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인가 ?
사칠신인가 ?
사육신의 명성에 끼워넣기한 사칠신(?).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일(경자)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사옹방(司甕房)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上王)이 창덕궁(昌德宮)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韓明澮)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上王)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上王)과 세자(世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婦翁]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尹師路)ㆍ신숙주(申叔舟)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ㆍ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ㆍ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삼문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났기에 신은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를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폐간(肺肝)을 보는 듯이 하고 있으니, 사실을 소상하게 말하라.”
하고, 명하여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니, 네가 모조리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
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
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하고, 여러 죄수가 나간 다음에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유(李瑜)의 집 정자를 상왕(上王)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하였다. 임금이 윤자운(尹子雲)을 노산군(魯山君)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성삼문은 심술이 좋지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조금 알기 때문에 그를 정원(政院)에 두었는데, 근일에 일에 실수가 많으므로 예방(禮房)에서 공방(工房)으로 개임(改任)하였더니, 마음으로 원망을 품고 말을 만들어내어 말하기를, ‘성왕께서 이유(李瑜)의 집에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가만히 불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제 방금 그를 국문(鞫問)하는 참입니다.”
하니, 노산군이 명하여 윤자운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과 박쟁(朴崝)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김문기(金文起)ㆍ성승(成勝)ㆍ박쟁(朴崝)ㆍ유응부(兪應孚)ㆍ권자신(權自愼)ㆍ송석동(宋石同)ㆍ윤영손(尹令孫)ㆍ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ㆍ유응부ㆍ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ㆍ유응부ㆍ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관가(觀稼)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ㆍ좌참찬 강맹경(姜孟卿)ㆍ좌찬성 윤사로(尹師路)ㆍ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ㆍ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ㆍ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ㆍ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원전】 7 집 134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과학-천기(天氣) / 왕실(王室)
[주-D001] 이유(李瑜) : 금성 대군(錦城大君).[주-D002] 좌의정(左議政) : 한확(韓確).[주-D003] 우의정(右議政) : 이사철(李思哲).[주-D004] 별운검(別雲劍) : 운검(雲劍)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武官)의 임시 벼슬.[주-D005] 관가(觀稼) : 임금이 농작물의 작황(作況)을 돌아보던 일.
정조 15년 신해(1791) 2월 21일(병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 대군 이유(錦城大君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ㆍ화의군ㆍ한남군ㆍ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 갑술년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ㆍ원호(元昊)ㆍ이맹전(李孟專)ㆍ성담수(成聃壽)ㆍ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ㆍ한남군ㆍ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ㆍ남효온ㆍ이맹전ㆍ조여ㆍ원호ㆍ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ㆍ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ㆍ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좌의정[영의정] 김종서, 영의정[좌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 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와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ㆍ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ㆍ어ㆍ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ㆍ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ㆍ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ㆍ화의군ㆍ한남군ㆍ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 갑술년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ㆍ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ㆍ송현수(宋玹壽)ㆍ어(?)ㆍ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ㆍ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ㆍ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ㆍ사의척(四懿戚)ㆍ삼상신(三相臣)ㆍ삼중신(三重臣)ㆍ양운검(兩雲劒)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ㆍ허조(許慥)ㆍ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ㆍ문헌공(文獻公)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ㆍ송 문정(宋文正)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ㆍ병자년ㆍ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ㆍ내시ㆍ군사ㆍ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ㆍ무당ㆍ내시ㆍ군사ㆍ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46 집 204 면
【분류】 왕실(王室) / 윤리(倫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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