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장미산성과 국원성

산골어부 2022. 5. 24. 20:41

장미산성을 돌아보며

 

충주의 보련산성과 장미산성, 그리고 남산성과 대림산성은 고교시절 부터 셀 수도 없이 다녀온 곳이다. 특히 장미산에 자주 오르는 것은 산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이 너무 좋기에 산성에 오르면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진다. 장미산은 산성 내에 봉학사라는 절이 있어 그 곳에서 조금만 걸으면 정상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성에 대해 흥미를 갖게된 것은 자전거를 타고 남한강 일대의 폐사지나 유적지를 돌아 다니면서 시작된 것같다. 처음에는 복원된 산성이나 읍성을 찾아 다니다가 점점 빠져들어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나 흔적조차도 희미한 유적지들을 찾아 다녔다. 역사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 내게는 산성에 대한 유적답사라기 보다는 지형에 따른 입지조건들을 파악하는 것이 흥미롭고, 그리고 성을 쌓는 모습과 그 곳에서 일어난 전투를 상상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과 답사후기를 남기는 것은 다르다. 답사후기에서 잠깐 둘러보고 사적지 안내판이나 팜플렛에 소개된 내용으로 자랑삼아 다녀 왔다는 글은 별 흥미가 없다. 그리고, 답사를 하면서 한. 두번 다녀온 곳은 사진만 남길 뿐, 그에 대한 소감을 쓰지 않는다. 2010년 12월 22일에 충주 장미산성 둘레를 답사한 후에 글을 남기려다가 더 공부를 하고 쓴다는 것이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후로도 장미산성을 수없이 다녀 오면서도 답사기를 쓰지 못한 것은 내공도 부족하지만, 고증보다는 추리같은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알기 때문이다. 이 글도 장미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보다는 개인적인 의견으로 남기고자 할 뿐이다.

 

장미산성은 국원성의 치소일까 ?

 

삼국사기에 나타난 국원성을 장미산성이라고 단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까지 찾을 수가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 진흥왕이 설치한 국원성과 신라 문무왕이 설치한 국원성이 동일한 성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신라 진흥왕이 국원소경을 만들기 위해서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에 이주시키고, 내마 신득이 만든 포와 노를 성 위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 국원소경이 성곽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성이 목책인지 토성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 후에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전란 중에 설치한 대부분의 산성들은 석성들이다. 진흥왕이 국원소경을 만든 것은 557년이지만, 문무왕이 2,592보의 국원성을 쌓은 시기는 673년으로 116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국원성의 길이를 개산으로 환산하면(2,592보*1.2m) 3,110m 정도이기에 현재 잔존하는 장미산성의 규모와 비슷하다. 그리고, 보의 단위를 1,8미터로 환산하면 4.665M로 대림산성과 비슷하다. 국원성 또는 중원경의 치소는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겠지만,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도성과 주요 읍성들도 전란 시를 대비하여 읍성과 인접한 곳에 방어용 산성을 축조하였다. 장미산성을 배후로 하는 평지성인 국원성의 치소는 어디일까 ? 주변의 유적지 분포로 볼때, 중앙탑면 탑평리와 용전리로 추정된다. 어쩌면 고구려비가 있는 용전리 입석마을보다는 풍납토성과 지리적 요건이 비슷한 탑평리에 있는 중앙탑 주변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국원소경과 중원경이 형성되기 이전에 설치된 충주 고구려비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 고구려비문에 남겨진 내용은 무엇일까 ? 장미산성은 신라에서 축성한 것이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서 장미산성의 주인은 누구일까 ? 고구려비문에 따르면 국원은 신라의 영토를 고구려가 지배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장미산성을 발굴조사한 결과는 백제.고구려.신라시대의 유물이 모두 출토되어 백제의 산성을 고구려와 신라가 사용하다가 신라 문무왕 때 재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것은 일부분이며, 산성의 형태나 축조방식은 신라가 마지막으로 관리하였기에 신라시대로 분류할 뿐이다. 이러한 추정도 당시의 삼국의 영역에 따른 흐름일 뿐이다.  토루의 일부분의 발굴조사로 산성의 주체세력을 단정하는 것은 시대의 일부분만 강조하는 것이다.

 

고구려비에서

 

고구려비를 바라보면 전승 기념비가 떠오른다. 전승 기념비라는 것이 승자에게는 기념할 일이지만, 패자에게는 치욕적인 일인데, 고구려가 자신의 영역에 대한 권위를 내세운 비석이 삼국의 승자인 신라의 중원경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중국의 당나라가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파괴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경관(京觀)이란 일종의 전승 기념물이다.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가 오늘날에 전해지는 것도 삼국의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했고, 고려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신라를 흡수통합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의 전쟁에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패망했더라면 진흥왕 순수비 뿐만 아니라, 땅 속에 있는 신라의 왕릉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흥왕이 한강유역에 진출한 시기부터 신라가 패망할 때까지 4백 년간, 아니 그 후로도 천년 동안 고구려비가 어떻게 존속했을까 ? 하는 뜬구름같은 망상을 떠올려본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있는 유적들은 수많은 수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유산들이다.

 

충주 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나는 역사는 삼국사기에도 나타나질 않는다. 두 비석은 모두 고구려에 의해 설치되었기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자화자찬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자랑하는 내용들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나열한 대목들이 나온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비문에는 호형호제(好兄好弟)한다고 기록하지만, 내용을 보면 정복한 곳은 고구려의 법과 제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두 비석은 크기가 다를 뿐 형태도 닮은 꼴이다. 비록 과장되긴했지만, 두 비석은 고대사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이 신라와 백제에게는 치욕적일지는 몰라도 고구려에게는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수구왕에게 죽은 고국원왕의 한과 정복의 꿈을 가야를 빌미로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371년에 연나라의 공격으로 피폐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켜며 백제의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역사의 기록은 그로 인해 백제가 궁지에 몰리고 재앙을 일으키는 사건일 뿐이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보복이 두려워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정비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진사왕(385~392년)은 생사조차도 모르고, 396년에 아신왕(392~405년)이 패전하여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다. 475년에는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물러난다. 결국 백제 근초고왕의 영광은 불과 10여 년만에 무너진다. 광개토왕비와 충주 고구려비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지않은 역사를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충주지역의 향토사나 한국사에서 충주 고구려비는 삼국의 영역의 변화를 수정케 했다. 고구려비가 세워진 시점 이전에도 충주는 신라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 이전에 낭자곡성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만, 낭자곡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추측만할 뿐이다. 역사의 기록과 평가는 민족과 국가도 아니며, 종교나 사상 논쟁도 필요없는 옛이야기다. 즉 가설이나 가정도 필요없는 것이 역사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이다. 학창시절 통학버스에서 무심코 바라보던 돌기둥이 어느날 갑짜기 고구려비로 알려질 때도 나에게는 국보인 고구려비가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무엇이 나를 과거 속으로 이끌었을까 ?

 

 

[참고자료]

[충주 장미산성 시굴조사보고서]

 

장미산성을 둘러보며 (자료사진:2010.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