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우벌성(于伐城)과 미을성(未乙省)에 대하여

산골어부 2017. 2. 6. 10:12

 

불골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충주의 고지명이라는 불골(붉골)은 역사서에도 나타나질 않는다. 역사서에도 나타나질 않는 불골(붉골)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  충주의 대표적인 고지명은 고려 말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나타난 국원성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국원성은 고구려의 지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 편에서는 국원성의 옛지명을 완장성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지리편에서는 미을성 또는 탁장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충주 향토사에서 나타나는 범장성(范長城)이나 고려사에 나타난 완장성(莞長城)도 완장성(薍長城)의 표기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선 미을성을 백제의 지명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으며, 백제가 국원성이었던 충주를 지배한 기록이나 기간도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서 짧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충주(중원) 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于伐城)을 충주로 비정하면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지명은 우벌성(于伐城)이 된다. 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도 백제의 영토가 아닌 신라의 영토라는 것이다. 신라 탈해왕과 백제 다루왕 때 나타나는 낭자곡성(娘子谷城)을 충주로 비정하면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우벌성(于伐城)보다 더 오래된 충주의 고지명이 되며, 낭자곡성에 대한 기록에서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을 점령하고, 신라왕을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거부 당했다는 것도 당시의 낭자곡성이 신라의 영토는 아닐지라도 신라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낭자곡성(娘子谷城)과 우벌성(于伐城)을 왜 충주의  고지명으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 하는 의문도 있지만, 역사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질 않는다. 역사의 기록도 역사를 쓴 사람의 관점과 그가 필요한 것만 기록한다. 그래서 역사를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로 만든다. 고구려가 지배한 남한강 유역에 잔존하는 고구려의 지명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 지금부터 일만 년이 흐른 뒤에 남한강 유역에서 국원(?)이라는 비문만이 잔존한다면, 그 때의 역사가는 지금의 충주시를 국원시로 명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국원성도 삼국사기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산골짜기의 부곡인 국원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란 지나간 기록일 뿐이기에 가설을 허락치 않으며, 되돌릴 수도 없다. 향토사의 지명유래에서 벌(伐)이란 개념을 "나무를 베어내다."로 해석하지만, 고지명에서 벌(伐)은 평야나 넓은 구릉 뿐만 아니라, 산골짜기의 작은 평지도 벌(伐)이라고 칭한다. 산간오지 뿐만 아니라, 산자락에도 너른 벌이 존재한다. 즉, 충주호의 목벌이나 신니면의 광벌도 나무를 베어낸 곳이 아니라, 주변에 비해 조금 넓다. 라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에 우리의 문자로 된 기록이 없다. 고유의 문자를 갖고 있는 다른 민족이나 국가도 고대어가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대의 역사를 문자로 기록을 했어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와는 다르기에 그를 해석하기가 어렵다. 이두나 한자로 기록을 남겼더라도 말과 글이 다른 언어체계로 인하여 굴절될 수 밖에 없었다.  한글이 창제된 것도 조선시대의 세종 때이며, 한글이 체계화되어 백성들에게 보급된 것도 서양문물에 따른 교육체계가 정착된 근대사이다. 그로 인하여 고유의 지명은 있었지만 가차된 문자로 굴절되어 잔존할 뿐이다. 한글로 표기된 용비어천가에 나타난 지명들도 본래의 지명이라기보다는 한자로 표기된 지명들을 한글발음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글로 기록됐다고 하더라도 한글의 변화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과는 발음이나 의미가 다를 수 있다. 또한 한글학자들이  음운체계나 방언들을 고찰하여 제시하는 지명들도 마찬가지다.

 

우벌성과 미을성이란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국원성의 고지명을 완장성(薍 : 물억새 완/달래뿌리 란)이라 하고, 탁장성과 미을성이라고도 기록하는데, 일부의 향토사에서는 국내성(國內城)의 다른 지명인 불이성(不而城) 또는 불내현(不耐縣)을 근거로 불(不)을 불(붉다.)로 해석하거나,  미을성(未乙省)의 미(未)를 오기로 간주하여 붉을 주(朱)로 대체하여 미을성(未乙省)을 주을성(朱乙省) 또는 "붉골"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을 위나암성 또는 불이성(不而城)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국내성애 대한 해석논란은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국(國)과 불(不)에 대한 표기를 충주의  고지명인 국원성(國原城)에 적용하면 불골이 된다. 하지만, 국내성과 불이성 또는 불내현이란 지명은 "붉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벌판 또는 들판에 형성된 촌락으로 목책 또는 성(城)으로 둘러싼 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을성(未乙省)을 주을성(朱乙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미을성(未乙省)에서 미을(未乙)을 물(水) 또는 미르(龍)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을(未乙)도 가차된 지명이기에 그에 대한 해석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미을성(未乙省)의 유래를 물(水) 또는 미르(龍) 등으로 해석하는 것도 당시의 언어체계보다는 현대적 의미에서 유추한 것이 아닐까한다. 고구려가 드넓은 만주벌판을 지배한 나라이긴 하지만,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험준한 산악지대의 작은 분지와 산골짜기일 뿐이다.

 

 

고구려 국원성에서 국(國)에 대한 해석 뿐만 아니라, 충주(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于伐城) 또는 벌성(伐城)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즉 국(國)과 우벌(于伐)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벌성(于伐城)과 미을성(未乙省)은 본래의 지명을 가차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과 음이 변형된 것이기도 하지만 기나긴 언어의 변천으로 그 진위를 분별하기가 어렵기에 수많은 추론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미을성(未乙省)은 성(城)이 아니라, 성(省)으로 기술하고 있다. 충주의 옛지명이라고 전래되는 사천성(四川省)을 충주천의 옛지명인 사천(沙川)과 충주성(忠州城) 등으로 합성하면 사천성(沙川城)으로 표기될 수도 있으며, 충주(중원) 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于伐城)도 우벌성(于伐城)인지 벌성(伐城)인지에 대한 견해도 다를 수 있다. 우(于)를 "크다" 라고 풀이할 수도 있고, 울타리란 의미의 "우리"로 추정할 수도 있다. 벌성(伐城)에서 벌(伐)을 국내성의 옛지명인 불이성 또는 불내성과 같은 의미로 풀이하면 불성(不城)도 되고, 국성(國城)도 된다. 우벌성(于伐城)과 국원성(國原城)이 같은 지명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충주(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 우벌성(于伐城) 또는 벌성(伐城)을 경주로 비정할 수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우벌성이 나타나질 않는다. 다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금성 또는 월성을 서라벌과 같은 의미로 우벌성 또는 벌성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고구려비가 지명을 달리 표기한 것은 언어체계와 기록을 남긴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미을성(未乙省)과 사천성(四川省)에서 성(省)이란 개념은 자연발생적 촌락이 아니라 행정중심의 촌락을 의미하기에 산성(山城)보다는 평지의 읍성(邑城)일 것이다. 미을성(未乙省)과 사천성(四川省)에서 성(省)과 미을성(未乙城)과 사천성(沙川城)에서 성(城)은 같은 의미로 추정할 수도 있다. 백제 시조인 온조왕이 축성하여 개로왕 때까지의 왕성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을 고찰할때, 충주의 남산성을 백제의 구이신왕 때 축성한 범장성(范長城)으로 추정하는 향토사학은 민담설화에 의한 허구일 것이다. 그리고, 안림동의 어림에 대한 민담설화도 안림동에 있던 의림사가 와전된 일화일 것이다. 충주의 고지명인 불골과 우벌성과 국원성에서 불(不) = 벌(伐) = 국(國)은 벌판 또는 들판에 형성된 촌락으로 목책 또는 토축으로 둘러싼 성(城)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이 설치한 국원소경 이전의 국원성은 산성이라기 보다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과 유사한 남한강변의 토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벌성과 미을성의 위치를 비정하거나 지명의 유래를 해석함에 있어서 수많은 추론이 난무하는 것은 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료나 유적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고국원왕의 국원(國原)과 국원성의 국원(國原)을 동일 시하면 고구려의 왕성이 충주가 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원왕은 국강상왕이라고도 하고, 이름은 사유 혹은 쇠(釗)라고도 한다. 쇠(釗)를 해석하면 고국원왕은 활(弓)의 일종인 노(弩)를 잘 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호태왕이나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한 후에  고국원왕의 한을 풀기 위해 고국원왕의 시호를 따서 국원성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조선조의 기록에서도 선대왕의 호칭과 같은 문자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한자로 대체한 사례는 흔하게 나타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본명이 담덕(談德)이며,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로 인하여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전하며,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이다. 고국원왕과 광개토태왕을 국강왕 또는 평원왕으로 부르지 않는다. 고구려왕의 호칭은 왕이 죽은 뒤에 묻힌 곳을 기준으로 명명되는데, 국천왕과 국원왕과 국양왕 등에서 국(國)은 국내성에 있다는 뜻이며, 내와 들과 언덕 등에 무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대왕과 후대왕을 구분하기 위하여 호칭 앞에 고(古)를 표기하여 구분한 것이다.

 

역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 충주의 고지명인 붉골, 사천성, 범장성, 봉현성 등의 민담과 설화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기보다는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서나 관련 논문들에서 잘못된 자료를 근거로 왜곡하는 사례도 너무 흔하다. 우리는 역사를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오류를 범한다. 역사를 쓰는 사관들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쉽지는 않다. 하물며, 그를 해석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가 모두 진실은 아닌 것처럼 그 진위를 가려내야 하는 것이다. 탁장성과 미을성 등은 같은 시대에 있었던 국내성과 풍납토성과 월성 등과 비교하면 변방의 작은 읍성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 진흥왕 이전에 존재한 국원성은 장미산에 잔존하는 산성일 수도 있지만, 그를 단정할 수도 없다. 원삼국시대의 역사는 아직도 미궁에 쌓여 있다. 물론 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된다면 그 진위는 쉽게 밝혀지겠만은 그를 위해 문화유적들을 발굴하는 것도 유적파괴가 될 수 있기에 섣부른 발굴조사나 복원을 하기보다는 훼손을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관광자원을 위해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도 역사왜곡의 일부분이다. 복원된 산성을 답사하다가보면 잘 쌓여진 성벽보다는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돌무더기가 더 애처롭게 보인다.

 

(참고자료)

三國史記 第 十八卷(삼국사기 제 18권) 高句麗本紀 第 六(고구려본기 제 06)

故國原王(고국원왕)

故國原王(고국원왕) : 

 

고국원왕은 <331~371 재위기간 40년>

一云國岡上王(일운국강상왕) :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諱斯由(휘사유) :  이름은 사유이다.

或云釗(혹운쇠) : 혹은 쇠(釗)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地理四(지리사) 

 

自朱蒙立都紇升骨城(자주몽립도흘승골성) :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歷四十年(력사십년) : 40년이 지나서

孺留王二十二年(유류왕이십이년) : 유류왕 22년에

移都國內城(이도국내성) :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或云尉那巖城(혹운위나암성) : [혹은 위나암성이라 하고

或云不而城(혹운불이성) : ) 혹은 불이성이라고도 한다.]

 

漢山州(한산주) :

한산주

國原城(국원성) : 국원성

(一云未乙省(일운미을성) : [미을성 또는

一云託長城(일운탁장성) : ) 탁장성이라고도 한다.]

 

 

三國史記 第 四卷(삼국사기 제 04권)  新羅本紀 第 四(신라본기 제 04)

제24대 眞興王(진흥왕)  <540~576  재위기간 36년>

 

 

 

 

 

 

 

 

十八年(십팔년) : 18년,

以國原爲小京(이국원위소경) :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廢沙伐州(폐사벌주) : 사벌주를 없애고

置甘文州(치감문주) : 감문주를 설치하였다.

以沙湌起宗爲軍主(이사찬기종위군주) : 사찬 기종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廢新州(폐신주) : 신주를 없애고

置北漢山州(치북한산주) :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十九年春二月(십구년춘이월) : 19년 봄 2월,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사귀척자제급육부호민) :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으로 이사하게하여

以實國原(이실국원) : 국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奈麻身得作砲弩上之(내마신득작포노상지) : 내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바쳤으므로,

置之城上(치지성상) : 이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

 

 

三國史記 第 七卷(삼국사기 제 07권)  新羅本紀 第 七(신라본기 제 07)
제30대 文武王 下(문무왕 하)  <661~681  재위기간 20년>

 

 

十三年九月(십삼년구월) : 13년 9월,

築國原城(축국원성) : 국원성

古薍長城(고완장성) : 예전의 난완성·

 

 

동사강목 뷰록 하권 - 불내 화려고(不耐華麗考)
 

 


불내(不耐)와 화려(華麗) 2현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동부(樂浪東部)에 속하고, 불이현(不二縣)은 도위(都尉)의 소재지였다. 불이(不二)는 또한 불내라고도 칭한다. 이른바 영동(嶺東) 7현(縣)이란 바로 지금의 철령(鐵嶺) 내외의 땅이니, 불내ㆍ화려 2현은 아마 옛날 이추(夷酋)의 호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강등시켜서 현(縣)으로 만든 것이리라.
한 광무(漢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동부도위를 없애고 영동의 땅을 떼어 그들의 괴수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았으므로 이에 예후(濊侯)와 불내후(不耐侯)란 칭호가 생겼다.
신라기에,
“유리왕(儒理王) 17년 건무(建武) 16년 화려와 불내 사람이 북쪽 지경을 침범하자 맥국(貊國)의 괴수가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그를 깨뜨렸다.”
하였으니, 그 땅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서》에,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 고구려 태조왕 66년 고구려가 현도를 침범하고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하였다.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화려(華麗)가 요계(遼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화려는 낙랑 동부이고 현도는 요동의 동부에 있으니, 남북이 절연(截然)한데, 어찌 서로 가까울 리가 있겠는가? 《후한서》에서 운운한 것은 현도를 침범하고 또 화려를 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위(魏)의 정시(正始) 연간에 불내후(不耐侯)와 예후(濊侯)가 항복하였으며 위(魏)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치고, 동천왕(東川王) 20년 숙신(肅愼)의 남쪽 지경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功)을 기록하고, 환도성(丸都城)과 불내성(不耐城)에도 공을 새겼다.

 

동사강목 뷰록 하권 - 국내위나암성고(國內尉那巖城考)
 

 


유리왕(瑠璃王)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 지금의 동구산성자(洞溝山城子)이다)을 쌓았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는,
“이산군(理山郡) 북쪽 2백 70리에 올랄산성(兀剌山城)이 있다. 압록(鴨綠)ㆍ파저(婆猪) 두 강 사이, 큰 들 가운데 있는데 사면이 벽처럼 높이 솟았다.”
하고,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19년 조에,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올오첩목아(李兀吾帖木兒)가 올랄산성에 의거하였다.”
하고 유계(兪棨)는,
“이것이 옛날의 위나암성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음(漢音)에 ‘兀剌’과 ‘尉那’가 음이 같으니 그 말이 근리하다. 《삼국사기》에 보인 이적(李勣)의 주문(奏文)에,
“압록강 이북의 항복한 성(城) 중에 국내성(國內城)이 그 하나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여기까지는 17역(驛)이다.”
하고, 《통전》에도,
“압록강은 국내성 남쪽을 경과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한다음 서남쪽으로 서안평(西安平 지금의 안평하(安平河) 유역)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두 설에 의하면, 그것이 압록강 북쪽에 있어 올랄성(兀剌城)으로 전하였음이 분명하다. 염난수는 곧 파저강이니, 비류고(沸流考)에 보인다. 국내(國內)라고 한 것은 아마 졸본 기내(畿內)의 땅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리라. 교시(郊豕)가 놓여 달아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얻었으니, 돼지가 아무리 달려서 도망했다 한들 능히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천 리나 백 리의 먼 거리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국내 위나암성이 졸본과 서로 가까웠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인주(獜州)를 국내라 한 것은 아마 후에 따로 둔 것이리라. 《삼국사기》에,
“《괄지지(括地志)》에 국내를 불내성(不耐城)이라 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한서》 지리지의 낙랑 동부(樂浪東部)에 있는 불이현(不而縣)은 딴 이름이니, 이것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주D-001]교시(郊豕)가 놓여 달아남으로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조에 “교시(郊豕 :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놓여 달아나매, 왕이 희생(犧牲)을 맡은 설지(薛支)를 시켜 뒤를 쫓아가게 하여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잡았다.” 하였다.

 

 다산시문집 - 논(論)
 
 
고구려론(高句麗論)
 

 


고구려(高句麗)는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한 지 40년 만에 졸본(卒本)은 곧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불이성(不而城)곧 위나암성(尉那巖城)이다. 으로 옮겼고 여기서 4백 25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이때는 군사력이 매우 강성하여 국토를 널리 개척하였다. 한(漢) 나라와 위(魏) 나라 때 중국이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침략해 왔으나 이길 수 없었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고 여기서 나라를 누린 지 2백 39년 만에 멸망하였다. 비록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城郭)이 견고했으나 마침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압록강(鴨綠江) 북쪽은 기후(氣候)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고(蒙古)와 맞닿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용감하다. 또 강한 오랑캐와 섞여 살기 때문에 사면(四面)으로 적국의 침입을 받게 되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했었다. 이것이 나라를 장구히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이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과 청천강(淸川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산천이 수려(秀麗)하고 풍속이 유연(柔軟)하다. 그리고 밖으로 견고한 성(城)과 큰 진(鎭)이 겹겹으로 방호(防護)하고 있는바, 백암성(白巖城)ㆍ개모성(蓋牟城)ㆍ황성(黃城)ㆍ은성(銀城) ㆍ안시성(安市城) 등의 성이 앞뒤로 잇달아 바라보이고 있다. 이러니 평양 사람들이 어찌 두려움이 있었겠는가.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적(敵)에게 성(城)을 내어주고 항복했으나 이를 문죄하지 않았고, 개소문(蓋蘇文)이 군사를 동원하여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를 금지하지 않았고,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가 탄환만한 작은 성으로 당(唐) 나라의 백만 대군을 막았으나 이를 상주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평양을 믿은 때문이다.
아, 평양은 믿을 수 있는 곳인가? 요동성(遼東城)이 함락되면 백암성이 위태하고, 백암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이 위태하고, 안시성이 함락되면 애주(愛州)가 위태하고, 애주가 함락되면 살수(薩水)가 위태하다. 살수는 평양의 울타리인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가죽이 벗겨지면 뼈가 드러나게 된다. 이런데도 평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진(晉) 나라와 송(宋) 나라는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넌 뒤 천하를 잃었으니 이는 거울삼아 경계해야 될 중국의 전례(前例)이고, 고구려는 남쪽으로 압록강을, 백제(百濟)는 남쪽으로 한강(漢江)을 건넌 뒤 나라를 잃었으니 이는 귀감으로 삼아야 할 우리나라의 전례이다.
경전(經傳)에는,
“적국(敵國)으로 인한 외환(外患)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
했고, 병법(兵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을 곳에 처해야만 살게 된다.”


 

[주D-001]불이성(不而城) : 불내성(不耐城)으로 곧 국내성(國內城)을 가리킨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벌찬(伊伐飡))]

17관등 중의 제1등으로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