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용섬이다.
남한강의 한낫 모래섬이 유명해진 것은
아마도 갈 수 없는 섬이기에 더 호기심을 주는 것은 아닐까 ?
탄금대 용섬을 배경으로 하는 일출과 일몰,
탄금호에 피어나는 물안개는 사진작가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탄금대 용섬은 충주댐 건설과 탄금제방으로 인하여
더 이상 토사가 유입되지 못하고 충주댐이 방류할 때마다
점점 사라져 가기에 탄금대에 오를 적마다 마음을 슬프게 한다.
만배미섬이라고 불리던 용섬은 반송의 김생사지에서 시작하여
반송산을 따라 형성된 거대한 백사장이었다고 한다.
탄금제방과 충주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유송리 주민들이 남한강변의 하천부지를 따라
걸어 다니면서 농사도 짓고 천렵도 다녔다고 한다.
72년 대홍수 때에 섬 전체를 강물이 휩쓸고 갔지만
72년 대홍수 이후에도 샛강을 건너서 경작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탄금호가 건설되고 90년 홍수 이후로는
완전히 섬으로 변하여 접근이 어려웠지만,
줄배와 바지선을 이용하여 경작을 시도했으나,
탄금제방의 축조로 토사의 유실이 심하여
더 이상 경작을 하지 못하고 농기계와 굴삭기가 방치되고 있다.
90년대에는 탄금대 섬뜰에 있던 골재장의 골재채취와
충주댐의 방류로 용섬 주변의 토사유실은 더욱 심해졌으며,
용섬에는 토사유실을 막기위한 방책들이 생겨났다.
또한 반송산 자락의 농경지도 해마다 유실되어
머지않아 용섬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용섬은 남한강이 만들어낸 하중도로
탄금대 에 속하기 보다는 반송산 줄기인 유송리에 속한다.
지금은 용섬이라고 불리지만
금가면 유송리 유래에는 만배미섬이라고 전해진다.
배미란 논배미란 뜻으로 만배미는 크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용섬은 지목이 임야로 되어 있지만
용섬 주위의 논밭들을 지대가 낮아서 하천부지로
주민들이 해마다 수해를 겪으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용섬 주변기록은 신라시대의 김생에 얽힌 전설에서 잘 나타난다.
김생의 도술로 쌓았다는 김생제방과 벙어리 여울은
김생이 도술를 부렸다기 보다는 남한강 홍수에 의하여
탄금대와 용섬 주변의 남한강 물길이 변했거나,
하천부지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방죽을 쌓은 것을
김생 선생의 일화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남한강의 본류는 탄금대 열두대와 용섬 사이에 흐르고,
홍수 시에는 탄금대 일대의 남한강이 범람하여
탄금대 샛강과 유송리 샛강으로 흐르는 형상이었다.
용섬은 용탄(용여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용섬은 용탄(용여울)의 끝자락에 형성된 모래섬이다.
지금의 충주댐 자리에서 시작하여 충주산업단지 앞에 용탄과 용소를 만들고,
용대마을(옛 미루나무 숲 훈련장) 앞에 기다란 모래섬을
용의 허리처럼 만들고 난 후에 용교(목행대교) 지점에 다시 굽이쳐 흘러
반송산 자락에 부딪혀서 대문산(탄금대)에 모래섬을 만들며 갈라지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탄금대 용섬을 찾아서 다니는 발길에 떠오르는 옛추억들.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이 합수머리 여울을 건너서 충주장을 보려다니던 이야기.
남한강을 따라서 가는 길에서 72년 홍수 때를 떠올리는 슬픈 이야기들.
동네분들을 따라 경운기를 타고 천렵갔던 추억.
용대마을 미루나무 숲에서 훈련을 받던 군인들과 예비군들.
선거용 고무신 다리인 탄금대교가 건설되면서 비포장길을 따라 통학하던 기억.
충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나룻배 타고 건너다니던 오석 사람들.
합수머리 백사장 여울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던 친구들.
현재 장례식장 자리에서 용섬을 수영으로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고등학교 동창생.
물구경 하겠다고 건너 다니던 탄금대 샛강다리.
수석을 줍겠다고 섬뜰 골재장 주변을 쏘다니던 기억.
공군부대 공사로 이전하는 오석초등학교 현장을 걸어서 간 기억 등~~~~
이제는 되돌아 갈수도 없는 탄금대 용섬의 운명.
4대강 사업과 칠금동 유엔평화공원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만배미섬이라 불리던 용섬의 눈물이 슬프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
4대강 사업으로 용섬을 자연형 생태습지로 원형을 보존한다고는 하지만,
사라져 갈 수 밖에는 탄금대 용섬을 더 이상 개발논리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용섬이 탄금호에서 사라지는 날 까지라도 철새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기를 바라며 ~~~~~
(참고자료 탄금대 용섬)
칠금동 섬뜰에서 바라본 탄금대와 용섬의 전경
반송마을 김생사지에서 바라본 목행대교
김생사지 앞 벙어리 여울과 만배미섬
김생사지 와편들과 만배미섬
유송리 놀골에서 바라본 탄금대
칠금동 섬뜰과 샛강을 가로지르는 탄금제방
탄금대 용섬의 최상류 지점
탄금대 용섬의 최상류 지점
유송리 양수장에서 바라본 용섬의 허리 지점
용섬과 어망
용섬의 철새들
용섬에 방치된 굴삭기와 농기계
유송리 양수장과 급수지
유송리 양수장 제방도로
유송리 양수장에서 바라본 금가대교
유송리 수골에서 바라본 용섬
유송리 수골에서 바라본 탄금대와 용섬
탄금대 합수머리와 갈마골 쇠꼬지를 연결하는 탄금대교
충주동부우회도로의 금가대교 건설현장
▣ 금가-면(金加面)【면】충주시 13면의 하나. 본래 중원군의 지역으로서, 가차산면(加次山面)이라 하여 마산(馬山), 휴암(休岩), 하담(荷潭), 경촌(卿村), 기동(基洞), 마사(麻沙), 사천(沙川), 비산(飛山), 두담(斗潭), 상잠(上岑), 사랑(沙浪), 중잠(中岑), 도리(島里)의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금생면(金生面)의 창리(倉里), 반송(盤松), 유동(遊洞), 화동(禾洞), 모산(毛山), 오평(梧枰), 연합(延合), 석교(石橋), 문지(文旨), 마산(馬山), 독재(篤才), 원평(遠坪), 종포(鍾浦), 매사(梅沙), 양평(凉坪), 옥강(玉江), 월탄(月灘), 상시(上矢), 하시(下矢)의 19개 리를 병합하여 금가면이라 하고, 도촌(島村), 매하(梅下), 문산(文山), 사암(沙岩), 오석(梧石), 원포(遠浦), 월상(月上), 유송(遊松), 잠병(岑屛), 하담(荷潭)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동량면(東良面), 남쪽은 충주시, 서쪽은 가금면(可金面), 북쪽은 엄정면(嚴政面), 동북쪽은 산척면(山尺面)에 각각 닿음.
⊙ 유송-리(遊松里)【리】금가면 법정리동의 하나. 본래 중원군 금생면(金生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반송리(盤松里), 유동(遊洞), 화동(禾洞), 창리(倉里)를 병합하여 유동과 반송의 이름을 따서 유송리라 해서 금가면에 편입됨. 현재 행정리동으로 반송, 화동이 있음. * 반송(盤松)●반-송(盤松)【마을】유송리 행정리동의 하나. 구 목행대교에서 24번 군도를 따라가다 2.2㎞ 지점의 남북에 형성된 마을. 지형이 소반처럼 뚝 떨어졌으며, 옛날에는 반송이 많았다 함. 1997년 8월 조사시 40호, 12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북창, 반송, 놀골이 있음.
●개자리-구렁【골짜기】초막골 북쪽의 골짜기. 지형이 개가 앉아있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
●김생사-지【절터】김생이 세웠던 절터.
●만배미-섬【섬】반송 동남쪽의 남한강 가운데 형성된 섬. 논을 만들면 만뱀이가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북-창(北倉)【마을】반송에 속한 자연마을의 하나. 벼루모퉁이 서쪽에 위치한 마을. 옛날 북창(北倉)이 있어 붙여진 이름
* 화동(和同)●화-동(和同)[수골]【마을】유송리에 속한 행정리동의 하나. 반송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 24번 군도를 따라 구 목행대교에서 3.5∼4㎞ 지점 좌우에 형성된 마을. 들이 넓고 벼를 많이 재배하여 붙여진 이름. 1997년 8월 조사시 52호, 16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웃말과 아랫말이 있음. 논농사가 주이며 밭에는 고추를 주로 재배함. 관내 오석초등학교가 있음.
●숫들-봉【산】화동마을 동북쪽의 산. 높이 11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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