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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청주의 지명유래는 ?

산골어부 2023. 4. 2. 22:56

 

청주의 지명유래는 ?

 

한강의 지류인 달천에 위치하는 청천과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에 위치하는 청주는 현재의 지명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삼국사기에 달천은 살수 또는 살매로 기록되고 청천이란 지명이 고착되지만,  청주의 옛 지명은 자곡과 비성이라고 전하며, 고려시대에 청주로 변천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백제의 지명이라는 상당현은 조선의 기록인 고려사 지리지에 전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은 신라를 중심으로 쓰였기에 백제의 지명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지명에서도 청주의 옛 지명은 나타나질 않는다. 청주의 지명유래에서 상당현이란 지명도 한자로 변경된 백제의 지명이라기보다는 신라시대에서 개명한 신라식 지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주에 백제의 영토였던 웅천주나 신라의 웅주를 관할하는 서원경이 설치된 것도 신라의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9주 5소경이 편제되었기 때문이지만, 서원의 역사가 마한과 백제를 근간으로 형성되어 왔기에 한강의 지류인 달천보다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에 형성된 백제의 상당현이라는 지명에 더 애착을 갖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상당현이란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벌이는 삼국의 전쟁사에서 남한강이나 달천에서 싸운 기록은 백제의 고이왕 때에 괴곡과 괴곡성, 그리고 백제의 동성왕 때에 살수와 견아성 외에는 나타나질 않는다.  대부분은 금강유역으로 추정하여 진천. 청주. 보은. 옥천. 영동 등으로 비정한다. 낭자곡성에서 시작된 낭성과 낭비성에 대한 비정도 마한과 백제의 땅이었던 까마득한 옛날의 향수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낭자곡성을 청주로 비정하면, 청주는 마한보다는 진한의 영역이거나, 마한의 복암성처럼 마한의 장수가 신라에 귀속한 지역이 된다는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낭"자가 빠진 자곡과 비성, 그리고 나타나는 상당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 낭자곡성과 와산성과 구양성, 모산성과 원산향과 부곡성, 봉산성과 괴곡성과 견아성 등은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는 지명들이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금강 유역인 청주 일대로 추정할뿐이다. 

 

상당(上塘) : 도서(都西)-도서(道西))-도당(道塘)-도안(道安)

서원(西原) : 청당(靑塘)-청연(淸淵)-청안(淸安)-청주(淸州)-청원(淸原)

 

삼국시대에 남한강과 달천에서 전쟁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 죽령과 계립령을 넘어 강원도의 영역인 삭주와 명주는 신라나 백제보다는 고구려의 속한 예맥 또는 말갈이 지배한 산간오지였기에  삼국의 영토 싸움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삼국의 전쟁사에서 대규모 전면전은 한강유역에서 이루어진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패하여 전사한 기록이나, 백제의 개로왕이 한성(위례성)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것과 백제의 성왕이 임진강의 오곡전투에서 패하여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한 것도 한강유역에서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삼국이 한강을 점령했다는 것은 삼국의 중원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충주지역에 말하는 국원과 중원이라는 개념은 신라의 왕경체계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과 158년에 계립령과 죽령을 개설하고, 165년과 167년에 아찬 길선의 반역으로 백제에게  빼앗긴 한수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벌인 전투와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기록뿐이다. 백제가 충주를 지배한 것은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백제  고이왕(255년)이 괴곡에서 전투를 하는 시기에서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백제의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속국으로 삼은 396년이거나, 광개토왕이 신라와 가야를 남정한 400년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역사도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 그리고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유적들로 추정할 뿐이다. 청주 신봉동 백제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한성백제와 더불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5세기 부터는 중부권의 매장문화재도 고구려.백제.신라의 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살매=살수=청천=청주=청원은 같은 지명이다.

 

삼한사에서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분되는 것도 백제. 신라. 가야라는 소국이 확립되면서 부터일 것이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진국 또는 마한이 존재했기에 고구려도 마한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이 정립된 원삼국시대에 청주의 역사는 마한과 백제문화를 근간으로 형성하여 왔었지만, 통일신라 또는 남북국시대에는 신라가 백제영토인 서원경을 방어하는 곳은 낭성과 미원 등이 속한 청천이라는 것이다.  후대에는 청천이 청주의 속현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신라의 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원경을 설치하고, 고려시대에 청주라고 개칭한 것이다. 살매=살수=청천=청주=청원은 같은 지명으로 국가와 왕권이 바뀌어도 지역정서에 따른 문화는 유지된다. 지명을 개명할 때도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기존의 지명을 존중하여 그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청주와 청천이라는 아름다운 의미는 맑고 깨끗한 땅이다. 즉  충청도의 대명사인 청풍명월의 본향인 것이다. 

 

낭성과 하림궁에 대하여

 

삼년산성의 고찰에서 삼년산성이 축조된 470년 전. 후로 구분하면 어떨까 ? 삼년산성이 축조되기 전의 지역명은 알 수가 없다. 삼년산성 축조된 후의 전쟁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서 시작된다.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자 백제는 웅진성으로 천도한다. 고구려가 484년에 모산성을 공격하자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격퇴시키고, 신라는 485년에 구벌성을 쌓고, 486년에는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수리하고, 백제는 우두성을 쌓는다. 하지만, 고구려는 489년에 과현까지 진출하여 신라의 호산성을 공취하고, 494년에는 신라의 실죽이 살수에서 싸우다가 견아성으로 후퇴하여 백제로 도움으로 견아성을 지키고, 495년에 신라의 덕지는 백제의 치양성을 구원하고, 496년에는 신라의 실죽이 우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니하에서 격퇴시키지만, 497년에는 우산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 금강유역에서 고구려의 유적인 보루가 발견되는 것도 475년에서 50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기록이 고구려의 최남단 국경분쟁으로 추정되지만, 삼년산성의 전투기록은 나타나질 않는다. 고구려의 최대영역도 삼년산성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삼년산성이나 삼년산군이란 지명이 전란이 끝난 후대에 형성된 것이기에 단정할 수는 없다.

 

백제는 동성왕과 무령왕이 신라와 협력하여 한강의 지류인 임진강 까지 영토를 회복하지만, 백제의 성왕( 529년) 때에는 백제의 3만 군사가 임진강의 오곡전투에서 완패하고, 538년에는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한다. 백제의 성왕은 540년에는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548년에는 고구려가 독산성을 공격하지만, 백제군이 신라군의 주령의 도움으로 방어한다. 신라 진흥왕(550년) 때에는 신라 이사부 장군이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취하고, 551년에는 진흥왕이 낭성을 순행하여 하림궁에 머무른다. 신라의 거칠부는 한강상류인 강원도 일대의 10군을 점령하고 553년에는  한강유역에 신주를 설치한다. 554년에는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관산성을 공격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삼년산성군의  고간 도도가 백제의 성왕을 전사시킨다. 신라 진흥왕은 555년에는 북한산주를 순행하고, 557년에는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사벌주와 신주를 폐하고 감문주와 북한주를 설치하고, 558년에는 국원에 귀족자제와 6부 호민을 이주시킨다.  

 

진흥왕이 551년에는 순행한 낭성과 머무른 하림궁은 어디일까 ?  낭성과 낭비성을 청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신라 진흥왕이 아직도 점령도 하지 못한 청주에 행차하여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연회를 할 수 있었을까 ?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낭자곡성은 청주로 비정할 수도 있지만, 낭성과 낭비성은 청주로 비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비슷한 시기에 쓰인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세종실록 지리지를 바탕으로 쓰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살매. 살수. 니하. 청천. 도살성 등이 나타난다. 괴산의 청천은 삼국시대에는 상주의 삼년산군 관할이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청주목 관할의 속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괴산군에 속해 있다. 살매=살수=청천=청원=청주는 표기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의 지명이다. 청주의 지명유래는 고려사 지리편에 나타나는 상당현의 유래부터 되새겨 봐야 한다. 청안현은 청당. 청연. 도서. 도안 등으로 불린다. 청천현은 한강의 달천 지역이지만, 청안현은 금강의 미호천 지역이다. 백제의 상당현이란 지명도 청안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청주는 금강의 미호천 지역으로 진한과 신라보다는 마한과 백제에 속했던 기간도 길고, 서원경이 웅주를 관할하였기에 백제 지명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삼년산군이었던 보은군도 삼년산성을 축성할 때에는 경상북도 상주에 속했지만, 현재는 충청북도 보은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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