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스크랩] 이천 효양산성 답사기

산골어부 2010. 12. 13. 11:01

2010년 12월 10일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내린 눈을 보며 이천으로 향한다.

기상청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육안으로 관찰되었을 때를 첫눈이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 보다는 눈이 하얗게 쌓여야 첫눈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하얀 눈이 쌓인 산과 들을 보니,  이천과 설성이라는 지명이 머리에서 맴돈다.

 

 이천의 옛지명인 설성의 유래를 보면 설성산성과 눈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이는 서울의 유래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는 서울을 한자음인 설(雪)로 해석하면서

눈 쌓인 산성에 비유해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서울의 유래에서 서라벌에 관한 이야기가 이곳의 이천서씨 시조묘의 안내판에도

나타나는데,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에서 이천서씨가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설성의 유래는 눈이 아닌 신라의 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천시 부발의 효양산성은 자그마한 토성이라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효양산 정상 부근에 토성과 토루의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인근 군부대에서

예비군 훈련장으로 활용하던 곳이라서 토성을 따라 참호와 방공호가 설치되어 있고,

산기슭에는 군사훈련 시설들과 공원과 묘지들이 산재하여 토성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효양산 효양산성은 이천서씨의 서거지이기도 하지만 옛 남매현과 남천현의 중심이기도 하다.

비록 보잘 것없는 토성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기에 기존의 예비군 훈련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원형을 보존하고 정비했으면하는 바램이다. 또한 효양산에 설치된

공원과 체육시설 등도 가급적이면 산 정상이 아닌 중턱으로 이전하면 어떨까 한다.

 

효양산 전설인 금송아지와 이천서씨의 유래인 사슴의 전설에서 그 진실른 무엇일까 ?

 

 

 

 

 

 

 

 

 

 

 

 

 

 

 

 

 

참고자료 - 효양산성

 

효양산 문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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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부발읍 산촌리

• 시  대 : 청동기~ 삼국

 

 

유 적

  효양산성에 관련된 조선시대 문헌 기록은 없고 일제 강점기 각종 조사 자료에도 언급이 없다. 이 성이 처음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정영호 박사(1986, 「신라 남천정지연구」, 『변태섭교수 회갑기념논총』에 의하여 남천정지로 주목되면서이다. 대체로 조선시대에 산성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폐성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산성은 해발 138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 여기에서 서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해발 172m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다시 남쪽으로 회절하여 남쪽으로 형성된 완만한 계곡을 감싸며 축조된 포곡식산성이 결합된 혼합식산성이다. 북쪽으로는 급사면을 이루지만 남쪽은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북쪽에 대항하여 쌓는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근에 산성 남쪽에 정수장이 들어서면서 호암미술관에 의하여 남벽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호암미술관․이천군, 1995, 『이천 효양산유적 발굴조사보고서 70쪽』가 실시된 적이 있다. 발굴결과에 의하면 성벽 외면은 삭토하여 급경사를 만들고 너비 3~5m, 높이 1~3m로 판축하여 축조하였다. 판축 된 상태는 황갈색 풍화암반층과 갈색부식토를 교대로 다져 올려서 쌓았는데, 조잡한 상태로 보아 급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성 내부에서 발견되는 백제 토기는 성벽 축조 이전에 형성된 백제 시대의 생활 유적이 축성 때 성토에 의하여 파괴되어 흩어진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주거지가 토성 보다 아래층에 존재하고 있고 흩어진 토기편이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토기편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 벽

  양산의 성벽은 토축 또는 토석혼축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북벽은 현재 체육시설이 들어선 곳에서 군사시설이 있는 곳까지이다. 이곳은 효양산 정상부의 북쪽 8~9부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평면으로 보아 S자형을 이루고 있다. 외벽 높이는 2m로 대부분 무너져 내려 원래의 높이보다는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토루가 잘 남아 있는 곳을 보면 토루의 폭은 약 3~5m 정도이고 외면을 삭토하고 그 위로 판축과 성토의 방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벽 예비군 참호에서는 다량의 백제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벽은 토루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정상부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바깥 면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곳은 성벽 바깥으로 60°이상의 경사가 가파른 지역이다. 능선을 따라서 축조한 관계로 전체적으로 보아 안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은선사 서쪽은 내벽과 외벽이 비교적 뚜렷이 잘 남아 있다. 이곳은 성벽 외면에 약간의 삭토를 가한 후 상면에 토석혼축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루의 상면 폭은 4~5m 정도이고 내벽 높이는 약 2m 외벽의 높이는 자연 경사면을 포함하여 약 5~6m에 이른다.

  벽은 북벽 군사시설이 있는 곳으로 회절하여 시작된다. 이곳은 정



상부에서 산촌리 방향으로 능선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가고 있다. 성벽은 이 능선 바깥쪽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성벽은 성토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로 삭토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외벽 높이는 자연지형을 포함하여 약 3m 내외이다. 성벽 상면에는 약 5m 너비의 회고가도가 남아 있다. 동벽에는 문지가 1개소 있고 문지를 지나면 성벽의 흔적이 점차 희미해진다. 이곳은 성 내외부가 모두 경사가 완


만하여 성토나 판축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성벽은 남벽으로 이어지는데 남벽과 동벽의 회절부는 철탑 공사로 훼손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남벽은 대부분 정수장 건설로 잘려나갔다.

  재 군사시설이 자리 잡은 동쪽에서 동벽과 갈라져 효양산 정상부 남쪽을 따라서 내성 벽이 축조되었다. 비교적 성벽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는데 이곳도 외면을 삭토하고 그 위로 성토와 판축을 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외벽 높이는 약 4~5m 정도이고 상면의 토루 폭은 약 3m 내외로 추정된다. 내벽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성내 시설물

 문지는 내성에서 1개소 동벽에서 1개소 모두 2개소가 발견되었으나 성의 규모로 보아 문은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문지는 현재 V자형으로 함몰되어 있다. 상면 폭은 약 15m, 하면 폭은 약 5m, 길이는 15m, 높이는 4m이다. 성내부에서 바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가는데 전내부 쪽으로는 내성의 문지와 이어진다. 문지 좌우로 성벽 높이는 바깥쪽에서 보아 약 6~7m에 이른다. 함몰된 규모로 보아 상당히 큰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성의 문제는 내성벽 중앙부에 있다. 역시 V자 형태의 함몰부로 존재하고 있다. 함몰부의 크기는 상단 폭이 약 2m 하단 폭은 50㎝, 길이는 약 3m, 높이는 50㎝ 정도이다. 문지 바깥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외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함몰된 폭과 깊이는 그리 크지 않아 수구지일 가능성도 있다.

  산성내의 건물지는 정상부의 평탄대지, 현 은선사가 들어선 곳, 은선사 서쪽 서벽의 상단, 체육공원, 남벽의 상면 등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건물지의 경우 군사시설, 공원, 사찰, 정수장 등에 의하여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성의 규모로 보아 상당수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유물

  성의 내부에서는 곳곳에서 많은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북벽의 예비군 참호와 내성 문지 주변 등지에서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들 유물을 살펴보면 기존의 조사 결과와 일치하고 있다. 연질회색 토기와 경질회청색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문양이 있다. 문양은 승석문, 유사승석문, 승문, 격자문 등이 많고 벽심은 흑색, 흑회색, 적색, 회색 등을 띠고 있다. 태토는 사립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 있으나 매우 정선된 것도 있다. 대체로 백제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의 성격

  양산성은 1986년 정영호 박사에 의하여 처음 조사되어 학계에 신라성으로 보고되었고, 이후 198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1994년에는 남벽 외부에 정수장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남벽 일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조사되었을 때도 역시 백제토기편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보고되었다. 기존의 조사 결과, 효양산성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치는 유물이 모두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고지성 취락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에 상관되는 유구가 없어서 토성과 선사 유물을 관련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가장 빈도수가 높은 유물인 백제 토기를 토성의 축조 시기와 관련하여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이 산성은 그 동안 신라의 남천정지(南川停址)가 있었던 곳으로 주목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설봉산성이 남쪽을 향해 축조한 고구려성이고, 효양산성은 이에 대응하는 신라의 산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암미술관의 발굴 결과를 보면, 신라 토기편을 찾을 수 없었고 모두 백제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어서 남천정지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성벽의 축조도 치밀한 것이 아니라 급조된 인상을 주고 있어서 신라의 대 군단이 주둔했을 것으로 보이는 남천정지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효양산성의 가장 핵심적인 지역은 내성 일대이며, 이곳은 지표상에 백제 토기가 산포되어 있다. 비록 해발 고도가 188m에 불과하나 백제시대에 이미 이곳에 생활유구가 존재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산성의 초축연대에 대해서는 성급히 결론 내릴 수 없고, 백제시대의 주거지가 효양산성 내에 있었다면 주변이 토성으로 둘러싸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효양산성이 복하천을 북쪽의 자연해자로 삼아서 축조되었고 복하천을 도강하는 위치이며 성벽도 북쪽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라와도 어떤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복하천은 지금은 수량이 줄고 하상이 높아져 배가 다닐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이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실으러 남한강을 통하여 이천 복하천에까지 배가 올라 왔다고 전한다. 고대에 복하천을 도강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효양산성이 복하천을 도강하는 교통로와 관련되어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자료-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유래(이천서씨 대종회)

 

이천서씨의 유래

 

◎기자(箕子)의 42대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쫒겨 이천서하성(利川徐河城)에 피해와서 살았으므로 그 뒤에 이로 인하여 성(姓)을 서씨(徐氏)로 하였다한다,

또는 전해오기를 여수기(余守己)라는 분이 단군(檀君)을 더불어 예국(滅國))의 추장(酋長) 되어 있으면서 아홉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여러 고을의 장(長)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중민(衆民)을 도와서 공(功)이 많았으므로 「여」자 (余字)에 두인변(.....두 사람 즉 사람이라는 뜻)을 부쳐서 서(徐)로 하여 성(姓)으로 내리셨다 고도 한다,

 

◎기자의 42세손이며 고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에 쫏겨 지금의 이천인 서아성(徐阿城)에 피신하여 살게 되고 지명을 따서 서씨가 되었다고 한다.[魏志 東史綱目]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되던 어느날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자, 신라 문성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만주에게 서씨 성을 내려 뒤를 보살펴 주고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徐氏史蹟精解] 

 자료출처: 이상(윗글) : 이천서씨 공도공파 2005년 癸酉譜(계유보)

 

자료출처: 이하 기타(타사이트및 책자)

◎ 단군시대(檀君時代) 예국(穢國)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 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부쳐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서신일은 이천 서씨의 시조이며 이천 서씨에서 달성(達成), 장성(長城), 연산(連 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남양(南陽)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달성 서씨에서 다시 대구 서씨로 나뉘었다 한다.

 

 


시조유래

신라 효공왕(孝恭王 : 제52대 왕, 재위기간 :897 ∼912)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내다가 국운(國運)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聖堂(희성당)을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스스 로 처사(處士)라 칭하고 후진훈도(後進訓導)에 여생을 바쳤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 창업의 원훈(元勳)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天 )이 인자중후(仁慈重厚)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 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 이 구해 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恩德) 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그는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國紀)를 확립(確立)했던 서 필(徐 弼)이다. 고려 광종(光宗)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이었던 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諫言)으로 왕(王)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光宗)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歸化)한 중국인(中國人)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孔子)가 마굿간에 있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諫)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창성유래

서씨(徐氏)의 대종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효공왕때 아간대부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희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라 칭하고 후진훈도에 여생을 바쳤으며, 그의 후손에서 달성,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대구 등으로 분적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명

이천(利川)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남천현(일명 남매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무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때 이천군이라 하였다.
1257년 영창현이라 개칭하였고 공양왕때 남천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조에 와서 다시 이천현으로 격하되었으며, 그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문소개

[동국만성보]와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서신일은 신라창업의 원훈으로, 아성대장군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이 인자중후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밤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서신일은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를 확립했던 서필(徐 弼)이다.
고려 광종때 대광내의령 이었던 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한 중국인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가 마굿간에 있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고려 성종때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략가로 유명했던 희(熙)는 필(弼)의 아들로,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話術)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한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국사상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희(熙)의 아들은 덕종때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임명되고 자손에게 영업전이 하사된 눌(訥)과 우복야를 지낸 유걸(惟傑), 유위 (惟偉 : 장야서령), 주행(周行) 등으로 그중에서 유걸과 유위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선종때 중서시랑평장사로 상주국이 되었던 정(靖)은 유걸의 아들이며, 그의 손자 순(諄)이 판비서성사에 올라 강직하기로 유명했으며, 유위의 현손 견(甄)은 절신으로 이름났다.

조선조에 와서는 밀직사 원(遠)의 아들 선(選)이 좌군도총제를 거쳐 우의정에 추증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판사재 감사 효손(孝孫)의 증손 강(崗)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세조때는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나 세조의 숭불(崇 佛)을 논란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던 기(起)는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고 전국을 돌며 민속과 실용적 학문연구에 전심했으며, 특히 고향인 홍주의 풍속이 타락해짐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바로잡고자 마을에 강신당을 지어 풍속개량에 앞장섰으나 심한 저항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지리산 홍운동으로 들어가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후에 계룡산 고청봉으로 옮겨 가서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임진왜란때 함흥과 홍원에서 대첩을 거두었던 경충 (敬忠)은 정유재란에도 전공을 세워 충무위 좌부장에 올랐으며, 득천(得 天)과 사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사원의 아우 사적(思迪)은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월성의 금장산, 선산의 금오산, 형산강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화왕산성 방어에 공을세워 3부자가 크게 명성을 떨쳤다.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발자취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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