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어부가 초등학교 때 부터 부르던 노래.
"보련산에 정기받아 ~~~~" -노은초등학교 교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던 보련골 절터와 솟대울 쇠똥밭 그리고 중학교 때 부터 오르던 국망산과 보련산. 그 험준한 보련산에 있는 산성터와 허물어진 화전민터. 보련산성이라고도 부르고 천룡산성이라고도 부르지만 고서에는 천룡성 또는 봉황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보련산성은 성벽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서 등산객들은 성터였다는 사실도 모른채 지나쳐 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보련산성에 대한 역사도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보련산 보련산성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보련산은 보련골에서 보면은 보련산이고, 천룡마을에서 보면은 천룡산이다. 보련산과 천룡산은 동일한 산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보련산성과 천룡산성 또한 동일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보련산 남측에는 보련사와 관련된 절터가 있고, 보련산 쇠바위봉과 투구봉 동측 아래에는 천룡사와 관련된 절터가 있다. 동막고개를 지나 국사봉과 무쇠봉 아래에 봉황마을과 봉황리 마애불이 있으며, 봉황내를 건너면 을궁산과 장미산성이 있는 장미산이 있다. 봉황휴양림이 있는 을궁산(乙宮山)은 새의 궁궐이란 뜻으로 봉황리를 감싸고 있다. 을궁산은 나라의 임금이 태어날 수 있는 '갈마음수지혈'의 묘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노은면 연하리 주변은 연꼿에 관련된 지명들이고, 노은면 수룡리 주변은 쇠(鐵)에 관련된 지명들이며, 가금면 봉황리 일대는 새(鳥)에 관련된 지명들이고, 가금과 금가 일대는 금(金)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보련산 주변의 지명유래를 조사하면서 봉황성은 보련산성으로 추정된다. 국망산을 해석하면 나라를 바라보는 산이다. 앞에는 문성(우성. 우리재), 뒤에는 앙성(복성), 그리고 국사봉과 을궁산 너머로 장미산성이 보이고, 멀리 탄금토성과 남산성과 대림산성 등 중원의 전지역이 조망되는 산이다. 국사봉을 해석하면 나라의 스승 또는 국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철(쇠)를 새로 해석하면 쇠바위봉과 무쇠봉도 새(鳥)에 관련된 지명이고, 앙성면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조천(조탁골,조대)도 낚시에 유래된 것이 아니라 새바지산과 새터에서 유래된 새(鳥)에 관련된 지명들이다.
충주는 삼국시대 이래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특히 한강지역을 차지하려는 삼국시대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각축장으로 그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들이 축성되었을 것이다. 산성이라는 것은 다른 유적지와 달리 한 시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지역을 방어하거나 다스리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쉽게 말하자면 평지나 야산에 만들어진 평지성은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용이지만, 산성은 지역을 방어하거나, 적의 침입에 의한 피난처이다. 토성이었던 곳을 보강하여 석성을 만들거나 읍성으로 변천하기도 하고, 백제성이 고구려성이 되었다가 신라성이 되기도 하며, 시대에 따라서 폐성이 되었다가 다시 축성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단순한 축성술과 발굴된 유물로 어느 시대의 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삼한시대의 마한과 백제가 한강을 지배한 시대에는 큰 규모의 군사력과 전투가 없었기에 높은 산에 위치하는 석성보다 강이나 평지의 작은 토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동안 돌아본 토성들을 보면은 조선시대의 읍성보다도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청주의 정북동 토성보다도 작은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쳤다는 처인성 전투는 화살 한방에 운명이 갈렸거나, 다른 요인이 발생하여 가능했을 것이다. 처인성 전투보다 시대가 앞선 안시성 전투를 생각해 보자. 당군이 안시성을 치기 위해 토성을 쌓아서 기마병으로 성을 넘으려 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 이후에는 토성으로 적을 방어한다는 것은 힘들다. 백제초기의 성들이 대부분 토성과 목책으로 이루어졌고, 탄금대 토성처럼 그 흔적조차 알기 힘든 작은 규모의 성들이 산재하여 거주민들을 보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고구려의 막대한 전리품과 전쟁포로는 고구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군사적 요충지마다 고구려의 산성들을 구축하였다. 또한,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을 지배하였지만, 한강유역에 성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고구려성을 점령하여 개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충주지역에서 국경에 따른 전투가 거의 없다. 후삼국의 혼란기에 일어난 지역호족간의 내전과 몽고침략에 따른 충주전투와 임진왜란에 따른 충주전투가 손에 꼽을 정도다.
충주지역에서 규모가 큰 대림산성과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은 발굴조사나 체계적 고증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따라서 보존계획도 없이 방치되어 마음이 아프다. 옛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그 성에 대한 가치를 알고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는 것은 섣부른 복원공사로 원형을 훼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림산성과 보련산성은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략으로 대몽항쟁의 충주성 전투와 관련된 성으로 분류되지만, 대몽항전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급조된 성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에 있던 성을 보수해서 대몽항전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보련산성의 흔적들
보련산성의 흔적들
보련산성의 흔적들
참고자료 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충주목]
천룡산(天龍山) : 주 서쪽 50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봉황성(鳳凰城) :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 유적(遺跡)이 있다.
참고자료 2 - 김윤후의 충주성 방어전
충주민들의 이같은 자발적인 항전에 직면한 몽고는 마침내 침략군의 사령관 야굴(也窟)이 직접 주력을 이끌고 내려와 충주성을 공략하는 작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10월의 기록에 "야굴(也窟)등이 충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고 하고 이어 "전소경 정수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경산부(星州)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고하여 이들의 남진으로 인해 바야흐로 충주 인근의 지역이 적의 세력권으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을 전해준다.
당시 충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인물은 1232년(고종 19)의 처인성 승첩으로 널리 알려진 김윤후였다. 그는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승첩이후 산사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정부로부터 섭랑장(攝郞將)을 제수받아 무반으로서 관도에 올랐는데, 이 무렵 그는 랑장(郞將)으로서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에 임명되어 있었다.
고종 40년(1253) 10월 충주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무려 70여일간 계속 되었다. 당시 몽고는 주장 야굴(主將 也窟)의 지휘하에 부장 아모간(副將 阿母侃), 그리고 반역자 홍부원(洪副源)과 이현(李峴) 등의 인도를 받은 주력군이였으며 게다가 인근 지역에서 항복한 고려인들을 공격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다음의 기록이 그러한 당시의 사정을 잘 전한다.
이현(李峴)이 벼슬을 옮겨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는데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2년이나 머무르게 되매 야굴(也窟)을 설유하기를 "우리 국도(國都)는 해도(海島)에 개재(介在)하여 공부(貢賦)가 모두 주군(主郡)에서 나오니 만약 가을 전에 주군(主郡)을 엄습하면 군인(郡人)이 반드시 궁색할 것이다." 마침내 금패(金牌)를 받고 야굴을 인도하여 왔다. 그리하여 몽고병을 따라 제성(諸城)을 설유하여 항복케 하는데 양근(楊根), 천룡(天龍) 두 성에 이르러 위협하기를 "경산(京山), 동주(東州), 춘성(春城) 등의 성이 모두 항복치 않으므로 도륙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속히 나와 항복하라. 만약 수장(守將)이 허락치 않거든 곧 베어 오라."고 하여 2성이 항복하는지라 스스로 달로화적(達魯火赤)이 되어 2성의 항복한 백성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쳤다.
참고자료 3 -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의 전설
가금면「장천리」를 중심으로 장미산이 있으며 노은면과 앙성면계에 보련산이 있고
제작기 산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삼국시대에 충주시 노은면 가마골 마을 부근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
남매가 있었는데 태어날 때 부터 장사기질을 가지고 이었다 한다.
그런데 관습에 따르면 한 집안에서 장사가 둘이 출생하게 되면 그 중 한 사람은 희
생을 당해야 한다는 숙명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남매도 비운을 안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하면서부터 운명을 정하는 방법은 상론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 방법으로 성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같은 분량의 다듬어진 돌을 가지고 규정된 규모의 성을 쌓는 것인데 물론 생사의 판결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남매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애착도 애착이려니와 장사라는 명예가 있기 때문에 심각했다.
보련은 노은에서 장미는 가금에서 드디어 운명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 어머니는 두 남매보다도 더욱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속도가 아무래도 장미보다는 보련이가 더 능숙함을 판단한 것이다. 아들·딸이 꼭 같다지만 어머니의 심정은 그래도 아들쪽이 컸던 모양이다. 장미의 속도가 미흡함을 본 어머니는 생각 끝에
떡을 해 가지고 보련에게로 가 떡을 좀 먹고 하라며 떡을 펴 놓았다.
보련이가 한창 배도 고프고 피로도 한 판에 한그릇을 맛있게 먹고 또 다시 시작해서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도중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는 북소리와 함께 기치가 올랐다. 보련은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서야 떡을 주신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한 술책인줄을 알았지만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그 길로 노은땅을 벗어나 어리론가 떠나갔는데 다음날 저녁에 보련의 본집을 향해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부터 보련이가 성을 쌓던 산을 보련산, 장미가 쌓던 산을 장미산이라고 하고 그 성을 각각 장미산성, 보련산성이라고 부르며 지금가지 남아있다. 장미산성은 1997년도에 사적 400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 해주고 있다.
_자료출처..충주시청_
참고자료 4 - 천룡사지
-위치: 충주시 노은면 수룡3리
-시대: 고려시대
-내용:
보련산 동남사면의 계곡에 위치하는 천룡마을의 윗쪽 산 40번지와 339-1번지 밭을 중심으로 과수원과 주변 밭 일대 약 3,000여 평이 사지로 추정된다. 지표 상에서는 고기뼈무늬·격자문·무문계의 와편이 산포되어 있고 장방형이나 방형의 전과, 청자, 백자, 토기편 등이 수습된다. 지표조사시 암막새와 숫막새편을 수습하였으며 많은 평와편 중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편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명문와에는 '大天龍…' '天用' '天龍' 등의 글씨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천룡(보련)산성과 관련된 천룡사터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사역은 보련산 동남사면 기슭의 경사면을 3-4단의 석축으로 구분한 모습으로 약 3,000여 평에 달한다. 석축은 정치한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쌓아올린 모습이며, 암·수막새기와, 명문와, 전이 사용된 고급스런 대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의 앞쪽으로는 보련산에서 흘러나온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을 경계로 하여 사역을 구분하는 높이 5m 정도의 석축을 축조하고 있다. 사지 내에는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의 석재들과 돌 확 등이 산포되어 있는데, 경작할 때 많은 주초석이 발견되어 밭의 구석으로 치워져 있는 상태이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절터골이라고 부르며 천룡사터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 사역은 정남향의 포근한 지점에 위치하며 멀리 평풍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이곳 사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고려시대 몽고와의 싸움에서 분전한 '天龍山城' 이라는 곳을 지금의 보련산 정상에 있는 보련산성이라 비정하는 것과 비교해 보련산과 천룡산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寶蓮寺在天龍山"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련과 천룡은 같은 곳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수습되는 명문와편으로 보아 이곳이 천룡사지임이 명확하다고 할 때 기록에 보이는 보련사가 바로 이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련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년) 4월 5일(경술일)에 기록된 불교를 교·선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절만 남기자는 건의를 받아들이는 내용에 나온다. 즉 교종에 소속된 18개의 사찰 가운데 보련사가 남게 되는데 150결의 법주사의 200결, 100명의 거승과 비교되는 큰 사찰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노은면 보련산 기슭에서 이곳 천룡사지 정도되는 규모의 사찰을 찾을 수 없고, 보련사지라고 추정하였던 사지가 기록과 비견할 수 없는 정도의 작은 암자터라면 이곳을 보련사지로 추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재 경작 등으로 인하여 사지의 일부가 보다 빠르게 훼손되고 있으므로 정밀조사 및 발굴을 시행하여 사지의 성격을 밝히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에 대한 억압책으로 시행한 사원정리.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소유의 사원전(寺院田)과 법손노비(法孫奴婢)를 몰수했고, 국가에서 지정한 사찰 이외에는 혁파했다. (중략)
그 36사는
한양에 흥천사·흥덕사·유후사(留後司)에 속한 숭효사·연복사·광명사·신엄사, 개성의 관음굴·감로사, 양주의 승가사·장의사·소요사·개경사·회암사·진관사·대자암, 공주의 계룡사, 진주의 단속사, 경주의 기림사, 구례의 화엄사, 태인의 흥룡사, 고성의 유점사, 원주의 각림사, 단율(段栗)의 정곡사, 안변(安邊)의 석왕사, 경기도 해풍의 연경사, 송림의 영통사,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사, 충주의 보련사, 거제의 견암사, 합천의 해인사, 거평의 서봉사, 전주의 경복사, 회양의 표훈사, 황해도 문화(文化)의 월정사, 해주의 신광사, 평양의 영명사 등을 말한다. 후에 강릉의 상원사
가 추가되어 37사가 되었다. 이러한 사사혁파는 그 과정을 통해 사원세력의 대폭적인 약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유교에 지배적인 위치를 내주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자료 6 - 건흥5년명 금동광배
건흥5년명 금동광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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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의 뒷면에는 "건흥5년(536년 또는 596년) 병진년에/불제자 청신녀.상부아암이 /석가모니상을 만들다./세상에 태어나도 불법을 듣기를 기원하며/모든 중생도 이렇게 기원한다" 는 내용의 5행 39자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단순한 두광과 신광을 새기고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함께 주조되었다. 주연부(周緣部)의 화염문은 매우 강한 율동감을 가지고 있으며 화불(化佛)3구가 부조되어 있다.
부처와 2구의 협시보살(俠侍菩薩)로 조성된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 하나의 대형 광배면에 삼존불(三尊佛)을 배치)의 배치와 치솟는 불꽃무늬, 보살상에 보이는 율동적인 조형성, 그리고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1963년 7월 경상 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불상)의 명문과 비슷한 형식으로 보아 고구려계 불상으로 판단되며 제작연대는 6세기 전으로 추정한다 이 광배는 중원 고구려비와 함께 고구려가 충주지역으로 진출하였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국립청주박물관 제3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충주 지역은 삼국의 접경지대로서 계립령과 죽령, 남한강을 통해 문물이 오고가는 사통발달의 교통의 요지이면서 무기생산에 꼭 필요한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 때인 475년에서 491년 경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남진책을 도모하여 한강의 전 유역을 포함하여 그 이남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 충주도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 남하세력은 충주를 중심으로 제천,단양,음성,괴산,진천 등지에 까지 미쳐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맞섰고, 서쪽 방면으로는 청주,청원 일대에서 백제와 맞섰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충주 지역을 장악하고 나라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고 이름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본고구려국원성」이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충주는 신라 진흥왕에 의해 완전 복속되기 까지 약60-70년 정도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당시 고구려는 국원성을 남방 진출의 전진 기지로 삼으며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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