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2일 충주시 금가면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태고산과 장태산은 명성은 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산으로 주변의 마을 사람들 조차도 잘 모르는 산이다. 남한강이 휘감아도는 금가면은 야산으로 형성된 구릉지라서 주변의 높은 산에서 내려다 보면 평야처럼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넓은 들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태고산과 장태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드넓은 구릉지가 청계산-오청산-천등산-인등산-지등산-계명산-남산-대림산 등에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고, 남한강을 따라 보련산과 국망산이 그를 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장태산의 유적 발굴지를 답사했다. 태고산 정상의 토성 흔적과 토성 주변의 참호들을 찾아 다니며 운동시설과 묘지 등으로 훼손되어가는 성터와 변형된 참호들을 보면서 공사가 진행되면 수박겉핥기식으로 진행되는 문화재발굴조사를 다시금 생각케한다. 최근에 발굴된 세계조정선수권 대회지의 중원경 발굴지와 동서 고속도로의 장태산 발굴지 등처럼 왜 관계기관과 자치단체는 유적지로 예상되는 곳을 사전에 조사하지 못하고, 뒷늦게 조사를 하고 국가와 자치단체의 사업을 위해 유적 발굴지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가. 이번에 발굴조사된 동서 고속도로 현장의 장태산 발굴지도 38번 국도가 지나가면서 이미 정상 부근이 발굴조사도 없이 사라지고 난 일부를 조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장태산 발굴지의 역사적 가치를 떠나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사라져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발굴현장에서 만난 마을 주민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장태산의 옛 모습을 이야기해준다. 장태산 정상에는 석재 기단 위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산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자주 이 곳에 올라 남한강의 경치를 둘러보고, 해맞이와 달맞이도 하고 대보름이면 쥐불놀이도 즐겼다고 한다. 그 분에게는 어릴때 놀던 추억의 장소가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 분은 38번 국도를 개설하면서 장태산 정상까지 절개를 하지 않고 터널을 만들었다면 장태산의 정상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이미 잘려나간 산 정상은 다시 볼 수도 없으며, 신목계대교보다도 더 크고 높은 동서 고속도로와 교량이 남은 발굴지를 관통하여 지나길 기다릴 뿐이다. 장태산 발굴지에 발견된 우물처럼 생긴 석축물의 용도에 의문이 간다. 또한 산 정상의 토사가 침식되면서 유적지에 쌓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의 토사를 날라서 망루처럼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장태산 발굴지를 돌아보고 하산하면서 두담마을 사람들이 산에 굴러 다니는 비석을 새마을비로 쓰다가 후에 조상묘 비석임을 알고 다시 제자리로 복원했다는 여담을 들으니, 강 건너의 중원고구비의 옛모습이 문득 생각이 났다. 보잘 것없던 돌덩어리가 국보급 문화재가 된 이야기. 신목계대교의 두무소와 뒷산을 둘러보고 모현정에 올랐다. 모현정에 바라본 남한강은 초겨울의 저녁 햇살을 받으며 은빛으로 출렁인다. 우륵이 놀았다는 금탄의 사휴지(사휴정)을 다시 복원할 수는 없을까 ? 국원경과 중원경의 위치도 모르는 현실에서 탄금대와 충주읍성의 복원도 아득하기만 한데, 말로는 중원문화를 외치고, 한반도의 중심을 외치지만 유적지는 하나. 둘. 샛 ~~~사라져간다, 우륵이 있던 대문산 금휴포와 탄금정. 제1휴지인 누암(창동)의 청금정. 제2휴지인 월락탄의 옥강정. 제3휴지인 하담의 모현정. 제4휴지인 목계의 사휴정의 옛 터와 모습은 ~~~~ 진흥왕이 놀았다는 하림궁은 ~~~~~~ (현 모현정의 위치인 사휴봉과 사휴거사라는 홍이상의 유래는 제3휴지가 잘못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 관련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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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내 또 다른 문화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제사터로 추정되는 집수정(集水井)이 발굴돼 지역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는 지난해 4월부터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산 9-1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 작업을 벌여왔다. 그 결과, 청동기 주거지, 백제초기 옹관묘, 토광묘, 토성, 집수정, 화덕, 소형금동불상, 마형대구 등 BC 10세기 전후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구와 유물들을 무더기로 발굴했다고 28일 밝혔다. 이와 관련 청동기 이른 시기의 문화층에서 반월형석도, 방추차, 돌도끼, 간돌검, 돌화살촉, 제작 중이던 또다른 석기류 등 다양하면서 많은 수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에따라 일대 공간은 청동기시대 석기 공방(제작소)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지역에서는 최초의 사례로, 청동기 이른 시기의 한반도 문화상을 복원하는데 획기적인 사료가 되고 있다. 장원장은 "같은 청동기시대라도 신석기에서 막 넘어온 이른 청동기 시대에는 간석기(마제석기)를 주로 사용했다"며 "많은 종류의 유물이 나왔고 그중 일부는 제작중에 있던 석기여서 일대가 석기공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구릉 정상의 통일신라시대 유적층에서 발굴된 집수정도 매우 희귀한 사례여서 또 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집수정은 돌을 원형으로 쌓은 가운데 그 안쪽을 흙다짐을 한 모습으로 발굴됐다. 이에따라 제사를 지내기 전 어떤 이유로 물을 모아두었던 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장 원장은 "집수정 안에서 소형 금동불상도 발견됐다"며 "이를 제사 시설로 추정한 것은 일대가 구릉 정상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원삼국시대 옹관묘, 청동팔찌 등도 도내 북부지역에서는 처음 발굴된 유물이어서, 향후 일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해석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http://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MTB 여행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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