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수계지도]
국립충주박물관 추진에 대하여
한국사에서 중원문화권의 영역은 ?
원삼국시대 이전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정립되질 않아서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역사교과서에도 제대로 기술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한국사 교사들까지도 고대역사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로 정립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역사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정교과서 논쟁에서도 고대사보다는 근시안적인 근.현대사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아전인수식 정치놀음만 벌이고 있다. 고대사에서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등장히는 군소국들 중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한 삼국을 제외하고는 유적지나 유물이 있어도 문헌이 없다는 이유로 간과해버린다. 물론 고대사 연구가 쉽지는 않겠지만, 국가나 학계차원에서 고대사를 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유물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하찮은 잡귀까지 이야기하지만, 정작 유적지의 시대적 배경이나 성격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데도 역사학계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관계기관이나 단체의 요구에 따라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너무도 많다. 이는 향토사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충주의 역사는 국원성에서 시작된다. 고대역사에서 한강의 본류인 남한강 유역의 문화는 한강 지류인 북한강 유역의 문화와도 다르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문화와도 다르다. 이는 삼국시대 이래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색이지만, 그보다 앞선 삼한시대로 올라가면 수많은 군소국들이 마한 54국, 진한 6국 또는 12국, 변한 6국 또는 12국으로 존재하며, 이는 현재의 자치행정구역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도 잔존한다. 특히 남한강 유역인 중원문화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마한 또는 백제 유물로 간주되는 것은 지역의 역사성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달천 유역과 금강의 미호천 유역은 한남금북정맥으로 분리되며, 중원문화권은 충북 북부와 강원 남부 뿐만 아니라, 경기 남동부의 여주.이천지역 등을 포함하며, 백두대간의 죽령과 계립령의 인접지역도 지배세력의 변화에 따라 중원문화권에 포함된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지명에서도 잘나타나며, 그 중심에는 고구려의 국원성이 존재한다. 고구려의 국원성은 신라의 중원경으로 이어지며, 고려시대 부터 충주로 지명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립충주박물관"을 추진하면서 중원문화재의 역사자료와 연구 결과를 전시하는 박물관의 소장물들도 이에 부합될 수 있어야 한다. "국립충주박물관"을 추진하면서 현재의 행정단위인 충주에 국한된 박물관이기 보다는 중원문화권의 역사와 문화를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명칭도 충주라는 작은 행정단위가 아니라, 남한강 유역을 포함하는 국원 또는 중원이라는 지명을 표기하여 인접한 자치단체의 역사까지도 포용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사진]
고유지명에서 국원과 중원이란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 ?
고구려의 국원성은 고구려의 지명 중에서 한강유역에 존재하는 유일하게 표기된 성(城)이다. 국원성은 단순한 군사용 성(城)이 아니라, 통치의 중심을 뜻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국내성과 유사한 의미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지명과 현존하는 유적들을 고찰해보면, 국원성의 중심은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이 있는 충주시 가금면 일대로 추정되며 그 영역은 한강수계와 금강의 미호천과 낙동강 상류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점령한 지역으로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에 진출한 지역과 유사하며, 이는 국원성을 중심으로한 충주고구려비와 고구려의 옛지명들이 그를 말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타난 고구려 지명들은 삼국사기 지리편에 기록된 것과 유사한데, 이는 남한강 유역과 금강의 미호천 상류 지역인 진천과 음성 등과 낙동강 상류지역인 봉화, 안동, 청송 등으로 나타난다. 이 기록에서 고구려가 고조선의 멸망으로 형성된 마한과 동예(예국과 맥국)의 영토인 동해안과 인접한 내륙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과 신라 진흥왕이 함경도까지 큰 전투없이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선과 험준한 산줄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원삼국시대 이전의 마한은 백제의 출현으로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을 빼앗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에 따른 유적과 유물까지도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분류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지역의 수많은 군소세력들은 현재에도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보이지않는 기준으로 잔존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행정구역에서도 역사적,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채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지역 간의 마찰로 이어진다. 고서에 기록된 고구려 옛지명들의 지역을 국원성의 관할구역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고구려의 영역을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중원경은 초기에는 국원성과 비슷하나 9주 5소경으로 편제된 이후에는 남한강의 달천과 청미천 유역으로 축소되며, 고려시대 이후의 충주는 충주목으로 더욱 좁아진다. 즉, 고대사에서는 국원 또는 중원이라는 남한강 문화권이지만, 근대사에서는 중앙집권체계에 따른 지방제도로 인하여 충주성 또는 충주읍성으로 제한된다.
또한 충주(忠州)의 충(忠)을 중원을 가차한 중심(中心)이란 뜻으로 해석하여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역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수긍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국원성에서 중원경으로, 중원경에서 충주목으로, 충주목에서 예성으로 축소되는 충주가 아니라, 한강의 남한강 유역을 포함하는 중원 문화권으로 지리적 시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달천(達川)의 유래에서 보듯이 지역의 문인들이 달천을 "달래"라는 아름다운 싯구로 달천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지만, 달천은 본래의 뜻과 달리 "달래내 전설"인 음담패설로 왜곡되어 회자되고 있으며, 우륵과 가야금에서 유래한 금휴포가 있던 탄금대는 충주역사의 최대 치욕인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한식경 만에 퍠한 신립의 무용담과 배수진으로 왜곡시켜 열두대를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분전하다가 전사한 곳으로 미화했지만, 역사의 진실인 패전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기에 "탄금대 사연"이라는 구슬픈 노래가락이 탄금대 공원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모든 것을 남기지는 않지만, 하찮은 지명과 유적에도 진실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중원의 역사는 왜 ! 왜곡되고 있는가 ?
충주탑평리칠층석탑이라는 문화재 명칭을 "충주 중앙탑"이라고 하지않는 것은 탑에 대한 본래 명칭과 건립시기와 성격이 모호하기 때문에 금천탑, 반천탑, 김생사탑 등으로 불렸던 것이다. 금천은 가금면의 옛지명이고, 반천도 안반내란 옛지명이며, 김생사는 명필 김생이 거처하던 사찰이지만, 김생사지가 발견되면서 김생사탑은 오류인 것으로 밝혀졌다. 충주시에서 아름다운 옛명칭은 살미면과 상모면과 노은면일 것이다. 살미면(乷未面)은 사을미(沙乙未)를 변형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명으로 생각하지만 남한강변의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본래 지명을 가차한 독특한 지명들이다. 하지만, 상모면(上毛面)은 고구려의 지명으로 천년의 세월을 이어 왔지만, 왜색이 풍기는 수안보면으로 변경되었으며, 이류면은 대소원이라는 작은 원터로 변경되었으며, 가금면도 탑평리칠층석탑의 속칭인 중앙탑면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자면 충주시란 명칭도 "남한강시"로 개칭하여야할 것이다.
최근에 발굴된 유적지들을 살펴 보면은 호암지의 청동기 유적지와 탄금대의 제철 유적지 그리고, 탑평리의 고대도시 유적지 등 대부분의 발굴지가 충주시의 숙원사업으로 원형을 보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충주의 문화유산은 얼마나 잔존할까 ? 도성이 있었던 경주, 평양, 개경, 서울 등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충주시 내에 잔존하는 유적과 유물은 전무한 상태라고 할 정도이다. 탄금대에 남아있는 유적지도 탄금대 토성 뿐이고, 충주읍성에 남아있는 것도 조선말기의 건조물 뿐이다. 유적과 유물들의 파괴을 자행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 일제강점기에 충주시가지 정비사업으로 충주읍성을 철거한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충주읍성을 재축하면서 인근의 사찰과 유적들을 훼손시킨 사람도 지방의 수령들과 지역의 유지들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발굴된 유적지를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시킨 것도 충주시민들이며, 이를 방관하며 동조한 사람들도 향토사학자들이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문화유산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지만, 전통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여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도 지역민들이 해야할 일이다.
중원역사의 대표적 유적들의 현실은 ?
충주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유물은 충주 고구려비일 것이다. 충주 고구려비는 국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교적 유물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금석문으로 남긴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의 대부분은 매장문화재이기에 골동품 취급을 받는다. 문화재 관리에서도 유적지보다 국보나 보물을 더 중시하는 것은 문화유산을 골동품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역사인식 때문이다. 충주 고구려비는 예성동호회가 1979년에 발견하여 1981년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충주 고구려비에 따른 주변정비사업은 아직도 미궁에 쌓여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의 건립과 같이 진행된 사업은 10 여 년, 발견된지 30 여 년이 흐른 지금도 정비되지 못하고 있으며, 인접한 유적지인 장미산성과 탑평리 칠층석탑, 봉황리 매애불상군, 누암리와 하구암리 고분군 등과 연계되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굴된 탑평리 고대도시 유적지는 세계조정 경기장 조성사업으로 매몰되었으며, 이 일대에 산재한 고분군들은 도굴된 채로 방치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 정비사업은 무엇이 문제일까 ? 그리고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은 왜 외면 당하고 있을까 ? 한마디로 말하면 볼거리도 없고, 고구려에 대한 연구와 고구려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국보란 문화재만 생각했을 뿐, 전시관의 건립 목적이나 운영계획이 없는 전시행정이었기 때문이다.
충주의 대표적인 명승지 탄금대는 중원경의 문화를 꽃피운 3대 명현인 우륵, 강수, 김생의 유래가 서린 곳이지만,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행적을 소개한 문구는 없고, 탄금대기를 비롯한 허접한 기념비와 조형물들만 서있다. 또한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패한 신립장군의 순절비와 순국지지비가 세워져 탄금대를 명승지가 아닌 패전지로 각인시키고 있으며, 탄금대 역사공원화사업은 사유지란 이유로 수십 년째 방치되어 명승지가 아니라 남한강변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조사된 제철유적지도 사유지란 이유로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탄금대에 잔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인 탄금대 토성은 안내판과 보호책도 없이 신립장군 순절비 건립과 특정가문의 묘지관리로 인하여 훼손되어 있으며, 한강의 수운과 역참제도의 중심인 탄금대섬과 금휴포는 탄금대 샛강이 사라지면서 명승지라는 경관과 의미도 상실해버렸다.
충주의 대표적인 전승지 충주산성은 어디일까 ? 충주시에서는 김윤후 장군의 대몽항전지인 충주산성을 충주 남산성으로 홍보하고 있다. 고려시대 대몽항전의 전승지인 충주성과 충주산성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나 발굴조사도 없고, 충주산성으로 추정되는 대림산성은 지표조사를 근거로 전시에 급조된 산성으로 취급되어 사적지로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충청북도 지방 기념물로 분류되어 있을 뿐이다. 대림산성의 규모는 5.0km 정도인데, 5.0km에 달하는 산성의 계획과 축조는 국가적인 대사일 것이다. 남산성은 성의 둘레가 1,145m이며, 면적으로 비교하면 작은 성이다. 또한 군사의 주둔수와 군사물자의 저장능력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충주산성을 남산성으로 여겼던 것은 향토사가 고증보다는 민담설화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충주향토사에서는 정체불명의 유학산성이 전승지로 소개되고, 대몽항전 승전비가 전승지와 관련없는 마즈막재에 설치되어 있다. 대몽항전 충주산성전투에서 보듯이 충주를 지킨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충주의 토착민들이다. 또한 승려 출신인 김윤후와 달리 신립과 임경업 장군이 충주를 빛낸 5대 명헌으로 추대된 것도 충주시민의 뜻이라기보다는 부실한 고증 때문이다.
충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와 건축물은 충주읍성이다. 하지만, 충주읍성의 유적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하는 청령헌과 제금당도 근세에 축조된 건축물이다. 충주읍성 복원사업은 읍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충주성 또는 예성의 주요 시설인 문루와 충주관아를 상징하는 충주사고와 실록각 그리고 객사 등을 재현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초기에 고려시대의 서적들을 보관했던 충주사고의 가치는 기록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이동경로의 역사가 그를 말해준다. 하지만, 충주사고는 임진왜란 충주전투로 인하여 사라졌으며, 충주지역의 문화적 자존심도 충주사고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충주사고는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유일하게 잔존했던 외사고로 추정되며, 충주사고의 복원은 건축물이나 사고지 위치의 중요성보다는 충주사고가 갖는 역사성과 상징성이며, 충주읍성이 대몽항전의 중심이며, 고대문화유산의 기록물들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예성으로 불리웠던 충주읍성이 빛났던 것도 충주사고와 궁실인 실록각이 있었기에 더 권위가 있고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문화재를 복원함에 있어서 원형을 보존한다거나 원형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형을 복원한다는 것은 지나친 순결주의적 발상이다. 그리고, 충주읍성을 복원하자는 것도 충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부각시키자는 것일 뿐이다.
(참고자료) 국보 제102호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참고자료) 보물 제359호인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
충주지역의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 국보 제102호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과 보물 제359호인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는 일제강점기에 충주에서 반출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17호)는 충주댐 건설로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어 있지만,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 자등탑은 없고, 법경대사 자등탑비만 남아 있다. 또한 홍법대사 실상탑(모조품)도 조각공원의 소품처럼 전시되고 있으며, 법경대사 자등탑은 비만 서있고, 홍법국사 실상탑은 비가 없어 두 문화재 모두가 부조화를 이룬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는 무덤은 있고 비석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은 없고 비석만 있는 꼴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현실태이며, 문화재 관리의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개선해야할 향토사학계와 지역민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개천안과 솟대문화를 외치고 있다. 정토사와 개천사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목은 이색이나 양촌 권근의 글에서 개천사가 등장하는 것도 충주사고에 수장되었던 고려시대의 서책들 때문이며, 고려말 도은 이숭인의 시에서 정토산 개천사란 지명과 고려말에 있었던 충주사고가 개천사에 있었다는 기록에서 두 개의 사찰(큰 절과 작은 절)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축당섭필에서 “충주(忠州) 개천(開天) 내촌(內村)에 있는 개천사비(開天寺碑)"라는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개천사가 정토사보다는 후대의 사찰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개천사에 있던 고려왕조실록과 충주읍성에 있던 충주사고 덕분에 고려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전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충주사고에 대한 인식은 극히 미미할 뿐이다.
(참고자료) 건흥 5년명 금동광배-청주 박물관 소장
(참고자료) 충주 의림사 금고 - 청주 박물관 소장
국립충주박물관 추진에 대하여
충주지역의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 외에서는 청주박물관에 소장된 "건흥 5년명 금동광배"와 "의림사가 새겨진 금고" 등에 관한 유물과 충주지역이 아닌 남한강 유역에 산재한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건흥"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쓰던 연호이고, "의림사"는 고려시대의 사찰로 남산성과 어림의 잘못된 설화와 "광불"로 알려진 철불좌상의 비밀을 풀어 줄 유물이지만, 향토사학은 민담과 유물에 집착하여 그 중요성을 깨달치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무용사에 등장하는 능안(能晏)과 포노(砲弩)를 만든 신득(身得)은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일천보를 날아가는 노(弩)를 만든 사찬 구진천(仇珍川)보다도 앞선 진흥왕 때 포노(砲弩)를 만든 나마(奈麻) 신득(身得)에 대한 기사는 소개조차 되질 않는다. 국보 1호인 남대문을 국보로 여기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조선시대의 왕궁인 경복궁보다도 도성의 문루가 국보 1호라는 것은 일반 국민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재청부터도 일제의 잔재를 털어버리지 못하고 그를 관행처럼 따르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란 무엇일까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와 더블어 국립충주박물관의 건립은 중원문화를 정립하고 전시하는데 필요한 시설일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개발논리에 면죄부를 주는 발굴조사를 하고, 국립충주박물관이 그 유물을 전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향토사학계 뿐만 아니라, 지역인사들이 해야할 일은 중원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지난 날의 굴절된 민담과 설화에 의존한 향토사가 아니라, 고증을 통하여 입증된 향토사를 정립하고, 중원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립충주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면서 중원의 역사문화를 정립하지 않는다면, 충주시민은 물론이고, 박물관을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잘못된 중원의 역사를 각인시켜 줄 것이다. 문화재를 복원하고 전시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남아있는 유적도 관리를 하지 못하고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의 대부분도 매장문화재이기에 골동품 취급을 받는다. 국립충주박물관의 건립으로 남한강 유역의 향토사가 재정립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한강 유역에서 충주댐과 충주호가 차지하는 역할처럼 남한강 유역에 있는 타지역 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중원문화권에 속한 문화재까지도 인식하여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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