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잔차를 타고/라이딩 후기

[스크랩] 까치 까치 설날 라이딩(남한강 투어링)

산골어부 2006. 5. 3. 04:48

"까치 까지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까치 까치 설날은 설이브 날이다.

다른 말로는 작은 설날이다.

 

명절 전날 라이딩 하는 습관이 생긴 것같다.

귀성차량으로 전국이 교통전쟁을 치룰때,

한가로이 라이딩을 즐긴다는 것이

고향에 산다는 특권 중 하나인 것같다.

 

지난 추석에도 똑같은 코스로 라이딩했었다.

그 때는 소낙비를 가르는 우중 라이딩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이딩보다는 답사를 한다는 부제를 두고보니,

라이딩하는 기분이 사뭇 가벼웠습니다.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랄까?

고려시대의 폐사지인 청룡사지,거돈사지,법천사지,흥법사지,고달사지등은

고려불교의 권력세도와 뱃길을 따라 형성된 지방호족의 흥망성쇠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이 ~~~~~

 

 

 

(거돈사지-카페게시글에서 펌)

강원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정산리(鼎山里)에 있는 신라 말~고려 초의 절터.

지정번호 : 사적 제168호
크기 : 약 7,500평
종류 : 사찰터

 

금당(金堂)터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불좌대(佛坐臺)가 있으며,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750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탑 옆에 있던 배례석(拜禮石)은 135cm ×85cm의 크기에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3층석탑 북쪽 50m 지점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된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025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최충(崔沖)이 짓고 글씨는 김거웅(金巨雄)이 썼다.

 

 

또 보물 제190호로 지정된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시대 부도(浮屠)의 정형으로서 현재는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불좌대의 대석(臺石) 주위에는 원래의 위치로 보이는 주춧돌들이 비교적 정연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기단(基壇)은 대부분의 지대석과 면석이 남아 있어, 나말 여초(羅末麗初)의 사찰로는 매우 희귀하게 유존 상태가 좋다. 이 절의 폐사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거돈사지

 

법천사지가는길
서울-문막ic-42번 국도-문막교 앞에서 좌회전-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샛길(599번 지방도로)-부론면 소재지 직전에 법천사지 들어가는 푯말이 있다.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부론면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산 하나를 넘어가야만 거돈사지가 나온다. 아침 햇예쁘다. 한적한 산길을 지그재그 올라 기분이 참 좋다. 다시 정산면에서  산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거돈사지가 나온다.

 

 

천년된 느티나무

가장

겨울엔 폐사지를 거닐어 보라.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풍성하게 보일 때보다 이렇게 황량한 겨울에 거닐어야 스산한 감흥을 받는다. 아무리 화려했던 시절이 있어도 결국 이렇게 부서진 돌멩이로 전락한다. 영원은 없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나뒹굴어진 돌멩이 속에  혹 자신이 있는지 확인해보라. 인간도 역시 그렇게 쓰러지고 죽어갈 것이다. 쓰러진 돌에도 그 쓰임새가 있었을 것이다.  탑의 부재로 쓰였던지..건물의 초석으로 쓰였던지...나름대로의 역할을 했었던 돌이다. 나의 돌은 쓸모 없는 돌이 아니었는지...지금이라도 그런 돌이었다면 앞으로 의미있는 돌이 되야하지 않을까?

절이 왜 쓰러졌을까?  거긴엔 인간의 탐욕이 늘 따랐기 때문이다.  그럼 절을 다시 세워야 되지 않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면  마음 속으로나마 집을 지어 주어야 할 것이다. 잡초속에 나뒹굴러진 소맷돌 하나가 바로 나다. 나 혼자 세워서는 건물을 올릴 수 없다. 모든 돌들이 말짱한 상태로 돌아가 잘 조합되야만 건물이 올라가지 않을까?  삶도 그런 것 같다.이렇게 폐사지를 거닐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것은 분명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어서 난 겨울에 폐사지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남단에 높다란 석축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넓은 절터가 펼쳐진다. 무려 7,500평이다.  그걸 보노라면 가슴마져 후련하다. 절터 가운데 금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금당중앙엔 부처님이 앉았을 듯한 불좌대가 놓여 있다. 높이만 무려 2미터가 넘은다.  그럼 얼마나 큰 부처님이 앉아 계셨을까?  금당 앞엔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이  서있다.

 먼저 이방인을 맞이해 주는 것이 천년된 느티나무다. 나무는 천년동안이나 사찰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본 것이다. 이 절이 지어지고 부서지는 광경을 본 유일한 목격자다.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을 때는 싱싱한 가지를 들어 냈으며  절이 한 순간에 무너졌을 때는 그 가지가 힘겹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세월을 함께 살아준 느티나무가 고마울 따름이다.

 

폐사터를 거닐며

겨울엔 폐사지를 거닐어 보라.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풍성하게 보일 때보다 이렇게 황량한 겨울에 거닐어야 스산한 감흥을 받는다. 아무리 화려했던 시절이 있어도 결국 이렇게 부서진 돌멩이로 전락한다. 영원은 없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나뒹굴어진 돌멩이 속에  혹 자신이 있는지 확인해보라. 인간도 역시 그렇게 쓰러지고 죽어갈 것이다. 쓰러진 돌에도 그 쓰임새가 있었을 것이다.  탑의 부재로 쓰였던지..건물의 초석으로 쓰였던지...나름대로의 역할을 했었던 돌이다. 나의 돌은 쓸모 없는 돌이 아니었는지...지금이라도 그런 돌이었다면 앞으로 의미있는 돌이 되야하지 않을까?

절이 왜 쓰러졌을까?  거긴엔 인간의 탐욕이 늘 따랐기 때문이다.  그럼 절을 다시 세워야 되지 않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면  마음 속으로나마 집을 지어 주어야 할 것이다. 잡초속에 나뒹굴러진 소맷돌 하나가 바로 나다. 나 혼자 세워서는 건물을 올릴 수 없다. 모든 돌들이 말짱한 상태로 돌아가 잘 조합되야만 건물이 올라가지 않을까?  삶도 그런 것 같다.이렇게 폐사지를 거닐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것은 분명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어서 난 겨울에 폐사지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남단에 높다란 석축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넓은 절터가 펼쳐진다. 무려 7,500평이다.  그걸 보노라면 가슴마져 후련하다. 절터 가운데 금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금당중앙엔 부처님이 앉았을 듯한 불좌대가 놓여 있다. 높이만 무려 2미터가 넘은다.  그럼 얼마나 큰 부처님이 앉아 계셨을까?  금당 앞엔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이  서있다.

 

절터 왼쪽에 그나마 온전한 부재들이 함께 모여 있다. 석물들의 부상병동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동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꽃 대좌의 화려함이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몸돌의  꽃문양이 일품이다. 화려했던 남한강 문화의 꽃이리라.

 

거돈사지 3충석탑(보물 750호)

지방여행을 하게 되면 향토사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외모는 볼품 없지만 그 분위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거돈사지 삼층석탑도 그렇다. 세련된 장식도 없고 소박한 탑이건만  이 앞에 서면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폐허속에서 살아남은 생명력 때문일까? 석탑 앞에는 연꽃이 활짝핀 배례석이 놓여 있다. 스르르 끓어 앉게 만든다.

 

탑이 의연하게 서있다.

 토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석탑을 올린 것이 특이하다.  

폐사지의 돌덩이를 헤치고  원공국사 부도가 있었던 터에 올랐다. 이 곳에서 바라본 거돈사터가 일품이다.  그런데 부도터는 기단만 횡하니 놓여 있고 부도는 없다.  그렇지만 안내판엔 부도 사진과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다.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심정이겠지... .

 

원공국사 부도 (보물190호)..경복궁 소재

부도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경복궁 중앙박물관 건물벽 앞에 놓여 있다. 보물 이건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척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부도의 높이는 무려 2.68미터다. 중대석의 안상안에는 천상을 지키는 장수인 팔부신상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상대석엔 연꽃무늬가 겹쳐 피어 오르고 있으며 몸돌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거돈사터에 있다가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경복궁 이곳 저곳 전전하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 건물벽 앞에 놓여 있다.  용산의 국립박물관이 완공되면 또 이사를 가야한다. 타향살이 그만하고 원주의 고향으로 보내주는 것이 어떨런지.....

 

원공국사 부도비 (보물 78호)

절터 오른쪽에 부도비가 자리잡고 있다.유명한 승려의 사리를 묻는 부도옆에는

귀갑문이 예술이다. 특히 이중의 육각형을 유심히 보라. 안쪽은  닫혀 있지만 바깥은 다른 육각형과 이어져 있다. 안쪽의 육각형엔 연꽃과 卍자가 번갈아 새겨져 있다.

 

 고승의 행장이 기록된 부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원공국사 부도비는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까지 갖추고 있어 날렵한 몸매를 뽐내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는  고승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공덕을 찬양한 글이 적혀 있다.  비문은 최충이 지었으며김거웅이 해서체로 글을 썼다. 고려시대 비중에서 가장 뛰어나 글씨라는 평을 받는다. 단 한자의 결자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수는 구름위에 생동감 있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입을 꽉 다물었지만 이빨을 훤히 드러내 희죽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귓가에는 물갈퀴까지 새겨져 있다.

 

출처 : 익스트림MTB
글쓴이 : 산골어부(권희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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