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운하를 바라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작은 뱃길을 완성하지 못한 굴포.
파나마 운하와 스에즈 운하가 건설된지 100여년이 지난 세상에서
허황된 운하의 꿈과 조그만 경인운하도 만들지 못하고,
작은 아라뱃길도 운영하지 못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정치논리에 국력을 소모하는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의 굴포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경인운하는 운하의 본질보다는 권력투쟁의 희생물일 뿐이다.
비록, 반쪽짜리일지라도 그를 활용할 묘수(妙手)를 찾아야 한다.
"굴포는 육지와 습지(濕地)가 함께 이어져 물을 건너는 곳은 겨우 20리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마음이 깊지 못하여 큰일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어렵게 여깁니다. 그러나 1년간의 조선(漕船)ㆍ상선의 패몰과 사람이 빠져 죽은 일 등을 계산해 보면 그 경비가 거만(巨萬)에 이르러 계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노는 인력을 부역(赴役)하게 한다면, 설사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나라에 손해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중종실록에서)
왕강[ 王康 ]
왕강(王康)은 종실의 먼 친족이다. 공민왕 20년(1360)에 과거에 응시하여 회시(會試)1)에 급제했는데, 왕강은 같이 급제한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적었다. 왕이 불러보고는,
“판관(判官) 조숭례(曹崇禮)와 진사(進士) 민안인(閔安仁)2)은 노숙한 유학자인데도 아직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이런 어린 아이가 어떻게 급제했겠는가? 필시 남의 손을 빌렸을 것이다.”
하고는 회시의 책제(策題)를 짓게 했는데 왕강이 짓지 못했다. 왕이 노해 전시(殿試)를 정지시키고 그 때부터는 나이 열다섯이 되지 않은 자는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몇 달 뒤 복시(覆試)3)에서 동진사(同進士)4)로 급제시키고 성균직학(成均直學)으로 임명하였으며 그 후 거듭 승진해 강녕부승(江寧府丞)이 되었다.
우왕이 즉위하여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임명하였다가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승진시켰다. 곧이어 서북면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되어 군(郡)·현(縣)에 유랑하는 자들을 모아 정착시켰다.
공양왕 때 전농시사(典農寺事)가 되었다가, 양광·전라·경상도 수군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水軍軆察使) 겸 방어염철사(防禦鹽鐵使)로 나갔다. 곧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옮겼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수군도체찰사(水軍都體察使)와 염철(鹽鐵)·조전(漕轉)·대토(擡討)·영전(營田) 선성사(繕城事)를 겸하였다. 당시 임명하는 교서는 이러하다.
“국가가 중간에 불운을 만나 가짜 왕은 혼탁하고 방종했으며 권신들은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더욱이 왜구가 날뛰어 주(州)·군(郡)이 폐허가 되는 통에 조운(漕運)이 원활하지 못하여 창고가 텅 비었다. 난리를 평정한 후 인재를 얻어 옛날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참에, 조정의 대신들이 경을 천거하기에 조운을 맡게 하였더니 몇 년 되지 않아 과연 성과가 나타났다.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하니 왜구가 멀리 달아나고, 양곡과 군량을 제때 수송하니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지 않았다.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이제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를 맡겨 육지와 바다의 일을 총괄하게 하니, 그곳의 군인이나 관리 가운데 공이 있는 자는 이름을 적어 보고하면 내가 뽑아 쓸 것이다. 죄를 저지른 경우 봉익(奉翊)5) 이상은 치죄를 상신하고 3품 이하의 관리는 경이 임의로 처단하라.”
왕강이 여러 차례 3도의 군수품과 세공을 수송할 때마다, 도당(都堂)에서는 반드시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왕강은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어업과 소금 생산의 이익에 진력하여 금전의 수입을 엄청나게 올렸으므로 국가가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왕강이 조운 인근 지역을 수탈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왕강을 백성을 수탈하는 신하라고 불렀다. 왕강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양광도(楊廣道)의 태안(泰安)과 서주(瑞州)의 경내에 있는 탄포(炭浦)는 남족으로 흥인교(興仁橋)6)까지 180여 리를 흘러가고 창포(倉浦)는 북쪽으로 순제성(蓴堤城) 밑에까지 70리를 흐릅니다. 두 포구 사이에는 옛날 도랑을 판 터가 남아 있는데7)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며, 파지 않은 것도 7리를 넘지 않습니다. 나머지를 다 파서 바닷물이 통하게 한다면 해마다 조운선이 안흥량(安興梁)8)의 4백여 리나 되는 험한 곳을 통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7월에 일을 시작하여 8월에 마치게 허락해 주소서.”
그래서 장정들을 징발해 파보았더니 물밑에 돌이 있는데다가 밀물 썰물이 오가는 통에 파는 대로 막혀버려 시공이 쉽지 않았으므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9) 왕강이 한번은 전 목사(牧使) 여칭(呂稱)10)을 천거하여 부사(副使)로 삼고 자기의 임무를 대신 시키려 하자, 사람들은 그를 두고 유안(劉晏)11)과 같은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강 [王康]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20년을 보내며 정서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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