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삶과 담소/추억과 생각

2012년 청주시립교향악단 " 송년음악회 " 에서

산골어부 2012. 12. 30. 21:12

 

2012년을 보내며

 

 

베토벤 / 교향곡 제9번 라단조 "합창"

 

 

또 한해를 보내며 지난 일 년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기념과 아들 녀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청주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을 찾아 청주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유광이 지휘하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관람하며 청주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이 자아내는 멋에 도취하면서 "나는 왜 저렇게 멋진 한해를 보내지 못했을까 ?" 하는 자책 아닌 자책에 빠져 들었다.

 

우리가족은 공연예약을 하지못해 공연시간보다 40분 정도 빠른 시간에 청주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 입구에는 갑짜기 경찰들이 허겁지겁 달여와서 분산배치되며 주차장 진입을 통제했다. 주차장이 만차가 되었는가보다 하고 차를 우회하여 서편 주차장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도 평소와 달리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지휘자의 소개로 김황식 국무총리가 깜짝 방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로 인해 청주시장과 경찰들이 촌극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청주예술의 전당은 내가 **자치단체 청사를 공사할때, 같은 건축사가 설계하고 감리한 건축물로  시공하는 과정을 자주 돌아보던 곳으로 청주예술의 전당과 같은 공연시설을 시공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훌륭한 공연을 위해서는 훌륭한 공연시설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교향악단 지휘자가 작곡자의 의도를 잘 알고 지휘하듯이 ~~~~~


 



 

 

 

 

 

 

 

 

 

 

교향곡 9번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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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을 작곡할 무렵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교향곡 9번 d 단조》 (Op. 125)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청력의 완전상실 상태[1]에서 작곡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1824년에 완성되었다. 명성있는 작곡가의 교향곡으로는 처음으로 성악을 기악과 같은 비중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합창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바로 4악장에 나오는 합창(및 독창) 때문이며 그 가사는 프리드리히 실러환희의 송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작품들은 물론 서양 고전 음악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현재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네 번째 악장에 나오는 음악은 유럽 연합의 공식 상징가로 사용되며(독일어 가사는 공식은 아님), 자필 원본악보는 2003년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 에서 미화 3백3십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소더비 의 Stehpen Roe 박사는 "이는 예술작품으로서는 최고가로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리어왕과 같은 수준이다."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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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편집] 작곡

교향곡 9번의 초고

1822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을 의뢰를 받은[2]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의 작곡을 1822년에 시작하여 1824년 연초에 마쳤다. 그의 교향곡 8번(1812)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사실, 베토벤은 일찍부터 "환희의 송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1793년에 이미 곡을 붙였다고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제 2악장 스케르초의 주제는 1815년에 작곡한 푸가에서 비롯되었다.

교향곡성악, 합창을 도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교향곡성악적 요소를 도입하는것은 베토벤뿐 아니라 그 모두에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전기집필자 겸 제자인 안톤 쉰틀러는 후일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4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환희의 송가를 적절하게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베토벤은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불멸의 실러에 대한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여줬지요."
그러나 그 착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토벤이 오늘날과 같은 4악장을 완성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편집] 초연

1824년 5월 7일 에서 미햐엘 움라우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베토벤로시니같은 이탈리아출신의 작곡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보다는 베를린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원했지만 그의 친지들, 후원자들이 초연을 설득했다 한다.

청각의 완벽한 장애인인 베토벤은 최종악장의 연주 동안에는 청중을 등지고 서서, 가수들의 입술모양으로 실황을 눈치채었다 한다. 제 2악장 스케르초가 끝나자 청중의 박수가 (모든 악장이 끝나기 이전임에도 이례적으로) 울렸을 때, 그리고 마지막 악장인 합창 악장의 직후 열광했을 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어가 귀머거리 베토벤의 등을 돌려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도록 도왔다 한다.[3] 이 초연때 청중은 5 번의 '기립박수'를 보냈다 하는데, 당시 황제부부 입장 때의 기립박수 3 차례 라는 통례로 보면, 귀족도 아닌 (게다가 궁정에서는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던) 작곡가에 불과한 베토벤에게 5 차례였음은 별난 일이었다. 초연 16일 뒤인 1824년 5월 23일의 두 번째 공연에서의 반응은 초연 때 보다 미미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