양주와 동주를 강등하여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고 금성(金城)은 감무(監務)가 다스리는 고을로 만들었으며, 천룡성 별감 조방언(趙邦彦)과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을 섬에 귀양보냈다.
○ 정준(鄭準)ㆍ최평(崔坪)ㆍ임경필(林景弼)을 모두 추밀원 부사로,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를 감문위 섭상장군으로 삼고, 그 나머지 전공(戰功)이 있는 자와 관노와 백정도 또한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 몽고 병선 7척이 갈도(葛島)를 침노하여 3십 호를 노획해 갔다.
○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산성과 해도 중에 피난할 만한 곳을 살피고 전토를 참작하여 주었다.

○ 여름 4월에 가물었다.
○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


○ 8월에 경상ㆍ전라 두 도에서 각각 야별초 80명을 보내어 경성을 수위하였다.
○ 갑술에 지진이 있었다.
○ 몽고병이 서북 변경에 들어오고, 척후 기병이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 안경공 창이 몽고에서 돌아왔는데, 몽고 사신 열 사람이 함께 왔다, 왕이 제포에 행차하여 잔치를 벌여 위로했다. 몽고 사신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신 등에게 칙명을 내려 공을 동반해서 보호하며 왔는데, 만리 풍진에 편안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했으나 오늘 다행히 병없이 환국했으니, 우리들이 매우 기쁩니다." 하고, 술잔을 드리기를 펑하자, 왕이 허락했다. 창이 처음 강도(江都)에 이르러서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몽고의 오랑캐 풍습에 물들었으니, 하룻밤이 지난 뒤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간 뒤로 하늘과 부처에 기도하여 어느 날에나 서로 볼까 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잘 돌아왔으니 어찌 밖에서 자겠느냐. 네가 입은 옷을 모두 불태우고, 옷을 갈아 입고 곧 들어오너라." 하였다. 밤이 되어서 창이 들어와 뵈니, 왕가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 몽고병의 척후 기병이 괴주(槐州 충북 괴산(槐山))에 주둔하였는데, 산원(散員) 장자방이 별초를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였다.
○ 대장군 이장(李長)에게 명하여, 몽고병이 주군한 곳 보현원(普賢院)에 나아가서 차라대ㆍ여속독(余速禿)ㆍ보파대(甫波大) 등 원수와 영녕공 준과 홍복원에게 금은 술그릇과 가죽 폐백을 차등 있게 주게 하였다. 장이 돌아와 아뢰기를, “차라대의 말에,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육지로 나오거든 모두 머리를 깎으라. 그렇지 않으면 왕을 붙들어서 돌아가겠다. 만일 하나라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사가 돌아갈 기약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9월에 동계 병마사가 보고하기를, “동진 군사가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 어사 박인기(朴仁基)를 차라대가 주둔한 곳에 보내어 술과 과실과 폐백을 주었다.
○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 겨울 10월에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 문하평장사 최린을 차라대가 주둔한 곳에 보내어 군사를 파하기를 청하니, 차라대가 말하기를, “최항이 왕을 모시고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파하겠다." 하였다.

○ 12월에
○ 최린이 돌아와 아뢰기를, “차라대의 말에, '최항이 왕을 모시고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파하겠다.' 합니다." 하였다.
○ 이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을묘 42년(1255), 송 보우 3년ㆍ몽고 헌종 5년


○ 겨울 10월에 몽고병이 대원령(大院嶺)을 넘으니,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 중 3백 명에게 구정(毬庭)에서 3일간 밥을 먹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병진 43년(1256), 송 보우 4년ㆍ몽고 헌종 6년


○ 여름 4월에 신집평이 몽고병이 주둔한 곳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차라대와 영녕공이 말하기를, '국왕이 나와서 사자를 맞고, 왕태자가 친히 황제께 조회하면 군사를 파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로 물러가겠느냐?' 했습니다." 했다. 그때 차라대와 영녕공은 담양에 둔치고 홍복원은 해양(海陽)에 진치고 있었다. 재신과 추신을 모아 군사를 물리칠 방책을 의논하였으나 계책이 나오자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군사를 물러가게 할 수 있다면 어찌 한 아들과 나가 맞이하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고, 다시 신집평을 시켜 차라대가 주둔한 곳에 보낸 편지에, “대병이 돌아간다면 명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 서북면 병마사가 별초 3백을 보내어 몽고병 1천을 의주에서 쳤다.
○ 대부도 별초가 밤에 인주(仁州) 지경 소래산(蘇來山) 밑에 나와 몽고병 백여 명을 쳐서 쫓았다.
○ 충주도 순문사 한취(韓就)가 아주(牙州 아산(牙山)) 바다 섬에서 배 9척을 가지고 몽고병을 치려고 하다가 적이 반격하여 모두 죽었다.
○ 몽고병이 충주성을 도륙하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이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바람ㆍ비ㆍ우레ㆍ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치지 않고 물러갔다.

 

○ 겨월 10월에 전광재(全光宰)를 보내어 차라대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군사 물리기를 청하였다.
○ 고주(高州)ㆍ화주(和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의주(宜州)ㆍ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에 옮겨가 사는데,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드디어 15주의 사람을 옮기어 죽도(竹島)를 지키게 하였다. 섬이 좁고 우물과 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옮기려 하지 않으니, 집평이 강제로 몰아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옮긴 자는 10명 중에서 2, 3명뿐이었다.
○ 충주 별초가 박달현(朴達峴)에 복병을 설치하고 몽고 군사를 기습하여 포로와 우마와 병기를 빼앗았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무오 45년(1258), 송보우 6년ㆍ몽고 헌종 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