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이명박(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생회 간부를 지냈고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6·3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에게 발탁되어 30대 초반에 이사를 지냈고 현대건설의 평사원 출신으로 1977년 현대건설 사장, 1988년 회장이 되었다. 1992년 현대건설을 떠나 정치인이 되어 14대(민주자유당 비례대표)와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1996년 5월 30일 ~ 1998년 2월 21일)과 32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2007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일본 오사카 부에서 출생하였고 광복 직후(당시 만 3세) 귀국하여 경상북도 포항읍으로 이주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호는 원래 일송(一松)이었지만 서울특별시장 시절이던 2005년 10월 26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청계(淸溪)로 바꾸었다.[1]
생애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이명박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던 1941년 12월 19일 현재의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 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일본 제국 오사카 부 나카카와치 군 가미 촌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2]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3]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사용했던 일본어 성씨는 쓰키야마(月山, 1945년까지 사용했음)이었다.[4] 일제 강점기 시절 그의 가족은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국하여 경상북도 포항읍으로 이사 왔다. 형제 둘을 잃었으며[5][6] 원래 호적에 올라 있던 이름은 이상정(李相定)이었으나 나중에 이명박(李明博)으로 바꿔 올렸다.[7][8] 경북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국 전쟁이 터졌고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바로 위의 누나와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 살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러 다녀야 했다.[9]자녀로는 딸 이주연(1971년생), 이승연(1973년생), 이수연(1975년생), 아들 이시형(1978년생)이 있다.[3]
학창 시절
애초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설득으로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닌다는 약속하에 동지상업고등학교(현 동지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졸업하였다.[10][11] 그 후 19살 되던 해 서울로 가서 1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독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지원하여 합격했다.
고려대 재학과 6.3 시위
박정희 정권 때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생 운동권의 리더로 활동했고 상과대학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아침 청소부 생활을 하여 학비를 조달하며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군에 입대했으나, 훈련소에서 신검을 받다가 기관지확장증 판정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시위를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계엄령 이후 도피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신문 공고가 나오고[12]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다.[12]
현대건설 시절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대기업이나 공무원 등 각종 공직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 를 규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박정희에게 전달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편지 발송 후 대통령 비서진이 찾아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고 그는 현대건설에 취직할 수 있었다.[13]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3]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1970년 김윤옥과 결혼해 1남 3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5]
입사한 지 2년차에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 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30대에 현대건설 사장이 된 이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고 그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14]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회사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 ~ 1991년 걸프 전쟁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 탓에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15] 현대 건설은 이후 워크 아웃을 조기에 졸업하여 시공능력평가 1위 자리를 다시 되찾았다. [16]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으로 현대가와의 '화해'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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